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397화 (397/449)

4장 Fate (1)

세 번의 코너를 더 돌고 난 후, 승용차는 다시 속도를 늦춰 장갑차와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뒷좌석의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민 병사가 확성기에 대고 외쳤다.

“속도 최대로! 게이트 닫을 시간이 필요하다!”

병사가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한 뒤, 유빈은 속도를 높여 건대 쉘터의 남쪽 게이트를 향해 질주했다.

위이이잉―

잠시 후, 건대 쉘터의 남쪽 철책이 시야에 들어온다. 외부와 내부, 두 개의 게이트 모두 활짝 열려 있다.

유빈은 가속 페달을 꾹 눌러 밟았다. 이 정도 속도를 내도 괜찮다는 것을 뒤따라오는 장갑차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북쪽의 철책이 다 무너지고 없으니, 시속 100킬로미터로 돌진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멈춰 설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후웅―

두 개의 게이트를 순식간에 통과한 유빈은 속도를 줄이며 크게 회전을 했다. 그러고는 진우에게 물었다.

“잘 따라오고 있어?”

“음, 꽤나 빠른데?”

고개를 돌려 뒤쪽의 장갑차를 보고 있던 진우가 대답했다. 유빈이 남쪽 철책의 오른편 구석으로 차를 돌리는 동안, 속도를 높인 장갑 트레일러도 게이트를 통과했다.

콰창! 콰창!

트레일러가 철책을 스치며 지나간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은 서둘러 게이트를 밀어 닫았다.

그롸아아아―

50여 미터 뒤에서 좀비들이 맹렬한 기세로 달려온다. 게이트를 미는 병사들의 얼굴은 두려움 때문에 흘러나온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쿵―!

철제 게이트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히자 병사들은 얼른 빗장을 찔러 넣고 잠갔다.

콰창! 콰창!

전속력으로 달려온 좀비들이 철책과 게이트에 몸을 부딪쳐 대자 조용했던 밤하늘은 쇠가 긁히고 울리는 소리로 요란하게 달궈졌다.

남쪽 건물로 옮겨온 병사들이 아래쪽을 향해 총구를 내밀고 방아쇠를 당겼다.

투투투― 투투둑― 투투투― 투투투―

앞줄에서 울부짖어 대던 좀비들이 총알에 온몸을 꿰뚫린 채 쓰러진다. 하지만 좀비들과의 싸움이 늘 그랬듯이 쓰러진 놈들의 자리는 곧바로 뒤의 놈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백 마리 이상 되는 좀비들이 한꺼번에 달라붙어 체중을 싣자, 철책은 그물처럼 불룩해진다. 저만한 규모의 좀비들이 몰려왔으니 어차피 외부 철책은 곧 무너질 것이다.

“빨리 날라! 그거 이리 가져와! 여기 막아!”

바로 코앞에서 좀비들이 울부짖어 대는 동안 병사들은 바리게이트를 들고 뛰어와 내부 철책 앞에 지그재그로 쌓았다. 내부 철책에 좀비들이 넓게 달라붙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지연 장치다.

어제 오후에 태양 그룹 헬리콥터로부터 실탄 2,000발을 압수했지만, 그래봐야 두세 발 중 한 발은 명중시켜야만 저놈들을 다 퇴치할 수 있는 수치다. 그러니 신중하게 방아쇠를 당길 수 있도록 장애물들을 설치해야만 한다.

“흐으으~ 흐으으~”

바리게이트끼리 쇠사슬을 연결해서 고정시키는 병사들의 손이 떨린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오직 플래시 불빛에만 의지해 이런 일을 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데, 바로 몇 미터 앞에서 좀비들이 철책을 두들기며 울부짖어 대고 있으니 당연히 간이 콩알만 해져 있다.

“설치 완료했으면 들어와! 빨리!”

내부 게이트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이 안타깝게 외친다. 이윽고 바리게이트 간 결속 작업이 끝나고, 병사들은 네 발로 기다시피하며 내부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롸아아아아―

신선한 인간들이 도망가는 걸 보며 철책에 달라붙은 좀비들이 안타까운 울음을 터뜨린다.

끼이이잉―

내부 게이트가 쇳소리를 울리며 닫혔다. 하지만 안도하고 있을 여유 같은 건 없다. 사격조로 배정된 병사들은 지급 받은 탄창을 소중히 전술 조끼에 채워 넣고, 남쪽 건물의 계단을 뛰어올랐다.

“빨리 저거 떼어내!”

쉘터의 북단을 지나서 멈춰 선 장갑차에서는 장갑차장의 명령에 따라 트레일러를 분리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장갑차 내부에 탑승하고 있던 네 명의 병사와 트레일러 지붕 위의 병사들이 모두 합세해서 견인 장치를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열어주세요! 나가고 싶어요!”

컨테이너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벽을 두들기며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한다. 좁은 공간 안에서 꽉 낀 채 정신없이 흔들리느라 그들도 정말이지 힘이 들었을 것이다.

“내가 현재 건대 쉘터 책임자입니다.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강 소위가 다가와 전차장에게 말을 건넸다. 조금 전에야 잠에서 깨어난 그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다.

“아, 충성!”

장갑차장인 하사는 강 소위에게 경례를 붙이고 상황을 설명했다.

“오늘 잠실 쉘터가 무너졌습니다. 이 병력과 컨테이너에 탑승하고 있는 민간인들이 마지막으로 그곳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입니다.”

“잠실이… 어떻게 됐다고요?”

강 소위는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다시 물었다. 아직 잠이 다 깨지 않아서 뭔가 잘못 들었다고만 생각했다. 하사는 한숨을 내쉬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역시… 믿기지 않으시겠죠. 하지만 사실입니다. 잠실 쉘터는 완전히 함락됐습니다. 오후부터 규모 여섯 짜리가 계속 밀려 들어오는 바람에…….”

그 말을 들은 강 소위는 멍한 얼굴로 비틀거렸다. 분명히 사람의 말을 듣고만 있을 뿐인데, 누군가 망치로 그의 하이바를 두들기는 것 같다.

남쪽 게이트에서 쉬지 않고 울려 대는 총소리까지 더해져서 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그가 대동하고 있던 병사들도 다들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부상당한 다리가 급격하게 쑤셔온다.

잠실이… 내일 오후에 그들이 돌아가기로 되어 있던 안전한 요새가… 무너졌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이 장갑차장의 퀭한 얼굴을 보면 그가 얼마나 급박한 상황을 헤쳐 왔는지 알 수 있다.

“잠실에서 왔는데 왜 북쪽에서 접근했습니까? 애초 목적지가 여기였습니까?”

강 소위는 다시 물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럴 수 있는 증거를 찾아내고 싶었다.

“아뇨. 원래는 탄천을 넘어가려고 했는데, 길목마다 좀비들이 꽉 차서 계속 돌다 보니까 어느새 한강을 넘게 됐습니다. 북쪽으로 접근한 건… 아무리 교신을 시도해도 답이 없고, 불빛도 안 보여서 좀 헤맸습니다. 저쪽 하늘이 훤해서 거기인 줄만 알았는데, 가보니까 불이 난 거더라고요.”

“그, 그러면… 그… 거기에 있던 병력이랑 민간인들은?”

강 소위는 정신을 다잡으며 물었다.

“애초에 오늘 오후부터는 별로 남아 있지도 않았습니다. 다들 선로로 옮겨가고, 또 태양 그룹이 운영하는 쉘터로 이동하기도 해서…….”

장갑차장은 서둘러 대답하고, 뒤쪽의 장갑차를 흘끔거리며 돌아봤다. 그 모습을 보며 강 소위도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잠실의 소식이 충격적이라고 하더라도 놀라는 건 좀 뒤로 미뤄놓을 수 있다. 일단은 저 철책 밖에서 울부짖어 대는 좀비들부터 다 잡아야 한다.

“우리 중대는 지금 탄약이 부족한데… 싹싹 다 긁어모아도 이천 발 조금 넘는 수준입니다.”

강 소위는 실질적인 한계부터 말했다.

“이천 발이요? 중대 병력이?”

이번에는 장갑차장이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병사당 실탄을 채 20발도 지급 못하는 군대가 다 있다니… 북쪽의 철책이 다 무너져 내린 것도 그렇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잘 이해가 안 된다.

“탄약은 저희에게 여유가 있습니다. 원래 잠실 방어 병력들에게 지급했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무너지는 바람에… 어이, 탄약상자 가져와!”

장갑차장은 자신이 데리고 온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지금까지 좀비들에게 쫓기느라 쌓인 스트레스가 그의 성질을 부글부글 끓이고 있다.

한시라도 빨리 저 염병할 놈들에게 40㎜ 주포를 쾅쾅 갈겨주고 싶었다. 북쪽으로 빠져나가서 한 바퀴 돌아와 뒤를 칠 생각이다.

“이쪽으로 가십쇼! 이쪽입니다! 아, 그리고 절대 금연입니다!”

분리된 트레일러에서는 문을 열어준 병사들이 강 소위의 지시에 따라 민간인들을 수용자 숙소로 안내하고 있었다.

산소도 부족한 공간에 꽉 끼어 정신없이 흔들려 댔던 생존자들은, 곳곳에 주저앉아 먹은 것 없는 빈속을 게워내면서도 열심히 안내에 따랐다. 불 꺼진 건물이지만, 좁은 트레일러 속에 꽉 끼어 갇혀 있는 것보다는 몇 백 배 나을 터였다.

투투투투투― 투투투투―

남쪽 게이트에서는 계속 총성이 울려 댄다. 그런데도 외부 철책은 어느새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강 소위는 입술을 꽉 깨물어 어지러운 정신을 다잡았다.

탄약도 생겼으니 이 싸움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 그리고 이겨야 한다. 그래야 그다음도 있는 거니까.

“오빠, 들어와요!”

체육관 안으로 대피해 있던 제니가 유빈을 향해 외쳤다. 임무를 완수한 유빈을 들여보내고, 진우는 남쪽의 건물을 향해 뛰어갔다.

그가 가세하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은 용기백배해서 함성을 질러 댄다. 그 일련의 모습들을 보며 강 소위는 또다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저 친구들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되지?’

그들은 테라를 만나기 위해 잠실로 가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내일 해가 뜬 후에도 늦지 않는다고 말렸던 사람 때문에 오늘 밤을 여기에서 보냈다. 물론 그 사람이란 강 소위 자신이다.

그런데 그사이 잠실은 무너졌고, 거기에 있던 민간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만약에… 만약에 테라의 행방을 모른다면, 저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

저 어린 친구들은 그를 살려주고 이곳을 구해냈는데… 그는…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테라를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에서마저 발목을 잡았던 거다.

“미쳐 버리겠군…….”

강 소위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리게이트를 타 넘으며 울부짖는 좀비들보다, 이 좆같은 상황을 저 친구들에게 사실대로 알려줘야 한다는 게 더 무섭고 괴롭다.

☆ ☆ ☆

그롸아아아―

달려드는 괴물들!

민구는 바쁘게 두 팔을 휘둘렀다. 마세티로 뼈를 끊고, 쿠크리로 나머지 부분을 잘라낸다. 플래시조차 마음대로 켤 수 없기에 오직 창문을 통해 비쳐 드는 푸른 달빛에만 의존해서 싸워야 했다.

학교 건물 안에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많은 수의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금까지 열 마리를 베었지만, 아직도 그의 앞에는 두 마리가 더 남아 있다. 물론, 앞으로 얼마나 더 만나게 될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카아악―

두 팔이 끊긴 괴물이 아가리를 쫙 벌리며 몸을 날렸다. 민구는 왼손에 쥔 마세티를 있는 힘껏 휘둘러 놈의 두개골을 찍었다.

쩌억―!

단단한 뼈가 갈라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그 메아리가 끊기기도 전에 민구는 재빨리 몸을 돌리며 쿠크리로 뒤의 괴물을 베었다.

핏―

괴물의 목에 실처럼 가느다란 금이 생겨났다. 사람이었다면 대번에 피를 분수처럼 쏟으며 쓰러질 만한 상처였지만, 괴물에게는 그다지 큰 타격이 되지 않았다. 놈은 달려들던 기세 그대로 민구의 어깨를 움켜쥔다.

“이놈!”

살갗이 찢기는 아픔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민구는 곧바로 놈의 목에 쿠크리를 비스듬히 꽂아 넣었다.

푹―

쿠크리가 폐에 닿을 만큼 깊숙하게 박혀 들어갔다. 하지만 그래도 괴물은 멈추지 않는다. 놈이 아가리를 벌리며 덤벼들 때마다 쿠크리의 칼날은 놈의 상처를 벌렸고, 민구는 이를 악물며 그 힘을 받아내기 위해 버텼다.

“이익!”

쿠크리를 놓아버린 민구는 놈의 배를 있는 힘껏 걷어차서 뒤로 밀쳐 냈다. 밀려난 괴물이 벽에 부딪치는 순간, 민구는 왼팔을 역방향으로 휘둘렀다.

카득!

이미 쿠크리에 의해 반쯤 잘려 있던 괴물의 목이 바닥에 떨어진다. 민구는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시체에서 쿠크리를 뽑아냈다.

‘젠장…….’

허리를 숙일 때 콱― 하고 쑤셔온 통증에 민구는 몰래 이를 갈았다. 한계다. 분하지만, 지금의 그는 이 정도밖에 안 된다.

총에 맞았던 오른쪽 옆구리는 똑바로 펴기도 어려울 만큼 쑤셔 대고, 오른손은 칼을 꽉 잡는 것만으로도 부들부들 떨린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조금 전만 해도 한 방에 목을 자르려던 계획이었지만, 힘이 모자라서 그렇게 질질 끌어야 했다.

민구는 조금 전 괴물에게 할퀴어진 어깨에 손바닥을 대봤다. 뜨끈한 피가 묻어 나오는 걸 보니, 상처가 꽤나 깊다.

“아아, 할퀴어지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변하지 않아. 그저 조금 부을 뿐이지. 그 정도는 이해해 줘야지. 썩어가는 시체와 접촉을 한 거니까 말이야.”

민구가 좀비들과 싸우는 내내 테라의 등 뒤에 숨어 있던 젠킨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먹을 것을 찾자는 제안을 했다.

“지쳐 보이는군, 챔피언. 이럴 때일수록 탄수화물을 섭취해 줘야 돼. 한국의 학교에는 카페테리아가 없나?”

녀석이 뭐라고 지껄이는지 테라로부터 전해 들은 민구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친놈. 이 상황에서… 배짱이 두둑한 거냐, 아니면 정말로 그냥 처먹는 것밖에 모르는 거냐?”

경멸에 가득 찬 민구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젠킨스는 별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이 먹보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먹을 것을 찾는 일은 민구에게도 중요하게 느껴졌다.

이미 늦은 새벽, 에너지가 고갈되어 간다. 아까 유람선에서 이 녀석이 과자를 오물거릴 때, 아무거라도 먹어두지 않은 게 실수였다.

그러나 매점을 찾아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괴물들의 수가 전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지하로 내려갔다가는 꼼짝없이 거기에 갇혀 버릴 수도 있다.

언제라도 이 건물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1층이나 2층에 머물러야 한다.

“여기라면…….”

긴 복도의 끝에서 교무실을 찾은 민구는 반쯤 열린 문을 밀고 안쪽을 엿봤다. 검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서 교무실 내부는 한층 더 어두웠다.

“제가… 제가 먼저 들어갈게요. 저는 물지 않으니까…….”

민구가 마세티를 앞세워 한 발짝을 내디디려 할 때, 테라가 그의 팔목을 잡았다. 민구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론적으로는 그녀의 말이 맞지만, 여자를 앞세운다는 게 영 마뜩치 않다.

“저는 대신 싸워 드리지 못하니까, 이런 거라도 하게 해주세요.”

그의 망설임을 읽은 테라가 차분하게 민구를 달랬다. 그런 후,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교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ㄷ자 형태로 배치된 책상들과 의자들, 하지만 워낙에 심하게 어지럽혀져 있다. 테라는 손으로 짚어가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서 책상 위를 더듬거렸다.

좀비에게 물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두려움은 남아 있다. 갑자기 날카로운 손톱이 어둠 속에서 뻗어 나와 목덜미를 할퀴며 파고들 것만 같아 그녀는 계속 식은땀을 흘렸다.

“찾았다…….”

한 책상에서 음료수 박스를 찾아낸 테라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돌아왔다. 맛을 논외로 친다면 고작 설탕물일 뿐이지만, 다들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어서 그만큼의 음식이라도 일단 섭취해 둬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도 더 도망 다니고 싸울 수 있다.

민구는 음료수 병을 기울이며 창문 밖을 힐끔 엿봤다. 정신없이 울려 대던 프로펠러 소리가 조금은 멀어져 있는 상황. 가장 껄끄러웠던 서치라이트의 환한 빛도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놈들이 포기해 준다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불안하지만, 함부로 건물 밖으로 도망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너 혼자 남게 되면 말이야…….”

잠시 뚫어져라 테라를 보고 있던 민구가 입을 열었다. 테라는 겁먹은 얼굴로 황급히 그의 말을 끊었다.

“지금 저… 혼자 두고 가시려고요? 왜요?”

“아니, 아니… 두고 어디로 가겠다는 게 아니야. 나는 움직일 수 있는 동안은 너를 위해서 싸울 거야. 그건 약속하지. 하지만 내 몸은 예전만 아주 못해. 약해 빠졌다고.”

민구는 테라를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테라는 곧바로 도리질을 한다.

“약하지 않아요. 아저씨는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강해요.”

“다치기 전에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아니야. 어쨌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너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살아남아야 돼. 살아서, 내가 열어놓은 지옥문을 닫아줘. 저놈의 말이 맞는 것 같으니까……. 만약에 너 혼자 남게 되면, 동쪽으로 가. 멀지 않은 곳에 건대 쉘터가 있어.”

그곳이 현재 민구가 아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안전한 곳이었다. 육만배가 거기에 있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테라가 군인들 사이에만 있으면 감히 그녀를 해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 가느다란 다리로 용산까지 걸어가라는 건 무리다.

“세 가지만 명심해. 먼저 밤에만 움직여. 손전등도 켜지 말고. 그래야 네가 사람들 눈에 안 띄니까 안전해. 또 하나는… 만일 위험하다 싶으면 괴물들 틈에 끼어서 놈들이랑 같이 걸어. 그 옷은 알아보기 편하니까 다른 걸로 갈아입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건대에 가면 육만배라는 인간을 조심해. 정말 악마 같은 놈이라고 생각하면 돼.”

민구는 사뭇 진지하게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말했다. 마치 유언을 듣는 것 같아 테라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 남자는… 태양 그룹과 싸우다가 자신이 죽은 이후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왜…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주세요? 그냥 차라리 아저씨 혼자 도망치시는 거라면… 지금보다는 살아남을 확률이 높잖아요.”

테라가 물었다. 민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살아야 돼. 아까 말했잖아. 오직 너만이 내가 저질렀던 큰 잘못을 조금이나마 되돌릴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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