3장 공주는 잠 못 이루고 (4)
식사실에 홀로 남겨진 뒤, 처음 한동안 테라는 어떻게 하면 여기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오 박사가 정말로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대원들을 데리고 돌아오기 전에 여기에서 도망쳐야 한다.
그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이 짧은 틈이 아마도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기회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말처럼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식사실의 사방은 쿠션이 대어진 벽으로 막혀 있고, 열려 있는 위층 바닥까지는 적어도 4미터 이상이 떨어져 있다.
장신의 농구선수가 도움닫기를 해서 뛰지 않는 한, 저기까지 그냥 올라갈 수는 없다.
‘저건…….’
초조하게 주변을 돌아보던 테라의 시야에 방호복 직원들이 가지고 들어온 장비가 들어왔다.
소형 전기톱과 무선 드릴.
두 가지 모두 그녀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물건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녀가 무서워하는 물건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사치스러운 어리광을 부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멍하니 배회하고 있는 좀비들 사이로 절룩거리며 걸어간 테라는 피 웅덩이를 피해 발을 디디며 조심스레 무선 드릴을 집었다.
권총처럼 생긴 모양에 방아쇠. 방호복 직원이 죽기 직전까지도 이걸 들고 저항을 했으니, 별다른 예비 조작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테라는 좀비들이 오가지 않는 쪽으로 물러나 쿠션이 있는 벽에 드릴을 대고 스위치를 눌렀다.
위이잉―
드릴은 순식간에 쿠션을 뚫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단단한 콘크리트 벽의 저항을 만났다.
투퉁― 퉁― 텅―
웨에에엥―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표면에 날이 부딪쳐 튀고, 허공에서 맹렬하게 돈다. 몇 차례 더 힘을 주어 밀어보던 테라는 스위치에서 손가락을 뗐다.
이렇게 해서 뚫릴 벽이 아니다. 괜히 날이 튀어 다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혹시 그렇게 하면 올라갈 수 있을까…….’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쿠션에 드릴로 여러 개의 구멍을 뚫은 뒤, 그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홀더로 삼고 클라이밍을 하듯 위로 기어 올라가면 어떨까 하는 발상이었다.
계속 구멍을 뚫고 올라가다 보면 천장까지는 닿을 수 있다. 그러면 저 비스듬히 나 있는 유리 바닥을 깨고…….
거기까지 생각한 테라는 팔을 위로 뻗어 쿠션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드릴 날이 벽에 닿으면 곧바로 빼내서 바로 옆을 뚫는다. 그런 작업을 몇 번 반복하면 손으로 움켜쥘 수 있을 만한 틈이 생긴다.
‘될 수도 있겠어.’
첫 번째 구멍에 손을 넣고 몸을 끌어 올리는 시늉을 해본 테라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그녀는 몸무게가 그리 많이 나가지 않는다. 제니만큼 운동으로 단련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춤과 노래로 무대를 섭렵하던 아이돌 스타의 체력. 자기 한 몸 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머리 위로 팔을 뻗어 묵직한 드릴을 지탱하며 구멍을 뚫는 것만으로도 이내 그녀의 가녀린 팔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밤을 꼬박 샜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기 때문에 테라는 그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쳐 있었다.
“윽!”
겨우 2미터도 오르지 못했을 때, 왼팔에 힘이 빠진 테라는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민구에게 피를 주기 위해 찢었던 왼팔의 상처가 견디기 힘든 고통을 준다. 그리고 위에서 뛰어내릴 때 다쳤던 골반도 깨지는 것만 같다.
“으으윽! 아흐으으!”
테라는 저릿한 허벅지를 붙잡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발판이 없어서 그래… 발을 디딜 만한 곳부터 먼저 만들어놔야…….”
그녀가 멍하니 벽면을 바라보고 있을 때, 좀비 두 마리가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왔다. 테라는 좀비들이 지나칠 때까지 일단 자리를 피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하는데도 저 흰 막이 덮인 눈동자만 보면 끔찍해서 온몸이 다 얼어붙을 것만 같다.
다시 벽면에 돌아온 테라가 30여 센티 높이부터 발 디딤을 위한 구멍을 뚫으려 할 때, 처음으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워낙 두껍게 만들어진 식사실의 벽과 문이지만, 바로 근처에서 쏴대는 총소리마저 온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타앙―
단발의 총소리. 그리고 곧바로 천둥이 퍼붓는 것처럼 사나운 연사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좀비들을 가두는 격벽 쪽으로 도망간 테라는 바닥에 주저앉아 귀를 막았다.
총소리…….
오 박사의 협박이 기억났다. 총을 가지고 돌아오면 그녀에게 어떤 끔찍한 짓을 할 건지, 길고도 잔인하게 떠들던 그의 목소리……. 테라의 이가 딱딱 맞부딪친다. 무섭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뒤, 테라는 계속해서 들려오는 총소리가 단순히 오 박사 쪽에서 쏴대는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느낌은… 총격전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계속 연발로 쏴댈 이유가 없다.
‘대체 누굴까… 왜 여기에서 총싸움을…….’
테라는 한쪽이 오 박사 팀일 거라고 제멋대로 규정하고, 다른 한쪽의 정체를 상상해 봤다. 하지만 추리가 잘 되지 않는다.
총은 군인들이 쓰는 건데…….
군인들이 그녀를 구하러 왔다고 생각하면 너무 허황되다.
‘설마 그 아저씨가… 살아난 다음에 군인들에게 일러줘서?’
테라는 민구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것이 그녀가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경우의 수였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가능할까?
투투투투― 투투투투― 투투둑―
가끔씩 끊길 때도 있지만, 총소리는 아주 사납게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실제로는 불과 몇 분 정도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지만, 초조하게 기다리는 그녀에게는 영원처럼 길고도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멈췄다…….”
얼굴을 감싸 쥐고 있던 테라가 고개를 들었다. 시끄럽게 귀를 때리던 총소리가 사라지자 세상이 순식간에 적막 속에 휩싸인 것 같다.
어떻게 된 걸까?
그녀가 불안에 떨며 고민하고 있을 때, 식사실의 전자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삐익― 띠리릭―
총격전의 승자가 식사실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이다. 테라는 눈을 감았다. 두 손은 배에 붙인 채 꼭 마주 잡았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무서웠다. 이제 눈을 뜨면 어떤 얼굴과 마주하게 될는지… 문이 열리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일지…….
찰나의 시간 동안 그녀는 간절하게 빌었다.
제발… 제발… 오 박사가 아니기를… 만약 그 소름 끼치는 얼굴을 다시 봐야 한다면…….
그때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스르릉―
문이 열린다. 운명과 마주할 시간이다. 그녀는 드릴을 한 손에 잡고, 입술을 꽉 깨문 채 눈을 떴다.
“테라야!”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도 두렵고 그리워서 뇌가 제멋대로 귀에 들려주는 환청.
이렇게 좋은 일이 현실일 리는 없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몇 번이고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테라야! 없어! 어떡해요… 없어……. 테라야!”
“으아! 저거 뭐야! 제니야, 그리 너무 가까이 가지 마! 바닥이 열렸잖아! 저 밑에 다 좀비라고!”
낯선 이의 목소리가 부르는 그리운 친구의 이름. 그리고 곧바로 또 친구의 목소리.
“오빠, 테라가… 없어요! 여기에 없으면… 그럼 어디로 데려간 거죠? 어! 여기 신발이 있어요! 이거! 테라 샌들!”
얼―! 얼―!
“삼숙아, 왜? 저 밑에?”
듣고 있던 테라의 눈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격벽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대각선의 유리 바닥을 통해 보이는 위층. 거기엔 정말로… 정말로 제니가 있었다. 꿈에도 잊지 못하던 그리운 얼굴이 거기에 있다. 제니의 얼굴을 보자마자 테라는 다시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아 버렸다.
펄쩍펄쩍 뛰며 손을 흔들어줄 생각이었는데… 왠지 울음이 터져서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제니…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고 믿으며 버텨왔지만, 이렇게 자신을 구하러 와줄 거라고는 상상도 안 해봤는데… 이건 필시 꿈이다…….
“테라야!”
그녀의 모습을 본 제니도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른다. 그녀는 유리바닥을 손으로 두들기며 테라에게 외쳤다.
“나야! 나! 제니! 응? 테라야! 정신 차려! 여기 봐!”
제니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잔뜩 묻어 있다. 테라는 흐느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럴게. 잠깐만…….”
“으아… 말로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보니까 정말 이상한 기분이네. 좀비들, 테라 옆을 막 걸어다녀… 저렇게 내버려 둬도 되나?”
유빈이 어깨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좀비들 사이에 꿇어앉아서 울고 있는 건 테라인데, 덜덜 떨리는 건 그 자신이다.
“각이 나올지 모르겠네… 이 방 구조가 쏘기 영 불편하게 되어 있어서.”
진우는 K―2를 붙잡고 이리저리 사격 자세를 취해본다. 발판 구멍 사이로 몸을 내밀어 아래층의 좀비들을 싹 다 잡아버릴 셈인가 보다. 유빈이 얼른 배낭을 벗어 열면서 진우를 만류했다.
“그럴 거 없어. 어차피 좀비들 눈에 안 보인다니까 저것들은 방해도 안 할 거야. 그냥 끌어 올리자. 제니야, 이리 가까이 와달라고 해.”
그리고 유빈은 배낭 안에 들어 있던 여러 표준 장비들 중에서 등산 로프 묶음을 꺼내 풀었다. 높이도 얼마 되지 않으니 그냥 로프를 내리고 테라가 거기에 자신의 몸을 묶기만 하면 된다.
저 정도 마른 몸이라면 보안관이 왼손 하나만 써도 금방 끌어 올릴 수 있을 테니까.
“테라야, 일어날 수 있어? 다쳤어?”
제니는 유리 바닥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물었다. 그녀의 흰 블라우스에 묻은 피 때문에 걱정이 든다. 테라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아니… 그냥 너무 좋아서…….”
그녀는 머리를 들고 유리 바닥에 엎드려 있는 제니와 눈물 가득 고인 눈을 마주쳤다. 제니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아름답고 기운차다.
“밧줄을 내릴게! 거기에 허리를 묶어! 알았지?”
제니가 말했다.
“응! 응!”
테라는 절뚝이면서도 걸음을 서둘렀다. 이게 꿈이라도 좋다. 깨기 전에 꼭 한 번 다시, 제니의 손을 잡고 싶다. 그리고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건강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로프는 이미 아래에 닿아 있었다. 테라는 그걸 집어 자신의 허리에 묶고, 두 손으로 로프의 위쪽을 꽉 잡았다.
“올린다!”
제니가 물었다. 테라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보안관은 로프를 잡아당겼다.
정말이지, 가볍기도 하다.
쭉― 쭈욱― 쭈욱―
네 번을 잡아당기자 테라의 손이 발판 위로 올라온다.
“테라야! 내 손 잡아!”
제니가 테라에게 손을 내민다.
덥석!
두 미소녀의 작고 고운 손이 드디어 맞잡혔다. 타이밍을 맞춰 보안관은 한 번 더 로프를 끌어 올렸고, 테라는 마침내 발판 위로 올라섰다.
“아아! 아아! 미안해, 테라야!”
테라를 끌어안아 옆으로 옮긴 제니는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초췌해진 그녀의 얼굴이, 바짝 말라 갈라진 입술이… 그리고 잘린 발가락의 상처가 다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서, 제니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날… 자동차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겁에 질린 눈으로 쫓아오는 테라와 함께 도망쳤더라면… 그랬더라면 이 연약하고 겁 많은 아이가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아도 됐을 텐데… 오빠들과 함께 웃으면서 살아올 수 있었을 텐데…….
“왜… 미안하다고 해. 나는 이렇게 고마운데… 울지 마.”
테라는 자기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제니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달랬다.
고맙고도 궁금하다. 지금까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었는지, 여기엔 어떻게 오게 된 건지… 그리고 자신이 이 방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듣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제니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고 싶다.
“너… 다쳤어. 피나.”
테라는 제니의 얼굴에 난 생채기 주변을 손으로 쓸며 말했다.
“응?”
제니는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슥, 훔쳤다. 따끔하다. 엄폐물로 쓰던 합판이 부서지면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갈 때 난 얕은 상처들이었다. 제니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이까짓 거야 뭐, 그냥 긁힌 건데…….”
제니는 마치 오빠라도 되는 양 터프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테라는 그제야 제니가 총을 메고 있다는 걸 알았다.
총… 총소리!
“아! 맞다! 이럴 때가 아니야! 일단 도망부터 쳐야 돼! 여기 무서운 사람들이!”
별안간 이성이 돌아온 테라는 깜짝 놀라 제니에게 말했다. 그녀의 겁먹은 눈동자를 보고 제니는 또 울음을 터뜨렸다.
“흐윽! 아니야… 테라야, 이제 괜찮아.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나쁜 사람들… 이 오빠들이 다 죽였어. 전부 다…….”
“정말?”
테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물었다. 제니는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전부 다 좋은 오빠들이야. 엄청 착하고 강하고… 좋은 오빠들이야. 이제 우리 같이 살면 돼. 안전하고 행복한 곳에서…….”
제니의 말을 들은 테라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두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넘긴 그녀는 방 안에 들어와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은인을 눈에 새겼다.
전혀 강할 것 같지 않은 조그만 덩치의 오빠부터, 산처럼 커다랗게 버티고 있는 오빠와 총을 든 오빠 옆에서 헥헥거리고 있는 커다랗고 검은 개까지…….
“정말 고맙습니다.”
테라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채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은…….
심장 어택!!
진우와 보안관은 거의 동시에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 당장에라도 꼭 안아서 그녀를 달래주고 싶어진다. ‘나만 믿어’라고 말해주고 싶다.
“왜 하필… 와이셔츠만…….”
취향을 저격당한 보안관이 모깃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제니와 함께 지내면서 이제 아름다운 것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그의 눈앞에 선 테라는… 또 완전히 다른 종류의 극치다. 너무도 연약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아니… 나는 일편단심 제니니까… 이건 뭐랄까, 그냥 보호본능…….’
머릿속에 바보 같은 말들이 둥둥 떠다니는데, 얼굴이 빨개진다. 그리고 시선을 떼지 못하겠다.
오! 신이시여! 이 정도 훔쳐보는 건 죄가 되지 않는다고 제발 말씀해 주세요! 그냥 처음이라 낯설어서 그래요!
근원을 따지자면 테라파였던 진우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렇게 애처로울 수가! 아아, 저 가느다란 팔, 다리…….
똑, 하고 부러지지나 않을까 두려울 정도다. 그런데 그게 예쁘다고 느껴진다.
둘 중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겠다던 김 상병님, 당신이 옳았습니다! 제가 직접 만나보니까 그렇군요!
“혜주랑 같이 간 그 아저씨한테도 알려주자. 얼굴 보면 반가워할 텐데…….”
뒷목을 긁적거리고 있던 삼식이가 입을 열었다.
“어? 아아, 응. 그래야지.”
보안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로 나갔다. 저 와이셔츠 차림의 테라를 그 칼잡이 놈한테도 보여줘야 한다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그 녀석도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그놈이 없었다면, 테라가 어디로 끌려간 건지 단서조차 못 잡았을지도 모르니까.
“혜주야! 혜주야!”
보안관은 커다란 목청을 완전히 개방해서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테라 찾았어! 식사실로 와!”
보안관의 외침이 넓은 8층 전체를 쩌렁쩌렁 울릴 때, 태권소녀와 민구는 계단 문을 닫고 있었다. 들어와 있던 좀비들을 진우가 거의 다 사살했지만 그 후에도 몇 마리인가가 더 뛰어 들어왔고, 다른 방향으로 돌아다니던 놈들이 몇이나 있었다.
“계단 문! 저것부터 닫아요!”
태권소녀는 총을 옆으로 돌려 메고 삼단봉을 빼 들었다. 아까 선착장에서 봤던 발차기만으로도 그녀의 실력을 대강 파악한 민구가 씨익 웃으며 뒤를 따랐다.
드물게 보는 씩씩한 계집애다. 좀비를 향해 싸우려 달려드는 여자…라는 것도 특이하지만, 민구 자신이 칼 쓰는 걸 보고 나서도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계집애는 처음 봤다.
다들 벌벌 떨거나 적어도 온순해지기 마련인데…….
“하앗!”
태권소녀는 달려드는 좀비의 내디뎌진 발목에 로우킥을 날려서 놈이 앞으로 고꾸라지게 만들고, 그 힘에 더해서 삼단봉을 위로 쳐 올렸다.
덜컥―!
쫙 벌어졌던 아래턱이 박살 난 채 좀비가 바닥을 뒹군다. 태권소녀는 덮쳐 오는 두 번째 놈의 가슴에 뒤돌려 차기를 날려서 거리를 벌리고, 쓰러진 좀비의 뒤통수를 뒤꿈치로 내리찍었다.
“하하, 꽤나 날래군. 설칠 만도 해.”
그녀의 싸움을 곁눈질로 지켜본 민구가 재미있어 한다. 물론 그는 태권소녀가 두 마리를 상대하는 사이, 이미 세 마리의 머리를 날리고 네 마리째의 좀비 어깨에 마세티를 깊게 박아 넣은 뒤였다.
마세티 손잡이를 당겨 좀비의 몸이 앞으로 기울게 만든 민구는 쿠크리를 바깥쪽으로 돌려서 놈의 목을 베었다.
꿀꺽―!
뒤쪽으로 비켜서서 태권소녀와 민구가 좀비들을 상대로 한바탕 살벌한 춤을 추는 걸 보던 애송이와 보안 요원이 마른침을 삼킨다. 특히 몸을 써서 먹고살아 온 보안 요원 쪽이 느낀 충격이 더 크다.
저런 움직임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감히 대검을 들고 베어보려 했던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던 건지…….
쿵―
순식간에 복도에 남은 좀비들을 모두 해치운 민구와 태권소녀는 계단 문을 잡아당겨 단단히 닫았다.
“진우 얘는 대체… 뭐하고 있지? 여기가 이 모양인데…….”
태권소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복도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을 때, 중앙 복도 쪽에서 보안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라 찾았어! 식사실로 와!”
반가운 일이다. 이제 이 위험하고 긴 난투극의 목적을 이뤘다. 태권소녀도 목청껏 외쳤다.
“찾았어? 알았어, 갈게!”
그러고는 태권소녀는 민구를 돌아보았다.
“아저씨, 가요! 테라 찾았대요.”
“음…….”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민구는 보안 요원과 애송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홀더에 넣어두었던 쿠크리를 다시 슥, 꺼내며 말했다.
“그럼 이것들은 이제 아무 쓸모없잖아.”
뜻밖의 돌발 행동에 두 끄나풀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희 쓸모 있어요! 나가실 때 길도 알려 드릴 수 있고! 아니… 아까 분명히 협조하면 살려주신다고!”
두 놈의 파랗게 질린 얼굴과 흔들어 대는 손을 보며 민구는 킥킥 댔다.
“이것들 데리고 먼저 가. 아직 쓸모가 있다고 하니까.”
그것이 민구의 농담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두 놈도 식은땀 범벅이 된 얼굴로 히스테릭하게 따라 웃었다. 태권소녀가 물었다.
“먼저 가라니… 아저씨는요?”
“아아, 담배 한 대 피우고 천천히 따라가지. 도통 못 피웠더니 옆구리가 영 결리는 것 같아서 말이야.”
민구는 꺽다리 기생오라비에게서 받은 담뱃갑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아무리 이 연기가 괴물들을 불러들인다고는 하지만 여기는 폐쇄된 건물의 8층. 이미 들어와 있던 괴물들은 다 죽였다.
일을 성공시킨 이후의 한 대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태권소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천천히 와요.”
태권소녀가 두 끄나풀을 데리고 코너를 돌아 사라진 뒤, 민구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찰―칵!
싸구려 1회용 라이터는 아주 작은 불꽃을 피워 올렸다가 겨우 담배에 불을 붙이자마자 맥없이 꺼졌다. 가스가 다 바닥이 난 것이다. 몇 번 불꽃을 찰칵거리던 민구는 라이터를 바닥에 던졌다.
“후우우우~!”
길고 긴 싸움을 승리한 뒤에 피우는 담배의 맛은 각별했다. 적당히 맵고, 쓰고, 목구멍 저 안쪽까지 할퀴고 지나간다. 민구는 주변에 떠다니는 연기를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결국… 약속을 지킬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테라, 그 연약한 계집애……. 이제 그녀가 가고 싶다는 곳으로 보내주면 된다. 아마 그녀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곁에 남고 싶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원한을 뒤집어쓰고 있는 자신보다 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일행을 찾았다는 게 테라에게는 정말 좋은 일이라고, 민구는 생각했다.
보아하니 고릴라와 총잡이 일행들은 꽤나 오래된 친구 사이인 것 같고, 민구와는 다른 종류의 ‘쓸 만한’ 놈들인 것처럼 보였다. 그들과 함께 있었던 제니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민구는 그녀에게서 별다른 구김살이나 눈치를 보는 약자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제니를 그렇게 아껴주고 살아남도록 보호해 줄 수 있는 놈들이 테라에게 같은 일을 해주지 못할 리는 없다.
테라 역시 가장 친한 친구와 또래의 애들과 함께 있는 편이 더 행복할 것이고.
민구는 젠킨스의 것이었던 버클을 톡톡 두드렸다. 이걸로 신호를 보내 JL로 가야 하는 탐탁지 않은 선택은 피할 수 있게 된 모양이다. 이제 행복한 결말이 왔으니까…….
“응?”
생각에 잠긴 채 사라지는 담배 연기를 눈으로 쫓던 민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그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죽어 자빠져 있던 좀비들의 시체. 그 방향이 너무 일관되게 복도의 반대쪽을 향해 나 있다.
서너 마리의 시체, 그리고 또 두 마리, 마지막으로 한 마리.
조금씩 거리를 두고 쓰러져 있는 좀비들… 이건 꼭 누군가를 쫓아 뛰어가다가 차례로 총에 맞아 바닥에 뒹굴게 된 모양새다. 게다가 중간에 떨어져 있는 기관단총과 권총.
“흐음, 냄새가 나는군.”
민구는 좀비들의 시체가 쫓았던 방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풋!”
민구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좀비의 체액이 묻은 발자국이 어떤 방 앞에서 끊겼다.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걸 잔뜩 묻히고 돌아다니면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다급했나 보다.
하긴 총을 다 내던졌을 정도니…….
그래도 핏자국이 없는 걸 보니 물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끼이익―
민구는 아주 살짝 손잡이를 돌리고 문틈에 눈을 가져다 댄 뒤, 방의 안쪽을 엿봤다. 불이 꺼진 방 안에는 여러 개의 커다란 스테인리스 테이블이 있고, 그 위에는 잡다한 연장들이 잔뜩 어지럽혀져 있었다.
겁 많은 사람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그런 종류의 연장들이었다.
톱, 칼, 도끼… 전부 다 깨끗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한쪽 벽에는 개수대가 길게 늘어서 있다. 여기는 사람을 썰고 나서 연장을 세척하던 곳인가?
하지만 민구의 시선은 그 섬뜩한 스테인리스 테이블 위가 아니라 아래쪽을 향해 있었다. 어둠 속에 누군가 잔뜩 움츠린 채 숨어 있었다. 놈이 대검을 들고 부들거리는 모습이 우스웠다.
“여어, 너 뭐하냐?”
민구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문을 열며 물었다. 테이블 아래에 숨어 있던 놈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키려 했고, 그 때문에 스테인리스 테이블이 뒤로 넘어가면서 연장들이 쏟아졌다.
쨍그렁― 쨍강―!
요란한 쇳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민구는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켰다.
파팟―
천장의 Led 등에 불이 들어오자 메이저의 흉측한 얼굴이 보인다. 이리저리 꿰매놓은 보랏빛 얼굴… 민구는 그게 자신의 목 딸 리스트에 들어 있는 놈인 줄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놔두면 귀찮아질 것 같아서 지금 처리해 두려는 것뿐이다.
이렇게 덜덜 떨던 놈도 총만 잡으면 언제든 등에 바람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메이저는 민구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 특색 있는 커다란 흉터는 웬만해서는 잊기 어렵다.
어쩌다 이런 새끼까지 여기에…….
“너, 너, 너! 이, 이 새끼! 자, 자, 잠실 맞지! 조, 조용히 해! 떠, 떠, 떠, 떠들면 주, 죽여 버릴 거야! 무, 무, 문 닫아!”
잔뜩 쫄아 있던 메이저는 급격하게 자신감을 회복하고 민구를 향해 대검을 내밀었다. 어떤 사유로 이 습격팀에 끼었고, 또 양복은 어디에서 주워 입었는지 모르지만, 메이저는 이놈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분명히 안다.
조금 빠르기는 해도 그 근육질의 큰 덩치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약골이다. 이놈을 죽이든 인질로 삼든, 하여튼 일단 조용히부터 시켜야 한다. 일행을 불러올 수 없게.
“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아나, 이런 참… 너였어? 큭큭큭, 누군가 했네, 이 새끼. 야, 너 얼굴 우습게 됐다? 큭큭큭,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잖아.”
놈의 말투를 듣고 나서야 민구도 상대가 메이저라는 걸 알아챘다. 민구는 문을 닫고 경쾌하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꿈처럼 찾아온 소중한 만남, 누구에게도 방해 받고 싶지 않다. 방 안은 널찍했다. 이놈뿐 아니라 기동이도 함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을 정도로 활개 치기 좋은 곳이다.
민구가 자신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명령을 따랐다고 생각한 메이저도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새끼… 마, 말 잘 듣네. 하긴 뒈, 뒈, 뒈질 뻔했으니까 무, 무섭기도 하겠지…….”
“아아, 그때… 나 그때 일부러 맞아준 건데… 그리고 말이지, 그때는 내가 몸이 좀 그랬어… 체력이 한~ 5퍼센트 정도였달까?”
민구는 왼손 엄지와 검지로 아주 작은 크기를 만들어 보였다. 약골 놈의 빤한 허세라고 받아들인 메이저도 덩달아 실실거린다.
“지랄하고 앉아 있네. 그, 그럼 지, 지금은 며, 몇 프로냐? 응? 이 주, 주둥이만 호, 홀랑 까진 새끼야.”
“음… 지금은 한 50퍼센트는 되는 것 같다. 아니다. 잠을 설쳤으니까 45프로라고 하자. 어쨌든…….”
민구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등 뒤로 손을 돌렸다.
스릉―
쿠크리와 마세티가 동시에 자태를 드러냈다.
맑은 울림과 함께 뽑혀 나온 두 자루의 커다란 칼이 조명을 받아 번뜩인다. 민구는 쿠크리를 빙그르르 돌리며 웃는 낯으로 말했다.
“넌 이제 큰일 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