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408화 (408/449)

1장 어벤저스 (3)

“여기에서 뭐해? 다들 줄 서고 있는데. 철로로 빨리 가야 테라를 만나지.”

임수정과 고 하사는 뒤쪽에 서 있는 삼식이와 규영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삼식이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다.

“아, 지금 저 사람이 테라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 같은데, 자꾸 고집을 부리고 말을 안 해줘서요.”

“테라? 그럼 어제 철로에 가 있던 게 아니라는 거야? 근데 저 사람은 테라 행방을 어떻게 알아?”

임수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사이 고 하사는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갔다. 보안관과 대치 중인 사내, 먼발치이긴 하지만 어딘가 낯이 익다.

10여 미터 이내로 거리를 좁히자 그제야 얼굴이 좀 보인다.

“어라?”

민구의 흉터를 알아본 고 하사가 반가운 감탄사를 터뜨렸다. 초주검 상태로 건대에 들어와 자신이 살려낸 남자가 멀쩡히 서 있다는 게 너무 기뻤다. 어디에서 구했는지, 양복도 아주 멀끔하다.

“어휴, 선생님! 이제 많이 나으셨네요? 다행입니다!”

고 하사가 특유의 까불거리는 말투로 말을 걸며 민구에게 다가갔다. 민구도 당연히 고 하사를 알아보았다.

생명의 은인, 며칠 동안이나 똥오줌을 받아내 준, 고마운 사람. 그 고 하사가 하필 이렇게 곤란한 상황에서 인사를 건네온다. 민구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여러 명의 사람들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군인 의사 선생.”

“네, 반갑습니다! 아니, 근데 여기 분위기 왜 이래요? 뭔가 되게 심각한데요? 유빈아, 무슨 일이야?”

고 하사가 보안관 일행과 친근하게 대화하는 걸 보며 민구는 큰 압박을 느꼈다. 평생 잊지 않겠다고 했던 은인이 테라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쪽에도 목숨을 빚졌지만, 테라도 그를 살려줬기에 문제가 간단치 않다.

“…저 애들이랑 아는 사이요?”

물어보는 민구의 목소리는 고통스러웠다. 고 하사가 ‘아뇨, 잘 모릅니다’라고 해주기를 바랐다. 그냥 수용자와 군인 의사 정도의 사이였다면 고 하사가 중간에 개입될 일도 없으니까.

그러나 고 하사의 대답은 민구가 기대했던 것과 정반대였다.

“아아, 얘들이 제 목숨 여러 번 구해줬습니다. 얘들 아니었으면 전 아마 벌써 며칠 전에 좀비로 변해 있었을 거예요. 이 녀석들… 정말 좋은 친구들이에요.”

민구의 속도 모르면서 고 하사는 엄지까지 척 치켜세운다. 민구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 방의 카운터펀치가 더 민구에게 퍼부어졌다.

“어머! 민구… 민구 씨? 세상에!”

임수정의 목소리.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가린다. 비 오는 밤 강서 정수장에서 짧은 시간 동안 함께 있었지만, 저 얼굴은… 특히 저 흉터는 잊을 수가 없다.

으음? 이건 또 무슨…….

눈을 가늘게 뜨고 임수정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던 민구도 뒤늦게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 먹물 여자? 강서 정수장?”

임수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냉장고 안에 넣어두고 왔던 여자가…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니… 민구는 믿기지가 않았다.

그때보다 조금 더 야위기는 했지만, 그래도 건강해 보인다. 얼굴에 그늘도 없다.

“에? 수정 씨, 저분이랑 아는 사이예요?”

고 하사가 물었다. 임수정이 대답해 준다.

“네, 그… 기억나시죠? 7월 14일에 정수장에 좀비들이 몰려 들어왔을 때… 제가 머리를 찧고 기절했었다고… 말씀드렸었잖아요. 그때, 저분이 절 냉장고 안에 숨겨주셨어요.”

“허! 그래요? 그럼 내가 잘해 드렸어야 할 의무가 확실히 있던 분이네! 와~ 이런 기연이 다 있군요!”

고 하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해한다. 민구에게도, 임수정이 살아 있다는 건 꽤나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좀비 세상이 되어버린 후, 지금까지 그와 얽혔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죽었다. 그나마 밤톨이 용케 살아남아 줬지만, 그냥 그 정도까지였다. 그리고 이제는 테라에게까지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런데 한 달이 훌쩍 넘은 뒤 이 자리에서 임수정을 다시 만난 것이다.

그와 맨 처음 인연이 얽힌 여자, 당연히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여자를…….

사방에 폐만 끼치는 것 같아 암흑처럼 암담했던 마음에 한 줄기 여유로운 빛이 비쳐 든다. 민구는 조금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살아남았군… 정말 장해.”

“제가 장할 건 별로 없어요. 계속 도움만 받았으니까요. 처음엔 민구 씨, 그리고 군인들… 테라… 그리고 여기 이 친구들……. 딱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이 친구들을 만났죠.”

임수정은 담담하게 자신을 도와줬던 사람들을 나열했고, 맨 마지막에 보안관 일행을 지목했다. 민구가 다시 물었다.

“테라… 걔를 아나?”

“네, 잠실에서… 그 격리실 아시죠? 거기 동기였어요. 낙담하고 있을 때, 기운을 차리게 도와줬죠.”

“이 언니가 저희한테 테라가 살아 있다는 걸 알려줬어요. 전 그때까지 죽었다고만 생각했었거든요.”

제니가 끼어들어서 다시 한 번 간절한 눈빛을 보낸다. 민구의 마음속에 굳게 쌓여 있던 벽은 이미 무너지고 난 뒤였다.

자신과 함께 싸웠던 밤톨, 생명의 은인인 군인 의사,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살려준다 약속했던 먹물 여자……. 그들 모두가 보안관 일행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이라 말하고 있다.

이보다 많은 보증인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테라의 단짝이었던 아이도 그 일행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이놈들이 꽤나 강하다는 사실이다. 고릴라는 물론이고, 발차기를 날렸던 길쭉한 계집애도, 그리고 저 진우라는 총잡이도… 나름 대단한 놈들이다. 침을 줄줄 흘려 대는 저 시꺼멓고 덩치 큰 개새끼도 전력으로는 나쁘지 않다.

이놈들과 함께라면 태양 그룹을 치러 갈 때 분명히 훨씬 승산이 커진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믿을 수 있나?”

마음을 굳힌 민구는 가까이 있는 보안관을 제쳐 두고 진우에게 물었다. 진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원래부터 함께 계획을 짰던 그들 일행 아홉 명은 물론, 고 하사, 강 소위, 그리고 제니의 사인을 받으러 왔던 밤톨… 다 믿을 수 있는 사이다. 밤톨은 낯선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미 이 사건에 깊이 개입되어 버렸다.

싸움이 나는 동안에 잠시 기웃거리던 다른 민간인들은 이미 관심을 거둔 지 오래였다. 그들에게는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게 말싸움 구경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그렇습니다.”

진우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구는 낮게 한숨을 쉬고 나서 입을 열었다.

“테라에 대해 얼마나 알지?”

“행방만 몰라요. 특별한 애라는 건 압니다. 아주 특별한 아이죠.”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유빈이 먼저 대답했다. 민구의 질문을 듣자마자 유빈은 그게 면역에 관한 일을 돌려 묻는 말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강 소위와 고 하사의 귀에 들어가 봐야 서로에게 별로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만약 그들이 테라가 면역자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들은 군과 진우, 그 둘 중에 한쪽을 배신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러느니 아예 모르는 편이 낫다.

“…그래?”

민구는 유빈을 유심히 살펴봤다. 지금까지 전혀 눈에 띄지 않던 놈인데, 의외로 눈치가 빠르고 말주변도 제법이다.

“…걔는 지금 태양 그룹에 끌려갔다. 본사 건물에.”

민구는 멀리 꼭대기가 보이는 본사 건물을 가리켰다.

아―! 제니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어디로 갔든 일단 살아 있다는 게 제일 중요했다. 구해내는 건 그다음의 문제다.

“또… 태양 그룹이네. 하여간 이 개새끼들…….”

보안관이 이를 빠득, 갈았다. 이 칼자국 새끼도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태양 놈들이 끼치는 민폐에는 댈 바가 아니다. 조금 살 만해진다 싶으면 번번이 이렇게 발목을 잡고 늪으로 끌어당기려 든다.

“근데 아저씨는 뭐했어요? 테라 끌려가는 동안.”

태권소녀가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민구는 잠시 고민했다. 눈에 두들겨 맞은 멍자국이 남아 있는 저 녀석은 군인들에게 테라가 면역자라는 걸 알리고 싶지 않은 눈치인데… 결국 민구는 자기가 조금 모자란 놈이 되기로 했다.

“사연이 길지만… 짧게 말하자면, 완전히 뻗어서 손끝도 못 움직였다고 해야 될 것 같군.”

“쳇, 그래놓고 기운 차리자마자 새 옷 쪼가리 주워 입은 거야?”

여전히 민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보안관이 시비조로 중얼거렸다. 제니가 얼른 보안관을 뒤로 잡아당겼다. 겨우 말문이 터진 사람의 성질을 건드려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어쨌든 테라 구하러 가시던 길이죠? 그 칼도 그렇고, 장갑 트레일러를 피했던 것도 그렇고.”

진우가 물었다. 민구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목적이 같네요. 같이 가시죠. 저희도 태양 그룹 그 검은 군복 입은 놈들만 보면 눈에서 불이 나는 것 같으니까. 보안관이 저렇게 틱틱거려도 뒤에서 덤비는 놈은 아니니까, 저희 믿으셔도 됩니다.”

“내가 뒤를 치면 어쩌려고?”

조금 장난기가 동한 민구가 짓궂게 물었다.

“그럼 나한테 뒈지는 거… 읍!”

보안관이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제니에게 입을 막힌 채 제지당했다. 진우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그 정도로 자존심 없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진우는 가슴에 걸고 있는 소총의 총열 덮개를 가볍게 두드렸다. 마치 ‘만약 그렇다면 내가 곧바로 죽일 거다’라고 경고하는 것 같다.

“근데… 군인 형아들은 아무것도 안 해요? 소중한 국민이 끌려가서 감금되어 있다는데… 그리고 바로 저 코앞의 건물에서 사람을 좀비 밥으로 주고 있다는데… 그걸 그냥 둬요? 강 소위 아저씨가 건대 대장이라면서요? 장갑차 끌고 가서 다 쏴 죽여 버리고 항복 받으면 안 돼요?”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규영이 강 소위에게 물었다. 강 소위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순진한 소년이 그런 생각을 하며 답답해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미련한 박 소위가 그 동영상을 봤다면 아마 이 소년과 비슷한 판단을 했을 것이다.

“아… 그건 진짜 부끄러운 질문이구나.”

강 소위는 카트 위에 앉은 규영의 어깨를 짚으며 힘겹게 말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냥 쳐들어가요.”

“아니… 그게 좀… 여기 있는 군인들 말이지, 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다들 나름의 임무라는 게 있거든. 예를 들어 저 철로 위에 있는 전차랑 군인들은 좀비들이 몰려올 때 싸워야 하고… 우리 타고 왔던 장갑 트레일러만 해도 계속 사람들을 싣고 왔다 갔다 하잖아. 그러니 지금 갑자기 태양 그룹으로 쳐들어가겠다고 병력이나 장비를 뺄 수가 없어.”

규영이 납득하는 표정을 짓자 강 소위는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또 설사 여유가 있다고 해도 군대라는 건 그리 가볍게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야. 엄청난 크기의 폭력을 가진 집단이니까 가벼워서도 안 되고, 감정적이어서도 안 된다고. 우리가 움직이려면 공식적인 명령이 있어야 돼. 그런데 내 의견 같은 건, 여단장님께 닿기까지 아주 오래 걸리거든.”

“저기도 높은 사람 있지 않아요? 아까 강 소위 아저씨가 보고하던 사람 말이에요.”

“응, 그 사람 정도로는 안 돼.”

규영을 납득시키기 위해 강 소위는 조금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말이 안 통할 거라는 게 더 큰 문제다. 이곳 철교를 담당하는 장교에게 섣불리 핸드폰을 들이밀어 봐야 이게 진짜 태양 그룹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냐는 핀잔이나 돌아올 뿐이다. 강 소위는 그런 정도의 눈치는 있다.

“대신에 유빈이가 복사해서 준 그 동영상, 그건 내가 나중에 꼭 우리 중대장님께 보고할게. 그분은 현명하고 올곧은 분이기도 하고, 지금 여단장님과 함께 작전 회의에도 참가하시니까 반드시 기회를 얻어내실 거야. 그러면 여단장님도 가만히 계시지는 않겠지.”

“그럼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못한다고요? 그냥 진우 형이랑 보안관 형이 잘 싸우라고 기도만 할 거예요?”

규영은 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적지 않게 실망한 모양이다. 강 소위는 고개를 저었다.

“공식적으로는 그런 거지. 그런데 말이야… 공식적으로 그렇다고 해서 전혀 손을 쓸 수 없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이야기가 다르긴 하지. 대한민국 군대에서는 한 가지 전제 조건만 채우면 모든 일이 허락되거든.”

“그 전제 조건이 뭔데요?”

“뭐… 그런 게 있단다. 나머지는 형들이랑 이야기할게.”

강 소위가 규영의 머리를 쓸어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어린 이 소년에게 대한민국 군대에서는 ‘걸리지만 않으면’ 뭐든지 해도 된다는 말을 하기는 좀 꺼려진다.

진우네 일행이 태양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했을 때부터 그는 나름 약삭빠른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실수를 가장한 강력한 한 방!

그게 그가 이 친구들을 도우면서도 건대 쉘터의 사람들도 다 이송시키고, 아무도 처벌 받지 않는 방법이다.

부끄럽지만, 지금 그에게 허락된 권한은 그 정도밖에 안 된다.

“언제쯤 쳐들어갈 생각이야?”

강 소위는 유빈과 진우에게 물었다. 유빈은 초조한 얼굴로 태양 그룹 본사 건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걸… 잘 모르겠어요. 마음은 급한데, 성급하게 달려들기가 영 꺼림칙해서… 저기도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었던 데잖아요. 그럼 벽이랑 문이 엔간히는 높고 단단하다는 이야기일 텐데… 그걸 쉽게 뚫고 들어갈 수 있을지… 저는 저 회사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거든요.”

“그건 몇 분 뒤에 장갑 트레일러 다시 돌아왔을 때, 장갑차 기관포 조준경으로 보면 될 거야. 내가 보여 달라고 요청할게. 뭐, 보나마나 벽도 높이 세워져 있고, 정문도 단단히 셔터를 내려놨겠지만.”

강 소위가 말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유빈은 조금 전보다 더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에 잠겼다.

처음부터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 많다. 건물의 내부 구조에 대해서도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데.

그렇게 걱정하고 있는 유빈을 향해 강 소위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벽이랑 정문 정도는 내가 뚫어준다.”

☆ ☆ ☆

“아, 준비 다 됐어?”

내부 회선 전화기가 울리자 오 박사는 수화기를 집어 들고 여유롭게 물었다. 평소보다 아주 온화해진 태도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엄청난 종류의 면역자가 그의 손아귀 안에 있으니까.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저쪽의 보고를 듣던 오 박사가 딱 잘라 말했다.

“아니, 아니, 그거보다 조금 더 많이 준비해. 몇 번 이야기해야 알아듣냐? 식사실이 좀비들로 바글바글해야 한다니까. 한 열댓 마리 더 끌고 와서 집어넣어. 그거 다 되면 다시 보고해. 뭐? 어떻게 뒤처리를 하냐고? 그게 걱정이냐? 그냥 대가리에 구멍을 뚫어서 다 죽이면 되잖아! 이 멍청아!”

자기 할 말을 다 하자마자 오 박사는 수화기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소파에 기대앉아 있는 테라를 돌아봤다.

“어지러워요?”

“…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테라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밤새도록 뛰어다닌데다 민구를 구하기 위해 피를 많이 흘렸고, 오 박사도 혈액 샘플을 몇 차례나 채취해 갔다. 거기에 좀비와 한 방에 갇힌 동안 받은 스트레스까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제 조금 쉬고 싶다.

“그러니까 뭐 좀 먹으라는데도… 왜 그렇게 고집이 세요? 응? 예쁜 아가씨가 말이야.”

오 박사는 테라의 맞은편 테이블로 와서 턱 걸터앉으며 또 담배를 피워 물었다.

테라는 대꾸하지 않았다. 자신의 미래가, 끔찍한 인간들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첫날인데도 자꾸 깜빡깜빡 눈이 감긴다. 그만큼 피곤하고, 몸도 마음도 괴롭다.

“어이, 어이, 정신 차려요! 졸면 안 돼. 나랑 같이 한 30분짜리 기록 영상 하나만 찍자고요. 오늘은 그것까지만 하고 나면 재워줄게. 응? 알았어?”

테라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자 오 박사는 그녀의 볼을 가볍게 두드려 깨웠다. 테라는 눈을 비비며 잠을 떨어내기 위해 애를 썼다.

조금만 누워서 자고 싶은데… 이 오 박사라는 사람에게는 그런 부탁 따위 하고 싶지 않다.

똑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오 박사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뭐야?”

“지시하셨던 커스텀입니다.”

“오! 오! 그래! 들어와! 쓸 만한 게 좀 있었나?”

오 박사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문을 열었다. 여직원 둘이 종이 상자를 들고 들어온다.

“거기 내려놔. 어디 보자…….”

여직원들이 테이블 위에 상자를 올려두자 오 박사는 담배를 문 채 그 안에 든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늘어놓았다.

옷이었다. 흰 블라우스들. 그리고 흰 여자 속옷들. 널찍한 테이블 위는 금방 흰 블라우스와 속옷들로 덮였다.

“원피스 종류는 없었어?”

블라우스만 계속 나오자 오 박사가 질린다는 듯 투덜댔다. 여직원들은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원피스는 몇 장 안 됩니다. 나름 모으기는 했는데, 흰색은 드물어서…….”

그녀들이 모아온 것은 태양 그룹 본사의 여직원들이 가지고 있던 옷가지들이다. 흰색 옷이면 드레스든, 블라우스든, 속옷이든 뭐든지 가지고 오라는 오 박사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야, 이건 너무 크잖아. 쟤가 이걸 어떻게 입어… 슬립은? 그런 것도 없어?”

테라에게 너무 큰 흰색 원피스를 바닥에 집어 던져 버리며 오 박사가 투덜댔다. 정말 건질 만한 옷이 없다. 결국 그가 골라 든 것은 77사이즈의 흰색 실크 블라우스였다.

“그래… 이 정도 크기면, 쟤가 입었을 때 미니 원피스 비슷하겠어. 그렇지 않아?”

오 박사의 질문에 여직원들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미친놈이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지만, 공연히 골 아픈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

여직원들을 내보낸 오 박사는 테라의 앞에 커다란 흰색 블라우스와 흰 속옷 상하의를 내려놓았다.

“지금 입고 있는 거 싹 다 벗고 이걸로 갈아입어요.”

테라는 오 박사와 옷가지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녀는 오 박사가 자리를 비켜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아아, 뭐? 내가 볼까 봐? 아니, 그런 걱정 하지 마요. 난 그런 건 관심 없으니까요. 내 새디즘은 유치한 누드 따위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에서 만족을 얻거든. 그냥 내가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테라 씨를 혼자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예요. 혹시 이상한 맘 먹고 그러면 안 되잖아요. 이렇게 귀한 사람인데… 자, 어서 갈아입어요. 정 불편하면 열 셀 동안 눈은 감고 있을게.”

그래도 테라가 순순히 지시를 따르지 않자 갑자기 안색이 변한 오 박사는 인터폰의 단추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갈아입어라! 내가 셋 센 다음에도 그 지랄로 멀뚱멀뚱 앉아만 있으면 아까 그 얼굴 꿰맨 친구 불러서 걔가 갈아입혀 주도록 한다. 농담인 것 같냐? 하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