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난폭하게! 잔인하게! (7)
울부짖는 수석 연구원의 간절한 목소리가 계속 높아지고 커졌다.
“팔층이라니까아아! 이 칼 좀! 아아악! 칼! 칼! 제발!”
하지만 민구는 그리 쉽게 놈의 고통을 멈춰줄 마음이 없었다. 민구는 칼을 당기던 손에서 힘을 뺀 채 다시 물었다.
“몇 놈이나 같이 있어?”
“아아악! 오 박사, 연구원들, 메이저, 쉐도우 실드 대우으언… 어! 으! 아으으~으어.”
비명을 내지르던 수석 연구원의 말이 점점 어눌해지는가 싶더니, 놈의 표정이 당혹스러워진다. 그러고는 잠시 뒤, 놈의 얼굴과 버둥대던 팔다리는 움직임을 멈췄다.
“뭐하자는 거지, 이놈?”
뜻밖의 상황을 만난 민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놈들이 이상한 빨간색 주사기를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예전에 본 적이 있어서 안다.
하지만 그건 심장을 멈춰 죽은 것처럼 만드는 약이었다. 이렇게 두 눈을 멀뚱멀뚱 뜬 채로 가슴이 벌렁거리는데, 움직임만 멈춰 버리는 게 아니었다.
혹시 무슨 연기인가 싶어 칼을 당기던 손에 힘을 줘봐도 녀석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대신에 눈동자만은 고통과 공포에 질려 엄청나게 커진 채 끊임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어리둥절해 있는 민구, 진우와 달리 수석 연구원은 자신의 신체에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진우의 총에 맞아 손 안에서 폭발해 버린 X―1!
그때 터져 나온 약품이 노출된 혈관을 타고 침투한 것이다.
‘끄으으윽! 으으으윽!’
고통은 고스란히 전달되는데, 운동능력만 상실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수석 연구원은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가슴에 박힌 칼이 움직일 때마다 뇌의 끝까지 찌릿찌릿한 아픔에 튀겨지는 것 같은데, 비명조차 지를 수가 없다.
‘해독제! 해독제!’
수석 연구원은 간절하게 해독제를 원했다. 단순히 10㎎이 주입되었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현재의 신체 변화로 보아 X―1의 양은 그 이상인 게 분명하다. 이제 이대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심장이 멈춰 사망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 멍청한 미친놈들에게 해독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리기 위해 계속 눈동자를 연구실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도무지 알아봐 주지를 못한다.
“이 사람 왜 이래?”
뒤늦게 달려온 유빈이 굳어버린 수석 연구원의 얼굴을 보며 묻는다. 놈의 목을 밟고 있던 진우가 대답했다.
“무슨 약에 중독된 것 같은데? 조금 전에 삼숙이 찌르려고 주사기 같은 걸 들고 있었는데, 그게 터졌거든.”
말이 통할 것처럼 생긴 유빈의 출현에 수석 연구원은 잠시 기대를 가졌다.
제발… 가서 여자 직원들에게 물어봐 다오. 해독제가 어디에 있는지…….
하지만 유빈은 놈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는 팔을 뻗어 수석 연구원의 목에서 아이디카드를 빼냈다. 그러고는 목걸이 줄을 손에 쥔 채 복도를 다시 되짚어 달려가 오 박사의 연구실 문 앞에 섰다.
“열어요! 제가 오빠 뒤에 서 있을게요!”
제니가 MP5를 꽉 움켜쥐고 진우의 흉내를 내며 유빈을 엄호해주겠다고 나선다. 혹시 방 안에 숨어 있다가 덤벼들지도 모르는 위험을 제거해 주겠다는 것이다.
“…혹시 놀라서 내 뒤통수 쏘면 안 돼.”
자신의 방패 뒤에 몸을 숨기고 사격 준비를 하는 제니를 돌아보며 유빈이 말했다. 제니는 예전에 무대 위에서 보여주던 그 자신만만하고 사랑스런 미소를 지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유빈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유빈은 방패를 문이 열리는 방향에 대고 아이디카드를 스캐너에 가져다 댔다.
삐익― 띠리리릿
여자 직원들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수석 연구원의 아이디카드가 닿자 지금까지 굳게 닫혀 있던 오 박사의 연구실 문 자물쇠가 반응을 한다.
위잉― 덜컥―
그런데 자물쇠가 한 번에 빠져나오질 않고 안쪽에서 덜컥거린다. 보안관이 워낙에 호되게 두들겨 댄 탓에 문이 찌그러져 안쪽으로 휘어버린 탓이다.
위잉― 덜컥― 위잉―
문 안쪽의 전자자물쇠는 몇 번이나 같은 소리를 내며 반쯤 열리는 소리를 냈다가 다시 닫히기를 반복했다. 기다리다 못한 유빈은 위잉― 소리가 끝나갈 때에 맞춰 문을 거세게 걷어찼다.
콰앙―
문이 열렸다. 유빈은 두 손으로 방패를 꽉 잡고, 제니는 그의 어깨를 왼손으로 짚은 채 MP5의 총구를 앞세우며 연구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두 사람의 표정과 대조적으로 넓은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박스와 옷가지들, 그리고 서류들이 정신없이 어지럽혀져 있을 뿐이다.
“으아~ 엄청 시원하게 해놓고 살았네. 괜히 열 받는 걸, 이 새끼들?”
둘을 뒤따라 방 안으로 들어오던 태권소녀가 중얼거린다. 연구실 내부는 복도나 계단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서늘하고 쾌적했다. 천장에 설치된 에어컨디셔너에서는 정화된 차가운 바람이 계속 뿜어져 나오는 중이다.
움직이고 있는데 목덜미와 등의 땀이 식는다. 좀비 사태가 시작된 이래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일이어서, 에어컨이 풀로 가동되는 이 방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뭐야… 박사라더니… 모르고 들어왔으면 디자이너 방인 줄 알았겠다.”
테이블 주변에 널려 있는 박스와 흰 옷가지들을 지나치며 유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넓은 연구실 안쪽까지 다 뒤져 봤어도 숨어 있는 사람은 없다.
“어! 이거…….”
소파 옆에 놓여 있는 박스를 보며 제니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뜬다. 모두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거… 테라 옷이에요.”
제니는 박스 안에 들어 있던 검정색 미니드레스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엄청나게 낡고 찢긴 곳도 여러 군데였지만, 그녀가 가장 아끼던 그 옷이 맞다.
드레스 아래, 속옷들까지 가지런하게 접어놓은 얌전함만 봐도 테라가 해놓은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제니의 눈에 눈물이 왈칵 고인다.
“…여기에 있었어요. 바로 여기에… 근데 왜 옷을… 속옷까지…….”
태양 그룹이라는 장소와 벗어놓은 속옷이 겹쳐지자 그녀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던 상처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작은 회장은 이미 좀비가 되어버렸지만, 꼭 그놈이 아니더라도 못된 짓을 할 인간들은 차고 넘친다. 테라가 혹시 지금 이 시간에도 험한 꼴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제니의 마음이 급해졌다.
“아니, 아니… 다짜고짜 옷을 벗긴 게 아니야. 뭔가 목적이 있어. 여기 이거 봐. 전부 다 흰 옷이잖아. 속옷까지… 무슨 코스프레 같은 걸 하려는 거였을까?”
유빈은 일단 제니를 안심시켜 보려 했다. 이곳의 책임자나 되는 놈이 힘들게 잡아온 면역자를 다짜고짜 성적 노리개로 삼을 만큼 멍청이일 것 같지는 않았다.
이렇게 옷을 갈아입힌 걸 보면 분명 무슨 사연이 있다. 물론 단순히 흰 옷 페티시가 있는 놈일 가능성도 있지만…….
“아니… 잠깐만. 그거, 테라가 입고 있던 옷이랬지? 어디, 흐읍!”
한참 제니를 진정시키던 유빈은 갑자기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테라의 옷에 코를 박고 깊이 냄새를 맡았다.
“아, 뭐하는 짓이야? 이상하게에!”
유빈의 돌발적인 변태 행동에 태권소녀가 미간을 찌푸린다. 유빈은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냐! 소독을 했는지 확인한 거야!”
그러고는 유빈은 방 밖으로 나가서 삼숙이를 불렀다.
“삼숙아! 이리 와봐! 냄새 좀 맡아! 이리 오라고! 삼숙아! 야! 말 좀 들어라, 이 개새끼야!”
유빈이 암만 악을 써도 별 소용이 없었다. 삼숙이는 여전히 진우의 곁을 지키고 선 채 고개만 슬쩍 돌려 유빈을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눈길을 돌려 외면해 버렸다.
여전히… 저놈의 서열은 변하지 않았다. 개에게 무시당하고 있다는 게 분해서 씩씩거리고 있는 유빈의 옆으로 제니가 다가오며 손뼉을 짝짝 친다.
“삼숙아!”
삼숙이는 유빈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볼 살과 큰 귀를 너풀거리며 빠르게 달려와 제니의 무릎 주변에서 빙글빙글 돈다.
제니는 녀석의 머리를 쓸어준 뒤, 손에 쥐고 있던 테라의 옷을 내밀어 냄새를 맡게 했다.
킁, 킁…….
삼숙이 녀석은 제법 영리한 척을 하며 신중하게 냄새를 맡는다.
“이 언니 찾아줘. 이 냄새 기억할 수 있지? 응, 삼숙아?”
제니는 녀석의 눈을 보며 간절하게 부탁을 했다. 삼숙이는 헥헥거리며 방 안으로 척척 걸어 들어간다. 그러고는 테라의 옷이 들어 있던 박스와 탁자 위의 재떨이를 한 번 스윽 스치며 냄새를 맡았다.
“내려가자. 테라가 8층에 식사실이라는 데로 끌려갔다는 것까지는 들었어.”
진우와 민구가 연구실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복도 한쪽에서는 보안관과 삼식이가 직원들을 화장실 안에 가두고 문을 잠그는 중이다. 유빈이 민구에게 물었다.
“아까 그 수석 연구원이라는 사람, 혹시 이제 말할 수 있어요?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죽었어.”
민구와 진우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둘 다 별다른 감정이 없이 평온한 어조라는 점도 비슷하다. 놀란 건 유빈뿐이다.
“엑? 왜? 피가 그렇게 많이 흘렀나?”
“아아, 피는 죽을 정도로 나오지 않았어. 아마 그 약이 뭔가 서서히 죽어가는 독약인 것 같더라.”
진우가 대답했다. 민구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보안 요원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숨을 할딱거리며 복도 벽에 기대앉아 있던 보안 요원은 민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곧바로 대답을 한다.
“하아, 하아! 뭐요, 그 약? 그거… 아마 그… X―1이라고 해서… 감각은 멀쩡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만드는 약일 겁니다. 하아, 하아! 그… 저는 거기까지만 알아요. 왜 죽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너무 많이 맞으면 그런 부작용이 있나 봅니다.”
녀석은 닥치는 대로 주워섬겼다. 어차피 뻗대야 할 의리 같은 것도 없고, 뻗대고 있으면 곧바로 저 미친놈의 칼이 몸을 쑤시고 들어온다. 그러기 전에 미리미리 다 털어놓는 게 훨씬 현명한 처세다.
“들었지? 가까이 붙을 때는 다들 조심해. 그건 그렇고, 이 새끼들… 어디서 희한한 약만 모아놨군. 예전에 본 건 10분 동안 심장이 뛰지 않게 해서 뒈진 놈처럼 보이게 해 주는 주사였는데…….”
민구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빨간 주사기를 거론하는 민구의 말에 유빈은 내심 조금 놀랐다. 이 잔인한 남자와 의외로 많은 부분에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임수정, 고 하사, 테라, 그리고 빨간 주사기까지…….
“내려가자! 다 가둬놨어!”
보안관과 삼식이가 합류했다. 새로 잡은 인질들을 모두 가둬 버렸다는 걸 깨달은 보안요원의 얼굴에 절망감이 가득해진다.
“저기… 저는 이제 좀 놔주셔도… 하아, 하아! 쌩쌩한 애들 많이 잡으셨잖습니까… 식사실이 어디인지 정도는 걔들도 다 압니다… 인간적으로 이렇게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데… 하아! 하아아~! 이제는 좀 쉬게 저는 놔주셔도…….”
보안 요원이 열심히 애원을 해본다. 하지만 민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민구는 녀석의 멀쩡한 쪽 귀를 꽉 쥐고 당기며 말했다.
“네가 나한테 칼 휘두른 거, 아직도 안 잊었어. 더 엄살 피울 것 같으면 여기서 죽이고 간다?”
“아, 아닙니다! 잠깐만요! 일어납니다! 아니! 형님! 제발 그 칼 좀 잡지 마세요!”
보안 요원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구의 손이 쿠크리의 손잡이 쪽으로 움직이자 옆에 서 있던 애송이의 등에서도 덩달아 땀이 배어 나왔다.
“8층이면 멀지 않네.”
유빈과 함께 방패를 잡고 앞으로 나서며 삼식이가 중얼거렸다.
그들이 A섹션의 계단 문에 거의 다 다다랐을 때, 갑자기 삼숙이가 코를 벌름거리며 멈춰 섰다.
“왜 그래, 삼숙아?”
진우가 녀석을 돌아보며 물었다. 삼숙이는 아주 진지하게 먼 복도의 코너를 돌아보며 낮게 짖었다.
얼―! 얼―!
다들 그 신호가 뭘 의미하는지 몰라 서로 얼굴만 마주 봤다. 그러는 사이, 삼숙이는 더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 저놈 왜 저래?”
이유는 모르겠지만, 삼숙이가 얼마나 영리한 개인지는 잘 알기에 친구들은 일단 녀석을 따라 뛰었다. 민구도 쑤셔오는 옆구리를 꽉 움켜쥐고 그 뒤를 쫓았다.
졸지에 남겨진 보안 요원과 애송이, 두 끄나풀은 잠시 고민하다가 민구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혹시라도 돌아와서 왜 쫓아오지 않느냐고 해코지를 할까 봐 무서웠다.
그리고 사실… 이미 계단 전체가 좀비들로 가득하다는 걸 보았기 때문에 딱히 도망갈 방법도 없다.
“으아! 저 새끼 엄청 빠르네!”
해머를 들고 뛰어야 하는 보안관이 숨을 헐떡인다. 삼숙이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내달렸다.
녀석은 이전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길고 꼬불꼬불한 복도를 빠르게 돌파해서 C섹션의 계단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단단한 철제문을 두드리며 사납게 짖어 댔다.
“뭐지, 대체? 이 안에 뭐가 있기에… 하아아~ 하아아!”
간신히 녀석을 따라잡은 진우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묻는다. 제니가 자신의 배낭을 두드리며 말했다.
“저기… 하아, 하아! 제가 테라 옷 냄새를 맡게 해줬어요. 혹시… 그걸…….”
거기까지 듣고 난 보안관이 망설임 없이 곧바로 문을 확 밀어젖혔다. 유빈과 삼식이는 방패를 들어 올렸고, 진우는 얼른 사격 자세를 갖췄다.
여기에서 테라를 만날 가능성이 1퍼센트라도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안에서 뛰어나온 것은 그들이 기대와 전혀 달랐다.
“으아아아!”
엄청난 기합을 지르며 열린 문을 통해 내달려 온 것은, 우주인처럼 거창한 방호복을 입은 남자였다. 방호복남자는 보안관과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움찔하더니, 곧바로 드릴을 앞세워서 그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뭐야! 이 새끼야!”
보안관은 코앞으로 찔러오는 드릴을 피하고는 방호복남자를 확 밀어 쳤다. 방호복남자는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그러는 사이 삼단봉을 든 쉐도우 실드 대원 둘이, 그리고 그 뒤에서는 좀비 다섯 마리가 차례로 문을 통과해 뛰어 들어온다.
“윽!”
한꺼번에 쉐도우 실드 두 명의 무게를 방패로 받아낸 유빈이 주춤하고 주저앉는다. 진우는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다.
보안관과 삼숙이, 유빈과 삼식이가 목표물들과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어차피 보안관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이니, 굳이 그 아슬아슬한 틈을 노려 쏘는 모험을 감수할 만큼 위험한 상황은 아니다.
적이라고 해봐야 사람 셋에 좀비 다섯. 그 정도면 그냥 보안관에 맡기고 떨어져 나온 놈들만 잡아주는 편이 나을 거다. 진우는 시야를 넓히기 위해 오히려 뒤로 몇 걸음을 물러났다.
그러는 사이, 잔뜩 흥분한 삼숙이는 움찔거리는 쉐도우 실드 대원들을 밀어내고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계단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으아악!”
삼숙이에게 밀려난 쉐도우 실드 대원이 비명을 지른다. 녀석은 뒤쫓아오던 좀비에게 부딪쳐 쓰러졌고 좀비는 놈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와드득!
놈의 뜯겨진 목에서 핏줄기가 솟아오르는 동안 다른 쉐도우 실드 대원은 보안관의 머리를 향해 삼단봉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아마도 방패를 든 두 명보다 이쪽을 뚫고 나갈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물론 잘못된 판단이지만.
휘이잉―
놈이 휘두른 3단봉이 허공을 가르고, 보안관의 해머는 놈의 무릎을 반대쪽으로 돌려 버렸다.
“끄으윽!”
끔찍한 비명과 함께 뒤로 밀려 넘어진 쉐도우 실드 대원의 눈이 갑자기 더욱 커진다. 그런 후, 그의 입에서는 피가 왈칵 솟아올랐다.
위이이이잉―!
놈의 가슴을 뚫고 맹렬하게 회전하는 드릴의 날이 튀어나왔다. 놈은 죽어가면서 핏발 선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방호복 직원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아니… 아니! 이건! 나는… 그냥! 저 새끼들 공격하려던 거였는데… 갑자기 내 앞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방호복 직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린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그렇게 변명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드릴의 방아쇠를 누른 손가락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고, 몸이 꿰뚫린 채 흔들리는 대원의 몸에서는 엄청난 양의 피가 터져 나온다.
“으아아아! 으으으!”
죽어가는 대원과 죽이고 있는 방호복 직원이 동시에 비명을 터뜨린다. 보안관과 친구들은 그런 대화를 듣고 볼 여유가 없었다. 당장 상대해야 하는 것은 아군의 무기에 꿰뚫려 죽는 얼간이들이 아니라, 남아 있는 좀비들이다.
부웅―!
보안관의 해머가 바람을 갈랐다.
으직―!
유빈의 방패 위에 올라타려던 좀비의 갈비뼈가 박살 나고, 좀비의 몸이 옆의 놈과 부딪친다. 엄청난 스윙에 밀려난 두 마리가 거의 동시에 하늘로 떠오른다. 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투두둑! 투두둑!
머리가 터진 좀비들이 뇌수를 쏟으며 바닥에 고꾸라진다. 보안관은 진우가 처리해 줄 것을 예상했다는 듯 세 번째 좀비의 턱을 후려갈기고 있었다. 유빈과 삼식이는 방패로 네 번째 좀비의 돌진을 막아내는 중이다.
“뒤로 빠져!”
보안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유빈과 삼식이는 힘을 합쳐 좀비를 밀쳐 내고 좌우로 갈라졌다. 보안관이 그 사이로 확 뛰쳐나오며 해머를 내리찍었다.
콰직!
정수리가 박살 난 좀비가 힘없이 쓰러진다. 그러는 동안 방향을 바꾼 진우는 계단에서 후속으로 뛰어나오려는 좀비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투두둑― 투투두― 투두― 툭―
계단 위쪽에서 좀비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죽은 지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 놈들과 변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놈들이 섞여 있다.
진우는 놈들이 복도의 조명 안쪽으로 들어오는 순간, 방아쇠를 당겨 머리를 꿰뚫었다.
위이이잉―
방호복 직원은 쉐도우 실드 대원의 시체에서 드릴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까짓 무기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깨닫지 못할 만큼 그는 흥분해 있고,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였다.
“어이, 아저씨! 그거 내려놔. 어차피 소용없어. 이쪽에는 총도 있다고!”
보안관이 녀석에게 경고를 했다. 하지만 방호복 직원은 피투성이가 된 채 열심히 드릴을 역방향으로 돌려서 결국 드릴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가까이 오지 마! 다 죽고 싶지 않으면!”
방호복 직원이 맹렬하게 돌아가는 드릴의 날을 좌우로 흔들며 다시 벌떡 일어섰다. 보안관은 어처구니없어 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뭐지? 네가 협박할 상황이 아닌데…….”
“이야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방호복 직원은 갑자기 몸을 홱 돌려 태권소녀와 제니를 향해 돌진했다. 여자들을 인질로 잡아야겠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것이 보안관을 화나게 했다.
“이 개새끼가!”
보안관은 해머를 풀스윙으로 휘둘러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단단한 방호 헬멧으로 덮여 있는 머리지만, 그 안의 두개골과 목뼈는 그만큼 단단하지 않았다. 목이 부러진 방호복 직원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맥없이 고꾸라져 버렸다.
“하아, 하아… 이 새끼… 왜 죽을 길을 택하는 거지?”
아직도 다리가 꿈틀거리며 경련하는 방호복 직원의 시체를 바라보며 보안관이 중얼거렸다. 진우가 친구의 어깨에 손을 올려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남들도 자기처럼 잔인하고 인정사정없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절대 곱게 살려줄 리가 없다고 믿었겠지.”
“이놈들은 뭐야?”
뒤늦게 합류한 민구가 헐떡거리며 물었다. 이렇게 건물 전체를 가로지르는 장거리 달리기는 도저히 쌩쌩한 놈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잘려 나간 옆구리가 점점 더 견딜 수 없을 만큼 당긴다. 어영부영 따라온 끄나풀들과 별다른 차이도 없을 만큼 느렸다.
“모르겠어요. 아마 계단으로 탈출하는 놈들이었던 것 같은데…….”
아래층에서 짖고 있는 삼숙이를 쫓아 내려가면서 유빈이 대답했다. 삼숙이는 문이 닫힌 12층 출구에 있었다. 발톱으로 문을 긁어 대는 삼숙이를 진우가 진정시켰다.
“왜 이렇게 흥분했어, 응?”
녀석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던 진우는 그 주둥이에 피가 묻어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러고는 녀석의 날카로운 이빨 사이에서 천 조각을 빼냈다. 찢긴 양복바지 조각이었다.
“얘가 누굴 물었나 본데?”
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보안관이 12층의 문손잡이를 돌리며 말했다.
“누군지는 쫓아가보면 알지.”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진우가 보안관을 만류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보안관에게 진우는 자신의 팔을 보여줬다.
“소름 끼친 거 봐. 이 안에는… 그냥 좀비들 밭이야. 우글우글해. 누가 이리로 도망갔는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못 살아. 나도 못 버텨.”
그래도 보안관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조금 열린 문을 잡은 채 망설인다. 진우는 제니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제니야, 가방에서 옷 좀 줘봐. 테라 옷.”
제니에게서 미니 드레스를 넘겨받은 진우는 흥분한 삼숙이의 코에 그 옷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삼숙아, 이 누나 찾은 거 아니지? 이 냄새 어디에 있어? 가자.”
삼숙이는 몇 차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은 뒤, 조금 진정하는 기미를 보였다. 그러고는 아래쪽을 향해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들 녀석의 뒤를 따라 걷고 있을 때, 삼식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계단 문을 빼꼼 열었다.
“야, 열지 마! 거기 감당 안 된다니까? 왜 그래?”
“그게… 왠지 아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삼식이는 문틈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을 집중하며 대답했다. 물론 들려오는 것은 좀비들의 우렁찬 울음소리뿐이다.
“혹시 테라 목소리야?”
진우가 물었다.
삼식이는 고개를 저으며 문을 닫았다.
“아니… 그냥 내가 잘못 들었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