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Fate (4)
훙훙훙훙훙―
2호기는 상공에서 유영하며 확성기를 켰다.
“왼쪽으로 이동해서 막아! 왼쪽으로 가고 있다!”
조장의 지시를 받은 세 명의 쉐도우 실드 대원은 거리를 유지한 채 테이저 건을 앞세워 전진했다. 도망가는 세 놈과 쫓아가는 세 대원의 거리는 약 20미터. 골목 두 개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그리고 도망치는 놈들 중에 뚱뚱한 놈이 워낙 느려서 그 격차는 곧 더 줄어들 것이다.
“조금 더 빨리! 길목 차단해! 조심하고!”
조장은 아래쪽을 살피며 계속 외쳤다. 지금 상황을 보면 아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하지만, 마음속에 커다란 불안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안심을 하기가 어렵다.
함부로 실탄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커다란 제약이다. 만약 젠킨스나 테라 둘 중 하나가 총상이라도 입는다면, 오 박사는 이 2호기에 탑승하고 있던 전원에게 연대책임을 물게 할 테니까.
도망가는 놈들 중에는 열 마리가 넘는 좀비들의 목을 따버릴 만큼 실력자가 있다. 뚱뚱한 백인 놈이나 테라가 그런 재주를 부렸다고 보기는 어려우니 아마 나머지 하나, 저 민첩하게 잘 빠진 놈의 소행이리라. 젠킨스의 보디가드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야 할 놈임에는 틀림없다.
도망치는 것만 봐도 어지간히 약아서 참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고 있다. 그것도 더 어둡고 시야가 가려지는 각도만 골라서…….
깜깜한 건물들 사이로 낮게 날아다니는 것만 해도 등골에 땀이 쭉쭉 나는 상황에서 놈들을 눈으로 쫓아다니기까지 해야 하니 헬리콥터 조종사로서는 정말로 못할 짓이었다.
“어어어! 이 씨발!”
주변 건물들 높이와 어울리지 않는 한 동짜리 아파트! 갑자기 앞쪽에 확 나타난 아파트 건물 때문에 헬리콥터 조종사는 욕설을 내뱉으며 급하게 조종간을 당겼다.
씨이이이이잉―
헬리콥터는 아파트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옆으로 날았다.
“하아아~ 하아아~”
위기를 넘긴 조종사와 조장은 동시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사이에 도망치는 놈들은 공장 단지의 주차장 사이에서 사라져 컴컴한 그늘 속에 묻혀 버렸다.
한 줄로 늘어서 있는 커다란 공장 단지. 아무리 라이트를 비춰봐도 주차장에 세워진 자동차들과 섀시들, 그리고 쌓여 있는 박스들만 잡힌다. 놈들을 시야에서 놓친 헬기는 방향을 틀어가며 공장 상공을 빙글빙글 돌았다.
“이 개새끼들… 어디로 간 거야…….”
조종사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조금씩 헬기의 기수를 틀었다. 앞쪽 대로에 높이 솟아 가로질러져 있는 2호선 선로 구조물이 그에게는 데드라인처럼 보인다. 저기로 도망간 이후에는 헬기로는 더 이상 추적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만일 여기에서 저놈들을 놓치기라도 하면… 그렇게 되면 차라리 태양 그룹으로 돌아가지 않는 편이 더 생존 확률이 높을 것이다.
“이놈의 동네… 뭐 이렇게 공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가뜩이나 정신 사나운데…….”
천천히 공장들 사이를 훑으면서 조종사는 이를 갈았다. 분명 조금 전 시야에서 놓쳤을 때, 줄지어 늘어서 있는 저 공장들 중 한 곳에 들어간 것 같은데… 그중 어디쯤인지를 특정할 수가 없다.
헬리콥터에서 내려오던 지령이 갑자기 끊기자, 넓게 벌려 서서 골목 위쪽을 지키고 있던 쉐도우 실드 대원들도 덩달아 초조해졌다. 일단 2호선 선로 그늘 아래로 가지 못하도록 막는 게 우선이다.
“길목 막아! 산개해서 길목 막으라고!”
지령을 내리면서도 조장의 목소리에서는 자신감이 점점 사라져 간다. 이렇게 헬리콥터가 상공에서 확성기로 명령을 내려 대고 총소리가 여러 번 울렸으면, 쫓기는 놈들이 지레 겁을 먹고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이 새끼들은 끝까지 해보자는 식으로 버티고 있다. 그러니 오히려 이쪽이 불리해진다. 자신이 확성기를 통해 대원들에게 내리는 지령은 도망치는 놈들의 귀에도 고스란히 들어가고 있다.
조장은 마취 총을 꺼내 들었다. 오 박사가 개발한 X―1은 단 몇 초 만에 온몸의 운동능력을 마비시킨다. 당황하지 말고 차분하게 몰아넣은 다음 상공에서 이것으로 노려 쏘면 생포할 수 있다.
“플래시로 비춰봐!”
한 블록에 달하는 공장 건물을 커버하기 위해서 쉐도우 실드 대원들이 산개했다. 대원들의 얼굴도 점차 긴장으로 굳어간다. 서로 간의 거리가 10미터 이상 벌어지는 상황. 총도 마음대로 쏘지 못하는데… 이건 좋지 않다.
테이저 건의 효과는 강력하지만, 연발이 아니다. 한 발을 쏘고 나면 카트리지를 갈아 끼운 뒤에야 다시 쏠 수 있고, 그나마도 근접 거리여야 한다. 게다가 왜 이리 장애물들이 많은지…….
섀시와 플라스틱 패널로 이뤄진 공장의 주차장은 대낮이라 하더라도 숨어 있는 놈들을 찾아내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롸아아아아―
설상가상으로 대로 쪽에서 좀비들이 접근해 오고 있었다. 헬리콥터에서 보기에는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아직 조금은 시간 여유가 있지만,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땅 위에 서 있는 대원들 사이에서는 눈에 띌 정도로 동요가 일었다.
“조금만 버텨! 3호기가 곧 지원을 온다고 했다!”
마취 총에 X―1 카트리지를 끼워 넣고 있던 조장은 큰 소리로 외쳤다. 딴에는 대원들의 사기를 돋워보려 했던 말이지만, 전술적으로 보았을 때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정보였다. 어둠을 방패삼아 대치 중이던 민구에게 먼저 공격해 오라고 부추긴 것과 다름없었다.
부웅― 부웅― 부웅―
그때, 바람을 가르는 낯선 소리! 거리를 둔 채 접근 중이던 쉐도우 실드 대원들은 그 소리의 정체를 찾기 위해 다급히 자세를 낮추고 플래시로 정면을 비췄다.
“윽!”
가운데 서 있던 대원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온다. 플래시의 희미한 빛 사이에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커다란 쇳조각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뭐지?’라는 의문을 던지기도 전에 그는 몸을 옆으로 틀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칵―
회전하며 날아와 옆구리에 박힌 마세티! 그 커다랗고 끔찍한 날이 갈비뼈 사이까지 파고들었다.
“으아아아아!”
가운데 대원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마세티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반사적으로 테이저 건을 쏘았다. 그러고는 테이저 건을 꽉 쥔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 어!”
오른쪽 대원의 시선은 반사적으로 가운데 대원을 향해 쏠렸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그는 정면이 아니라 옆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자신의 동료가 대체 왜 비명을 지르고 있는지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고 있는 동료의 모습을 보았다. 동료의 옆구리에 박혀 있는 커다란 칼날! 이건 테이저 건 따위로 맞설 만한 상대가 아니다.
“이… 이런 씨발!”
오른쪽 대원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테이저 건을 버리고 빨리 MP5를 손에 쥐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턱!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손이 그의 팔목을 옆으로 비튼다.
“으아아!”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공포! 그리고 사타구니에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
오른쪽 대원의 손아귀가 수축하며 테이저 건의 방아쇠를 꽉 움켜쥔다.
퓨욱―
테이저 건이 발사되었다. 카트리지 씰 넘버가 박힌 조그만 은박지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테이저 건의 바늘이 빠르게 날아가 박힌다. 가운데 대원의 가슴과 어깨에… 그리고 곧바로 고압전류가 전달되었다.
지지지직―
“으으으으윽!”
마세티가 박힌 충격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정신을 추스르며 MP5를 꺼내 쥐고 있던 가운데 대원의피로 점철된 몸이 부르르르 떨렸다.
테이저 건을 맞은 몸의 근육들은 전기신호 때문에 제멋대로 경련하고, 바짝 수축했다. 가운데 대원은 MP5의 방아쇠를 꽉 당긴 채 뒤로 넘어갔다.
투투투투투투투― 투투투투투투투―
허공을 향해 날아간 MP5의 총알이 건물의 유리창과 벽면, 그리고 헬리콥터의 전면 유리를 마구 때렸다.
“히이익!”
2호기의 조수석에서 마취 총을 장전하고 있던 조장은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교차시켜 얼굴을 가렸다. 총알은 헬리콥터의 굴곡진 유리에 맞고 옆으로 튕겨 나가 버렸다.
“하아아~ 으아, 진짜 놀랐…….”
한숨을 내쉬며 조종사를 돌아보던 조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다.
조종사의 목에 박혀 있는 X―1 주사기!
조금 전, 자신이 그를 향해 마취 총을 발사한 것이다. 조종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조종간을 움켜쥔다. 온몸의 근육이 마비되기 전에 어떻게든 헬리콥터를 불시착이라도 시켜보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오 박사가 조합해 낸 이 신경마비 약품은 강력했다.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조종사의 몸은 앞으로 기운다. 부릅뜨고 있는 그의 눈만이 그가 아직 온전하게 의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걸 알게 해주는 증거다.
훙― 훙훙훙―
아래로 방향이 꺾인 프로펠러에서 커다란 바람 소리가 울렸다. 헬기는 빠른 속도로 20여 미터 아래쪽의 건물을 향해 곤두박질친다.
“으아아아아! 야! 야!”
조장은 다급하게 비명을 지르며 조종사를 밀어 치고 무작정 조종간을 잡아당겼다. 그가 특별히 헬기 조종에 대해 안다거나 착륙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 시킨 일이었다.
위이이이잉―
땅으로 곤두박질치기 직전, 극적인 각도 전환을 이루어낸 헬리콥터는 지면과 거의 수직을 유지하며 하늘을 향해 다시 솟구쳐 오르는 듯했다. 그러나 그 급상승이 진행될수록 헬기의 천장이 지면을 향해서 조금씩 기울었고, 어느 순간에 이르자 완전히 위아래가 뒤집어져 버렸다.
삐융삐융삐융~
헬기의 자세 제어장치가 계속해서 위기 경보를 울려 댄다.
“어어~어!”
조장이 울부짖으며 미친 사람처럼 조종간을 위아래로 흔들어 댔다. 뒤집힌 채 날아오르던 헬기는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공장 건물을 향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쐐애애애애앵―
빠르게 바람을 가르며 떨어지는 커다란 헬리콥터!
그리고 가장 아랫부분에서 맹렬하게 돌고 있는 프로펠러!
기체가 뒤집히면서 번쩍이던 불빛이 위쪽을 비추며 아래쪽 공장 주변에 기묘한 어둠의 공백을 만들어냈다.
“이런!”
오른쪽 대원의 목을 따고 있던 민구도, 그를 향해 MP5의 방아쇠를 당기려던 왼쪽 대원도 고막을 찢을 듯 엄청난 폭음을 터뜨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경악했다.
헬리콥터의 무게와 프로펠러의 크기!
이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피해!”
민구는 재빨리 몸을 굴리며 공장 사무실 안에 숨어 있던 테라와 젠킨스를 향해 외쳤다. 검은 군복 놈들을 상대하려고 나서기는 했지만, 멀쩡히 날아다니던, 저렇게 큰 쇳덩이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일은 그의 계산에 없었다. 왼쪽 대원도 MP5를 난사하며 달아났다.
쒸이이이이잉―
빠르게 추락하던 헬리콥터는 공장 바로 옆의 3층짜리 다세대 주택을 들이받고 완전히 찌그러졌다.
콰작―!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부러지고, 로터에서 불꽃이 튄다. 엉망으로 압축된 조종석 내부는 터져 나온 피로 붉게 물들었다.
끼이이잉―
처참하게 우그러지며 불이 붙은 헬리콥터가 옆으로 기울며 공장의 차고를 덮쳤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반응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세대 주택의 옥상과 계단 같은 구조물들도 함께 허물어져 내렸다.
꽈앙― 콰쾅!
추락한 헬기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과 주택과 공장이 무너지면서 피어오른 먼지, 그리고 불붙은 로터에서 터져 나온 폭발!
주변은 완전히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충격의 여파로 부근 건물에 온전하게 남아 있던 유리창들이 박살 났고, 섀시와 패널로 만들어둔 허술한 차고는 산산조각이 났다.
“쿨럭! 쿨럭! 괜찮아? 대답해! 어디에 있어?”
헬기의 라이트가 터지는 것과 동시에 빠르게 어둠 속에 잠긴 건물의 폐허 속에서 민구는 테라부터 찾았다. 먼지와 연기가 입과 코로 밀려 들어와 기침이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 위치가 노출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화르륵!
헬리콥터의 엔진 주변에서 불길이 세차게 타오른다. 민구는 소매로 코를 가린 채 차고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모든 게, 정말이지 모든 게 엉망이었다.
섀시들은 부러지고 꺾여 있고, 패널들은 산산조각이 난 채 무너져 내렸다. 여기저기 튕겨져 날아간 장비들과 박스가 사방에 널려있다.
“음!”
사무실에 도착한 민구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테라와 젠킨스가 그곳에 있었다. 테라는 무사했다. 멍해진 까만 눈으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는 있지만, 별다른 상처 같은 건 눈에 띄지 않는다.
문제는… 젠킨스였다. 젠킨스는 무너져 내린 사무실의 한쪽 벽에 깔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저씨.”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테라가 민구를 보고 입을 열었다.
“…젠킨스 씨가… 젠킨스 씨가…….”
민구는 무표정한 얼굴로 젠킨스에게 다가갔다. 시멘트 더미에 깔린 녀석의 다리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다.
“끄으으응!”
민구는 시멘트 더미를 들어 올리기 위해 용을 써봤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용을 써 대자 민구의 갈비뼈만 시큰거릴 뿐, 돌 더미는 미동도 없다. 테라가 옆자리로 와서 힘을 보탠다고 하지만, 앙상한 그 팔다리가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후우우~ 후우우~ 읏! 으으으! 끄으으으!”
젠킨스는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 댔다. 어지간히 고통스러워 견디기 힘이 든 모양이라는 건 이해하겠는데, 이래서야 이쪽의 위치를 광고하는 거나 다를 바가 없다. 민구는 테라의 팔목을 잡고 끌었다.
“저놈은 글렀어. 가야 돼.”
“아니… 아니, 잠깐만요! 이 사람! 구해야 돼요! 이 사람이 없으면! 백신을… 이 좀비 세상을 끝내지 못해요!”
테라는 몸을 뒤로 젖히고 버티며 애원을 했다. 좀비 세상을 끝낸다는 말에 민구의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그가 바라는 것도 똑같다. 테라를 놓아준 민구는 근처에 떨어져 있던 섀시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섀시를 바닥과 시멘트 더미 사이에 찔러 넣었다.
“노노노노!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민구가 지렛대 삼아 섀시를 누르려 하자 젠킨스가 간절하게 손을 흔든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게 젠킨스의 다리뼈에 엄청난 고통을 주리라는 것은 민구도 잘 안다. 하지만 일단 빼내지 않으면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끄으으아아! 노! 노! 이 바보 멍청아! 끄으으!”
민구와 테라가 체중을 실어 지레를 누르자, 젠킨스는 날카로운 비명을 욕설과 섞어 질러 댔다.
파악―!
시멘트 더미가 조금 들리는가 싶었을 때, 터져 나온 피가 민구의 얼굴에 팍 튀었다. 민구는 흠칫 놀라며 지레를 누르던 손에서 힘을 뺐다.
시멘트 더미의 그늘 아래, 젠킨스의 옆구리에서 터져 나온 피였다. 그의 옆구리에는 벽에 고정된 섀시가 아주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 역방향으로 박혀 들어간 것이어서 몸통이 다 찢겨야만 겨우 빠져나올 수 있는 상태였다.
“그만… 그만 누르라고… 끄으으윽! 그래봐야 내가… 후우우~ 유언을 남길 시간만… 끄으응~ 더 짧아지는 거야. 그 파이프는 내려 놔, 테라 양. 그냥 여기에서 내 눈을 보고… 내 이야기를 들어줘… 우리는 아직 이 세계를 구할 수 있어… 끄으으으!”
젠킨스는 고통에 일그러진 상황에서도 테라를 올려다보며 어떻게든 마지막 말을 남기기 위해 애를 썼다.
“어떻게 해달라는 거야?”
녀석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민구가 물었다. 테라는 작은 입술을 달달 떨며 대답했다.
“자기… 유언을 들어달래요. 아직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들어. 너무 오래만 끌지 마.”
민구는 테라에게 말하고 뒤돌아섰다. 아까 전기 총을 들고 설치던 세 놈 중에 둘은 잡았는데, 나머지 하나는 생사를 모른다. 살아 있다면 이제는 분명 눈이 돌아가 있을 것이다. 이쪽에서 먼저 찾아야 한다.
그롸아아아―
괴물들의 포효가 가까이에서 울린다. 이래저래 시간이 많지 않다. 민구는 테라와 젠킨스를 등지고 선 채 주변을 경계했다.
“내… 내 허리띠… 테라 양, 이, 이걸 잘라줘. 버클을… 끄으윽!”
젠킨스는 이따금씩 눈을 질끈 감아가며 허리띠를 풀어내려 애를 썼다. 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상황이어서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테라는 민구에게서 받은 울트라 마린 나이프로 젠킨스의 허리띠를 힘겹게 끊어냈다. 그런 후, 그의 커다란 버클을 젠킨스의 손에 쥐어 줬다.
“아…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라… 으으윽, 테라 양이 가져가야 돼. 이 버틀, 중앙의 원… 이게… 이게 부메랑에 신호를 보내는 버튼이야… 24시간 내에… 끄응, 후우~ 후우~ 올 거야…….”
젠킨스는 버클 중앙의 버튼을 몇 번이나 눌러 시범을 보이고, 그것을 테라의 손 위에 얹었다. 그러고는 겨우 상체를 뒤척여 자신의 웃옷 안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도를 꺼냈다.
“이건… 그동안 드론이… 쿨럭! 쿨럭! 후우우~ 보내온 암호들의 위치야… 귀하가 어디에 가게 되든… 이 위치들만 기억하면… 끄으으으! JL의 구조팀을… 부를 수 있어. 테라 양이라면… 기억할 수 있을 거야…….”
젠킨스는 지도를 펴서 보였다. 서울 지도의 이곳저곳에 빨간 색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시청 주변에 가장 큰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MJ라는 이니셜이 적혀 있었다.
“혹시… 오늘 밤… 귀하가 더 먼 곳까지… 가게 될지도 모르고, 그사이에… 으윽! 또 드론이 새 좌표를 보내줄 수도… 후우우~ 있으니까… 내가 읽는 법을… 알려줄게. 이 위치가… 내 GPS 신호가… 마지막으로 송신되었던 곳이야. 위도… 126.98, 그게 M. 경도는… 큭!”
젠킨스는 잠시 말을 끊고 쿨럭거렸다. 그가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지도 위에 튄다. 하지만 그는 고통 속에서도 말을 계속 이었다.
“경도는 37.55… 그게 J. 그게 기준점이야… 으흑! 쿨럭! 쿨럭! 후우우~ 새 좌표가 오면… 끄으으! 기준점 M과 J를 중심으로 알파벳의 순서대로 백분의 일을… 후우우~ 더하거나 빼. 그러면 부메랑의 위치가…….”
보다 못한 테라가 그의 손을 잡고 만류했다.
“젠킨스 씨… 그만 설명해도 돼요. 다 알아들었어요.”
“아니!”
젠킨스는 마지막 힘을 다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테라의 손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다시 피를 토하며 애원했다.
“테라 양이… 끄으으~ JL로… 가지 않으려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후우우~ 지금 귀하의 그 보물 같은 피로… 백신을 만들 수 있는 곳은… JL뿐이야. 제발… 제발 약속해 줘. 끄으으! JL로 가서 널 키드라는 걸… 알리겠다고…….”
테라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젠킨스의 고개는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흘러나온 피와 침으로 바닥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아아… 아름다워… 널 키드의 물린 상처… 루벤스의 그림도 아닌데… 끄으으! 이제야… 보게 되는군.”
두 눈을 힘없이 깜빡이며 젠킨스가 말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테라의 왼발이 있다. 발가락을 감아두었던 붕대는 어느 틈엔가 날아가 버리고, 빨갛게 피가 맺힌 잘린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잠시 말이 없던 젠킨스가 다시 안간힘을 쓰며 입을 열었다.
“제발… 부탁해… 테라 양… 나는 귀하의 부모를 죽게 만들었지만… 끄으으! 귀하는 나의 아이들을… 구해줄 수도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