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Fate (2)
민구의 이야기를 들은 테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되돌릴 수 있다고 하시지만… 전 아저씨가 말하는 그 큰 잘못이라는 게 뭔지도 몰라요. 그런데 어떻게…….”
“저 괴물들!”
민구는 복도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상이 저런 걸로 뒤덮인 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한 달 전에 저 괴물들을 처음으로 세상에 풀어놨어. 알겠나? 지금 네가 이렇게 가슴 졸이며 뛰어다녀야 하는 것도… 결국은 다 내가 저지른 죄 때문이라고…….”
“아니, 그건… 그렇지 않아요. 아마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아요.”
테라는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순진한 눈빛이 죄스러운 감정을 증폭시켜서 민구는 잠시 입술을 꾹 다물어야 했다.
지난 7월 14일…….
그는 그날도 그저 평소와 같은 하루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늑대가 양을 잡아먹고, 살아남은 양들은 초원의 한쪽 구석으로 도망쳐서 울어 대는, 그런 하루…….
그런데 아니었다. 늑대가 물어뜯은 건 양의 목덜미가 아니라 둑을 지탱하고 있던 밧줄이었다. 이제 초원은 없다. 늑대가 살 곳도, 양이 살 곳도. 사방이 온통 물바다가 되어버렸다.
그 이후, 그 일들은 집요하게 그의 의식을 괴롭혀 왔다. 특히 민구를 줄곧 더 아프게 만들었던 것은, 옆구리에 총알을 맞고 나서 잠실의 의무실을 찾았을 때 본 광경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비명을 지르며 앓고 있던 수많은 부상병들, 얼마나 많고 또 얼마나 심각하게들 다쳤는지… 그 신음 소리 하나하나가 자신을 향한 비난처럼 가슴을 후벼 파고 들어왔다.
[이 개새끼야! 너 때문에 내 몸뚱이가 이 꼬라지가 됐어! 내 다리가 잘리고, 내 손이 날아간 건 다 너 때문이라고!]
그건… 아팠다. 지독하게 아팠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으로 업을 삼고 평생을 살아왔으니 그런 비난 자체는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피해를 입힌 사람들에 빌붙어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간다는 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거니까.
군인들이 주는 밥을 먹을 때마다, 군인들이 그를 지키기 위해 대신 싸우고 있을 때마다, 그러다가 부상을 입고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실려 들어올 때마다… 그들의 시선이 칼로 찌르는 것보다 아프게 느껴졌다.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이 자신에게 칭찬이나 감사의 말을 할 때마다… 그런 게 존재하는 줄도 모른 채 이제껏 살아왔던 양심이라는 놈이 심장을 꽉 움켜쥐는 바람에 숨이 턱턱 막혔었다.
그 모든 후회와 죄스러움을 조금이나마 되돌릴 수 있는 운명적인 존재가 지금 그의 앞에 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평생을 자책하며 살아가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는데, 희망을 가지고 눈을 감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니 만약 그녀를 대신해 죽어야 한다면,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 길을 택할 것이다.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다.
“뭐라고 하는 거야, 테라 양? 응? 이 챔피언이 갑자기 왜 이렇게 심각해진 건가?”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젠킨스가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테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건 개인적인 이야기다. 그녀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민구가 말했다.
“흥, 저놈도 궁금해하는 모양이군. 말해줘도 상관없어. 저놈이 이역만리에서 저렇게 거지꼴이 된 것도 결국 내 책임이니까, 녀석도 들을 권리 정도는 있겠지.”
“테라 양, 이야기해 줘. 지금 대화에서 나를 배제하는 거야? 우리는 팀이야. 팀 멤버들끼리는 그렇게 비밀을 가지고 있으면 안 돼.”
젠킨스는 집요하게 졸라댄다. 테라는 짧게 대답해 줬다.
“이 아저씨는 한국에 좀비들이 퍼진 게 전부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뭐?”
젠킨스는 눈을 똥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엄청나게 얄미운 표정으로 비웃음을 터뜨렸다.
“풋! 주제파악을 좀 하라고 해! 이 정도의 대형 사고를 아무나 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렇지 않아! 자기가 뭘 했다고 하던가? 아니, 아니, 그런 건 사실 궁금해할 필요도 없지. 어차피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니까. 이 사람이 수행한 역할은 비유하자면… ‘발사’라고 적힌 플라스틱 버튼을 만든 사람이, 자신이 핵폭탄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해. 그리고 그로 인해 일어난 모든 책임을 지려고 든다는 거지. 이봐, 챔피언! 너는 그냥 50센트짜리 플라스틱 버튼만 만들었어! 그것도 전기장치가 없는 커버 부분만!”
젠킨스는 광인답게 지구를 멸망에 가깝게 몰아간 것이 민구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걸 아주 자랑스럽게 떠들어 댔다. 그게 경쟁할 거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별로 더 듣고 싶지 않아 테라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가 했던 말 중에 한 가지 사실만은 민구도 분명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아저씨가 무슨 일을 하신 건지 전 몰라요.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된 건 아저씨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에요. 이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테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이 사람에게 젠킨스가 진범이라는 걸 밝힌다면… 그는 젠킨스를 죽이려들지도 모른다.
젠킨스는 백신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사람이다. 훗날 그와 서로 다른 길을 가기 위해 헤어지게 된다면, 자신의 피를 조금 나눠 줄 용의도 있다.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아주 많은 사람들이 개입되어 있는, 복잡한 문제예요. 그러니까 아저씨 혼자서 책임을 진다거나, 속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건 이 젠킨스 씨도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
테라는 적당히 에둘러,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실을 말했다.
“그런 건 말이 안 돼… 내가 그 놈들을 꺼내놓기 전에는 거리에 그런 괴물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고.”
거기까지 말하던 민구가 갑자기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워낙 멀고 또 프로펠러 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들리지만, 이 소리는…….
개다. 커다란 사냥개들이 짖어 대고 있다.
“젠장!”
민구는 당황해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계획은 잠시 여기에 숨어 있다가 헬리콥터가 좀 더 멀어지고 나면 이동하는 거였다. 헬리콥터가 땅에 내려앉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저놈들도 사람인 만큼 괴물들이 무서울 테니까.
괴물들과 어둠, 그리고 복잡한 건물들이 쓸 만한 방패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개에 대한 대비는 그의 계획 속에 없었다.
“개를 풀었어. 여기에 가만히 있으면 안 돼.”
민구는 테라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개 자체는 무섭지 않다. 하지만 그놈들은 귀신같이 숨은 곳을 찾아 소리를 남기면서 쫓아온다. 죽여 버리더라도 방향을 알리게 될 거다.
“뭐야, 갑자기? 왜 또 뛰어?”
계속해서 드링크를 비워 대고 있던 젠킨스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개들이 쫓아온대요!”
“그건! 그건 안 좋군. 개들은 좀비에게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아!”
젠킨스도 허겁지겁 따라온다. 세 사람은 학교의 후문을 통과해서 살림집들과 아파트의 사이를 누비며 뛰었다.
언제 개들이 뒤를 덮치고 달려들지 몰라서 서늘한 등 뒤를 신경 쓰고,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헬리콥터 걱정까지 해야 한다.
그롸아아아―
몇 번의 회전을 하고 골목을 돌던 민구의 앞을 괴물이 막아선다. 큰 소리가 나는 게 두려워서 민구는 다급하게 쿠크리를 뽑아 들고 놈의 아가리에 박아 넣었다. 그러고는 벽을 향해 밀었다.
각! 카각!
그 큰 칼날이 입안에 들어가 박혀 있는데도, 녀석은 안간힘을 쓰며 빠져나오려고 덤벼들었다. 민구는 놈의 뒤통수를 잡고 앞쪽으로 꺾어 눌렀다. 그런 후, 쿠크리의 날을 비틀어 당겨서 목 위쪽을 잘라냈다.
훙훙훙훙훙―
근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가까워진다. 민구는 좀비 시체를 벽과 나뭇잎의 그늘 속에 밀어 붙이고, 자신도 그 옆에 숨었다. 바로 곁의 어둠에 테라와 젠킨스도 몸을 웅크렸다. 세 사람은 어둠 속에서 잔뜩 긴장한 채 하늘 위를 노려보았다.
후우우웅―
아파트 건물 위로 헬리콥터가 스쳐 지나가는 게 보인다. 다행히 서치라이트를 비추는 놈은 아니었다.
“푸하아~!”
젠킨스가 참았던 숨을 팍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하아~ 하아~ 안 좋아. 이건 아니야… 이건 너무 계획이 없어. 이 사람에게… 어디로 가고 있는 거냐고 물어봐 줘, 테라 양. 최소한 목적지에 가까이는 가야 할 것 아니야…….”
그건 꽤 중요한 문제인 것 같긴 하다. 테라는 자신이 궁금한 것처럼 민구에게 물었다.
“목적지?”
괴물 시체를 자동차 밑으로 끌어다 놓고 있던 민구는 테라의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건대, 건대 쉘터. 가끔씩 돌아서 움직이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가고 있는 방향은 북동쪽이니까.”
대답을 마친 민구는 괴물 시체를 마저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잘라낸 머리도 발로 차서 시체와 나란히 자동차 밑에 숨겼다.
하늘에서 찾아다니는 놈들이 있으니, 이제부터는 눈에 띄는 곳에 시체를 남기면 안 된다. 그랬다가는 그것이 단서가 되어 뒤를 밟히게 될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북동쪽이라고 말을 했지만, 실은 이 계획에는 엄청난 맹점이 있다. 크게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는 괴물들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만약 골목을 빠져나가거나 코너를 돌았을 때 그런 놈들을 만나게 되면, 그와 젠킨스는 그 자리에서 죽고 테라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앞장서서 뛰던 민구는 가방 안에 손을 넣고 뒤적거려 뭔가를 꺼냈다. 그러고는 테라에게 그걸 건넸다. 가죽 홀더 안에 들어 있는 울트라마린 나이프였다.
“줄을 목에 걸어. 그리고 괴물들 사이에 숨어 있다가 가까이 오는 인간이 있으면 이걸로 목을 그어버려.”
아무렇지도 않게 요령을 일러주는 민구를 보며 테라는 놀란 눈을 깜빡거렸다. 라면 쫄깃하게 끓이는 법을 알려주는 것처럼 편안하고 일상적인 말투다.
목을 그으라니… 바퀴벌레도 직접 잡아본 적 없는데…….
“아, 그리 센 힘이 필요하지 않아. 날을 잘 갈아둔 거니까 그냥 대고 슥, 밀기만 하면 돼. 그렇게만 하면 피가 팍 솟을 거야.”
당황한 테라의 표정이 목을 잘 못 딸까 봐 걱정하는 거라고 이해한 민구는 엉뚱한 조언을 해줬다. 그리고 자신의 설명에 만족해하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콰앙― 콰앙―
큰길로 나서려던 순간, 멀리서 들려오는 엄청난 폭음에 세 사람은 깜짝 놀라 멈춰 섰다. 대포 소리다. 민구가 말하는 건대 방향, 즉 북동쪽에서 들려왔다.
“저기도 전쟁이 난 거 아닌가?”
젠킨스가 불안해하며 중얼거렸다. 총소리가 들려올 만큼 거리가 멀지 않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만일 저곳도 잠실처럼 좀비들에 휩싸인 채 탈출극을 찍고 있는 중이라면… 목숨을 걸고 거기까지 간다는 게 무의미하다.
“뭐어… 가보면 알게 되겠지. 어차피 그리 멀지 않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큰길로 발을 내디디려던 민구가 화들짝 놀라며 테라와 젠킨스를 다시 골목 안으로 밀치고 들어왔다.
“왜 그러세요?”
테라가 입술을 떨며 묻는다. 그러나 민구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 이유가 시야에 들어왔다. 헬리콥터였다. 조금 전 지나갔다고 생각한 헬리콥터가 대로의 북쪽 상공에 나타나 방향을 조금씩 틀며 유영하고 있다.
“저리로는 못 가겠다. 돌자.”
민구는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올라갔다. 가뜩이나 좁은 골목에 자동차들까지 세워진 틈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자니, 불안감은 몇 배나 커진다. 게다가 개들의 짖어 대는 소리도 점점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세 사람은 멈춰 서 있는 자동차들 뒤에 몸을 숨기고 이동해서 영동대교 고가도로의 그늘 밑으로 뛰어 들어갔다. 동일로의 중앙을 따라 움직이는 것까지는 어떻게 잘 왔는데, 이제 다음 대로인 능동로까지 길고 긴 한 블록을 이동하는 게 문제다.
능동로까지만 도달하면 거기에서 건대까지는 직선 구간이고, 거리도 1킬로미터가 채 안 된다.
후우우우웅―
헬리콥터가 좌우로 바쁘게 위치를 바꾸며 넓은 도로를 감시한다. 이제 그들 세 사람은 고가도로의 그늘 아래 갇혀 버렸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순간, 헬기의 눈에 띄게 될 것이다. 이제 인내와 끈기 싸움이 되어버렸다.
“바보 같은 결정이었어! 헬리콥터가 있는 걸 알았으면 당연히 지하로 들어갔어야지! 그래야 저쪽이 시야의 우위가 없을 거였잖아! 이 근처에는 지하철역이 없었나? 애초부터 그런 델 찾으라고 할걸!”
그새 지쳐 버린 젠킨스가 우는소리를 계속한다. 민구는 놈을 한 번 흘겨보고 나서 다시 헬리콥터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테라에게 물었다.
“뭐라고 저렇게 징징대는 거야? 쓸 만한 소리인가?”
“처음부터 지하철역으로 숨었으면, 헬리콥터 걱정을 하지 않았어도 되는 거였다고…….”
흠, 민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한강 주변 어딘가에는 분명히 지하철역도 있기는 했을 거다. 하지만 그는 그게 어디인지 모른다. 언제 마지막으로 지하철을 타봤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하다.
“지하철역이 어디 있는지 몰랐어.”
잘못된 선택으로 인도한 것에 대해 조금은 사과의 의미를 담아서 민구가 중얼거렸다. 테라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요.”
화악―
헬리콥터에서 비춰 대는 불빛이 고가도로 주변을 훑고 지난다. 서치라이트를 달고 있는 녀석처럼 수십 미터의 반경을 대낮처럼 밝히는 것은 아니지만, 조명이라고는 달빛뿐인 죽어버린 도시에서 그 정도면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잡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민구 일행은 기둥 뒤에 바짝 몸을 붙이고 조명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북동쪽이라고 했지?”
젠킨스는 웃옷 안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도를 꺼냈다. 하지만 고가도로 아래, 기둥 뒤여서 잘 보이지 않는다. 젠킨스의 몸이 점점 더 밖으로 기운다. 달빛에라도 비춰보려는 마음에서다.
“무슨 짓이야, 이 멍청아!”
헬리콥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가 뒤늦게 젠킨스가 그늘 밖으로 몸을 내민 걸 알아챈 민구는 버럭 화를 내며 놈을 끌어당겼다.
“아하하하! 쏘리! 쏘리! 실수야!”
젠킨스는 미안하다는 듯 두 손을 내저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는 분명히 확인했다.
YL. 마지막 드론에 실려 온 기호 중에 그를 좌절시켰던 좌표. 그것이 그리 멀지 않다. 그의 기억이 맞았다. 이제는 용산으로 가는 걸 고집할 필요도 없어졌다.
“테라 양.”
젠킨스는 테라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보아하니까 저 헬리콥터는 쉽게 저 자리를 떠날 것 같지 않아. 마치 우리가 어디로 갈는지를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태도야. 그렇지 않나?”
테라는 젠킨스를 돌아보았다. 이 사람이 또 무슨 미친 소리를 하려는 건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민구의 성질을 더 건드리면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게 무섭다.
“아니, 그렇게 겁먹은 눈으로 보면 내 마음이 아프다네. 나쁜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야. 테라 양, 우리가 보았던 마지막 좌표 기억나나?”
젠킨스는 너스레를 떨며 물었다. 테라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DK, KM… YL.”
“오! 놀랍군! 정말이야!”
젠킨스는 가볍게 탄성을 흘렸다. 이 아이의 기억력은 이상할 정도로 비상하다. 자신이 해줬던 말을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 혼란 속에서 슬쩍 흘려보기만 한 좌표까지도 필요하면 이렇게 기억 속에서 되찾아올 수 있다.
어쩌면 이 비정상적인 기억 능력은 널 키드가 된 이후의 사이드 이펙트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변화를 무조건 긍정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흥미롭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래, 그중에서 두 번째 것이 용산이었어. 그래서 그곳으로 가자고 했던 거지.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세 번째 좌표와 더 가까워. 여기에서 불과 3킬로미터 내외야. 그 말인즉, 우리는 앞으로 2킬로미터 정도만 더 북쪽으로 이동하면 된다는 거지. 헬리콥터가 저렇게 눈에 불을 켜고 지키는 북동쪽이 아니라. 왜인 줄 알겠나?”
“부메랑의 신호가 닿는 거리가 1킬로미터 정도니까…인가요? 그 반경 안으로만 들어가면 되니까.”
테라가 대답했다.
“그래, 맞아. 역시 똑똑하군.”
젠킨스는 최대한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저 챔피언에게 말을 해 줘. 굳이 길목을 지키는 방향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고. 다시 골목으로 들어가서 그냥 똑바로 북쪽을 향해 2킬로미터만 가면 돼. 거기에서 내일 오후까지만 버티면… 우리는 아주 안전하고 아늑한 곳으로 가게 될 거야. 저까짓 놈들을 무서워할 필요 없는 곳으로…….”
젠키스의 제안을 들은 테라는 잠시 고민했다. JL이든 태양이든, 일단 그 집단 안으로 들어가고 나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태양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이렇게 애를 쓰고 도망을 다니면서… JL로 간다는 게 이치에 맞는 걸까? 두 회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은 젠킨스가 이렇게 웃으면서 말을 걸지만, 그가 절대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에도 같은 태도를 보일 것이란 보장은 없다. 그리고… 젠킨스는 거짓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뒤로 물러나! 개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테라를 당겨 자신의 몸 뒤로 숨기며 민구가 속삭였다. 남쪽 고가도로의 그늘 속에서 동물의 눈이 반짝거린다.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조명도 이따금씩 번쩍인다.
“뭐냐, 이놈들? 언제 이렇게 쫓아왔어? 그리고 그 불빛은 뭐고?”
민구의 눈매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그들이 헬리콥터의 조명과 프로펠러 소리에 긴장하고 있는 동안 개들은 성실하게 냄새를 추적해 왔던 것이다.
으르르르― 월! 월! 으르르―!
개들은 위치를 고수한 채 사납게 짖어 댔다. 더 방치했다가는 머지않아 헬리콥터에서도 놈들이 짖어 대는 걸 깨닫게 될 터였다.
“너희들이 청한 거다.”
민구는 반짝이는 개들의 눈을 노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놈들을 향해 달려갔다.
스릉―!
가방에서 마세티가 뽑혀 나오는 소리가 고가 차도의 기둥에 부딪쳐 가볍게 울린다. 이어지는 민구의 가벼운 발소리.
웡! 웡! 으르르르― 웡!
개들의 울음소리가 더 거세졌다. 반짝임이 어지럽게 흔들린다. 이 상황이 너무도 끔찍해서 테라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