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좀비 세계의 최강자 (4)
오 박사 일행은 잠실 쉘터의 야구장 외야에 헬기를 착륙시켜 두고, 그 안으로 대피한 소수의 생존자들을 구조하고 있었다. 야구장 밖에서는 수만에 달하는 좀비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선로 위에도 없고, 선착장 주변에도 없고, 잠실 주경기장에도 없다면, 테라와 젠킨스가 있을 만한 장소는 이제 딱 두 군데밖에 남지 않았다.
장갑 트레일러의 내부와 여기 이 야구장.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야구장 내부로 들어와 숨어 있던 생존자들은 오 박사의 헬리콥터를 발견하고 미친 듯이 펜스 아래로 뛰어내렸다.
비록 그들의 원래 목적지가 태양 그룹은 아니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다. 일단 여기에서 벗어날 수만 있으면 아무 곳이라도 가야 한다.
야구장 입구를 막아둔 허술한 셔터는 곧 무너질 터였다. 그러면 좀비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는 거다.
“진정해!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천천히 걸어와! 뛰지 말고! 뛰면 쏜다!”
쉐도우 실드 대원들은 기관총을 겨눈 채 달려오는 생존자들에게 경고를 했다. 그들 역시도 바짝 긴장을 한 상태여서 듣는 사람의 기분 따위를 배려할 여유는 없었다.
눈깔이 돌아간 오 박사 미친 새끼 때문에 마지못해 따르고는 있지만, 이 야밤까지 이건 정말 할 짓이 아니다. 좀비들의 한가운데에서 이미 물렸을지도 모르는 놈들과 상대하고 있다. 게다가 사방에서 압박하듯 조여오는 좀비들의 포효…….
인간 사냥을 할 때처럼 재미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위험만 몇 배나 가중된 상황이다. 다들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쏘, 쏘지 마세요! 제발! 제발!”
위협에 놀란 생존자들은 다급하게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서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자신이 좀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계속 떠들어 댔다.
“당신들 말고 더 없었어? 테라! 테라 못 봤어? 뚱뚱한 백인 남자는? 용산철로로 가는 줄에 있었다고 했어. 본 사람 없나?”
오 박사는 새로운 생존자를 베슬 안에 집어넣을 때마다 소리쳐 물었다. 생존자들은 다들 고개를 젓기만 할 뿐, 쓸 만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젠장, 오 박사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이를 갈았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피가 마른다. 여기에도 없었다면… 그럼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테라… 아마 지금쯤 배 타고 가서 용산철교 쪽에 있을걸요? 저보다 훨씬 앞줄에 있었거든요.”
열두 번째 생존자가 겨우 정보다운 정보를 전해 줬다. 하지만 그건 개소리였다. 오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철교도, 선착장도 다 봤어.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까지 다 샅샅이 봤지만, 테라는 없었어. 젠킨스도 없었고. 그 커다란 덩치는 그냥 못 보고 지나치기 쉽지 않아.”
생존자들을 그물 베슬 안에 함부로 집어넣으며 오 박사는 초조하게 야구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더 이상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아쉽지만 이대로 끝인가…….
오 박사는 분한 마음에 고개를 저었다. 두 대의 장갑 트레일러가 아직 남아 있지만, 거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든 걸 걸기에는 너무 확률이 줄어든다.
그롸아아아아아―
생존자들만 달려오던 야구장 잔디밭 위로 드디어 좀비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쉐도우 실드 대원들은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나며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타타― 타타타― 타타타―
MP5를 난사해서 좀비들을 쓰러뜨린 쉐도우 실드 대원들은 오 박사를 잡아끌고 헬리콥터 안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오 박사는 한사코 그들의 팔을 뿌리치며 다시 내리려고 든다.
1분만 더 기다려 보면… 저 어두운 야구장 건물 내부에서 테라가 뛰어나올 것만 같아 도저히 미련을 버릴 수 없다.
그롸아아―! 카아아악―
펜스를 뛰어내려 달려오는 좀비들의 수가 더욱 늘어났다. 쉐도우 실드 대원들은 열려 있는 헬리콥터의 측면, 문밖으로 MP5를 내밀고 계속 연사를 날렸다.
허술한 그물 베슬 안에 갇힌 채 헬리콥터가 떠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생존자들은 두려움이 가득한 비명을 지르며 떨었다. 운동장 잔디밭 여기저기에 좀비들의 시체가 널리기 시작한다.
“오 박사님! 이륙해야 합니다!”
쉐도우 실드 대원들과 헬리콥터 조종사가 한목소리로 외쳐 댄다. 이 건물 어딘가에는 아직 생존자가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래도 오 박사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보다 목한 조종사가 임의로 헬기를 이륙시켰다.
훙― 훙훙훙― 훙훙― 투투투투투―
프로펠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하자, 헬리콥터는 곧바로 하늘 위로 솟아오른다. 그물 베슬 안의 생존자들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이런 씨발!”
20여 미터 아래까지 밀려 들어와 있는 좀비들의 모습을 보며 오 박사는 헬리콥터의 좌석을 몇 차례나 내려쳤다. 그 와중에도 혹시 그중에 젠킨스가 끼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다.
그렇게 오 박사가 성질을 이기지 못해 펄펄 뛰고 있을 때, 무전이 들어왔다.
― 치이익, 1호기 응답하라. 여기는 3호기. 치이익.
“말해.”
오 박사는 무전기를 꽉 쥐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3호기의 목소리 톤에서 이미 기쁜 소식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트레일러의 문이 열렸고, 거기 들어 있던 사람들 중에 테라나 젠킨스가 없었다는 소식일 거라고 생각했다.
제기랄, 그러면 트레일러 하나만 남게 된다. 오 박사는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런데 3호기 승무원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 치이익, 잠실대교 남단에 치익, 유람선 한 대가 표류 중입니다.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치익.
“유람선? 야, 잠실대교면 어디야?”
오 박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헬기 조종사에게 물었다. 헬기 조종사가 대답을 해준다.
“송파대로에서 이어진 다립니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동쪽? 그러면 용산이랑 반대 방향이잖아. 거기 있는 유람선이 무슨 상관이야? 왜? 불이 켜져 있어? 사람이 보이나?”
오 박사는 짜증스럽다는 듯 물었다.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은데, 멍청한 보고까지 그의 신경을 긁고 있다.
― 치이익, 조명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치익.
“그럼 그냥 버려진 배잖아! 예전부터 그 부근에 떠다니던 거 아니야? 대체 이 바쁜 상황에서 그런 난파선 이야기는 왜 하는데?”
질문하는 오 박사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날카로워진다. 하지만 3호기 승무원은 기죽지 않고 대답했다.
― 치익, 저도 처음엔 그렇다고 생각했었는데, 다리에서… 치이익, 좀비들이 뛰어내렸습니다. 치익.
“…뭐라고?”
― 치이익, 다리 위를 달리던 좀비들이 배를 향해서 뛰어내렸습니다. 치익, 뭔가 있는 거 아닐까요? 치이익.
그 말을 들은 오 박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비디오 통화를 하는 것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좀비들이 그렇게 뛰어내렸다는 건, 거기에 살아 있는 사람이나 놈들을 끌어들일 만한 뭔가가 있다는 뜻이다.
그 유람선은… 단순히 오래전에 버려진 배가 아닌 것이다.
“어디라고? 배를 목격한 장소가?”
오 박사의 목소리가 떨린다. 아찔한 느낌이 왔다. 그의 감으로는 거기에 분명 뭔가가 있다.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뭔가가……,
― 치이익, 잠실대교 남단입니다. 치익, 트레일러 추적을 멈추고 타깃을 배로 변경할까요? 치이익.
“아니야. 트레일러 계속 쫓아. 배는 내가 직접 확인해 보겠다.”
오 박사는 단호한 명령을 마지막으로 무전을 끊었다. 그러고는 헬기 조종사에게 손짓을 했다.
“들었지? 잠실대교 남단이야. 서둘러!”
헬리콥터 조종사는 오 박사의 얼굴을 곁눈으로 흘겨보았다. 이 미친놈은 이렇게 깜깜한 밤에 불 꺼진 고층 건물이 즐비한 서울 시내를 비행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전혀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저 사람을 달달 볶아대기만 한다.
“서두르라고!”
마음이 바쁜 오 박사는 망원경을 손에 꼭 쥐고 한강 남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채 다시 닦달을 했다.
잠실야구장 상공 위로 떠오른 헬리콥터는 크게 선회해서 대각선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 ☆ ☆
바로 그 시각, 테라를 태운 유람선은 청담대교 북쪽의 그늘 아래를 막 지나치고 있었다. 출발 직전 갑자기 다리 위에서 떨어져 내린 좀비들로 잠시 소동이 있었지만, 민구가 재빨리 나서서 머리를 날려 버리는 것으로 정리한 뒤였다.
워낙 어두웠기 때문에 강의 반대 방향에서 잠실대교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 오 박사의 헬리콥터는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테라 양, 이 부드러운 항해술을 좀 봐주면 좋겠는데… 조명 하나 없이 이렇게 엉망이 된 배를 몰아서 캄캄한 밤의 강을 헤쳐 나간다는 거 말이야.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후후후, 이렇게 방향키를 잡고 있으니 나폴리의 밤바다가 저절로 떠오르는군. 언젠가 이 좀비 사태가 좀 진정되면 귀하와 함께 방문할 수도 있겠지. 내 요트 이야기해 준 적 없지?”
젠킨스는 유람선의 방향키를 잡고 고정식 의자에 기대앉은 채 계속 떠들어 댔다. 그렇게 여유를 부리면서도 청담대교의 교각 사이를 아주 부드럽게 통과했다. 가끔씩 개인 요트를 몰고 항해를 즐겼다는 말이 허풍은 아닌 모양이다.
오도독― 오독!
젠킨스의 기분이 좋아진 또 다른 이유는 조타실 내부에 있던 과자 상자와 음료수였다. 하루 종일 쉬지 못하고 계속 운항을 해야 했던 승무원들이 그걸로나마 허기를 채우려고 가져다 놓았던 것들이다.
젠킨스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과자를 한 움큼씩 집어 입에 가져가고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젠킨스 씨, 꺼림칙하지 않으세요? 바로 눈앞에 좀비들 시체가 그렇게 많은데?”
조타실 유리창과 계기판 주변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좀비 시체들을 보며 테라가 물었다. 젠킨스는 과자 쪽으로 손을 뻗으며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물리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들뿐이야. 시체는 거기에 해당되지 않지. 그러니 입맛에 영향이 없어. 그건 그렇고, 참 속도가 어지간히 나지 않는군. 아무리 배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말이야. 이래서야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겠어… 뭐, 그렇다고 당장 침몰할 것 같지는 않지만… 아슬아슬하군.”
그렇게 젠킨스가 떠들어 대고 있을 때, 군인들과 민구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음?”
민구는 객실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강의 반대편 건물들 사이로 강렬한 빛을 뿜어내며 날아가는 헬리콥터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이상한 그물 감옥 같은 것도…….
태양 그룹의 검은 헬기다.
“구조 헬기가 뜬 거 맞죠? 우리를 구하려고!”
아무것도 모르는 민간인 생존자들은 헬리콥터를 보고 흥분해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민구는 긴장한 채 헬기의 방향을 주시했다.
헬리콥터는 조금 전 그들이 표류하고 있던 위치로 날아가 라이트를 번쩍이며 다리를 훑으며 떠 있었다. 비록 꽤나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서치라이트의 빛이 워낙 강력해서 눈에 확 띈다.
왜 하필 이 밤중에 여기를… 그리고 하필이면 저 다리를…….
민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냥 목적 없이 돌아다니는 게 아니다. 조금 전 그들이 아직 표류하고 있을 때 머리 위로 지나갔던 헬리콥터와 다리에서 뛰어내렸던 좀비들… 그게 상관이 있는 것 같다.
‘이 배를 찾고 있다!’
민구는 짐승 같은 본능으로 느낄 수 있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기는 한다. 그게 아니라면 저런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민구는 다시 앞쪽을 돌아보았다. 불 꺼진 영동대교의 어두운 윤곽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이 속도로 용산까지 도착하려면 앞으로도 한참을 더 가야 한다. 빨라도 10분. 어쩌면 그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
반면에 헬리콥터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올 것이다. 방향만 이쪽으로 돌리면, 눈 깜빡할 사이에 따라잡힌다.
그런 후, 계속 항해를 방해할 수도, 다짜고짜 먼 하늘에서 라이트를 비추며 총을 쏴댈 수도 있다.
“이봐, 그… 기관총으로 쏴서 저걸 떨어뜨릴 수 있나?”
다급해진 민구는 K―3 사수에게 달려가 앞뒤 설명을 모두 생략한 채 그것부터 물었다.
“에?”
K―3 사수는 미간을 찌푸린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걸 왜 쏴요? 구조해 달라고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그렇게 의아해하며 대답을 한 뒤, 그는 계속 헬리콥터 쪽을 향해 손전등을 깜빡거렸다. 워낙 거리가 멀고 플래시의 조명이 약해서 신호가 전달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안 하고 노는 것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했다.
다리에서 떨어져 내린 좀비들 때문에 확성기가 작살나 버린 지금으로서는 이게 가장 강력한 신호 전달책이다.
“어이! 어이! 그 플래시 좀 꺼! 깜빡거리지 말라고! 그러다가 우리 다 죽어!”
신경이 날카로워진 민구는 자기도 모르게 오른손을 등 뒤로 돌려 쿠크리의 손잡이를 잡았다. 하마터면… 그어버릴 뻔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던 군인 녀석들의 순진해 빠진 옆모습 때문에 차마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저 새끼들… 테라를 잡아가려고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저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아?”
민구는 네 명의 군인에게 다시 한 번 진심을 담아서 설득을 해봤다. 물론 통하지 않는다.
“잡아가다니요? 선배님, 저희 군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런 걱정 하지 마십쇼! 저 헬리콥터, 태양 그룹 거예요. 오늘 하루 종일 저쪽으로도 민간인들 이송했어요! 우리도 용산까지 편하게 가면 좋은 거 아닙니까? 이 배도 가뜩이나 언제 물에 잠길지 모르는 상황인데……. 뭐,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병사들은 멍청이 같은 소리를 잔뜩 늘어놓고 나서 다시 플래시를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민구의 속이 타들어 가기에 충분한데, 병사 하나가 한술 더 뜨는 제안을 했다.
“하늘에 총을 몇 방 쏴볼까? 그 소리가 이 플래시 깜빡거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에이, 이렇게 사방에서 총소리가 나는데 그게 무슨 효과가 있을까?”
병사들은 의견이 분분하다. 이제는 더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을 것 같아서 민구는 얼른 조타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저거… 태양 헬리콥터 맞죠?”
불안해하며 기다리고 있던 테라가 겁먹은 얼굴로 묻는다. 민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에게 오른쪽으로 바짝 붙이라고 해.”
테라는 젠킨스에게 주문을 했다. 배를 모는 것에 몰두하느라 뒤쪽의 헬리콥터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한 젠킨스는 큰 소리로 기분 좋게 복창을 했다.
“아이 아이 캡틴! 스타보드! 후후후… 테라 양, 배에서 항해를 하는 동안에는 왼쪽, 오른쪽 같은 말은 쓰지 않아. 왼쪽은 포트, 오른쪽은 스타보드. 왜 그런 이상한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줄까?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방향키가 배의 중앙이 아니라 한쪽에 붙어 있었거든.”
“닥치고 저 다리 지나가기 전에 바짝 붙여서 세워! 다리 그늘 아래 멈추면 더 좋고.”
민구는 젠킨스의 수다를 끊고, 그의 옆에 서서 손가락으로 위치를 지정했다.
“선다고? 왜? 무슨 일이야?”
젠킨스가 물었다. 두 사람의 말을 계속 번역해 주고 있던 테라가 대답했다.
“태양 그룹 헬리콥터가 오고 있어요. 빨리 도망쳐야 돼요.”
“오 마이! 이런!”
태양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젠킨스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걷혔다. 그는 퉁퉁한 털북숭이 손으로 아주 능숙하게 속도를 줄이고 방향타를 틀어 유람선의 앞부분이 영동대교의 최북단 교각 아래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뒤쪽의 객실은 그늘 밖에 위치시켜 놓았다.
정말 매끄러운 실력이다. 뱃머리에서 강기슭까지의 거리는 불과 5미터 내외, 물에 뛰어든 다음 바로 코앞의 기슭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
플래시를 챙긴 민구는 뒤를 돌아보았다. 민간인이고, 군인들이고 할 것 없이 다들 헬리콥터에만 혼이 팔려서 열을 내는 중이다. 달아나려면 지금이다. 만약 저놈들이 본다면 분명 귀찮게 붙잡으려 들 것이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려! 그리고 내리기 전에 저 레버를 조금만 앞으로 밀어! 그러면 배가 앞으로 전진할 거고, 우리가 어디에서 멈췄다가 내렸는지 모를 거야!”
난간을 잡고 뛰어내릴 준비를 한 젠킨스가 테라를 통해 말을 전해왔다. 민구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병사들 간의 논의가 끝났고, K―3 사수는 하늘을 향해 총구를 겨눈 채 방아쇠를 당긴다.
투투투투― 투투투투―
“뛰어!”
그 소리를 틈타 젠킨스와 테라는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풍덩―
직접 물에 빠진 두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큰 물소리가 울렸지만, 총소리에 묻혀 배 위의 사람들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뭍에 오른 걸 확인한 민구는 젠킨스가 시킨 대로 레버를 조금 위쪽으로 밀어 올렸다. 곧바로 배의 속도가 바뀌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민구는 깨진 유리창 사이로 비집고 나가서 뱃머리 우현의 난간 위에 올라섰다. 그러고는 망설이지 않고 물속에 몸을 던졌다.
푸우우웅덩~!
순식간에 온몸을 감싸는 검은 강물!
민구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앞으로, 그리고 수면을 향해서 팔을 저어 나갔다. 머리 위로 유람선의 그림자가 검게 드리워진 채 지나간다.
등 뒤에 달고 있는 쿠크리와 비스듬히 걸치고 있는 칼 가방의 무게가 몸을 끌어당기지만, 그리 멀리 가는 게 아니니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여기예요!”
민구가 기슭에 닿자, 교각의 구조물 뒤에 숨어 있던 테라가 작은 목소리로 신호를 보내온다. 민구는 얼른 물에서 빠져나왔다.
“과자… 과자 상자를 가지고 왔어야 하는데!”
젠킨스는 물을 먹고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자신이 잊고 온 과자를 안타까워하며 바닥을 치고 있었다.
“우리가 도망친 거 아직 모르는 것 같아요.”
웃옷을 벗어 물기를 짜내고 있는 민구에게 테라가 말했다. 민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람선을 돌아보았다.
군인 놈들은 아직도 공중에 총을 쏴대고, 플래시를 깜빡거리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가자! 여기 있으면 안 돼!”
민구는 와들와들 떨리는 테라의 가냘픈 손을 잡고 앞서 걸어 나갔다. 이곳은 너무 탁 트여 있다. 헬기가 서치라이트를 비추기 시작하면 대번에 발각되고 만다.
그녀의 곁에서 켁켁거리며 물을 토해내고 있던 젠킨스가 입가를 닦으며 물었다.
“이 남자, 지금 어디로 가려는 거야? 무슨 계획이 있는 건가?”
테라는 굳이 그 질문을 번역해서 민구에게 묻지 않았다. 계획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