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여명 (2)
“여기에서 이야기하시면 안 들릴 것 같아요.”
친구들로부터 충분히 멀어졌다고 판단되는 거리까지 걸어온 뒤, 유빈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도 잔뜩 굳어 있다.
역시 이 친구는 눈치채고 있었다. 강 소위는 입술을 꾹 한 번 깨물고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한데… 어젯밤에 잠실 쉘터가 무너졌어.”
유빈은 미간을 찌푸렸다. 왠지 그 이야기일 것 같다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새벽에 갑자기 좀비들을 끌고 달려온 장갑 트레일러, 그리고 강 소위의 이 비통한 얼굴. 여기도 그렇고, 잠실도 그렇고… 많은 민간인들을 모아놓은 곳들은 전부, 이제 버티는 게 한계에 달한 모양이다.
“그러면…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요? 그러니까…….”
말을 고르려던 유빈은 금세 포기한 듯 톡 까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테라는요? 테라도 아까 저 장갑 트레일러 타고 온 사람들처럼 어디론가 도망친 건가요?”
“그걸 모르겠어. 잠실의 본부에서 테라 한 사람을 꼭 찍어 행방을 챙기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장갑차장에게 물어도 보긴 했는데, 하루 종일 수천 명을 태운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하냐고… 부끄럽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모르겠다는 것뿐이야. 그리고…….”
이제 진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강 소위는 한숨을 또 한 번 내쉬었다. 담배라도 한 대 시원하게 피운 뒤에 좀 말하고 싶은데, 좀비들이 올까 봐 중대 전체가 강제 금연하는 중이니 그럴 수도 없다.
“그… 태양 그룹으로 이송된 사람들도 꽤 되는 모양이야. 용산철로까지 가는 동안에 사망한 사람들도 많고… 그러니까 테라의 생사는 현재… 후우, 확인되지 않아.”
말을 하는 동안 강 소위는 자신의 뺨이라도 몇 대 후려갈기고 싶었다. 유빈과 친구들이 어떤 기분일지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냥 하루만, 딱 하루만 일찍 잠실로 갔더라면…….
총알을 갚아주고 싶다는 그의 뻘소리라든가, 내일 해 뜨면 가라는 바보 소리를 듣지 않고 어제 이른 아침에 출발해서 잠실에 도착했더라면… 그랬으면 벌써 테라를 구해내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원망이 들 수밖에 없다. 만약 자신이 유빈의 입장이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어휴우~”
유빈은 특유의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어제 떠났어야 했나…….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만일 어제 그들이 함께 싸우지 않았다면… 이곳에 있는 700명의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젯밤을 여기에서 보낸 건…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꽤나 의미 있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도왔으니까.
하지만… 테라의 행방을 모른다는 이야기를 제니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다른 무엇보다 그녀의 실망하는, 그러면서도 애써 그 실망의 기색을 지우고 태연한 척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테라가 면역자이고, 항체를 얻을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는 그 다음이다.
“바로 조금 전까지… 테라를 만나면 어떻게 해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유빈은 제니를 슬쩍 돌아보았다. 여전히 후드를 뒤집어쓰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녀. 테라를 구해서 코스트코로 돌아가면, 맛있는 찌개를 해줄 거라고 하며 웃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데…….
“아! 아야야! 아아!”
주차장에 설치된 야전 의무대. 소독약을 바르는 내내 김 이병은 뒈진다고 고함을 질러 댔다. 결국 고 하사는 치료하던 손을 멈추고, 놈의 얼굴을 지그시 노려봤다.
대단한 부상이라면 납득할 수 있겠는데, 그런 게 아니다. 그저 조금 긁힌 거다. 오늘 그가 치료한 모든 부상병 중 가장 경미한 부상이다. 그것도 전투 중에 당한 부상이 아니고, 전투가 다 끝나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다가 계단에서 굴러 다친 상처다.
“너, 용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밤톨, 어떻게 애 교육을 이렇게 시켰냐? 아무것도 없는 계단에서 왜 굴러, 구르기를…….”
고 하사는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밤톨에게 타박을 했다. 김 이병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대답한다.
“저 사람 쳐다보다가 그랬습니다.”
“누굴 쳐다봤다고?”
김 이병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던 고 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진우! 사격하는 거 봤구나. 그래, 뭐… 누가 보더라도 반할 만큼 멋있기는 하지. 눈이 안 간다고 하면 그게 거짓말이겠다.”
“어? 고 하사님, 저 사람 아십니까?”
밤톨도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고 하사가 그렇다고 하자, 밤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또 물었다.
“근데… 저 사람은 소속이 뭡니까? 장비는 군용 장비가 맞는데, 복장은 그냥 등산 나온 아저씨고… 같이 앉아 있는 일행도 별의별 사람이 다 섞여 있고… 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민간인에게 개인화기를 지급하셨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음, 저 사람들 중에 몇 명이 특수 요원이라고 하더라. 신분은 밝힐 수 없는데, 임무 수행 중에 여기를 지나다가 아주 크게 도와줬지.”
고 하사는 강 소위가 쳤던 뻥을 똑같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말하면서도 영 민망하다.
특수 요원이라니… 그런 걸 누가 믿겠나 싶다. 그런데 의외로 이게 통했다.
“우와~ 특수 요원! 쩐다… 어쩐지 멋있더라.”
김 이병은 거의 감동한 표정으로 진우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중얼거렸다. 고 하사는 김 이병을 옆으로 밀어내고, 다음 부상병을 불렀다. 이번에는 레이저 와이어를 치다가 베인 환자여서 부상 부위가 좀 컸다.
“이거 항생제니까 매일 한 알씩 먹어. 염증 생기면 영 골치 아프다.”
정성껏 소독을 끝낸 고 하사는 비닐 지퍼백에 알약을 넣은 뒤, 그 위에 매직펜으로 약의 종류를 적어줬다. 이래야 아무 약이나 막 집어먹지 않는다.
“저… 그 펜 좀 잠시 빌려도 됩니까?”
김 이병은 고 하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빌려도 되기는 하는데, 뭐하려고?”
“특수 요원한테서 사, 사인 받을 겁니다. 하이바에다가!”
김 이병은 얼굴에 홍조를 띠고 대답했다. 고 하사와 밤톨, 그리고 그의 분대원들 전체가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뭔 소리야, 이 미친놈아! 정신 차려! 무슨 연예인인 줄 알아?”
밤톨이 곧바로 만류하려 들었지만, 이미 김 이병은 발동이 걸렸다.
“안 될 거 없잖습니까? 저 사람 사인 받으면 저도 그 기를 받아서 사격 잘하게 될 것 같습니다! 백발백중!”
고문관다운 똘끼로 아무 소리나 씨부린다. 그런데 제 딴에는 그게 무슨 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어서 밤톨은 굳이 더 말리지 않았다.
다들 살고 싶어 하고, 그런데도 매일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러니 생존 확률을 높여보겠다는 안간힘을 나무랄 수는 없다.
“예의바르게 잘 말씀드려. 인사부터 하고. 알았지?”
밤톨이 그렇게 말했는데도 김 이병은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인 뒤, 진우 일행 쪽으로 다가갔다. 잠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까맣게 모르는 친구들은 출발할 준비를 다 마쳐놓고 강 소위와 유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후우우~ 후우우~”
긴장을 풀기 위해 몇 차례나 숨을 몰아 쉰 뒤, 김 이병은 하이바를 벗어 매직펜과 함께 내밀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사인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황당한 제안에 남들보다 먼저 반응한 것은 제니였다. 제니는 버릇처럼 하이바를 받아 들고, 매직펜 뚜껑을 열며 김 이병과 다정히 눈을 맞췄다.
“그러세요. 성함이…….”
그러다가 이내 자신이 지금 변장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인’이라는 단어에 기계적으로 반응이 나와 버린 것이다. 민망해하는 제니를 김 이병은 당황스런 표정으로 바라본다.
“저는… 저기 계신 특수 요원한테 사인 요청한 건데요…….”
“아… 네! 네!”
제니는 시선을 피하며 진우 쪽으로 하이바와 매직을 넘겨줬다. 이번에는 진우가 황당해졌다.
“저기… 무슨 오해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인해 드릴 만큼 유명인이 아닙니다…….”
‘우와, 슈퍼스타다!’를 연발하는 삼식이와 보안관을 조용히 시키고, 진우가 쑥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김 이병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유명인! 그런 거 상관없습니다! 요원님 사격 실력에 완전히 반했습니다. 사인이랑 그 옆에 딱 네 글자만 써주세요. ‘백발백중!’ 이렇게요! 그러면 저도 기를 받아서 사격을 잘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살아남아야죠!”
진우는 난감해하면서도, 하이바에 또박또박 이름과 백발백중이라는 글자를 써주었다. 한자로 쓰면 좀 더 멋질 것 같았는데, 아무리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봐도 ‘발’자가 잘 떠오르질 않아서 그냥 한글로 썼다.
그 별것도 아닌 여섯 글자를 쓰는데 손이 떨린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여기요. 사격 잘하시고 건강하세요.”
진우로부터 원하던 글자와 사인을 받아낸 김 이병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빨리 이 멋진 하이바를 쓴 자신의 모습을 밤톨 병장에게 보여주고 싶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헐레벌떡 뛰던 김 이병은,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오던 유빈과 어깨를 부딪쳤다. 그래도 마냥 좋아서 고개만 꾸벅 숙이고 밤톨이 기다리는 곳으로 뛰어왔다.
“그래그래, 멋있다. 우리 김 이병 좋겠네, 소원 성취해서.”
잠시나마 눈 좀 붙여보려던 밤톨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손을 휘저어 꺼지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런데도 김 이병은 오히려 바짝 달라붙어 그에게만 귀엣말을 했다.
“근데, 조 병장님. 저기 말입니다… 히힛, 제니가 있습니다.”
“뭐어?”
밤톨은 같잖다는 얼굴로 녀석을 노려보았다. 김 이병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진짭니다! 저기 저 여자, 저 수건 쓴 여자 말입니다. 저 여자, 제니입니다.”
김 이병은 누가 들으면 큰일 난다는 듯 목소리를 낮춰 은밀히 말하며 히죽거렸다. 밤톨은 녀석의 코를 쥐고 흔들었다.
“지랄하시네… 야, 내놓은 게 눈밖에 없는데 뭘 보고 그딴 소리를 지껄여? 남들이 들으면 너 비웃어, 이놈아!”
“아니, 조 병장님은 가까이에서 눈동자를 마주 보고 목소리를 들어도 제니를 못 알아보십니까?”
김 이병이 진지하게 물었다. 잠시 생각해 보던 밤톨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네 말이 맞아, 당연히 알아볼 거다. 근데… 왜 저렇게 꽁꽁 싸매고 있지? 야, 매직펜 내놔봐. 저기 분위기 어때? 사인 잘 해주디?”
“밝은 분위기였습니다. 다들 엄청 웃고 친절하고.”
“근데 넌 왜 제니 사인은 안 받았냐?”
밤톨의 질문에 김 이병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전 테라파지 말입니다!”
“그래? 그럼 나도…….”
밤톨은 하이바를 벗어 들고 제니를 향해 걸었다. 제니…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의 연인. 그녀가 바로 1미터 앞에 있다. 물론 테라도 좋지만 아까는 너무 긴박했다.
하루 만에 테라와 제니, 둘을 실물로 가까이에서 본다는 건 정말 흔치 않은 행운이다. 기념으로 사인 하나 정도는 꼭 받아야겠다.
“저… 실례합니다.”
밤톨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일행들의 분위기가 어째 아주 심각하다. 잘 웃는다고 분명히 김 이병이 그랬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말도 꺼내보지 않고 물러나기는 싫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지금…….”
제지하려고 일어났던 진우가 말을 맺지 못한다. 밤톨의 하이바 안쪽에 소중하게 붙어 있는 핑크 펀치의 사진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진우가 아니라 제니의 사인을 받으러 왔다.
어떻게 알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진우는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저 작은 사진 한 장이 지옥 같은 생활에서 버텨내는 데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진우는 아주 잘 안다.
그 역시 혼자서 여행을 하는 내내 하이바 안쪽의 핑크 펀치를 보며 매일 잠을 청했었으니까.
“아… 좀 곤란하신가요? 제니 씨가 계시다는 걸 듣고 왔는데…….”
밤톨은 민망해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제니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헬멧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아까 그 병사와 눈이 마주쳤을 때, 아차 싶더니 결국 정체가 드러난 모양이다.
테라가 실종된 건 슬픈 일이지만, 그 불행을 이 병사도 나눠 짊어질 이유는 없으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성함이…….”
하이바를 받아 든 제니가 갑자기 흡, 하고 울음 섞인 소리를 냈다. 안쪽에 붙은 사진, 자신의 옆에서 환하게 웃는 테라… 그걸 보는 순간, 애써 진정시켜 왔던 감정이 격해져 버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무슨 일이신지 모르지만, 마음 푸세요. 제 딴에는 좋아서 그랬던 거니까… 어젯밤에는 테라 씨를 봤는데, 오늘은 제니 씨가 여기 계시다고 하니까 그게 저한테는 대단한 행운인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사인은 안 하셔도 됩니다!”
“잠깐만요, 지금 뭐라고 했어요?”
보안관이 물었다. 밤톨은 멍하니 그를 보고 대답했다.
“사인은 안 하셔도 된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전에! 테라를 만났다고 했지 않았어요? 어젯밤에 만났다고?”
흥분한 보안관의 목소리가 커진다. 밤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젯밤에… 테라 씨는 잠실 쉘터에 계셨거든요. 아, 지금은 용산철로 어딘가로 이동하셨겠네요. 제가 본 게 이동하기 직전이었으니까.”
“테라, 이동했어요? 무사히 이동…했어요?”
제니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눈물이 그렁거리는 그녀의 눈에 홀려서 밤톨은 말을 더듬었다. 꿈에서만 보던 제니의 느낌과 꼭 같긴 한데, 얼핏얼핏 쉰내가 좀 난다.
“그, 그럴 겁니다! 거의 확실해요! 그… 같이 이동하시는 일행분 중에… 엄청 센 분이 있었거든요. 아… 물론 진우 요원님만큼은 아닙니다. 하여튼 그분이 무사히 지켜줬을 겁니다. 네!”
친구들의 표정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제니는 밤톨에게 기쁨의 사인을 해주며, 테라 이야기를 좀 더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사이 유빈은 강 소위에게 뛰어갔다. 용산철로를 향해 출발하는 첫 트레일러에 자신들을 태워 달라고 하기 위해서다.
이제… 만날 수 있다!
☆ ☆ ☆
철컹! 철컹!
그롸아아아―
철컹!
꾸에에에―!
소리가… 들린다. 귀가… 윙윙 울려 댄다.
감각은 그쪽에서부터 돌아왔다. 너무도 시끄럽고 부산스러워서 민구의 의식이 조각을 맞춰 나가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청각 다음으로 돌아온 감각은 시각이었다. 굳게 감고 있는 눈꺼풀 안쪽에 붉은 햇살의 기운이 비쳐 든다.
민구는 아주 천천히 눈을 껌뻑였다. 눈꺼풀과 안구가 아주 뻑뻑해서 눈을 반쯤만 뜨기까지도 꽤나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된 이후에도 의식은 아직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저 감각에 자극이 느껴졌을 뿐이다.
철창이 울리고… 볕이 비쳐 들고… 뭔가가 울어 댄다. 아주 시끄럽게…….
목이 마르다. 팔다리가 쑤신다. 그리고 머리는 깨지는 것 같다. 불편하다. 대리석 바닥에 닿아 있는 맨살에서 차가움이 느껴진다.
여기가… 대체… 어디지? 누가 저것 좀… 조용히 시켜라…….
“음!”
민구는 눈을 번쩍 떴다. 이 상황이 뭔지 조금이나마 깨달은 것이다.
괴물이 울어 대고 있다!
민구는 몸을 벌떡 일으켜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철컹! 철컹!
세 마리의 괴물이 셔터에 몸을 부딪쳐 오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셔터는 세차게 파도치며 요란한 쇳소리를 울려 댄다.
일단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민구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그는 우선 두 자루의 큰 칼부터 집었다. 하지만 아직도 여기가 어딘지조차 잘 모르겠다.
“이건…….”
바닥에 떨어져 있던 지도와 그것을 눌러놓은 커다란 버클을 보고 민구가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것이 기제가 되어 기억과 의식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기 시작한다.
“…살아남은 건가…….”
민구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환상과 함께 뒤섞여 버린 바람에 연기처럼 뿌예진 기억이 맞았다.
테라는… 여기에 없다. 그를 치료하기 위해 피를 나눠 주고… 그리고 태양 그룹 놈들에게 스스로 걸어가 잡혀 버렸다.
헬리콥터에서 내려 쏘는 환한 빛 속에 슬픈 얼굴로 서 있던 그녀의 모습…이 기억난 시점에서 민구는 이를 부득 갈았다.
“으으음! 쿨럭! 쿨럭!”
바짝 말라 있던 목에서 기침이 터져 나온다. 민구는 마세티로 땅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어젯밤 무슨 가게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쓰러졌던 곳은 작은 부동산 중개소였다.
민구는 입구에 놓여 있는 정수기 쪽으로 걸어갔다. 위에 꽂힌 물통에는 아직도 물이 반 이상 남아 있다.
콰창―!
그롸아아아! 끄롸악―!
셔터 너머의 괴물들은 한층 더 시끄럽게 치댄다. 민구는 놈들을 한 번 노려보고 나서 정수기의 노즐을 눌러 손바닥에 물을 받았다. 그러고는 정신없이 마셨다.
조금 곰팡이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급한 갈증을 속이는 용도를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푸우우!”
민구는 얼굴과 머리에 물을 뒤집어쓰고 피와 먼지, 그리고 아직도 달라붙어 있는 뜨거운 열기를 씻어냈다. 물줄기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니 의식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또렷해졌다.
얼굴의 물기를 훔쳐낸 민구는 거울에 자신의 등을 비춰보았다. 아직도 피딱지가 남아 있는 날갯죽지의 상처… 거기 흐른 피의 7할은 테라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피가 그를 죽음으로부터 꺼내왔다.
“젠장…….”
민구는 미간을 찌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의 말이 기억나 버렸다.
“만약, 아저씨가 깨어나시면… 구하러 와주시면 되잖아요. 그리고 같이 JL로 가요.”
이렇게 숨을 쉬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기는 하지만, 정말로 깨어났다. 그러니 이제 그녀를 구하러 갈 차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팔목의 미키마우스 시계는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족히 한 시간은 뻗어 있었던 모양이다.
민구는 천천히 손끝을 움직여 봤다. 손가락들이 뜻대로 따라주는 걸 확인한 후엔 팔을 돌려봤다. 그리고 허리와 다리를, 목을 움직였다.
머리통이 깨질 듯 아프다는 걸 제외하고는 모두 다 정상이다. 신기하게도…….
“JL…….”
민구는 테라가 남기고 간 버클과 지도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그걸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툭―
버클은 곧바로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트레이닝 바지의 주머니가 뜯어져 있다. 양쪽 다. 웃옷은 입고 있지도 않았으니 주머니도 없다.
민구는 일단 두 물건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런 후, 가방을 옆으로 비껴 멨다. 이제 나갈 시간이다.
“그만 치대, 이 새끼들아!”
민구는 오른발을 셔터의 틈에 끼워 넣고 힘을 주어 차올렸다.
차르르륵―
셔터는 빠르게 올라간다. 민구는 한 발 뒤로 물러나며 마세티를 치켜올리고, 쿠크리로 앞쪽을 비스듬히 겨냥했다.
그롸아아아―
셔터가 들리자마자 기다리던 괴물들이 달려든다. 민구는 세차게 마세티를 내휘둘렀다.
카작―!
무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가 마세티의 칼끝에 실려 괴물의 대가리를 매섭게 때렸다. 두개골이 박살 난 괴물의 시체를 훌쩍 피하며 민구는 쿠크리를 내질러서 두 번째 놈의 목을 깊숙이 그었다. 그런 후, 칼을 빼내며 뒤돌려차기로 덜렁거리던 놈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세 번째 괴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든다. 민구는 마세티를 세차게 내리그었다. 녀석의 목뼈와 쇄골이 부서지면서 대가리가 한쪽으로 기운다. 민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방비로 열린 채 꺾인 놈의 반대편 목을 쿠크리로 찍었다.
카각―!
근육과 힘줄이 잘려 나간 채 대롱거리는 괴물의 머리. 민구는 한 발을 내디디며 백핸드로 마세티를 휘둘러 놈의 뒷목을 잘라냈다.
툭!
데구루루루―
바닥을 구르는 괴물의 머리. 민구는 그 바로 옆을 걸어 가게를 빠져나왔다. 가게 두 개를 더 지났을 때, 남자 정장을 파는 옷가게를 만났다. 예전에 그가 입던 것만큼 비싸고 좋은 옷은 아니지만, 그래도 넝마가 된 트레이닝복 바지보다는 백배 나을 터였다.
쨍그렁―!
마세티로 유리를 깨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 민구는 마네킹이 입고 있던 여름 정장을 통째로 벗겨냈다. 그러고는 벨트의 버클을 테라가 남기고 간 것으로 바꿔 끼웠다. 웃옷 안주머니에 지도를 소중히 넣고 단추까지 잠근 민구는 다시 가방을 메고 걷기 시작했다.
와이셔츠에 닿자 겨드랑이의 상처가 가볍게 따끔거린다. 그 정도의 고통은 좋다. 뭘 해야 하는지 계속 상기시켜 주니까.
“여기에서 잡혀 갔군…….”
사거리를 지나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울트라마린 나이프를 발견한 민구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걸 주워 올려 목에 걸었다.
이미 선물했던 물건이니까 다시 주인에게 돌려줄 것이다. 이 칼의 날에 묻어 있는 피의 주인에게… 꼭 돌려줄 것이다.
민구는 테라, 그리고 젠킨스와 함께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한강 산책로로 나왔다. 다른 곳을 헤매다가는 길을 잃을 것 같아서, 아예 한강을 따라 걸어가는 편이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후우우~”
용산까지는 꽤나 멀었다. 적어도 10킬로미터 이상. 터벅터벅 걸어가는 동안 민구는 길가의 가게에서 꺼내온 생수로 갈증을 달랬다. 아직 새벽인데도 햇살이 어지간히 강렬하고, 기온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크르르르릉―
서울 숲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등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민구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장갑차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산책로를 따라 트레일러를 매단 장갑차가 달려오고 있다.
17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