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Fate (7)
“…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테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록 어두운 그늘 속에서 희미한 윤곽만을 바라보는 것이지만,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불안에 떨리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 민구는 힘겨운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모자라서… 익!”
민구는 돌연 말을 끊고 뒤돌아섰다. 뒤쪽에서 달려오는 괴물들… 대체 얼마나 더 있는 건지 모르겠다. 민구는 마세티를 집어 들고 놈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크롸악!
포효하며 달려드는 놈의 옆머리를 후려갈겼다. 그리고 튕겨져 나온 칼날을 바로 내질러 뒤에 선 괴물의 목에 박아 넣고 밀었다. 그사이에 옆에서 몸을 날린 괴물이 민구의 얼굴을 노린다.
서걱!
재빨리 내민 쿠크리의 칼날이 놈의 얼굴을 대각선으로 가르고 들어갔다. 침이 뚝뚝 떨어지는 괴물의 이빨과 민구의 광대뼈 사이는 불과 한 뼘. 그 거리를 유지시켜 주는 것은 쿠크리의 칼날뿐이다.
“으으음!”
민구는 가벼운 신음 소리를 흘리며 떨리는 오른팔을 앞으로 밀었다. 예전 같으면 가볍게 해치울 수 있었겠지만, 지칠 대로 지치고 옆구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지금으로서는 그게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롸아아아―
부들거리며 괴물과 대치하고 있는 민구를 향해 제4의 괴물이 달려든다. 민구는 두 번째 괴물의 목에 박혀 있던 마세티를 옆으로 확 잡아 빼며 네 번째 괴물의 턱을 후려쳤다.
텁―!
박살 난 네 번째 괴물의 아래턱이 덜렁거리고, 뭉텅 잘린 놈의 혓바닥이 하늘 위로 떠오른다. 놈이 중심을 잃고 잠시 고꾸라지는 틈에 민구는 바짝 달라붙은 세 번째 놈의 발목을 걷어찼다.
덜컥!
세 번째 놈의 몸이 휘청거리고, 쿠크리에 잘린 상처는 더 크고, 더 깊게 벌어졌다. 민구는 마세티를 휘둘러 녀석의 팔과 옆구리, 그리고 골반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잘린 팔과 부러진 갈비뼈, 그리고 꺾인 다리! 세 번째 괴물은 칼날 위로 엎어지다시피 하며 비틀거린다.
그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민구는 왼발을 내디디며 쿠크리를 든 오른팔을 뒤로 확 잡아 뺐다. 전력으로 밀어 대고만 있던 세 번째 괴물이 그의 바로 옆을 스치며 앞으로 넘어간다. 민구는 마세티를 높이 들어 놈의 뒷목을 내려쳤다.
썽둥―!
부패한 살덩이와 뼛조각이 잘려 나가고, 놈의 머리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사이에 다시 일어난 네 번째 괴물과 다섯, 여섯 번째 괴물이 동시에 달려든다.
도대체 얼마나 더 남은 거냐…….
민구는 얼굴을 찌푸렸다.
태양 그룹 헬리콥터에 탄 놈들이 이쪽을 터놓고 건대로 가는 길목만 지키고 있던 건 다 이유가 있는 일이었다. 제대로 정신이 박힌 놈이라면 절대 이 방향으로 가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윽!”
빙글 몸을 회전시키며 스텝을 밟던 민구가 인상을 찌푸린다. 하마터면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자신의 육체가 정확하게 명령을 따라줄 것이라는 확신이 사라진 지금, 과감한 동작을 하기가 점점 부담스럽다.
이까짓 대여섯 마리를 상대하는 게 이렇게 힘들어서야…….
그리고… 계속 흘러가는 시간이 그의 마음과 칼끝을 점점 더 무겁게 만든다. 배에서 물렸던 놈들이 변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었는지… 괴물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하면서도 민구의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그걸 계산하고 있었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분은 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이미 의식을 잃은 채 토해 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면… 이제 그에게 남은 시간은 단 몇 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삶의 마지막 몇 분이 이 냄새나고 썩어가는 괴물들과 뒤엉킨 채 흘러가고 있다.
남의 피로 칼을 흠뻑 적셨던 그날부터, 언젠가 칼을 쓰다 죽게 될 거라는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아직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저 여리디여린 계집애에게 해줘야 할 말이 있다.
찌이익―
괴물들이 휘젓는 손아귀에 걸려 민구의 트레이닝복이 찢겨 나간다. 민구는 너풀거리는 옷을 벗어버릴 틈도 없이 바쁘게 두 개의 칼을 휘둘러 놈들을 자르고 베었다.
쩍―!
마침내 여섯 번째 괴물의 관자놀이에 마세티를 박아 넣었다. 두개골이 반쯤 열린 뒤에도 괴물은 끝내 민구에 대한 살의를 버리지 못하고, 어떻게든 그를 깨물어보려 달려들며 아가리를 벌린다.
“으윽!”
민구는 놈의 덤비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주춤거렸다. 하지만 아직 져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민구는 중심을 바꾸며 마세티를 밀어 괴물을 바닥에 쓰러뜨렸다. 녀석의 옆머리에 반쯤 박혀 있는 마세티의 칼끝이 하늘에 떠 있다.
콱―!
민구는 마세티의 칼등을 힘껏 밟았다.
까드득! 뿌드득!
녀석의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려온다.
칵―
민구는 한 번 더 체중을 실어 마세티를 밟았다.
쩌억―!
마세티의 날이 놈의 뇌를 가르고 반대편 두개골까지 닿는다. 그제야 괴물은 버둥거리던 팔다리의 움직임을 멈췄다.
민구는 떨리는 손으로 놈의 대가리에서 마세티를 비틀어 뽑았다. 그러고는 넝마가 되어 너풀거리는 웃옷을 벗어 바닥에 던졌다.
“…으으음!”
태연하게 허리를 펴려던 민구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지럽다. 그리고… 온몸이 점점 뜨거워진다. 신호가 너무 빨리 왔다.
“…물렸군요.”
민구의 등 뒤에서 다가오던 테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민구의 날갯죽지 상처에서는 피가 흥건히 흘러나와 옆구리까지 흠뻑 적시고 있었다.
민구는 옆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말을 해주고 싶은 것들이 있는데… 혀가 뻣뻣해지고 입술이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는다.
“후우우~ 하아~”
테라를 향해 돌아서려던 민구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똑바로 서 있기가 너무 힘이 든다. 그는 상가 건물의 벽을 짚은 후에야 겨우 멈춰 설 수가 있었다.
“…가라. 내가… 앞으로 달려가면서 시선을 끌게. 그사이에… 너는 북쪽으로 가. 만약 개들이 쫓아오면… 이걸로 머리를 후려쳐.”
마세티를 건네주려던 민구는 잠시 입을 다물고 숨을 골랐다.
지이잉―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은 고통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다. 통증이 가라앉고 나서 민구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것보다는 더 버텨주고 싶었는데…….”
가게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민구는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턱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가. 조금 있으면 또 개를 풀 거다. 그건 내가 잡아줄 테니까.”
하지만 테라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민구가 목에 걸어준 울트라마린 나이프를 빼 들었다. 그런 후, 입술을 꽉 깨문 채 그걸로 자신의 왼팔 손목을 그었다.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것 같던 ‘여리디여린 계집애’는 그 순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피싯―!
그녀의 가느다란 팔목에서 피가 왈칵왈칵 솟아오른다. 그 날카로운 통증에 테라는 온몸을 부르르 떨어 댔지만 작은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민구가 더 큰 소리를 냈다.
“너! 왜 그런 짓을!”
“제발 움직이지 마세요…….”
테라는 피가 솟는 자신의 팔목을 민구의 날갯죽지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자신의 피가 더 잘 섞여 들어가도록 민구의 상처를 벌렸다.
“그런다고 해서… 피가 들어갈 리 없어! 뿜어져 나오는 힘이 몇 배나 더 세다고! 너 지혈이나 해!”
민구가 그녀를 밀쳐내려 들었다. 하지만 테라의 의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난 상처예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세요! 제발 좀 자세를 낮추고 움직이지 마세요, 아저씨.”
그녀는 민구의 옆구리에 바짝 달라붙은 채 오른손에 든 칼로 민구의 물린 자국 안쪽을 한 번 더 그었다. 그러고는 거기에 자신의 상처를 밀착시켰다.
왈칵! 왈칵!
두 사람의 상처에서 솟아오른 피는 민구의 뜯겨 나간 피부 안쪽에 고인다.
테라도 이것이 정말로 이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인지에 대해 아무런 자신이 없었다. 젠킨스는 널 키드의 혈청을 주입하면 물린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고만 했지, 상처 난 곳에 생피를 가져다 대는 경우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자신의 혈액형이 O형이니까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다 수혈을 할 수 있다는 것만 안다.
혈청과 이렇게 흘러나온 피가 어떻게 다른 건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의 등을 피범벅으로 만들어놓은 피들이 정말 혈관 안쪽으로 들어가기는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사람의 말처럼, 이 모든 짓은 그냥 헛수고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정도도 해보지 않고, 이 사람에게 안녕을 고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만둬… 빨리 지혈이나 해. 너 그러다가… 쓰러진다. 나는… 이렇게까지 해서 살려야 할 만큼… 하아~ 하아… 가치 있는 인간…이 아니야.”
민구가 점점 굳어가는 혀를 간신히 움직여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미 그의 몸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 테라의 팔을 떼어낼 수도, 몸을 벌떡 일으킬 수도 없다. 팔다리에 천 근짜리 추가 달려 있는 것처럼 한없이 무겁고 아득하다.
귀에 전해져 오는 발음이 이상하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인데도 꿈속처럼 멀고, 메아리가 울린다.
“생명의 은인도 구하지 못한다면, 제 피야말로 아무 가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저씨, 꼭 사셔야 돼요.”
테라는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했다. 출혈이 계속되면서 그녀의 팔과 몸은 점점 더 차가워지고, 그와 반대로 민구의 몸은 불덩이처럼 끓어올랐다.
테라는 자신의 상처에서 더 이상 피가 콸콸 흐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한 번 더 그어야 할까?’
테라는 울트라마린 나이프를 쥐고 잠시 망설였다. 지금까지 그녀의 피가 민구의 몸에 얼마나 들어간 건지, 어느 정도 양의 피가 들어가야 면역 체계가 발동하게 되는 건지 전혀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흘려도 되는 피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지 못한다. 모든 게 다 불명확하고, 그래서 두렵다.
투투투투투투― 후우우우우웅―
그녀가 나이프의 칼날을 다시 들었을 때, 동쪽에서 새로운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가 커다랗게 울려왔다. 그리고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시게 강한 빛이 보였다.
지금까지 다른 헬기들에서 비추던 라이트와는 수준이 다른, 밝은 빛이다.
테라는 나이프를 칼집에 넣고 일어섰다. 새로 등장한 헬리콥터의 서치라이트가 선로 주변과 인근의 건물들을 찬찬히 훑으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여기에서 더 시간을 끌거나, 그를 내버려 두고 혼자서만 달아난다면 민구는 저들에게 발견돼 처형당할 것이다.
그건 싫다. 어차피 그녀 혼자서 달아나지도 못한다. 개들은 그녀보다 빠르고 강하다. 그러니 한 사람만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 쪽을 택해야 한다.
“이거… 여기에 두고 가요.”
낑낑거리며 민구의 두 다리를 가게 안쪽으로 밀어 넣은 테라가 민구의 옆에 젠킨스의 버클과 지도를 놓으며 말했다.
“크흐으~ 으으으~”
민구는 심하게 앓는 소리를 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온통 핏발이 선 그의 눈과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의 몸이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싸우고 있는 건지 짐작이 된다. 오직 민구의 눈동자만이 그가 아직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다.
그의 눈동자는 테라에게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는 중이다.
“만약, 아저씨가 깨어나시면… 저를 구하러 와주세요. 그리고 같이 JL로 가요.”
테라는 담담하게 말했다. 진심이었다. 그를 죽음으로부터 막지도 못할 정도라면… 자신은 구세주도, 뭣도 아닌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젠킨스가 뭔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때는 또 물리시면 안 돼요. 제 피가 효력이 있는 건 한 번뿐이랬어요.”
혹시 또 올지도 모르는 좀비들로부터 민구를 보호하기 위해 가게의 셔터를 내리며 테라가 말했다. 만약 그가 살아난다면, 아나필락시스 진이 될 확률이 월등히 높다.
딱 한 번의 면역. 그 뒤로는 항체가 쇼크를 일으켜 사망하게 된다.
드르르륵―
셔터가 내려지고, 테라는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힘겹게 왔던 길을 되짚어 달려갔다. 그에게서 멀어져야 한다.
“이쪽에 있는 게 확실해? 어떻게 알아?”
1호기에 타고 있는 오 박사가 무전기를 잡고 물었다. 3호기는 곧바로 대답했다.
― 치이익, 개를 한 마리씩 보냈는데,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치익, 그렇다고 뛰어다니는 불빛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치이익.
“그래? 그렇다면 맞는 것 같구만. 어이! 저길 비춰봐! 좀 더 가까이 가보라고!”
오 박사는 대로의 고가선로를 가리키며 1호기 조종사에게 명령했다. 1호기 조종사는 고개를 젓는다.
“베슬이 달려 있어서 저런 데는 가면 위험합니다. 2호기 추락한 거 보셨잖습니까? 베슬이 걸려서 갑자기 확 중심이 기울면, 끊어낼 새도 없이 떨어집니다.”
“아, 맞다! 베슬! 그것들을 처리해야지!”
조종사의 말이 오 박사에게 그물 베슬 안에 들어 있는 네 명의 군인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차피 테라의 신병을 확보하고 나면 그놈들은 영 껄끄러워지는 존재일 뿐이다.
함께 있는 민간인들까지 싹 다 죽여야 한다는 건 아쉽지만, 이쯤에서 미리미리 처리하고 가는 편이 낫다.
“어이! 2호기 쪽으로 다시 한 번 가! 고도는 아까보다 훨씬 올리고!”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종사는 헬기의 방향을 틀었다. 아직도 타닥타닥,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는 2호기 잔해의 상공에 도착했을 때, 오 박사가 말했다.
“베슬 끊어.”
조종사는 깜짝 놀라 오 박사를 돌아보았다. 베슬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스무 명이 넘는데, 이 높이에서…….
“…건대가 바로 근처인데요. 혹시 군인들이 이 근처를 지나기라도 하면…….”
“그러니까! 여기로 오라고 한 거야. 저기 우리 헬리콥터도 추락했잖아. 누가 보더라도 괜찮아. 아니, 오히려 좋지. 무리하게 구조하다가 다 같이 사망한 걸로 보이니까 의심 받지 않을 거라고! 뭐해? 빨리하고 선로로 돌아가.”
오 박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조종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베슬과 헬기 케이블을 연결한 전자석의 전원을 끊었다.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던 그물 베슬은 곧바로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으아아아아아!”
베슬 안에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떨어져 내리는 동안 절망적인 비명을 질러 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들은 몇 초 만에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끔찍한 소리가 났다.
“다시 선로로 가자. 근데… 혹시 살아남는 놈은 없겠지?”
참혹하게 뒤엉킨 시체들과 그물 베슬을 내려다보며 오 박사가 물었다. 조종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60미터 상공에서 그대로 추락했는데…….”
그렇게 조종사가 오 박사의 광기에 소름 끼쳐 하고 있을 때, 무전기에서 흥분된 목소리가 울려왔다.
― 치익, 테라 확보! 테라 확보! 치이익, 반복한다! 테라 확보! 치이익.
“엉? 어, 어디야! 어디야?”
흥분한 오 박사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와 함께 그를 태운 헬기는 3호기가 보고한 위치를 향해 날아갔다.
“테라! 테라!”
서치라이트 때문에 대낮처럼 밝혀진 도로 위에 까만 미니 원피스를 입은 테라가 서 있다.
불빛이 눈부신지, 그녀는 한 손을 들어 눈에 그늘을 만들어보려 애를 쓴다. 하지만 어딘가로 달아나려는 기색은 없었다.
셰퍼드를 앞세운 쉐도우 실드 대원들이 그녀의 주변으로 빠르게 접근하는 중이다.
“내려! 당장 여기에 내리라고!”
오 박사는 발정 난 돼지새끼처럼 고함을 쳐 댔다. 조종사는 위험을 감수하고 자동차들 사이에 헬리콥터를 착륙시켰다.
이 길고 위험했던 밤이 다 지나간 이 상황에서 혹시라도 성질을 건드렸다가 목숨을 걱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테라! 테라 씨!”
헬기의 문을 열고 뛰어내린 오 박사는 광기가 가득한 웃음을 터뜨리며 테라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의 왼손이 피투성이라는 것을 발견한 오 박사는 지혈을 위해 자신의 허리띠를 풀며 쉐도우 실드 대원들을 밀어 쳤다.
“비켜! 이 새끼들아! 피가 났는데 뭘 하고 있어?”
그녀에게서 울트라마린 나이프를 압수한 뒤에도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쉐도우 실드 대원이 소리쳤다.
“오 박사님! 아직 접근하시면 위험합니다! 또 한 놈이 있었는데 아직 그놈의 위치가…….”
“죽었어요. 개랑 싸우다가…….”
테라는 얼른 말을 지어냈다. 혹시라도 민구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이놈들이 수색을 계속 할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오 박사는 그런 것 따위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래요! 죽었군요! 아쉽네요! 하하하하! 테라 씨! 출혈이 커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제가! 아주 말끔하게 치료해 드립니다! 자, 저와 함께 갑시다! 하하하하하! 아아, 정말 아름답군요! 사랑합니다! 하하하하!”
허리띠로 테라의 팔을 졸라 묶은 오 박사가 손뼉을 치며 몸을 베베 꼰다. 이성을 잃은 미친놈처럼 아무 말이고 나오는 대로 마구 씨부리는 꼴을 보니 기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 모양이다. 테라는 쓸쓸히 시선을 바닥에 떨궜다.
☆ ☆ ☆
그 모습은 민구에게도 보였다. 환한 빛이 만들어낸 둥근 원 속에 테라가 서 있다. 그리고 악마 같은 놈들이 다가와 그녀를… 헬기에 태운다. 그녀의 슬픈 눈동자가 눈물로 젖어 있다.
너무도 선명한 광경이었다. 민구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의 환상이었다. 그가 고통에 휩싸인 채 경련하고 있는 가게와 테라가 서 있는 곳 사이에는 수십 대의 자동차와 여러 개의 선로 기둥, 그리고 몇 채나 되는 건물의 벽이 버티고 있었다. 도저히 볼 수 없는 각도와 거리다. 그러나 민구는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으으으음! 이 개새끼들!’
민구는 분노로 가득 찬 욕설을 내질렀다. 물론 그 역시 그의 의식 속에서만 터져 나온 사자후였다.
실제의 그는 고열에 시달리며 차디찬 대리석 바닥에 엎드린 채 미동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릅뜬 눈에는 현실과 환상이 빠르게 교차하며 비쳐졌고, 때로는 기억에서조차 지워져 있던 희미한 옛일들도 그 사이에 번쩍이며 끼어들었다.
번쩍!
환상은 그를 열다섯이 되던 해의 봄으로 데리고 갔다.
번쩍!
그때 그는 고아원의 애물단지였다. 원장은 이미 그전부터 민구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번쩍!
그렇게 큰 공연장은 처음이었다. 자줏빛 커튼에 부드럽고 푹신한 좌석! 꿈속의 궁전처럼 호화로웠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고아라는 사실을 잊고 다 같이 즐겁게 노래합시다! 여러분을 위해 저 멀리 미국에서 재미교포 어린이 합창단도 와 주셨습니다!”
개 같은 사회자 새끼가 소개를 할 때부터 이미 배알이 틀어졌다. 고아들만 잔뜩 모아둔 공연장이 싫었다. 민구는 어린이날 선물이라고 받은 과자 상자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번쩍!
더럽게 잘 차려입은 애새끼들이 차례차례 무대에 오른다. 부러운 꼬마 새끼들! 사람들의 박수 소리! 민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야이, 개새끼들아! 좆까! 동정하지 말라고!”
민구는 무대 근처까지 달려가 사회자와 애새끼들을 향해 꼬깃해진 과자 상자를 집어 던졌다.
번쩍!
하필이면 과자 상자는 개중에서도 어린 계집애에게 맞았다. 까만 머리의 바짝 마른 계집애가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린다. 바로 옆에 서 있던 같은 또래의 계집애가 민구를 노려보았다.
번쩍!
민구는 붙잡으려는 사람들을 피해 극장 밖으로 달려 나왔다. 마음 한 구석에 후회가 있었고, 그보다 더 큰 부분에서는 까만 머리 계집애에게 미안했다.
너를 맞추려던 게 아니었어…….
번쩍!
아주 아름다운 여자와 부딪쳤다. 바닥에 뒹군 민구를 향해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니?”
그녀에게 안겨 울고 싶었다. 그렇게 예쁜 여자는 처음이었다. 내 엄마가 이렇게 생겼으면 하고 늘 기도하던 그런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아들이 있었다. 그녀를 닮아 너무 예쁜 진짜 아들이…….
“삼식아, 너도 일어나.”
여자가 자기 아들을 돌아보는 순간, 민구는 견디지 못하고 그놈을 밀치고 다시 뛰었다.
으아아아아아! 다 죽어버려!
번쩍!
엉망으로 두들겨 맞은 민구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렇게 죽는 거구나…….
역시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다. 홧김에 이 동네 건달들을 건드리는 게 아니었는데…….
번쩍!
“살려줄까?”
쥐 상을 한 남자가 물었다. 그는 민구의 손에 짧은 칼 한 자루를 쥐어 줬다.
“다방에 들어가면 입구에 뚱뚱한 남자 앉아 있어. 그 사람 찌르고 와. 그러면 살려주지.”
번쩍!
번쩍!
번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