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째깍째깍! (3)
내 칼이라도 찾을 수만 있다면……
철책 너머 도로의 괴물들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던 민구는 개인 물품 보관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마세티만 손에 넣는다면 길을 트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세티가 너무 커서 안 된다면 쿠크리라도… 하여간 제대로 날이 선 큰 칼이 필요하다. 일격으로 괴물의 목을 끊을 수 있는, 그런 칼이.
하지만 개인 물품 보관소는 셔터가 굳게 내려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근처를 지키는 군인도 없다. 다들 어딘가에서 괴물들에게 총질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왜? 왜 이쪽으로 오신 거예요? 하아~ 하아~”
테라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민구는 그제야 그녀를 돌아보았다. 사람들과 부딪치며 뛰어오느라 그녀의 가느다란 팔과 다리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다. 민구는 철책 밖의 지하철역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하철… 지하철로 들어가야 돼. 거기로 가야 다들 살 수 있어.”
“네? 지하철이 왜?”
민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테라가 다시 물었다.
“저 아래로 내려가면 괴물들이 그리 많지 않아. 느리기도 하고. 한밤중에 강변을 뛰어다니는 것보다는 이쪽으로 가는 편이 훨씬 안전할 거야. 군인들… 군인들에게 말해야 돼.”
민구는 군인들을 찾기 위해 바쁘게 고개를 돌렸다. 사방에서 총소리는 울리는데, 정작 군인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다.
잠시 후, 무장을 갖추고 뛰어나오는 한 무리의 군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민구는 그들을 향해 달려가며 외쳤다.
“잠깐! 잠깐만! 저기! 이쪽 도로에 있는 괴물들을 죽이고 지하철로 들어갑시다! 아직 그리 많지 않으니까 별로 어려울 것 없소!”
“네에?”
병사들이 눈살을 찌푸린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민간인 놈이 갑자기 지휘를 하려 드니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엉뚱하게 지하철이라니…….
“선생님, 당황하신 건 잘 알겠지만, 다른 분들과 함께 병사들의 지시를 따르셔야 합니다. 그래야 보호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제 여기는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곧 폭발물을 설치할 거니까 돌아가세요!”
인솔자로 보이는 군인이 민구를 타이르고 다시 뛰어가려 한다. 민구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게 아니야! 이쪽이 훨씬 더 안전해! 당신들도 살아야 할 것 아냐? 기억해 보라고! 지하철역에서 괴물들이 나오는 걸 본 적 있소?”
그 말에 병사들의 표정이 흔들린다. 정말로 이 사내의 말처럼, 지하철역에서 좀비가 기어 나오는 꼴을 보았던 기억은 없다. 그런데… 정말로 유심히 보았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그렇지는 않다.
철책을 향해 달려들 때를 제외하면 좀비가 어디로 가고 어디에서 오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어차피 그것들은 장벽 밖의 존재들이었으니까. 병사들은 서로의 기억을 공유해 보기 위해 술렁였다.
“야! 거기서 뭐해! 이 새끼들아! 빨리 안 튀어와?”
2차 저지선 쪽에서 장교가 큰 소리로 호통 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네, 넷! 갑니다!”
병사들은 황급하게 그 장교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민구의 설득은 실패로 끝이 나버렸다.
“젠장, 바보 같은 놈들! 왜 자꾸 죽는 길로 가라고 하는 거야!”
동쪽으로 뛰어가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보며 민구는 분통을 터뜨렸다. 여기에서 살아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는다.
결국 지하 선로에 대한 미련을 버린 민구는 테라와 젠킨스를 이끌고 다시 제1주차장을 향해 뛰었다.
그사이에 줄선 사람들은 조금 더 늘어나 있었고, 그들 세 명은 가장 끝에 합류해야 했다. 이미 해가 거의 다 넘어가 버린 뒤여서 사방은 어두컴컴하다.
콰아아앙―
동쪽에서 폭발이 일어날 때마다 그들이 있는 곳까지 섬광이 번뜩였다. 그리고 이 지독한 좀비의 악취.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를 딱딱 부딪칠 만큼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었다.
“테라 양, 이 줄을 따라가면 어디에 도착하게 되는 거지?”
양복 안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지도를 꺼내 편 젠킨스가 테라에게 물었다. 테라는 어두운 그늘 아래서 한동안 지도를 쳐다보다가 한 점을 짚었다.
“아마 여기일 거예요. 유람선에서 내리자마자 철로로 이동한다고 했거든요.”
그녀가 짚은 곳은 용산역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마지막 부메랑이 설치된 장소.
젠킨스는 지도의 축적에 맞춰 거리를 짐작해 봤다. 대략 1.5킬로미터 정도인 것 같다. 그렇다면 철로에 도착해도 부메랑까지 신호를 전달하기는 어려울 거다.
“으음…….”
젠킨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신호를 보내려면 철로에 도착한 뒤에 또다시 500미터 이상을 북동쪽으로 전진해야 한다.
그게… 가능할까?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 행렬을 따라 서울을 벗어나 버리면 그때는 언제 또다시 부메랑이 있는 곳에 접근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물론 무사히 철로까지 도착하지 못한다면, 이런 고민들은 전부 아무 소용이 없는 것들이다. 그래도 젠킨스는 오로지 지도를 바라보는 데 집중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두려워서 미쳐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위험하고 원시적인 이동… 그는 평생 해본 적도 없고, 해낼 자신도 없다. 신체적인 조건을 놓고 본다면, 여기 모여 있는 수천의 사람들 중 그 자신이 가장 불리하다.
“야! 라이트 어떻게 된 거야? 여기 조명 다 밝혀!”
민간인 인원수를 헤아리고 있던 장교가 어딘가를 향해 소리쳤다. 잠시 후, 가로등과 서치라이트에 불이 켜지자 상황이 좀 더 명확하게 시야에 들어왔고, 사람들의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수천의 사람들이 이동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그들 대부분은 가방 하나조차 제대로 챙겨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이동할 병사들의 수는 60명도 채 안 되는 것 같다.
나머지 병력은 모두 동남쪽의 2차 저지선에서 좀비들과 대치 중이거나, 그 뒤쪽에 아주 허술한 3차 저지선을 설치하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다. 듬성듬성 놓여 있는 바리게이트가 너무 무력해 보여서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빨리빨리 나가요! 뒤에 사람 많다고!”
총소리에 놀라 가슴을 쓸어내릴 때마다 뒷줄 사람들은 앞을 향해 빨리 이동하라고 재촉해 댔다. 그래봐야 줄은 별로 빠르게 줄어들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차라리 태양 그룹으로 가겠다며 자리를 이탈하기도 했다.
“열 줄씩 끊겠습니다! 네 명의 병사가 호위합니다! 여러분은 그냥 아무 생각 마시고 앞에서 달려가는 병사와 거리만 유지하시면 됩니다! 여기! 여기까지가 한 조입니다!”
군인들은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이동 요령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어지간히 마음이 급하지만, 유람선에 태울 수 있는 인원이 제한적이니까 무작정 막 내보낼 수는 없다.
‘젠장, 이런 속도라면 새벽이 되어야 겨우 우리 차례가 오겠군…….’
민구는 초조한 표정으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이들을 찾아주느라고 소모된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렇게 여기저기로 뛰어다니지만 않았어도 줄의 중간쯤에는 설 수 있었을 텐데…….
크르르릉~
정원을 초과해서 민간인들을 태운 장갑 트레일러가 서쪽 게이트를 통과해서 도로로 나간다. 민구가 구했던 꼬맹이들도 저기에 타고 있을 것이다.
장갑 트레일러를 타고 나섰다가 사고를 당해본 경험이 있으니, 저게 무적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그래도 맨몸으로 달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안전하다.
“걱정하지 마. 그 어린 것들은 살 거야.”
걱정스러운 눈으로 장갑 트레일러를 바라보고 있는 테라에게 민구가 말했다. 그 말을 하고 나자 우습게도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테라가 민구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제가 부탁하는 바람에 아저씨까지 늦으셨네요.”
민구는 호주머니 속의 캠핑용 나이프를 만지작거렸다. 사람의 목숨은 빼앗을 수 있지만, 괴물들의 목을 자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날 길이.
게다가 자신은 몸이 아직 온전치 못하다. 그러니 지금의 민구로서는 저 철책 밖으로 나갔을 때, 너무 많은 수의 괴물들과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아무도 안 죽으면 미안할 일도 없지.”
민구는 나지막이 대꾸했다. 물론 허세였다.
☆ ☆ ☆
“으아, 엄청나네… 손이 이 지경이 될 정도였으면 맞은 사람 얼굴은…….”
고 하사가 태권소녀의 주먹에 약을 발라주며 인상을 쓴다. 곁에서 플래시를 비추고 있던 병사도 얼굴을 찡그렸다.
태권소녀의 두 주먹 너클 파트는 온통 살갗이 벗겨져 빨간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그 부위에 두꺼운 굳은살이 박혀 있는, 태권도 선수의 손이 이렇게 될 정도면 손가락뼈가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다.
“윽!”
살갗이 벗겨진 부위에 소독약이 닿을 때마다 태권소녀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킨다. 고 하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아픈데 왜 이제야 의무실로 왔어? 싸움이 끝나자마자 찾아왔어야지.”
“그냥…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도 별거 아니고. 제니가 하도 치료하라고 성화를 해 대서…….”
“제니요?”
플래시로 비춰주고 있던 병사가 깜짝 놀라 묻는다. 태권소녀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건대에 오기 전 제니를 보았던 고 하사와 강 소위를 제외하면 제니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다.
“아니~ 쟤네, 쟤네들. 이 새끼야, 귓구멍이 어떻게 됐냐? 이 상황에서 제니가 왜 나와?”
당황스런 상황을 고 하사가 단 번에 수습해 주었다. 태권소녀도 안심하고 이야기를 이었다.
“그리고 강 소위님하고 김 중사님 분위기도 좀 그래서…….”
“분위기가 그렇다는 게 무슨 소리야? 태양 그룹 직원이 아니라, 회장이라도 너희들이 개새끼라고 하면 개새끼인 거지. 설마 강 소위님이 그걸로 뭐라고 했어?”
고 하사는 약을 바르던 손을 멈추고 물었다. 하루 종일 의무실 구석에 파묻혀 다친 사람들 뒤치다꺼리만 해주느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는데, 오늘 아주 대단한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태권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하지는 않았는데요… 에, 그런 걸 뭐라고 해야 되나… 하여간 걱정이 많아 보였어요. 민간인들한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했고.”
“그래? 섭섭했겠는데? 사실 너희가 우리한테 해준 거 생각하면 뭐든지 오케이 해줘야 하는 상황이긴 한데…….”
고 하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재생 연고를 꺼냈다. 태권소녀의 상처에 조심해서 연고를 발라주며 고 하사는 말을 이었다.
“그냥, 좋게 이해 좀 해줘. 이 조직이라는 게,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때가 많거든. 강 소위님도 진심은 너희들 편이었을 거야. 알지? 결코 은혜를 잊을 사람은 아니야.”
“강 소위님 애 많이 쓴 거 알아요. 진우랑 같이 헬리콥터 잡고 있던 군인들한테, 자기가 명령했다고 하라고도 말해줬고요. 솔직히 처음에 김 중사님이 끼어들어서 말릴 때에는 좀 서운하기도 했는데… 한 시간 정도 지나고 나니까 그분들 입장도 이해가 가고, 또 그 새끼 하나 때려죽인다고 해서 뭐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싶기도 하고… 뭐, 그러네요.”
태권소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손에 정성껏 붕대를 감아준 뒤, 고 하사는 알약을 몇 개 내밀었다.
“이거 한 이틀 정도는 끼니때마다 챙겨 먹어. 요즘 같은 때 곪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진다. 그리고 붕대도 자주 갈아줘야 돼.”
“그럴게요. 고맙습니다.”
태권소녀는 약통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 하사는 장난스럽게 빙긋 웃고 자리에서 일어나 더 깊이 하리를 굽혔다.
“무슨 말씀, 나야말로 죽을 때까지 고마워해야 하는데.”
“에이, 그러지 마요. 쑥스럽게… 그건 그렇고, 아저씨도 좀 쉬셔야 할 것 같은데요. 얼굴이 완전 반쪽이에요.”
“아아, 그렇게 보여? 뭐, 잘됐구만. 안 그래도 얼굴이 커서 걱정이었는데. 크크큭.”
고 하사는 시커멓게 그늘이 진 눈 주변을 문지르며 웃었다. 정말 무사히 끝났다고는 하지만, 전쟁은 전쟁. 찢기고 깨진 사람들이 꽤나 많아서 하루에 두 시간도 눈을 붙이기가 어렵다.
그가 외면해 버리면 다들 생으로 앓아야 하니까 자꾸 무리하게 된다. 얼마나 바빴는지, 임수정의 얼굴을 볼 시간도 제대로 없었다.
“그래, 좀 쉴게. 하지만 혹시 조금이라도 아프면 곧바로 이리로 와. 내 걱정 하지 말고.”
“훗, 벌써 다 나은 것 같아요.”
태권소녀는 붕대 감긴 손을 씩씩하게 들어 보이며 문을 나섰다. 체육관 밖에서는 친구들이 강 소위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받으세요. 이게 있으면 강 소위님이 태양 놈들 때문에 처벌 받으실 일은 없을 겁니다.”
코스트코에서 막 돌아온 유빈이 강 소위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진실을 군인들에게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일부러 진우와 함께 코스트코까지 다녀온 참이다. 강 소위는 아주 새 것인 티가 물씬 나는 휴대폰의 동영상 재생기를 켰다.
[그롸아아아― 그롸아아아―]
화면 안에서 양복을 입은 좀비가 울부짖고 있었다. 좀비가 크레인에 매달려 있는 남자의 옆구리를 물어뜯자, 빨간 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음!”
스너프 필름을 보는 것 같은 충격에 강 소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좀비는 열심히 남자의 근육을 찢어냈고, 잠시 뒤에는 내장이 흘러나왔다.
화면 안에 스마트폰의 프레임이 함께 찍힌 것으로 보아, 원본은 아니었다. 원본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재생시키고, 그것을 코스트코에 진열돼 있던 이 휴대폰을 이용해 찍은 것이다.
“끔찍하기는 한데, 이게 태양 그룹에서 인체실험을 한다는 증거가 될까? 그냥 좀비가 사람을 잡아먹는 거잖아.”
강 소위가 물었다. 유빈이 좀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이놈 누군지 모르시겠어요? 태양 그룹 작은 회장이잖아요.”
그래? 강 소위는 화면을 다시 쳐다봤다. 이 코, 이 턱 모양… 말을 듣고 보니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정도는 닮은 사람이라고 발뺌을 해도 그만이다. 유빈이 다음 영상으로 넘어가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그리고 그 뒤에 보시면 어떤 아저씨가 쭉 읊는 동영상도 있어요. 태양 그룹 용산 본사라고 건물 여기저기 찍고, 그다음에 작은 회장 좀비 찍고, 자기들이 뭘 하는지도 말해요.”
강 소위는 다음 영상을 재생시켰다. 신 차장이 자신의 얼굴과 건물을 번갈아가며 찍은 동영상이다. 미리 언질을 들은 일이지만, 실제로 영상을 본다는 건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런 짓을… 그것도 굴지의 대기업이라는 놈들이…….
이런 놈들이 협력 업체랍시고 민간인들을 데려간다고 생각하니 그게 너무 아찔해서, 강 소위는 이를 악물었다. 이건 확실히 증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이 영상은 이 사람에게서 받은 건가?”
“네.”
“이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나? 이 동영상도 좋지만, 증인이 함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강 소위의 말을 듣고 있던 보안관이 고개를 저었다.
“죽었어요. 아까 그 새끼들처럼 검은 군복 입은 새끼들이 쏜 총에 맞아서.”
“…그렇군.”
강 소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간 기업 놈들이 사람을 마음대로 쏴 죽였다는데도 그리 놀랍지가 않다.
“이건… 내가 잠실에 도착하는 대로 꼭 문 대위님께 전달하겠어. 다른 분들이라면 어떨지 모르지만, 문 대위님은 믿을 수 있는 분이니까… 좀 더 일찍 이런 걸 알았으면 좋았을걸. 하필 잠실도 다 비우는 분위기라고 해서 민간인들도 태양으로 엄청 넘어갔을 텐데…….”
강 소위의 말을 듣고 있던 유빈과 친구들이 깜짝 놀랐다.
“뭐라고요? 잠실을 비워요?”
“아, 그렇다고 하더라고. 이동한다는 건 알았어도 그렇게 임박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는데, 나도 아까 태양 그룹 헬리콥터 무전기로 교신하면서 그 얘긴 처음 들었어. 잠실에 있던 민간인들 다 서울보다 훨씬 남쪽으로 이동시키는 거거든…….”
친구들 모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비쳤다. 테라를 데리고 나와야 하는데… 만약에 잠실까지 갔는데 테라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게다가…….
“만약에 테라가… 태양으로 갔으면 어떻게 해?”
태권소녀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되면 조용히 데리고 나온다는 게 거의 불가능해진다. 아니, 그보다 벌써 끔찍한 일을 당했을까 봐 두렵다.
“아니요, 언니. 테라는 절대로 태양 그룹으로는 가지 않아요.”
제니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들이 작은 회장을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태권소녀가 다시 물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가 있어?”
“그냥 알아요. 걔도 나만큼 태양 그룹을 싫어하니까요. 믿어도 돼요.”
제니가 말했다. 조금의 의심도 없는 것 같은 태도다. 강 소위는 그제야 의문이 해소됐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테라를 만나러 가는 거였구나… 나도 참 바보군. 이쪽에 제니 양이 있는 걸 봤으면서도, 자네들이 잠실에 가겠다고 하는 이유를 몰랐으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거였는데 말이야. 만약 테라가 태양으로 가지 않을 게 확실하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테라 양이 어디쯤 있는지는 잠실 병사들 전체가 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친구들의 마음은 바빠졌다. 잠실로 가서 몰래 테라를 데리고 나온다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으므로.
강만 건너서 지하철 선로를 이용해 돌아오면 되는 일이었는데, 만일 그녀가 서울을 벗어난 상태라면……. 그럼 코스트코로부터 너무 멀어진다. 이동 경로가 길면 당연히 여러 사람의 눈에 띌 수밖에 없고, 결국엔 조용한 탈출이라는 게 불가능해질 거다. 안전 문제도 심각해진다.
“안 되겠어! 지금이라도 가보자!”
보안관이 배낭을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잠깐만, 어디를 간다는 거야? 잠실에? 이렇게 밤늦은 시간에?”
강 소위가 깜짝 놀라 물었다. 보안관은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네. 한시라도 빨리 가야 조금이라도 덜 멀어졌을 때 만나죠.”
“그건 너무 무모해. 아무리 광훈 군이나 진우가 뛰어나다고 해도 지금 이렇게 깜깜한 밤이야. 플래시 불빛 범위 밖에는 안 보인다고. 그런데… 잠실까지 그 먼 곳을 어떻게 가겠다는 거야?”
보안관이 멈칫한다. 생각해 보니까 밤에 좀비들이랑 싸웠던 기억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유빈도 강 소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밤중에 복지 센터 뒷산을 오르다가 레이저 와이어에 다리를 크게 다쳤던 경험도 그에게 신중하라고 충고한다.
“어차피 잠실에서도 일몰 후에는 이동을 하지 않을 테니까, 내일 동이 튼 이후에 출발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은데.”
강 소위는 간곡하게 보안관을 설득했다. 그는 이 용기가 흘러넘치는 다혈질 영웅이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두려웠다.
물론 강 소위는 지금 잠실이 완전히 궤멸 직전이라는 사실 같은 건 전혀 모르고 있다. 그저 이동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밤에 움직이는 건 힘들기는 해. 나는 좀비가 안 보여도 좀비들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정말 귀신같이 알거든. 뭐, 그렇다고 못 싸울 만큼 난이도가 높아지는 건 아니지만… 웬만하면 피하는 게 현명하지.”
진우가 말했다. 유빈은 보안관의 어깨에서 배낭을 벗겨내고 그를 달랬다.
“보안관, 미리 준비 다 해놓고 있다가 내일 해 뜰 때 출발하자. 해 뜰 때라고 해봐야 이제 몇 시간 안 남았어.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야 있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