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Fate (6)
비굴한 종이 되겠다는 대사를 잔뜩 늘어놓은 뒤, 육만배는 오 박사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만하면 충분히 어필을 했으니 긍정적인 반응을 예상하는 중이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허겁지겁 뛰어 올라온 대원이 숨을 헐떡이며 오 박사에게 보고를 했다.
“오 박사님! 3호기가 급하게 보고를 해왔습니다! 2호기가! 2호기가 추락했답니다!”
“뭐?”
오 박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개들이 사라졌다고 했던 게 그가 2호기로부터 들었던 마지막 보고였다. 여기에서 그가 허탕을 쳤으니, 아마 그쪽이 제대로 추적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임무라는 게… 고작 세 명을 쫓는 거였다.
바짝 마른 여자애, 비대한 거구라서 100미터도 못 뛸 것 같은 중년 남자, 그리고 또 한 명이 있었지만, 그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총 한 자루 없는 민간인일 뿐이다.
그런데… 헬리콥터가 추락했다고? 구조 요청 한 번 남기지 않고?
“…대원들은? 대원들은 어떻게 됐어?”
충돌 사고의 가능성을 떠올린 오 박사는 대원들의 안부를 물었다. 1호기 조종사도 계속해서 건물들 사이로 날아다니는 일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였었다. 그러니 2호기도 건물에 부딪쳐 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대원들이 안전하다면 그의 추리가 맞는 거다. 하지만 보고하러 온 대원은 고개를 저었다.
“생존자는 없답니다. 전원 사망이라고…….”
“헬리콥터 안에 동승하고 있었나?”
“아닙니다… 시신이… 외부에 있답니다. 시신들 상태로 보면 전투 중에 사망한 것 같다고… 아, 그리고… 찾으시던 뚱뚱한 백인 남자 말씀입니다만…….”
“그래! 찾았나? 젠킨스!”
오 박사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돈다.
젠킨스! 위대한 사이코, MJ. 그의 연구 능력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그까짓 헬리콥터나 대원 몇 놈쯤 죽은 건 아까울 일도 아니다.
그의 목소리 톤이 올라갈수록 대원의 목은 움츠러들었다.
“그게… 찾기는 했는데, 사망 직전이랍니다. 무너진 건물에 깔려서…….”
끄으으으~!
오 박사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눌러 참아보려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결국 1초도 지나지 않아 폭발했다.
“뭐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성을 완전히 잃은 오 박사는 어린아이처럼 펄쩍펄쩍 뛰며 발을 굴러 댔다. 그의 성질을 아는 대원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후아~ 후아~”
오 박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취했어야 할 두 보배 중에 하나가 날아갔다. 그러나 아직 남아 있는 보배가 훨씬 더 높은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기는 하다.
쓰기에 따라서는 세상의 절반을 그의 손에 쥐어줄 수도 있는, 그런 보배. 그러니 지금은 성질만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래서… 지금 3호기는 뭐하고 있대?”
“건대로 가는 길목만 막고 대치 중이랍니다. 아마 2호선 선로 아래나, 그 부근에 숨어 있을 것이라 추정하는 모양입니다.”
대원이 대답했다. 오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잘한 결정이었다. 괜히 동료들의 시체를 보고 흥분해서 설치거나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제 그가 합류한 뒤 1호기에 부착된 서치라이트로 찬찬히 살피고 몰아 잡으면 된다.
“가자! 젠킨스가 거기에 있었던 거라면, 테라도 근처에 있겠지!”
오 박사는 광기 가득한 눈을 번뜩이며 몸을 돌렸다. 쉐도우 실드 대원들이 육만배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것들은 어떻게 합니까?”
응? 오 박사는 육만배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기동이의 커다란 덩치에 머문다.
저… 개새끼가 현혹시키지만 않았어도!
그랬더라면 그 자신 역시도 2호기에 합류했을 테고, 압도적인 인원을 동원할 수 있었을 테니 젠킨스의 사망보고를 듣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몇 초가 아까운 상황이기는 하지만, 일을 망쳐버린 놈들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냥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았다.
“권총 좀 줘봐. 쏴 죽여 버리게.”
오 박사는 그의 옆자리에 서 있던 조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장은 머뭇거림도 없이 권총을 뽑아 그에게 쥐어 줬다.
“쏠 줄 아십니까?”
“몰라… 이거 당기고 쏘면 되나?”
“일단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떼셔야 합니다. 다음에 총구를 위쪽으로 돌리시고 슬라이드 뒤로 당기셔서…….”
조장과 오 박사가 자동권총 사격 방법에 대해 평온한 어조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육만배와 기동이, 그리고 두섭이는 필사적으로 애원을 해 댔다.
“으으으! 안 돼! 안 돼!”
“선생님! 저희가! 저희가 궂은일 다 해드리겠습니다! 뭐든지! 뭐든지 명령만 내리시면 하겠습니다! 점잖은 체면에 하시기 껄끄러운 일들! 그런 거 전문입니다!”
말만으로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는 기동이와 육만배의 등짝에 3단봉 매질이 쏟아진다.
“이이이익! 개새끼들아!”
기동이는 어깨와 등의 통증을 참고 벌떡 일어났다. 플라스틱 케이블로 발목과 팔목이 묶여 있지만, 커다란 덩치와 힘만으로 주변의 쉐도우 실드 대원들을 밀어 치고 들이받아 가며 놈들과의 거리를 벌렸다.
“어쭈, 어쭈… 이제 방아쇠를 당기면 된다고?”
이미 겨냥을 마친 오 박사가 기동이의 발버둥을 보고 같잖다는 듯 혀를 차다가 조장에게 물었다. 그 말은 기동이에게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이야아아!”
두 발을 모아 뛰어오른 기동이가 기합 소리와 함께 복도 뒤쪽의 창문을 들이받았다. 여기가 3층이라는 생각도, 손발이 다 묶였다는 계산도 없었다. 일단 달아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기에 무작정 몸을 날린 것이었다.
쨍그랑―!
유리가 박살 나고, 100킬로그램이 훌쩍 넘는 기동이의 몸이 창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그는 손발이 묶인 채 유리 조각들과 함께 3층 아래의 콘크리트 도로를 향해 곤두박질쳤다.
퍼억―
수박이 깨지는 것처럼 둔탁한 소리.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다. 설마 이 정도 높이에서 몸을 던지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뭐야, 이거… 아주 개판이네. 죽었어?”
오 박사는 권총을 겨눴던 손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한심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창가에 서서 아래쪽으로 플래시를 비춰보던 쉐도우 실드 대원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
“진짜?”
오 박사가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이며 창가로 다가왔다. 기동이가 꿈틀거리며 기어가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유리 조각이 박혀 피범벅이 된 얼굴, 반대 방향으로 꺾인 팔꿈치, 발목이 돌아간 다리…….
그런데도 도로 바닥을 피로 물들이며 기고 있다. 딴에는 대단하다.
“하하하! 저 새끼, 뭔 생각이지? 하하하!”
놈이 그렇게 기어가려고 애쓰는 이유가 살아남겠다는 의지임을 알기에, 그게 웃겼다.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황인데도…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짐승이다.
오 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 재미있는 건, 놈이 기어가고 있는 위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좀비들 대여섯 마리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머리끝까지 치솟아 있던 화가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다.
“생각이 바뀌었어! 어이, 저 새끼들도 마저 던져 버려! 살고 싶은 사람들이니까 기회를 줘야지.”
권총을 조장에게 넘긴 오 박사는 그 명령을 남기고 계단을 내려갔다. 쉐도우 실드 대원들은 먼저 두섭이의 양팔과 다리를 잡고, 앞뒤로 크게 흔들다가 유리창을 향해 집어 던졌다.
“안 돼! 안 돼! 제발요오오오― 으아아아!”
두섭이는 긴 애원의 메아리를 남기며 유리창을 들이받은 뒤 아래로 떨어졌다.
퍼억!
녀석은 몸을 둥글게 만 채 척추부위로 떨어졌다. 녀석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오고 묶여 있는 다리가 부르르 경련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 허리 신경이 끊어진 모양이다.
“자, 다음! 후딱후딱 해치우고 가자! 밤새겠다, 좀비들도 오고 있는데.”
두섭이의 부상을 확인한 쉐도우 실드 대원들이 육만배의 팔을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이런 미친 일이…….
육만배는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이 저 좀비들을 이 태양 놈들에게 넘겼었다. 이제는 이 태양 놈들이 자신을 저 좀비들에게 넘기려 하고 있다니, 이런 기막힌 운명이…. 육만배는 몸을 채며 필사적으로 떠들어 댔다.
“아니! 잠깐! 잠깐만! 테라라고 했지! 나도 테라 알아! 그년 친구도 잘 알고! 임수정이라고 있어! 내가 잡아줄게! 내가 할 수 있… 끄으윽!”
육만배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몸부림을 쳤다. 말을 하고 있는 동안 날아온 3단봉에 이가 부러지고 입술이 터졌다. 그의 입안은 금세 비릿한 피로 가득 찼다. 곧이어 어깨와 머리에 매질이 가해졌고, 육만배는 무방비로 허물어졌다.
“아, 그 새끼 말 많네. 씨발, 이렇게 늙지 말아야지. 추하다.”
육만배의 입을 때린 대원이 바닥에 침을 뱉고 그의 발목을 잡아 올렸다. 육만배의 한쪽 팔을 잡아 올린 대원이 웃는 낯으로 중얼거린다.
“나, 근데 이 새끼 알아. 너희는 기억 안 나냐? 예전에 철거 용역 부르면, 우리가 경찰들 지키고 있는 동안에 만배파 새끼들이 와서 싹 다 쓸고 갔었어. 그것들 대빵이 이 새끼야. 봐, 누더기처럼 되기는 했는데, 양복도 존나게 좋은 거고. 크큭.”
“그러든가 말든가…….”
반대쪽 팔을 잡은 대원이 관심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녀석은 육만배의 팔을 아프게 꺾어 들어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때야 법이 무서워서 이런 허접한 새끼들도 부르고 한 거지. 지금 이까짓 것들이 뭐에 필요해? 어차피 다 우리 마음대로 하면 되는데.”
너무도 정곡을 찌른 말!
그제야 육만배는 자신의 주제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불편하게 옭아매는 법 같은 것만 없으면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자신에게는 그럴 만한 자질과 배짱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실 그는 법의 허술한 틈바구니에서 기생하며 덩치를 키워온 기생충에 불과했다. 아무도 차마 하지 않으려는 일들을 뻔뻔하게 저질러 가면서 그것이 대단한 재주라도 되는 양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만배의 몸이 앞뒤로 크게 흔들린다.
꽈창!
유리를 들이받자, 육만배의 이마가 찢기고 떠올랐던 몸은 곧바로 땅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끄아아아아~!”
두려움 가득한 비명이 밤하늘을 채운다. 그렇게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절망적인 상황인데도, 어떻게든 살아남아보려고 육만배는 안간힘을 썼다.
어떻게든 다리로 떨어져야 한다…….
콰직!
어깨에 전달되는 끔찍한 고통! 그와 동시에 눈에서 불이 번쩍 튄다. 육만배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묶인 팔과 어깨의 뼈가 모두 부러진 것 같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땅을 들이받은 얼굴은 타오르는 것처럼 뜨겁다.
“으으으윽!”
지독한 통증의 파도에 정신없이 휩쓸려 다니면서도 육만배는 눈을 떠보려고 애를 썼다. 상하좌우 분간부터 되어야 일어나든, 도망을 치든 할 수가 있다.
“으! 하아아~ 하아아~!”
육만배는 몸을 비틀어 일으켰다. 다행히 다리는 크게 부러지거나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바로 곁에 피거품을 문 채 경련하고 있는 두섭이의 모습이 보인다. 놈은 텄다.
그런데 보이는 경치가 어딘가 이상하다. 단순히 깜깜해서 잘 안 보이는 게 아니다. 한쪽 눈이 터져서 시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몇 초가 걸렸다. 조금 전 땅을 들이받았을 때 다친 모양이다.
“후우우~! 후우우!”
육만배는 신음을 흘리며 한쪽 눈에만 의지해 주춤주춤 걸었다.
이놈의 케이블 타이!
발목이 꽉 묶여 있어서 도무지 빨리 걸을 수가 없다. 발아래 질펀한 핏자국이 보인다. 기동이가 몸을 질질 끌고 가면서 그려놓은 핏자국이다.
“기동아! 후우우! 기동아!”
흘러내린 피 때문에 따끔거리는 눈을 깜빡이면서 육만배는 어둠 속의 기동이를 불렀다. 비록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지만, 아직 살아 있다. 유리 조각으로 서로의 케이블 타이를 끊어주고 부축해 가면서 도망가면… 그러면 된다.
우드득! 우득! 짭짭! 꾸르륵! 쩝쩝!
기동이가 기어간 방향에서 들려오는 소름 끼치는 소리! 육만배는 감전된 사람처럼 얼어붙었다.
위층에서 비추던 플래시의 조명이 사라져 버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이 소리는… 좀비다. 좀비들이 사람 살을 뜯어먹고 있는 소리다!
“흐으! 으흐으!”
뒤돌아선 육만배는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뜯기는 사람이 기동이라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녀석이 잡아먹히는 동안 어떻게든 달아나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였다.
그롸아아아!
갑자기 어둠 속에서 뻗어온 손! 그것이 육만배의 얼굴을 할퀸다. 육만배는 부러져서 덜렁거리는 팔을 휘둘러 좀비의 손을 뿌리쳤다. 온몸에 찌릿찌릿한 통증이 퍼진다.
“으악!”
뒤돌아 도망치려던 육만배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뒤쪽에서 덮친 좀비의 손가락이 그의 코와 아직 시력이 있는 눈구멍을 함께 움켜쥔다.
너무도 우악스럽고, 너무도 강력한 손아귀 힘이다. 육만배의 눈알이 터지고 콧구멍이 뜯겨 나갔다.
“끄으으으!”
끔찍한 고통에 육만배는 펄쩍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이내 중심을 잡지 못해 바닥에 쓰러졌다.
저벅― 저벅―
두 눈을 잃고 완전히 암흑 속에 잠긴 육만배의 귀에 발소리가 들려온다. 아주 가깝게… 육만배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기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롸아아아― 그아아악―!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좀비들의 포효! 육만배는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몸을 흔들어 댔다. 공포 때문에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이럴 거였다면 차라리 3층에서 떨어질 때 즉사했던 편이 나았을 것이다.
와득!
덜덜 떨고 있던 육만배의 발목에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진다. 좀비의 이빨이 그의 아킬레스건을 뜯어냈다. 그것에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목덜미에, 그리고 덜렁거리던 코에 좀비들의 이빨이 박힌다. 그리고 곧이어 팔목과 다리에서도 살이 뜯겨 나가는 통증이 전해졌다.
와드득! 와드득! 찌직! 꿀쩍꿀쩍! 우득!
자신의 살이 좀비들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육만배의 고막을 자극한다.
부하들이 잡아온 좀비의 눈알을 파고, 코와 귀를 잘라내며 호탕하게 웃던 그날 밤이 떠올라서 육만배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 동안에도 좀비들은 열심히 그의 살을 잘라내고 피를 삼켰다.
우드득! 찌이익! 쩝쩝! 꿀쩍꿀쩍…….
☆ ☆ ☆
“이놈!”
민구는 달려드는 괴물의 아가리에 마세티를 박아 넣었다.
칵―
마세티의 크고 무거운 날은 괴물의 이빨들과 혀, 그리고 얼굴의 절반가량을 잘라내고 놈을 뒤로 밀쳐 버렸다.
하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놈의 뒤에 있던 또 다른 괴물이 민구의 왼팔을 노리고 몸을 날린다.
휘이익―
민구는 백핸드로 마세티를 휘둘러 놈의 목을 쳤다.
와득!
목뼈에 박힌 마세티의 칼날에서 둔중한 소리가 난다. 혼신의 힘을 기울인 스윙이었다.
그런데… 온전히 잘라 내지를 못했다. 기력이, 기력이 부족하다.
“이익!”
민구는 괴물의 목을 마저 잘라내기 위해 마세티의 날을 힘주어 눌렀다. 그러는 사이, 조금 전 입 주변을 베어냈던 괴물이 또 일어나 달려든다.
민구는 마세티를 놓은 뒤, 몸을 틀어 녀석을 흘려보내고 다시 곧바로… 곧바로 다시 뒷목을 따려고 했다. 하지만 옆으로 쏠린 몸이 제대로 일어나지를 못했다. 또 그놈의 총상 부위가 발목을 잡는다.
“끄으응!”
민구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바로잡았다. 목에 마세티가 박힌 괴물은 칼날을 덜렁거리면서 그에게 달려온다. 민구는 쿠크리로 놈의 팔목을 후려치고, 마세티의 손잡이를 잡았다.
으드득!
괴물의 목뼈가 뜯겨 나가는 소리! 민구는 마세티의 날을 확 잡아챘다.
털썩.
머리를 잃은 괴물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허공에 떠올랐던 머리가 데굴데굴 구른다. 그사이에 입이 잘린 괴물과 제3의 괴물이 한 방향에서 달려들었다. 그뿐 아니다.
뒤쪽에서도 덮쳐오는 괴물들! 모두 몇 마리나 되는 건지 가늠조차 잘 되지 않는다.
그만큼 민구는 지쳐 있었고, 선로 아래의 어둠은 깊었으며, 달려드는 괴물의 수는 많았다. 그가 지금까지 지나쳐 온 길에는 대가리가 잘린 괴물들의 시체가 정신없이 널려 있다.
테라는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괴물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웠지만, 도움을 줄 수도 없었다. 괴물들의 공격 속도를 늦춰보겠다고 공연히 그녀가 근처에서 기웃거린다면 도리어 민구가 칼을 쓰기에 더 나쁘다.
그롸아아아―
괴물들의 포효! 민구는 두 팔을 정신없이 휘둘러 마세티와 쿠크리의 칼날을 교차시키고, 때로는 나란히 그었다. 머리를 깨고, 목을 베고, 발목을 끊고 턱을 잘랐다. 땀이 정신없이 솟아 이마를 타고 줄줄 흘러내린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울려온다. 놈들은 몇 분에 한 번, 꼭 한 마리씩만 개를 놓아 방향을 추적하게 한다. 그것 때문에 민구는 테라에게 먼저 앞서가라고 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 새끼들! 질기구나!”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고 몸을 틀던 민구가 가장 마지막 괴물의 정수리를 마세티로 때려 깨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번 싸움도 겨우겨우 이겨냈다. 이마의 땀을 닦아내던 민구의 표정이 굳는다.
“이런…….”
민구는 따끔거리는 오른쪽 날갯죽지를 짚어봤다. 끈적하고 따뜻한 감촉… 피다. 그리고 손끝에 피와 함께 남은 악취…….
이런 침 냄새를 풍기는 건 괴물들밖에 없다. 고개를 든 민구는 테라의 눈을 보며 말했다.
“여기까지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