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406화 (406/449)

1장 어벤저스 (1)

덜컹―

좀비 시체를 밟고 지나면서 장갑 트레일러가 크게 출렁인다. 이 차가 안락한 여행을 위한 편의 시설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장비라는 걸 다시 확인시켜 주는 순간이었다.

정말 승차감도 무지하게 후진데다가 그나마 붙어 있던 의자들도 다 부서지고 깨져서 엉덩이가 아프다.

“냄새 장난 아니네… 돼지 싣고 다녔던 트럭이라고 해도 믿겠다. 아우, 씨발. 토 쏠려.”

신입이 코를 막고 입으로만 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조금 과장은 있지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다. 장갑 트레일러 내부는 후텁지근했고, 기름 냄새, 땀 냄새, 그리고 멀미에 시달리며 사람들이 토해놓은 토사물 냄새 따위가 한데 뒤섞여 있었다. 그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쉬어도 고통스러워진다.

대신에 공간은 여유로웠다. 보안관 일행 여덟 명, 강 소위와 건대 소속 병사 셋이 탑승 인원의 전부였다. 그들은 지금 건대에서 용산까지의 직행로를, 원래 계획에 없던 이동 경로를 개척하기 위해 나선 길이다.

애초 군이 세웠던 계획대로라면 그들은 건대 쉘터에서 잠실로, 잠실 쉘터에서 재정비 후 다시 용산으로 이동했어야 한다.

하지만 잠실이 규모 여섯의 좀비들에 의해 점령당해 있는 지금, 예전에 세워뒀던 모든 계획은 폐기되어 버렸다. 그러니 그들만의 힘으로 새로운 경로를 뚫어내야 이동이 가능하다.

한강 산책로까지는 별문제가 없겠지만, 중랑천을 어떻게 건너느냐 하는 문제가 관건이었다. 교량에 자동차가 너무 많이 막혀 있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다.

“갑자기 걱정이 든 건데요… 이 가방 가지고 들어갈 수 있어요? 그 철로라는 곳이 어떤 구조일지는 모르겠지만, 입구에서 수색 같은 거 하지 않을까요?”

MP5 기관단총과 진우의 탄창들이 가득 채워진 가방을 두드리며 제니가 속삭였다. 그런 가방이 세 개나 된다. 유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우리 가방은 강 소위님이랑 저 군인들이 메고 들어가 줄 거야. 검색 통과한 다음, 안에 들어가서 가방 넘겨주시기로 했어.”

“그런 부탁을 미리 했다고요? 언제요?”

제니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걱정쟁이 다람쥐 유빈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응, 차에 태워 달라고 할 때, 그것까지 말을 맞췄지. 안 그러면 총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니까.”

“총… 그럼 진우 오빠가 들고 있는 저 총은요?”

“저건 용산철로에 도착했을 때 분해해서 가방 안에 넣을 거야. 가는 동안에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진우 사격 실력이 필요하니까. 물론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해서 한 번 들어가기만 하면 그 뒤에는 가방 검사 같은 일을 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것에 신경을 쓰기엔 다들 너무 바쁠 테니까…….

총기들을 챙겨 가야 테라를 만나서 데리고 나온 뒤에 무사히 코스트코까지 돌아갈 수 있다.

“이 해머는 어떻게 하지? 이것도 뭐라고 할 것 같은데…….”

보안관이 해머 손잡이를 두드리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그건 그냥 철로 들어가기 전에 수풀 사이에다가 숨겨놓으면 될 거야. 어디쯤인지 위치만 기억하면 나중에 집어 오면 되잖아. 사실 진짜 걱정해야 하는 건 따로 있는데…….”

유빈은 말을 다 맺지 않고 진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제의 주인공, 혀를 쭉 빼고 헥헥대던 삼숙이가 뻔뻔한 눈빛으로 유빈을 마주 본다.

아직 녀석의 머릿속에서 서열 변경은 없던 모양이다. 철교 입구에서 저 녀석을 데리고 들어가게 해 줄까… 그건 유빈도 강 소위도 잘 모르겠는 문제였다.

작은 개들을 안고 들어온 사람을 잠실에서 본 적이 있다고 들었지만, 저 녀석은 누가 봐도 작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급한 대로 대강 총 멜빵을 연결해서 목줄을 채워두기는 했는데, 그 정도 조처로 별말 없이 넘어가 줄지, 어떨지……

“테라 누나가 그렇게 멀리 내려가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빨리 데리고 나와서 코스트코로 돌아가게.”

태권소녀와 제니 사이에 앉은 규영이가 지친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이었다. 코스트코에서 나온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지도 잘 계산이 되지 않는다. 그 동안에 여러 군인들을 만나고, 아슬아슬한 사건들을 겪었다.

다 원래 계획에 없던 일들이고, 진이 쪽 빠질 만큼 힘이 들었다. 빨리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가서 테라와 함께 옥상의 풀장 속에 시원하게 몸을 담그고 싶다. 다 같이 맥주를 들어 건배를 하면, 세상의 주인이 된 기분일 거다.

“수정이 언니는 고 하사님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태권소녀가 중얼거렸다. 고 하사와 거의 대화를 하지 못했던 임수정은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중에 밤톨네 분대원들이 이동할 때 그편에 합류하기로 했다. 어쩌면 고 하사에게 잘 지내라는 인사를 남기는 걸지도 모른다.

“테라는 어떤 남자 좋아해?”

진우가 쑥스러워하며 물었다.

음, 잠시 생각해 보던 제니가 대답했다.

“잘 챙겨주는 사람 좋아해요. 다정다감하고, 세심하게 배려해 주고, 그러면서도 믿음직한 사람…….”

“나잖아!”

보안관이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는 과장되게 고개를 저었다.

“곤란한걸… 테라가 나한테 반하면 안 되는데…….”

“그런 일은 없지. 왜냐면 너는 세심함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니까.”

진우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친구들이 이미 한 달이 넘도록 제니나 태권소녀와 친해져 있는 상태에서 합류한 그였기에, 테라와의 만남은 조금 더 각별한 설렘이 있다. 제니를 제외하면 테라는 똑같이 처음 만나는 사이니까 함께했던 시간의 이점 같은 게 작용하지 않을 거다.

“얘, 토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삼식이가 신입을 가리키며 말했다.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얼굴이 파랗다. 아까부터 냄새 고약하다는 타령을 하더니, 도저히 못 참겠나보다. 입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 꼴이 금방이라도 게워 올릴 기세다.

“어이, 그러지 마! 좀만 더 참아! 이제 조금 있으면 경로 문제 때문에 한 번 멈출 거야. 그때 내려서 토해!”

강 소위가 깜짝 놀라 신입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적체되어 있는 악취만으로 이미 충분하다. 신입은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숨을 골랐다.

끼이익―

속도를 늦춘다 싶던 장갑 트레일러가 멈춰 섰다. 그러고는 장갑차장이 밖에서 트레일러 벽을 탕탕, 두들겼다. 서울 숲 부근에 도착한 모양이다.

“강 소위님! 잠시 의논 좀 드리겠습니다!”

장갑차장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강 소위와 병사들은 트레일러의 문을 열었다. 장갑차장이 중랑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교량이 몇 개 보입니다. 정차된 차량들이 있지만, 저 정도라면 장갑차로 밀어내면서 이동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조심하십쇼. 좀비가 한 마리 걸어가다가 이 부근에서 숲 안쪽으로 들어갔습니다.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하하, 좀비 정도야 뭐… 매일 보던 건데…….”

절룩거리며 트레일러 아래로 내려서던 강 소위가 센 척을 하며 웃어넘겼다. 그런 후, 곧바로 안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진우야, 같이 갈까?”

진우는 삼숙이와 함께 내렸다. 어차피 이 녀석 오줌도 뉘어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신입도 토할 장소를 찾아 급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저 교량 쪽으로 진입해서 다시 저쪽 산책로로 진입이 가능하겠나?”

강 소위와 장갑차장이 지도를 보며 논의를 하고, 한쪽에서는 신입이 꽥꽥 토해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진우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한강을 돌아보았다.

멀리 뒤쪽으로 보이는 자벌레 건물, 저기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꿈같은 일이다.

얼!

오줌을 갈기고 난 삼숙이가 숲 쪽을 향해 짖었다. 신입이 토하는 방향이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래그래, 냄새가 어지간히 구리지?”

얼―!

삼숙이가 한 번 더 짖었다. 이건 신입을 비웃는 게 아니다. 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이 짖어 대고 있는 방향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고 보니… 주변의 풀들이 꺾여 있다. 삼숙이가 달려들려고 하는 모양을 보면 화약 냄새나는 인간은 아니다. 진우는 의심스러운 덤불 속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뭡니까, 나와요.”

그의 말을 들은 군인들도 일제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잠시 후, 덤불 사이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쭉한 가방을 들고 있는 양복 차림의 남자였다.

“헉!”

열심히 토해대고 있던 신입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난다.

“아니… 뭐요, 당신?”

강 소위와 군인들이 물었다.

세상에, 이렇게 수상할 수가…….

남자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을 때, 장갑차에 탑승하고 있던 전투 병력 중 하나가 그를 알아보고 강 소위에게 말해준다.

“이분, 잠실에 계시던 분입니다.”

“진짜? 야, 너 암기왕이야? 잠실에 있던 사람들이 만 단위인데, 그 얼굴을 다 기억한다고?”

“그게… 예전에 흡연 구역에서 이 분이 여자 연예인이랑 같이 담배 피우는 걸 몇 번 봤습니다. 양복 입고 있는 거랑, 이래저래 좀 눈길을 끌던 사람입니다. 특히 얼굴에 저 흉터가 기억이 납니다.”

“그래? 이 병사 말이 맞습니까? 잠실에 계시던 분입니까? 그럼 일행들은?”

강 소위가 물었다. 민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제 탈출하다가 유람선이 가라앉는 바람에 다 뿔뿔이 흩어졌소. 다른 사람들 일은 모르겠소.”

“허! 그래도 살아남으시려면, 고생깨나 하셨겠네. 근데 왜 장갑차를 보고 피하셨습니까?”

강 소위가 물었다. 민구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괴물인 줄 알고 무작정 쏠까 봐.”

궁색한 변명인 것 같기도 하면서 동시에 말이 되기도 한다. 조금 전 장갑차장은 강 소위에게 이 숲 쪽으로 좀비가 걸어 들어가는 걸 봤다고 했었다. 사람이 돌아다닐 거라는 가능성 같은 건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던 거다.

“어쨌거나 이렇게 이 차량을 만나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강 소위의 눈길이 민구의 칼 가방에 쏠린다. 신원 파악이 끝났으니 소지품에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한 일, 민구는 솔직히 대답했다.

“내 칼이오. 개인 물품 보관소에 맡겨뒀던 건데, 어제 군인들이 돌려줬소.”

“그렇습니까? 그럼 이제부터는 저희들이 지켜 드릴 테니까 탑승 전에 칼은 일단 맡기시고…….”

“아니, 나는 전에도 그런 말을 들었소. 하지만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내 목숨은 내가 지켜야 했소. 이 칼로. 이제 그런 말은 믿지 않기로 했으니까 칼을 달라고 할 거면 그냥 가시오. 태워주지 않아도 됩니다.”

민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강 소위로서는 뼈아픈 이야기였다. 군인들은 어제 잠실의 수용자들을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 이 남자의 불신은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후우… 갖고 타세요. 대신에 칼을 꺼내시면 안 됩니다. 용산철로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강 소위가 말했다. 위험 물품이긴 하지만, 총을 든 군인들과 보안관, 게다가 진우가 함께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진우의 눈은 벌써부터 사내를 경계하는 중이다.

‘버리고 간다고 하기를 바랐는데…….’

민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장갑차를 타고 가면 아무래도 이동 시간은 단축되겠지만, 등의 물린 상처를 들키는 순간 그 몇 배의 시간을 잡아먹히게 될 거다.

전에 잠실로 갔을 때, 외상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 48시간 격리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 그는 그렇게 허비할 시간이 없고 또 칼을 압수당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장갑차를 일부러 피했던 건데……. 그런데 저 꿱꿱 토해 대는 놈과 개 때문에 다 들통이 나버렸다.

“후우~”

민구는 마지못해 트레일러에 올랐다. 일단 목적지까지 타고 갔다가 무슨 핑계를 대고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다. 강 소위가 그를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아, 이분은 잠실 생존자시고, 어제 이동 중에 일행들과 헤어졌다고 한다. 우리가 같이 모시고 갈 거야.”

친구들이 가볍게 목례를 한다. 민구는 마주 인사하지 않고 맨 뒤의 구석으로 들어갔다. 트레일러 내부의 어두운 조명에 눈이 익숙해졌을 때 즈음, 친구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민구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저거, 칼 아니에요? 저렇게 큰 칼을 가지고 타도 돼요?”

규영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민구의 칼 가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잡이가 저렇게 튀어나올 정도면 꽤나 큰 칼이다. 삼식이가 규영을 진정시켰다.

“괜찮아. 남이 뭘 가지고 있나 보기 전에 우리 쪽을 한 번 봐. 해머에, 총에… 우리가 훨씬 더 위험해 보일 거야.”

“근데… 아무리 봐도 낯이 익어… 저 흉터… 어디에서 봤지?”

보안관이 민구를 유심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새 양복을 입고 있는 놈. 수상하고 어딘가 기분 나쁘다.

민구는 여전히 놈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고슴도치 머리 고릴라… 언젠가 만나기만 하면 꼭 목을 따버리리라고 다짐했던 세 놈 중의 하나를 이런 데서 만나다니… 세상이 참 좁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놈에게 신경을 쓸 때가 아니다. 저런 사소한 일 때문에 목숨을 빚진 여자아이를 구하러 가는 길에 지장이 생기면 곤란하니까.

“야, 우리 저 사람 본 적 있는 거 맞지? 유빈아, 기억 좀 해봐.”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보안관이 유빈에게 물었다. 유빈도 가물가물하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다. 그리고 좋은 추억이 있는 인연도 아니었던 것 같다. 인상으로 보아서는 건달 생활하던 사람이니까, 보나마나 보안관이랑 치고받던 사이였을 거다.

공사를 하기 위해 이동했던 동네마다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니 기억한다는 게 무의미하다.

제니와 태권소녀는 다른 걸 궁금해하고 있었다.

잠실에서 어제 탈출한 사람…….

테라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군대던 제니와 태권소녀는 일단 말이나 꺼내보기로 했다.

“저기 혹시 테라 보셨어요? 어제?”

태권소녀가 민구에게 물었다. 테라라는 단어에 뜨끔하면서도 민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귀찮다는 표시를 노골적으로 하며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려 버렸다.

테라를 찾는 놈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이런 떨거지들까지 난리다.

“못 들으셨나? 저기요, 아저씨. 말씀 좀 여쭤볼게요. 혹시 어제 테라 보신 적 있어요?”

태권소녀가 다시 또박또박 큰 소리로 물었다. 민구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못 봤다고 하면 편할 테지만, 왠지 거짓말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어이, 아저씨. 사람이 물어보잖아요. 봤으면 봤다, 못 봤으면 못 봤다, 그거 한 마디 대답해 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보안관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았다. 죽여 버리고 싶던 고릴라가 끼어들자 민구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민구는 보안관을 노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리 다물어, 고릴라. 너랑 노닥거려 줄 기분이 아니니까.”

“뭐? 고릴… 아! 이 새끼 기억났다! 야, 너! 이 스크래치 만들었던 새끼지!”

보안관이 벌떡 일어나며 자신의 오른팔을 툭툭, 두드렸다. 자신을 고릴라라고 부르는 놈의 목소리! 그게 기억을 되살렸다.

그날 칼이 훑고 갔던 자리는 몇 달이 지난 지금도 가느다란 흉터가 되어 남아 있다. 물론 아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흉터다. 하지만 기분 나빴던 감정은 지금 이 순간, 아주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앉아, 보안관. 지금 여기에서 뭐하자고.”

유빈과 삼식이가 씩씩거리는 보안관을 만류하며 억지로 주저앉혔다. 잠시 발끈했던 보안관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모든 것이 다 엎어지고 뒤바뀐 세상. 예전에 사소한 원한이 조금 있다고 해서 그걸 다 갚으려 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보다 당장의 생존이 몇 천 배나 더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부하를 잔뜩 끌고 다니던 놈이 저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렸으니, 저놈도 속이 편하지만은 않을 거다.

보안관을 노려보고 있던 민구는 그 우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쏘아보는 매서운 눈길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놈인가?’

진우가 무표정하게 민구를 바라보고 있다. 미간을 찌푸린다거나 눈꼬리를 올린 것도 아닌데, 그 눈빛만은 서늘하기 짝이 없다. 민구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진우의 얼굴을 마주 봤다.

‘사람깨나 죽여 본 놈이군.’

저 보안관이라는 시끄러운 덩치보다 이쪽이 훨씬 위험하다는 걸 민구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러면서도 진우가 예전에 그 훈련소 앞 고기 집에서 만났던 놈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놈들의 일행 중에는 저런 눈을 가진 녀석이 없었다.

이후 트레일러 안은 불편한 침묵이 계속 이어졌다. 자동차들을 들이받고 밀어서 길을 터가며 어렵게 중랑천을 건넌 장갑차는 잠시 후, 용산철로에 도착했다.

좀비들이 신경 쓰여서 그렇지, 거리만 따지면 그리 멀다고는 할 수 없다. 강 소위는 병사들과 보안관 일행, 그리고 민구를 선로 아래에서 기다리게 한 뒤, 현장 책임자를 찾았다.

“건대 쉘터에서 왔습니다! 저희가 그쪽에서 지금 보호하고 있는 생존자만 700명 가까이 됩니다.”

강 소위는 장갑차장과 함께 상황을 보고했다. 보다 빠른 이송을 위해 장갑 트레일러 한 대를 더 투입하기로 결정이 내려지고, 보안관 일행과 민구를 내려놓은 장갑 트레일러는 본격적으로 민간인들을 이송하기 위해 다시 건대로 돌아갔다.

건대 생존자들의 이송이 끝나면 신체검사를 하고, 잠실 수용자들이 그랬듯 100명씩 끊어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받는 것으로 대강의 공식적 업무는 끝이 났다. 철로를 내려오기 전, 강 소위는 현장의 행정병들에게 물었다.

“혹시 지금 테라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나?”

“테라… 그 가수 말씀입니까?”

“그래. 잠실에서 이리로 왔다고 했어. 여기에서 계속 근무했으면 봤을 텐데.”

행정병은 서류철을 뒤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요 며칠 하루에도 수천 명씩 이동해 왔기 때문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이동일을 알고 계시면…….”

“어제야. 어젯밤에.”

“아… 그러면 서류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어제 오후까지는 100명씩 이동 희망자를 끊어서 이동을 시켰지만, 좀비들이 철책을 무너뜨린 다음부터는 마구잡이로 다 싣고 왔기 때문에… 누가 언제 왔는지 전혀 모릅니다. 어쨌든 어젯밤에 왔던 사람들은 이제 막 서울을 벗어나서 휴식하고 있을 겁니다.”

행정병은 서류철을 덮으며 대답했다. 강 소위는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선로 아래로 돌아왔다. 초조한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강 소위는 부담감을 느끼며 말했다.

“어젯밤에 이동된 사람들은 서류 만들 시간이 없었대. 하지만 그리 멀리 가지는 않았다고 하니까 금방 만날 수 있을 거야. 100명씩 입장하라고 하니까 트레일러가 민간인들 태우고 돌아오면, 너희가 제일 앞줄에 서서 들어가.”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려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제 다 왔으니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편,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위치에 서 있는 민구는 어떻게 하면 눈에 띄지 않고 태양 그룹 본사로 갈 수 있을지를 궁리했다. 사람들이 더 온다고 하니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다가 수풀 속으로 들어가면 될 것이다.

놈들의 건물은 용산 역에서 가깝다. 지금도 고층 부분이 눈에 보일 정도다.

크르르르릉―

잠시 뒤, 건대에서 수용자들을 싣고 돌아온 두 대의 트레일러가 도착했다. 탑승자 명단을 보고하기 위해 강 소위에게 달려왔던 밤톨이 민구를 보며 깜짝 놀라 외쳤다.

“어?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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