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째깍째깍! (5)
“지금 뭐라고 했지? 무한 뭐라고?”
너무나 아찔한 이야기에 오 박사는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되물었다. 그의 표정에서 반가움을 느낀 야구모자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무한 증식과 파괴가 반복되고 있다고 했어요. 물린 발가락에서 증식이요. Proliferation!”
야구모자는 ‘proliferation’을 필요 이상 굴려 발음하며 자신의 어학 실력을 강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하면 해외 영업 이사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으으~!”
오 박사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둘의 행방을 찾기 위해 비상을 걸 시간이다.
상처 부위에서의 무한 증식과 파괴?
이 멍청한 놈이 뒈지기 싫어 급조한 이야기라기에는 너무도 구체적이고 독특하다. 오 박사 자신조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그런 개념. 하지만 야구모자의 말을 듣자마자 그는 그것이 얼마나 면역자다운 독특한 특성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미스터 배인지 뭔지, 그 마녀 년이 달고 다니는 놈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실 타일러 젠킨스가 인정할 만한 면역자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연구할 가치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젠킨스와 면역자, 대단한 보물을 한꺼번에 둘이나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러기 위해서는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건대 쉘터에 수면 가스 쏠 궁리 따위나 할 때가 아닌 것이다.
오 박사는 일단 야구모자 녀석이 잠실을 떠나던 시점에서부터 확인을 시작했다.
“그래… 당신이 잠실을 출발하기 직전에도 젠킨스가 그 면역자와 함께 있는 걸 봤다는 말이지?”
오 박사의 질문에 녀석은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잠실에서 이놈들을 태워 왔던 시간이 오후 세 시에서 네 시경, 그 이후로 난리가 났다고 했으니 아홉 시간가량이 지났다. 당연히 젠킨스가 아직까지도 그대로 잠실에 남아 있다는 보증은 없다.
선로로 이미 이동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야간의 혼란 속에서 벌써 이곳으로 실어 와 지하 차고 안에 가둬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면역자를 수색하러 잠실로 출발하기 전에 먼저 그것부터 확실히 해둬야 한다. 오 박사는 인터폰을 누르고 명령했다.
“나, 오 박사다.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거기 넣어둔 민간인들 중에 외국인이 있는지 찾아봐. 백인에 키도 꽤 크고, 엄청나게 비대한 중년 남자니까 눈에 확 띌 거야. 아, 그리고 혹시 그 사람 일행도 있었는지도 확인하고.”
거기까지 말한 오 박사는 고개를 돌려 야구모자에게 물었다.
“이봐, 당신 면역자 얼굴도 기억하지? 그 인상착의 좀 설명해 봐.”
오 박사의 말을 들은 야구모자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을 지었다.
“인상착의가 뭐에 필요해요? 테라라니까요. 테라가 면역자예요. 그… 검은 미니 원피스를 입었는데요, 멀리서 다리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어요.”
“테라? 그게 뭐야?”
오 박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옆에 앉아 있던 메이저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프랑켄슈타인 같은 그 얼굴이 좋아하는 모양은 기괴했다.
“하, 하, 한국 사람이 테, 테, 테라를 몰라? 크흐흐흐!”
TV도, 연예 뉴스도 거의 보지 않는 오 박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메이저는 다시 설명을 해줬다.
“가, 가수 피, 피, 핑크 펀치는 들어봤지? 끄, 끝내주는 년들 두, 둘 있어. 아, 기, 기, 길게 이야기 할 것도 어, 없었네. 여, 여기에 있잖아.”
메이저는 야구모자에게 주었던 맥주 캔을 돌려 인쇄된 사진을 오 박사 쪽으로 향하게 했다. 오 박사는 안경을 끌어 올리고 캔을 살폈다. 여자 아이돌 둘이 웃고 있는 사진과 이벤트에 응모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메이저가 말했다.
“두, 두, 두 년 중에 까, 까, 까만 머리가 테라야. 아냐, 돼, 됐어! 내가 차, 차, 찾으면 되니까.”
메이저는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기운이 펄펄 나서 테이블을 쾅, 때리고 일어났다. 하지만 한 걸음을 제대로 떼지도 못하고 의자와 함께 뒤로 나동그라졌다. 진통제와 술에 취해 버린 몸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다.
“으! 아으! 이, 이게 왜, 왜 이래? 끄응!”
메이저는 의자를 붙잡고 일어나보려 애를 쓴다. 그 모습을 보며 오 박사는 이 수색에서 메이저가 아무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마취가 풀리자마자 진통제 범벅이 된 몸으로 이만큼이라도 돌아다닌 것이 오히려 대단한 일이다. 오 박사는 다시 인터폰을 눌렀다.
“지하 2층에 가둬둔 여자 중에 테라라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봐. 중요한 일이니까 건성으로 하지 말고 확실히 해! 하나하나 얼굴을 확인하라고! 아까 이야기했듯이 지하 3층에서 뚱뚱한 백인 남자도 찾아보고! 그리고 헬리콥터들에 연락해서 지금 자신이 태우고 있거나 태우기 위해 기다리는 민간인들 중에 테라가 있는지, 현재 위치 어딘지 확인하고 최대한 서둘러서 돌아오라고 해! 돌아오면 출발하지 말고, 내 명령 기다리라고 하고!”
명령을 마친 오 박사는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기대와 흥분으로 가슴이 벌렁거린다. 이렇게 좋을 수가…….
마음 같아서는 나가 있는 헬리콥터들에게 당장 구조고 뭐고 다 그만두고 테라와 젠킨스만 찾아 데리고 오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군인들의 눈치를 봐야 하니 일단 나가 있는 헬리콥터들까지는 정상적인 운행인 척해야 한다.
“출동 준비해! 경비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만 여기에 두고 쉐도우 실드 요원 전원 출동한다. 만일의 사태에도 대비해야 하니까 완전무장하라고 하고!”
메이저를 부축해서 의자에 앉히는 쉐도우 실드 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오 박사는 거추장스러운 가운을 벗어 던졌다.
“지, 직접 나가게? 저, 저, 전투가 버,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내, 내가…….”
메이저는 몸을 가눠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오 박사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넨 좀 쉬어. 아까부터 그러라고 했잖아. 애들 와서 부축해 주라고 할 테니까 두어 시간만이라도 푹 자둬. 술도 마시지 말고! 혹시 선로로 옮겨가 버렸으면 전투를 해야 할 텐데, 그때도 자네가 이런 상태면 힘들어!”
문을 열고 나가려던 오 박사가 야구모자를 힐끔 돌아본다. 야구모자는 잔뜩 기대에 찬 표정으로 가슴이 부푼 채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오 박사는 야구모자를 가리키며 쉐도우 실드 대원들에게 말했다.
“이거, 8층 식사실에 넣어둬.”
식사실?
낯선 단어들 들은 야구모자는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뜻이지? 식당을 여기에서는 식사실이라고 부르나?
그곳에서 수많은 희생자들이 X―1에 마비된 상태로 작은 회장 좀비의 먹잇감이 되었다는 건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작은 회장을 데려가 버려서 식사실에는 이제 아무것도…….”
야구모자의 양팔을 잡고 일으키며 쉐도우 실드 대원들이 물었다. 오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좀비는 나중에 넣으면 되니까, 일단 크레인에만 걸어놔.”
좀비? 크레인?
별로 적절하지 않은 단어가 또 나오자 야구모자의 눈이 흔들린다. 오 박사는 그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축하한다. 네가 오늘 막 시작된 페이즈 2 실험 대상 1호야. 테라인지 뭔지 데려오면 첫 혈청을 너한테 주사해 줄게.”
그리고 그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손목시계를 보니 시간은 자정을 막 지났다. 빨리 준비를 갖추고 출격해야 한다.
“왜 이래요! 이러지 마세요! 살려주신다고 했잖아요! 으윽! 억! 윽!”
야구모자가 쉐도우 실드 대원들로부터 두들겨 맞으며 내지르는 비명이 고요한 복도를 뒤흔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를 동정하거나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야! 여기 다시 연결해! 이 개새끼야! 빠졌잖아! 똑바로 하라고!”
밤톨은 악을 써가며 병사들을 독려하고, 다시 전방으로 총구를 돌려 방아쇠를 당겼다.
투투투― 투투둑― 투투투―
군데군데 파괴되고 무너진 내부 철책 사이로 꾸역꾸역 좀비들이 밀려 들어온다.
찢어진 철책을 비집고 들어와 막아놓은 차량들 사이로 기어 나오는 좀비들. 놈들이 머리를 들이미는 족족 바람구멍을 뚫어주고는 있지만,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점점 놈들이 들어오는 구멍이 많아진다. 이래서야 아무리 쏴봐야 소용이 없다. 잠실 쉘터는 이제 곧 무너진다. 외부 철책 안으로 좀비의 팔이 뚫고 들어 왔을 때부터 이미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그 시간이 너무 빨리 다가왔다.
콰아아아앙―
총알 세례를 받던 차량이 폭발하며 화염에 휩싸였다. 그 부근에 달라붙어 있던 좀비들의 살이 익어가는 악취가 바람을 타고 실려 왔다.
으읍! 밤톨은 치솟아 오르는 구역질을 가까스로 삼켰다. 불탄 좀비의 악취는 평소보다 몇 배나 강해지는 것 같다.
그롸아아아아― 크롸아악― 카아악―
머리와 옷에 불이 붙은 좀비들이 주차장을 가로질러 달려오다가 사살되어 쓰러졌다.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내부 철책 일대는 이제 따로 조명을 비추지 않아도 될 만큼 훤하다.
“도화선 연결 마쳤습니다!”
병사들이 외쳤다. 차량으로 벽을 만들어놓은 2차 저지선을 버리고 퇴각하기 전에 차량들 밑에 소량의 화약과 휘발유를 연결해 뒀다. 좀비들이 여기를 통과할 때 폭파시켜서 놈들의 전진 속도를 조금이나마 지연해 보겠다는 계산이다.
“퇴각! 3차 저지선까지 퇴각해! 퇴각!”
확성기를 든 장교가 고함을 쳤다. 2차 저지선 차량 위에서 좀비들을 향해 사격하고 있던 병사들이 순차적으로 뛰어내린다.
투투둑― 투투투― 투투둑―
탄창을 다 비울 때까지 3점사를 날린 밤톨도 그의 분대원들과 함께 자동차 아래로 뛰어내렸다.
“빠진 새끼 없지? 응?”
밤톨은 분대원들을 챙긴 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1톤 트럭 짐칸에 올랐다.
부우우웅―
인원을 채운 트럭은 곧바로 주차장을 내달려 야구장 쪽으로 접근했다. 거기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병사들을 싣고 실탄을 지급받은 뒤에 제1주차장으로 이동하는 것이 그들의 동선이다.
“야! 여기 있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어?”
텅 빈 제2주차장을 지나오면서 밤톨이 물었다. 태양 그룹으로 이동하기 위해 헬기를 기다리던 민간인들이 잔뜩 줄을 서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시끄럽게 귀를 울리던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도 뚝 끊겼다.
“퇴각하기 전에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옮겼습니다! 이제 그쪽에서 태운답니다!”
“아, 그래! 그럼 우리는 어떻게 퇴각해? 장갑 트레일러 어디로 온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탄창을 교체하던 밤톨이 깜짝 놀라 옆을 돌아봤다. 대답한 상병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야! 너! 너… 민간인 물품 보관소에 있던 놈 아니야? 왜 여기에 있어?”
“예? 아니, 그야… 지원 명령을 받아서… 지금 좀비들이 뛰어다니는데 민간인 물품 지키고 앉아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상병은 당연하다는 투로 답했다. 밤톨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너! 그전에 내가 부탁한 칼 가방 전달했어? 얼굴에 칼자국 난 아저씨가 이동할 때, 조용히 전달하라고 했잖아!”
“못했습니다! 제가 근무 서고 있을 때에는 그분이 안 왔습니다!”
“야이 씨! 줘야 한다니까! 꺼내놓고라도 나오지! 분명히 찾으러 왔을 텐데!”
밤톨은 답답해서 가슴을 치며 방방 뛰었다. 이동 시에 칼 가방을 전달해 주는 것으로 자신과 분대원들이 짊어진 마음의 빚을 갚고 싶었는데, 그게 다 터버렸다.
여기로 옮겨오면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것도 깨끗이 무산됐는데… 이러다가 만약 그 남자가 죽기라도 하면 그게 온전히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야! 너! 열쇠 갖고 있어? 보관소 셔터 열쇠?”
밤톨은 상병에게 손을 내밀었다. 상병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잠시 망설인다. 밤톨은 녀석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 네 말대로 물건 지키고 있어봐야 뭐할래? 이제 여기 몇 시간 안 남았는데!”
그 말을 듣고서야 상병은 밤톨에게 열쇠를 건네준다. 밤톨은 열쇠를 꼭 쥐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차피 실탄을 지급 받고 나면 그들이 가야 하는 위치는 제1주차장. 철로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곳이다. 운이 좋으면 칼 가방을 전달해 줄 수도 있다.
“야! 얘들 다 태우고 물품 보관소 쪽으로 돌아와! 어차피 가는 길에 있잖아!”
트럭이 잠실야구장 앞에 멈추자마자 밤톨은 운전병에게 그 말을 외치고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차량에 오르는 동안 밤톨은 트럭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존해 정신없이 내달렸다.
“하아~ 하아~!”
물품 보관소에 도착한 밤톨은 헐떡이며 자물쇠를 열고 셔터를 들어 올렸다. 칼 가방은 보관소 앞쪽에 따로 빼놓아져 있었다.
삐죽하게 삐져나와 있는 마세티 손잡이에 강민구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이름표 따위가 없었어도 누구의 것인지 너무나 확연히 알 수 있는 물건의 자태이다. 밤톨은 가방을 챙겨서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왔다.
부우우웅―
어느새 대기 인원들과 탄약을 다 실은 트럭이 그를 향해 달려오는 중이다.
☆ ☆ ☆
투투투투― 투투투― 투투둑― 투투투투투투―
등 뒤에서 쉼 없이 울려 대는 총소리를 들으며 민구는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불과 50여 미터 이내로 당겨진 저지선에서 병사들이 죽어라 총을 쏴대는 중이다.
아직 괴물들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지만, 머지않아 저 서치라이트의 범위 내까지도 놈들이 좁혀올 거라는 걸 소리로 알 수 있었다.
그롸아아아아―
괴물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지, 또 얼마나 가까이까지 왔는지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로 상세히 알려준다.
다행인 점이라면 이제 몇 분 내로 그들이 나가야 할 차례가 올 거라는 사실이다. 물론 저 허술한 3차 저지선이 그사이에 무너져 버린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건 없다.
“몇 시야?”
젠킨스가 테라를 통해 물어온다. 민구는 인상을 쓰면서 시계를 이리저리 비췄다. 미키마우스 시계의 야광이 영 시원치 않아서 이렇게 반사각을 잘 맞춰야만 겨우 시간을 알아보는 게 가능하다.
“12시 20분. 그리고 그만 좀 물어보라고 해. 시간하고 상관없는 일이니까.”
민구는 테라에게 일러줬다. 테라는 그걸 또 젠킨스에게 전한다. 좀비 세상이 오기 전에는 각계에서 나름 최고의 위치를 고수하던 사람들이건만, 지금은 세 명을 다 합쳐 끈이 나긋한 어린이용 미키마우스 시계 하나뿐이다. 그래서 이런 우스운 짓을 해야 한다.
“끄아아아악! 아아악!”
어딘가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총소리는 사방에서 울려 대는데,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은 한 군데뿐이다. 바로 잠시 후 그들이 달려 나가야 하는 탄천변의 산책로다.
“좀비들이 또 왔나 봐! 어떡해!”
주변의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울먹였다. 조명도 거의 없는 벌판을 달려 나가야 하니 두려울 수밖에 없다. 언제 어디에서 좀비들이 달려들지 모른다.
쾅쾅쾅쾅쾅― 쾅쾅쾅쾅쾅―
한동안 이어지던 끔찍한 비명은 전차의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난 뒤 끊겼다.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민구는 그 소리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있다. 다수의 괴물들과 한 덩어리로 뒤섞인 민간인들까지 전부… 한꺼번에 사살해 버린 것이다.
비정하기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합리적인 결정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산책로를 깨끗이 정리하지 않으면 앞뒤로 좀비들에게 둘러싸이는 형국이 되고 말 테니까.
“잘 들어.”
민구는 테라에게 속삭였다.
“누군가 괴물에게 물렸다 싶으면, 그 자리에 머물지 말고 곧바로 뛰어. 도우려고 하지도 말고, 무섭다고 머뭇거리지도 마. 무조건 그 자리에서 멀어져야 돼. 만약에 앞으로 갈 수 없으면 뒤로 돌아서라도 뛰어. 안 그러면 결국 총에 맞아 죽는다.”
민구의 말을 들은 테라는 겁먹은 얼굴을 위아래로 끄덕였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겨우 입술을 뗀 테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무서워요.”
그건 말을 듣지 않아도 이미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핏기가 가신 그녀의 입술은 아까부터 계속 바르르 떨리고 있다.
“손을 주무르고, 제자리걸음이라도 계속해. 그렇게 얼어붙어 있다가는 제대로 못 뛰어.”
민구는 그렇게밖에 대답해 줄 수 없었다. 물론 달려드는 괴물의 수가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라면 그가 충분히 지켜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저 밖의 벌판에 얼마나 많은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그동안 이동하면서 물린 놈들이 다 변해 있을 테니, 몇 백 마리로 불어난 채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전차들이 열심히 사살을 한다고는 하지만, 불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것은 아닐 테니까.
민구는 주머니 속의 칼을 꽉 쥐었다. 그 역시 이 계집애가 수십 마리의 괴물들에게 덮쳐져 갈가리 찢기는 꼴은 못 본다.
만약에 그런 상황이 오면… 차라리 자신이 먼저 손을 써서 이 계집애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드는 편이 나을 거다.
콰아아아앙― 콰아앙―
엄청난 폭음과 열기가 등 뒤에서 훅 밀려온다. 2차 저지선이 폭파됐다. 이제 그들을 좀비들로부터 갈라놓는 것은 허술하게 급조한 철조망과 바리게이트 정도뿐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급해졌고, 훌쩍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철조망을 사수하기 위해 방아쇠를 당기는 병사들과 민간인들의 거리는 50미터도 안 된다.
“여기까지가 100인 입니다! 앞으로 나오십쇼!”
민구의 바로 앞에서 줄이 끊겼다. 병사들에게 지목된 100인이 몇 걸음을 내디뎠다. 그 사이로 두 명의 병사가 끼어들어 큰 소리로 외쳤다.
“게이트 밖으로 나가면 무조건 뜁니다! 멈추지 않습니다! 저희가 앞에서 인도할 테니까, 이 불빛만 따라오시면 됩니다! 선착장까지 800미터! 거기까지만 가시면 유람선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병사들이 설명을 하고 있는 동안에 게이트를 통해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전차가 들어왔다.
동쪽에서 밀려오는 좀비들을 저지하기 위해서라지만, 지금까지 산책로를 지키던 전차가 한 대 줄었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불안에 사로잡혔다. 민구에게도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민구 형님! 민구 형님!”
그때, 총소리 사이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게 들린다.
뭐지? 내 이름을 알 만한 사람이 없는데… 형님이라고 부를 사람은 더 없고……. 착각인가?
민구는 의외라고 생각하면서 줄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밤톨이다. 민간인들 사이로 플래시를 비추던 밤톨도 민구를 알아보고 달려왔다.
“형님! 이거!”
밤톨은 민구에게 칼 가방을 내밀었다. 민구는 다른 병사들의 눈치를 살피며 가방을 받았다. 다들 이동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서 긴 가방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은 없어 보인다. 밤톨은 큰 짐을 내려놓았다는 듯 웃었다.
“하, 하하하! 다행입니다! 약속했던 대로 그걸 돌려드릴 수 있어서! 엇!”
환하게 웃던 밤톨이 깜짝 놀란다. 민구의 곁에 서 있는 테라를 보았기 때문이다.
“으아, 그동안 잠실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실물로 본 적 없었는데…….”
테라와 눈인사를 나누면서 밤톨은 잠시나마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사람이 아니라 인형 같다고 했던 김 이병 새끼의 말이 구라가 아니었다.
“테라 씨! 이 형님 곁에 바짝 붙어 계세요! 확실히 지켜 드릴 겁니다!”
밤톨은 그녀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고 바리게이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예상치 못했던 도움에 민구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밤톨에게 고백했다.
“나…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놈이 아니야! 무술가 같은 것도 아니고!”
“압니다.”
고개를 돌린 밤톨이 웃었다. 그런 후, 그는 칼 가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제 그걸 좋은 데 쓰실 거라는 것도 잘 알고요.”
젠장! 민구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
“살아남으세요!”
그 말을 남기고 밤톨은 바리게이트 쪽으로 달려갔다. 화약 연기가 철조망 주변을 자욱하게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