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어벤저스 (2)
민구도 놀랐다. 칼을 넘겨주고 좀비들이 달려오는 방향으로 뛰어가던 뒷모습. 그게 다급했던 어젯밤 그가 보았던 밤톨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둘 다 용케 살아남아서 다시 만난다니… 처음 든 감정은 한없는 반가움이었다.
“오! 살았구나!”
민구는 밤톨을 향해 아주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곧바로 약간의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녀석이 어제 칼 가방을 전해 주면서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칼을 좋은 데 쓸 거라는 걸 잘 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함께 이동하는 사람들을 부탁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자신과 같이 출발했던 100인대 중에 단 한 명도 구해내지 못했다. 나름 온몸이 으스러져라 칼을 휘두르고 죽음을 무릅쓰며 저항해 봤지만, 결국 이렇게 혼자만 남았다.
길을 터서 살려낸 사람들은 배에 탄 다음 죽었고, 2층으로 끌고 올라갔던 사람들은 태양 그룹의 헬리콥터에 자발적으로 올라 버렸다.
먹을 것 좋아하던 백인 녀석도… 그리고 결국에는 테라까지 그의 목숨을 구한 후 끌려가 버렸다. 결과만 놓고 보면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형님, 옷이… 하하하! 이런 건 어디에서 구하셨어요! 신수가 훤해지셨네!”
그의 속도 모르는 밤톨은 민구의 양복에 관심을 보이며 웃었다. 어제 출발했을 때는 낡은 트레이닝 복 차림이었으니 눈길을 끌 만도 하다.
민구의 표정이 굳어 있자 활짝 웃고 있던 밤톨의 얼굴도 점차 어두워졌다.
“근데… 테라 씨는…….”
밤톨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밤톨의 큰 리액션 때문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던 상황 속에서 ‘테라’라는 이름이 나오자, 주변의 시선이 일순간 밤톨과 민구를 향해 집중됐다.
사람 좀 죽여봤을 법한 차가운 눈빛의 놈도, 고릴라도, 여자애들도, 심지어 시꺼먼 개까지도 민구를 돌아본다.
민구는 난감했다. 물어본 상대가 밤톨만 아니었다면 화를 내고 뿌리쳐 버렸을 상황이다.
“걔는… 내가 꼭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놓을 거니까…….”
불안과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밤톨에게 민구가 대답했다. 진심을 담은 대답이지만, 그것으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물어본 밤톨에게도…, 귀를 쫑긋 세운 채 듣고 있던 친구들에게도……. 하지만 민구는 거기까지밖에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잊지 않으마.”
민구는 여러 가지 감정을 담은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어차피 철로에 들어갈 게 아니니까, 앞줄에 서 있을 이유가 없다. 뒤쪽에서 여자애들과 고릴라 일행이 밤톨에게 묻는 소리가 들려온다.
“테라랑 함께 간, 엄청 센 사람이라는 분이 저 아저씨였어요?”
제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밤톨이 곤란해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보안관과 태권소녀, 진우, 유빈이 빠른 걸음으로 민구의 뒤를 쫓았다.
“어이, 스톱! 이 새끼야, 거기 서! 야! 칼자국!”
보안관의 성난 목소리가 크게 울린다. 민구는 멈추지 않았다. 아직 철로에서 가까워 군인들도 많고, 막 트레일러에서 내린 민간인들도 속속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이목을 집중시킬 필요가 없다. 공연히 사고를 쳐서 칼을 빼앗기거나 체포된다면, 테라를 구하러 가는 일만 점점 늦춰질 테니까.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던 민구는 이제는 용도가 사라진 유람선 선착장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삐걱―
그가 발을 올리자마자 허술한 나무 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지난 일주일 동안, 그리고 어제 밤새도록 수많은 사람들이 밟았던 터라 낡을 대로 낡아 있다.
민구는 선착장 안쪽의 작은 가건물 안으로 모습을 숨겼다. 여기라면 구경꾼들로부터는 조금 자유로울 것 같아서다.
“서라는 말 안 들리디, 이 개새끼야! 기껏 도망 온 게 여기냐?”
바로 등 뒤까지 쫓아온 보안관이 민구의 어깨를 잡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민구는 곧바로 몸을 돌리며 쫙 벌린 엄지와 검지로 놈의 울대를 후려쳤다.
일단 저 시끄러운 목청부터 잠잠히 시켜놓아야 좀 조용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타악―
보안관은 민구의 손날을 옆으로 밀어 치고, 오히려 그의 멱살을 콱 움켜쥐었다. 민구는 왼팔 팔꿈치를 휙 돌려 막으며 멱살을 흔들려는 보안관의 얼굴을 겨눴다.
파앗―
날카롭게 뻗어오는 팔꿈치!
보안관은 놈의 멱살을 확 밀치는 것으로 그 공격을 피했다. 첫 번째 공격이 허공을 가르자마자 민구는 왼팔을 다시 백핸드로 회전시켜 보안관을 노렸고, 동시에 오른 손 스트레이트를 후속타로 날렸다.
“장난하냐?”
보안관은 왼팔을 들어 민구의 백핸드를 막고, 멱살을 잡았던 오른손으로 놈의 스트레이트를 밀쳐 냈다. 그러고는 곧바로 왼손 훅을 놈의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후웅―
민구는 뒤로 스텝을 밟으며 그 공격을 피했다. 보안관의 주먹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가건물 안에서 날카롭게 울린다.
아찔하다. 보호해 줄 수 있는 옆구리 근육이 날아가 버린 지금, 저런 걸 맞았다간 내장이 다 뒤틀려버릴 것이다.
“테라 어떻게 했어, 이 새끼야!”
민구가 잠시 주춤한 틈을 타서 보안관은 또 한 번 그의 멱살을 잡기 위해 달려든다. 민구는 오른발 로우킥과 미들킥을 연달아 날리면서 놈의 접근을 막았다.
보안관은 다리를 들고, 팔꿈치를 내려 민구의 킥을 무력화시키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딱 꼬리에 불붙은 황소 새끼 같다.
쉬익―
계속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하던 민구는 한순간 방향을 바꾸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보안관의 관자놀이를 향해 빠르게 주먹을 내질렀다.
핏―
보안관이 고개를 틀어 민구의 주먹은 아슬아슬한 차이로 비껴갔다. 동시에 보안관의 오른손 어퍼컷이 민구의 턱을 노린다.
민구는 황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원래대로라면 허리를 뒤로 젖혀 흘려보냈어야 할 주먹이지만, 지금 그의 몸은 그런 움직임을 수행할 수 없다.
타앗―
보안관의 펀치가 스친 민구의 입술 끝에서 피가 솟아난다. 마찬가지로 보안관의 광대뼈 주위도 회초리에 맞은 것처럼 가늘고 붉게 부어올랐다.
“오! 괴물들인데!”
두 사람의 현란한 몸짓을 지켜보던 태권소녀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둘 다 한 수씩을 접고 벌이는 싸움이었다.
보안관은 민구에게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죽일 각오로 펀치를 뻗지 않았고, 부상당한 상태의 민구는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칼을 꺼내지 못하고 맨손으로만 싸우는 중이다.
그럼에도 가건물 주변을 에워싸고 서서 지켜보는 친구들의 넋을 빼놓기에는 충분한 수준이었다.
“그만 까불어라! 안 되는 거 알잖아!”
서로의 주먹이 두어 번 더 상대방의 얼굴 주변을 스쳤을 때, 화가 난 보안관이 민구를 밀어 쳐서 중심을 흩뜨린 뒤, 강력한 미들킥을 날렸다.
갈비뼈를 부러뜨릴 기세의, 일명 ‘맞고 죽어라 킥’이다. 민구는 황급하게 몸을 피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두 팔을 뻗어 킥의 기세를 좀 약화시켰다.
빠악―
보안관의 커다란 안전화가 민구의 옆구리 바로 근처를 때렸다. 나무판자들을 덧대어 대충 만들어놓은 가건물의 벽에 금이 가고, 건물 자체가 떨릴 만큼 강력한 파워!
가까스로 흘리기는 했지만, 녀석의 다리를 막았던 손바닥이 전기가 오른 것처럼 찡하다.
‘젠장…….’
민구의 얼굴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흐른다. 한 번 더 이런 스피드와 파워의 발차기가 날아든다면, 그때도 또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이 없다.
이런 발차기를 정통으로 맞으면… 보름 정도는 요양을 해야 몸을 추스를 수 있을 만한 타격이다.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민구는 오른손을 등 뒤로 돌려 쿠크리의 손잡이를 쥐었다. 이제까지는 테라를 구하러 가는 길에 문제가 생길 까 봐 피를 보는 것만은 꾹 참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 되겠다. 이 싸움을 여기에서 더 끌다가는 본 경기에 들어가기도 전에 아예 몸져눕게 생겼다.
다음번 공격이 날아올 순간을 노려서 긋겠다고 마음먹은 민구는 가건물의 문 쪽을 등지고 설 수 있도록 스텝을 밟았다.
빠르고 적당히 죽지 않을 정도로 그어준 다음, 놈과 일행들이 피에 놀라 당황해하고 있을 때 풀숲으로 달아날 계산이었다. 사람이 죽지만 않으면 군인들도 그리 열심히 쫓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에헤이! 정정당당하게 싸워!”
등 뒤에서 뻗어오는 발차기!
민구는 깜짝 놀라 바람을 가르며 내질러 오는 발차기를 손바닥으로 쳐서 흘렸다. 그 바람에 칼을 뽑아 들 타이밍은 놓쳤다.
대체 누가?
민구가 등 뒤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웬 길쭉한 계집애 하나가 언제라도 제2차를 날릴 자세를 취하고 서 있는 중이다.
“야! 끼어들지 마! 이 새끼 존나 위험한 새끼라고!”
두 번의 경고성 펀치로 민구를 다시 가건물 안쪽으로 몰아넣은 보안관이 태권소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태권소녀도 지지 않고 맞서 소리를 질렀다.
“칼 빼려고 하니까 막아준 거잖아! 이 밥통아!”
“아우! 그걸 누가 몰랐을 것 같냐? 다 계획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놔둔 거야! 저 새끼가 뽑고 이쪽으로 그을 테니까 등짝을 차서 뻗게 하려고 했었다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놈 오른쪽이 시원치 않아서 그쪽 칼을 뽑으라고 유도한 건데!”
보안관은 민구가 칼을 그었을 방향과 각도까지 설명해 주며 유치하게 잘난 척을 해 댔다.
민구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모욕적인 순간이었다. 아무리 몸이 온전치 않다고는 해도 이런 놈에게 이런 취급을 받을 수는 없다.
“…너희, 그냥 다 죽어라.”
민구는 마세티와 쿠크리의 손잡이를 동시에 쥐었다. 가건물 밖으로 뛰쳐나가면서 마세티로 고릴라의 목을 치고, 쿠크리로 저 계집애를 그을 생각이었다.
나머지 놈들은 칼을 휘두르는 동안 알아서 피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죽이든 다치게 하든 군인들에게 잡히면 골 아파지는 건 매한가지다.
스릉―
마세티와 쿠크리가 칼집에서 절반 정도 빠져나오자 빠개진 벽 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아 칼날이 현란하게 번쩍인다. 바로 그때였다.
타앙―
고막을 흔드는 한 발의 총성!
민구는 동작을 멈추고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왼쪽 어깨 옆 판자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동그란 총알구멍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총알보다 더 날카로운 눈빛이 그의 심장을 찌른다.
“됐어, 거기까지.”
진우가 짧게 말했다. 민구는 목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 트레일러 안에서부터 서늘한 눈빛을 쏴대던 놈이다. 그 녀석이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민구는 조금 전의 경고 한 방이 일부러 빗나가게 쏜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놈은 이 좁은 가건물 안에 자기편이 함께 들어있는데도 아무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만큼 자신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라도 사람의 심장을 쏴서 뚫을 만한 배짱도 있다. 그러니 싸움은 승패가 갈린 거나 마찬가지다. 민구는 칼을 다시 칼집 안에 넣었다.
“보안관, 너도 밖으로 나와. 너무 과열된 것 같다.”
진우가 보안관에게 말했다. 아직 분이 다 풀리지 않은 보안관이 펄펄 뛴다.
“야! 너까지 왜 끼어들고 난리야, 이 새끼야! 이 칼잡이 새끼 편들고 싶어?”
“그런 게 아니야. 지금 상황을 봐. 꼭 다구리 놓는 것처럼 됐잖아. 저 사람은 혼자고, 우리는 너, 혜주, 그리고 지금 나까지 끼어들었어. 그러니까 승부를 보더라도 룰을 정해놓고, 깔끔하게 끝을 내란 말이야.”
“아니! 그러니까 내가 언제 끼어들어 달라고 부탁했냐고! 어우! 답답해!”
가슴을 치면서도 보안관은 순순히 가건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다구리를 놓는 모양새라는 게 그도 싫었다. 이런 식으로 싸우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니까.
그리고 흥분하는 바람에 잠시 잊고 있었는데, 지금 상황은 이기는 게 중요하지도 않다. 테라가 어디 갔는지를 알아내는 게 가장 급선무다.
“거기 뭐야? 총소리!”
철로 위쪽의 병력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내밀며 소리를 지른다. 하필이면, 좀비들과 대치하고 있지 않을 때, 이런 총소리가 나버렸다.
제니와 함께 달려온 밤톨이 얼른 기지를 발휘해서 외쳤다.
“오발입니다! 수풀 속에 좀비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람이었습니다!”
밤톨의 거짓 보고를 들은 장교는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에도 수천 마리씩의 좀비들이 모여들고, 또 죽어 나가는 곳이니만큼 민간인이나 아군을 쏘는 경우만 아니라면 오인 사격이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맥없이 물리느니,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라도 일단 쏴보는 게 낫다. 그것이 한 달 이상의 전투를 치르고 살아남은 이들이 얻은 교훈이다.
보안관이 가건물 밖으로 나가 버린 뒤, 민구도 천천히 그곳을 걸어 나왔다. 눈에 띄지 않고 싸우기 위해 들어갔던 곳인데, 싸움이 끝나 버렸으니 거기 더 버티고 서 있을 이유가 없었다.
시간이 넉넉한 상황도 아니고, 지친 몸을 채찍질해 가며 싸우는 거라 마음도 초조하다.
“거기에 서요.”
민구가 태연하게 걸어 나오자 산책로 위에 서 있던 진우가 당황해하며 총구를 겨눈다. 민구는 녀석을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 전, 그가 칼을 거둔 것은 승패가 갈렸기 때문이지, 녀석의 총알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쏘고 싶으면 쏴. 나는 멈출 생각이 없으니까. 대신에 빨리 결정해라. 조금 전 승부는 네가 이겼지만, 내가 몇 걸음 더 가까이 가고 나면 그때는 어떨지 모른다.”
민구는 차갑게 내뱉었다.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성큼성큼 걸었다. 당연히 보안관이 막아섰다.
얼―!
삼숙이가 사납게 짖는다. 이래서야 도돌이표처럼 다시 또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거다. 총구를 아래로 내린 진우는 삼숙이 녀석을 진정시키고 민구에게 말했다.
“싸우자는 게 아닙니다. 그냥 잠깐 이야기만 좀 하자는 거예요.”
“나는 별로 그럴 기분이 아니야.”
보안관과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깝게 마주선 채 민구가 말했다. 보안관이 사자처럼 낮고 굵게 으르렁거렸다.
“나도 너 같은 새끼랑 노닥거릴 마음 없어. 그러니까 한 가지만 말해! 테라 어디에 있어?”
“너한테 말해줄 것 같으냐, 고릴라? 그 계집애가 어디 있든지 너랑 무슨 상관인데?”
“잘난 척 작작해! 이 새끼야! 저 군인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테라는 엄청 센 사람이랑 같이 용산으로 갔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그런데 지금 이 꼴인 거야! 너 혼자 여기 와 있는 거라고! 너를 믿었던 저 군인한테 부끄럽지도 않냐? 나 같으면 쪽 팔려서라도 그렇게 잘난 척은 못할 거다. 테라 어디에 버리고 왔어?”
보안관이 밤톨을 가리키며 말했다. 민구에게도 뼈아픈 이야기이긴 하지만, 뭐하는 놈들인지도 모를 떨거지들에게 그녀의 정보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이놈들이 태양보다 나은 놈들이라는 보장도 없다.
“관심 끊어. 내가 해줄 말은 그것뿐이다.”
민구는 보안관을 밀치며 걸어 나가려고 했다. 당연히 보안관은 녀석의 팔을 잡아 꺾으려 했고, 민구는 또 고릴라의 인중을 향해 스트레이트를 뻗었다. 그러는 동안 보안관의 훅이 민구의 턱을 노린다.
휙― 팍― 탁―
주먹끼리 부딪치고, 옷소매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린다. 민구는 피가 터진 입술을 꾹 깨물고 뒤로 물러났다.
보안관의 공격을 막아낸 팔이 저릿저릿하다. 몸만 멀쩡했더라도 이렇게 밀리지는 않았을 텐데, 역시 이놈은 칼을 빼지 않고 상대하기 어렵다.
“…형님.”
제니, 유빈과 함께 서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밤톨이 슬프게 그를 부른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 민구도 몸에서 힘과 전의가 쪽 빠져나가 버리는 것 같았다.
밤톨의 그 짧은 한마디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의 믿음을 배신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고, 이 꼬맹이 놈들을 대번에 제압하지 못할 만큼 약해져 버린 자신의 비루한 몸뚱이가 싫다.
어쩌다가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채이고 원망을 당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건지…….
“좀 진정하세요. 이분들도 좋은 분들입니다.”
밤톨은 겁내는 기색 없이 다가와 민구에게 말을 건넸다. 그 말은 별로 참고할 대상이 되지 않는다. 밤톨이 참 괜찮은 놈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이 녀석의 사람 보는 눈은 형편없다. 민구 자신에게도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아무렇게나 했던 녀석이니까.
“특히 저 진우 요원이라는 분은 건대에서 사람들을 정말 많이 살렸다고 합니다. 저만 해도 어젯밤에 크게 신세졌고요. 그리고… 이 분들, 테라 씨를 정말 간절하게 찾는 이유가 있어요.”
밤톨의 말이 끝날 무렵, 빙 둘러싸고 서 있던 일행들 중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 더운 날씨에 후드 셔츠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수건으로 얼굴까지 가린 계집애였다.
“어어, 안 돼! 제니야, 가까이 오지 마! 위험해!”
보안관이 후드를 막아선다. 후드는 보안관의 팔에 붙잡힌 채 민구를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후드를 벗고 수건을 얼굴에서 끌어 내렸다.
“저… 제발 부탁드려요. 테라…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세요.”
그녀의 간절한 얼굴을 보며 민구는 약간의 충격을 느꼈다. 이 계집애의 이름도 잘 모르겠지만, 그녀가 테라와 각별한 사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잠실야구장의 전광판에 붙어있던 테라의 광고 사진… 그 옆에서 함께 웃고 있던 얼굴이다.
“저는… 이미 한 번 테라를 구하지 못하고 도망쳤어요. 이번에는 꼭 구하고 싶어요. 그래서… 저처럼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요.”
제니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사내의 입에서 그녀가 죽었다는 말이 나올까 봐, 그것이 너무 두렵다.
제발… 어딘가에 살아 있기를… 그리고 이 사내가 그 장소를 알려주기를… 제니는 바랐다.
“으음…….”
민구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온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이 계집애와 테라가 같은 팀이었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신뢰할 수 있을까?
진우라는 놈도 그렇고, 이 보안관이라는 놈도 그렇고, 정정당당한 걸 좋아하고 자존심이 어지간히 강해 보이지만… 그것으로 백 퍼센트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
그걸 잘 모르겠다. 배신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자라온 그에게, 낯선 이에 대한 신뢰라는 건 꽤나 어색한 개념이었다.
그때, 그들이 모여 서 있는 선착장 쪽으로 두 사람이 더 다가오는 중이었다. 조금 전, 다른 민간인들과 함께 두 번째 트레일러를 타고 도착한 임수정과 고 하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