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380화 (380/449)

5장 규모 여섯 접근 중! (4)

사람들 다 보는 데서 여자랑 싸우라고? 이게 무슨… 아니, 그것보다도 왜 이야기가 갑자기 그렇게 돼? 가해자라니! 맞은 건 나라고!

메이저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보안관을 돌아봤다. 보안관의 표정은 단호하고 사납다. 타협의 여지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얼굴이다.

“그래, 와라. 나한테 이기면 그냥 보내준다.”

태권소녀도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다가온다. 메이저와 쉐도우 실드 대원들은 이 상황을 믿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왜? 군인들이 개입했는데도 이 시비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지? 여기는… 군인이 전혀 통제를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장난치는 겁니까? 보급과 구조라는 중요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민간인이 끼어들어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도록 그냥 방치하실 거냐고요?”

양복쟁이는 주변에 모여든 병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보통 이 정도 되면 군인들이 나서서 저 덩치 큰 근육덩어리와 그 일행들을 한쪽으로 밀어내야 정상이다.

하지만 여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병사들은 오히려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쉐도우 실드 대원들을 노려보고 있다. 방금 전, 자신들이 이 건대 쉘터의 영웅 중 한 사람을 건드렸다는 것을 태양 그룹 직원들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야 추후에 또 지원을 나올 수 있겠습니까? 군에서 저희 직원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셔야지요!”

일반 병사들에게 하소연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양복쟁이가 강 소위를 향해 거칠게 항의한다. 강 소위가 대답할 말을 고르고 있는 동안에 보안관이 먼저 나서서 녀석의 말을 받아쳤다.

“안전 보장해 줬지! 근데 누가 성추행하래? 이 개새끼야! 엉뚱한 소리 하지 마! 이 세상 어디에서 그딴 걸 해도 모르는 척하고 봐줄 것 같아!”

양복쟁이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보안관의 목소리가 어찌나 크고 사나운지, 호통 치는 걸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에 무리가 오는 것 같다. 하지만 양복쟁이는 이런 협상의 프로로서 투입된 인물이다. 말주변이라면 자신이 있다.

“아니… 자꾸 성추행이라고 하시는데…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런 적 없습니다… 오해예요. 막말로 증거가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폭행당한 증거가 있습니다. 이거 심각한 문제예요.”

달변의 양복쟁이가 뱀 같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때, 규영이가 휠체어 바퀴를 밀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 언젠가 블로그에 올리겠다는 야망에 녀석이 항상 몸에서 떼어놓지 않던 ‘십오 세 여름 어쩌고저쩌고’ 하는 그 카메라다.

“이 사진이면 증거로 충분할 것 같은데요?”

규영이 내민 카메라의 액정에는 보안관이 개입하기 직전의 상황이 찍혀 있었다. 극적인 순간을 아주 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인물은 모두 네 명. 모두 한데 뒤엉켜 있다.

마운트 포지션을 차지하기 위해서 태권소녀의 허벅지를 끌어안고, 다리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놈. 태권소녀의 팔을 잡아 자신의 허벅지 쪽으로 끌어당기는 놈, 그리고 빙글거리며 내려다보는 메이저.

태권소녀는 머리칼이 헝클어진 채 입을 벌리고 있다. 마치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이건 너무 악의적으로 편집된… 이 장면만 보면 그런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만하면 서로 된 거 아닙니까? 여기 장교님께서도 중재하시겠다고 하셨고…….”

양복쟁이가 당혹스러워하며 다소 기가 죽어 말을 더듬자, 보안관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뭔데 됐다, 안 됐다를 마음대로 판단하는 거야? 저 장교도 마찬가지야. 어차피 이 일에 아무 상관 없는 남이야. 나는 하나도 해결 안 됐어. 자, 지금부터 너희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야.”

보안관은 메이저와 양복쟁이의 눈앞에 검지와 중지를 펴 보였다.

“혜주랑 싸워서 이기고 돌아가든지, 아니면 여기 갇히는 거다. 이 개새끼들아, 빨리 선택해.”

“두, 둘 다 시, 시, 싫다면?”

메이저가 숨을 헐떡거리며 물었다. 보안관은 녀석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럼 나한테 존나게 맞는 거지.”

보안관의 도발을 들은 메이저의 얼굴에서 경련이 일었다.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수준의 모욕.

이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감히…….

메이저는 이를 악물었다. 총만 휴대하고 있었으면 당장에라도 쏴 죽여 버리고 싶다.

하지만… 이미 그들이 타고 온 헬기는 군인도 아닌 놈에 의해 완전히 장악당한 상태고, 그는 맨손으로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만 한다.

쉐도우 실드 대원들과 양복쟁이는 그의 눈치만 보고 있다. 대장으로서의 권위가 철저히 짓밟혀 버린 메이저는 미간을 찌푸린 채 괴로운 숨을 내뱉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가장 멋지게 보일지는 메이저도 잘 알고 있다. 이 근육 덩어리를 지목하고 그와 맞싸워 박살을 내주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도저히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몸은 솔직하다. 딱 두 대를 맞았을 뿐인데도, 이 짐승 같은 녀석의 주먹을 보면 간이 조마조마해진다.

서로 나이프를 들고 진검 승부를 하자고 해볼까…….

메이저는 잠시 그런 유혹에 빠졌다. 서로 무기를 들면 이 덩치가 가지고 있는 강펀치의 위력은 반감된다. 어차피 칼날이 주 무기가 될 테니까. 자신은 칼을 쓰는 싸움에 익숙하다.

‘아니… 그래도 힘들 것 같아.’

진검 승부를 제안하려던 메이저는 이내 그 생각을 접어버렸다. 지금 숨만 쉬어도 욱신거리는 왼쪽 옆구리와 갈비뼈… 어딘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

팔꿈치에 맞아 찢긴 오른쪽 눈은 순식간에 퉁퉁 부어올라 있다. 눈이 자꾸 감기는 것도 문제지만, 피가 흘러나와 시야를 가린다.

그리고 코… 부러진 코 때문에 호흡이 가쁘다. 이런 상황에서 나이프를 들고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다고? 그건 미련한 짓이다. 결국 메이저는 쉬운 길을 택하기로 했다.

“그, 그, 그렇게 피, 피가 보, 보고 싶나? 조, 좋아. 여, 여, 여자한테 소, 손대고 싶지는 않지만, 계속 조, 졸라대니 어쩔 수 없지.”

전술 조끼를 벗은 메이저는 부러진 코뼈를 잡고 조금이라도 방향을 제대로 돌려 보려 애를 쓰며 말했다.

여자 때리기… 지난 한 달 동안 그가 최선을 다해서 수많은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실력을 쌓아온 종목이다. 여자의 얼굴을 전력으로 때릴 때, 망설이거나 힘을 빼지 않을 자신이 그에게는 있었다.

“야! 여길 봐!”

보안관이 손가락을 튕기며 메이저를 불렀다. 돌아보니 보안관의 옆에는 카메라를 든 규영이 있다. 아마 증거를 남기기 위해 동영상 모드로 녹화 중인 것 같다. 보안관이 말했다.

“서로 합의하고 싸우는 거다. 알지?”

훗, 미친 놈. 메이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물었다.

“루, 룰이 뭐야?”

보안관은 태권소녀를 한 번 돌아보고 나서 대답했다.

“맨손 싸움. 그거 외에는 없어.”

“그, 그, 그럼 저년을 주, 죽여 버려도 되나?”

메이저가 도발적으로 물었다. 보안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흥, 해보든가.”

“큭큭큭, 야, 그, 그런데 너희 뒤, 뒷일은 새, 생각 안 하나? 구, 구조해 줄 사람을 이렇게 대, 대, 대접하면 저 민간인들 모, 목숨은 어, 어떻게 감당하려고.”

메이저는 마지막으로 한 번 허세를 부리며 협박을 해봤다. 보안관은 메이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의 허리를 걷어차며 말했다.

“네 모가지 걱정이나 해, 이 새끼야. 남 걱정하지 말고.”

그 발차기조차도 바람처럼 빠르다. 충격을 받은 메이저는 비틀거리며 태권소녀의 앞으로 밀려 나갔다.

“윽!”

메이저는 가드를 올리며 기습에 대비했다. 하지만 태권소녀는 그렇게 빈틈 따위를 노리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준비됐냐?”

태권소녀가 메이저를 노려보며 물었다. 메이저는 대답하지 않고, 숨을 골랐다. 이년… 몇 번 보지는 못했지만, 계집년 주제에 발차기가 꽤나 날카롭다. 그의 쉐도우 실드 부하들 중 가장 무술 실력이 좋은 놈들과 붙인다고 해도 승부를 장담 못할 정도는 된다.

하지만 그래봐야 여자. 여자치고는 키가 크다고 해도 170 남짓, 몸무게도 결코 60킬로그램이 넘지 않을 터였다.

메이저는 그녀보다 키가 10센티 가까이 크고, 몸무게는 25킬로그램 이상 더 나간다. 두 대를 맞고 한 대를 때려도 그가 유리하다.

“서, 서, 선수는 양보하지. 머, 먼저 들어와.”

메이저는 찢긴 오른쪽 눈 주변으로 가드를 높이 올린 채 말했다. 부러진 코도 그렇고, 피가 흐르는 눈꺼풀도 그렇고, 몇 번만 집중적으로 쪼이면 견디기 힘든 통증과 함께 기능의 마비가 올 상태다. 분명 이년도 거길 노릴 것이다.

“으라앗!”

태권소녀는 기합 소리와 함께 풀쩍 뛰어 거리를 좁히면서 날카로운 옆차기를 연속으로 날렸다. 메이저는 왼손으로 그녀의 공격을 뿌리치고, 고개를 젖혀 피했다.

‘존나게 빠르군…….’

메이저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무릎이 접힌 채 날아온 발차기는 각도를 제멋대로 바꾸며 채찍처럼 휘갈겨 댄다.

“으라압!”

기회를 엿보던 메이저는 태권소녀의 발을 옆으로 밀면서, 그녀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까 쉐도우 실드 놈들과 몸싸움을 할 때에도 이년은 근접해 온 적에 훨씬 더 약한 모습을 보였다.

빠악―

팽이처럼 몸을 돌린 태권소녀가 뒤돌려 차기를 뻗었다. 겨우 팔로 막아낸 메이저는 지릿지릿하게 저린 팔을 문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가드를 내려서 막지 않았더라면 명치에 그대로 꽂힐 뻔했다.

“이익! 익!”

이후에도 메이저는 몇 번이나 태클을 하려는 시늉을 하다가 다시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그는 저년의 머릿속에 태클이라는 한 단어가 계속 불이 켜진 채 박혀 있기를 원했다.

그리고 다시 날아든 태권소녀의 발차기! 하지만 태클을 의식한 때문에 자세는 온전하지 않다.

휘이익―

눈앞으로 바람을 가르며 지나가는 발차기를 피한 뒤, 메이저는 빠르게 몸을 회전시켜 돌려차기를 날렸다. 이 싸움 내내 그가 선보인 첫 발차기였다.

빠악―

태권소녀의 가드에 발차기가 막히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메이저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진다. 애초부터 이 발차기를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충격을 주기만 하면 된다.

“윽!”

전투화 뒤꿈치에 팔을 걷어차인 태권소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보안관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9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근육질 남자의 발차기는 강력했다. 그 흔들리는 틈을 타서 메이저는 재빨리 로우킥을 날렸다.

쫙―

태권소녀의 허벅지에 제대로 감긴 로우킥은 가죽 허리띠로 후려친 것 같은 맑은 소리를 냈다. 태권소녀의 몸이 휘청한다. 기울어진 그녀의 옆구리에 메이저의 훅이 날아가 꽂혔다.

“으윽!”

태권소녀는 몸이 확 틀어진 채 밀려났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놈, 꽤 한다.

“이야앗! 으아압!”

한 번 승기를 잡은 메이저는 쉬지 않고 펀치를 날리며 몰아쳤다. 태권소녀는 가드를 바짝 올린 채 그 주먹들을 어깨와 팔로 받았다. 거리를 벌려야 하는데, 중심을 잡기도 힘들다.

빠아악―

메이저가 내지른 강력한 스트레이트가 태권소녀의 가드를 뚫고 가슴을 때렸다. 엄청난 통증! 태권소녀의 몸이 휘청하고 뒤로 날아간다.

“크으윽!”

가까스로 다시 몸을 추스른 태권소녀의 등에 단단하고 넓은 것이 닿았다. 보안관의 가슴이다.

“아니, 나 아직… 싸울 수 있어!”

혹시라도 보안관이 끼어들려고 하는 걸까 봐 걱정이 된 태권소녀는 다급하게 외쳤다. 보안관은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누가 뭐래?”

보안관은 태권소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한마디를 더했다.

“이길 수 있어.”

“나도 알아.”

태권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메이저 쪽으로 다가갔다. 메이저는 입을 벌린 채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녀석도 몸이 성치 않은 상태에서 조금 전의 소나기 펀치를 휘두르느라 꽤나 많은 체력을 소모한 상황이다.

“흐아아!”

태권소녀는 오른발 로우킥으로 첫 스텝을 뗐다. 메이저는 얼른 발을 들어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태권소녀는 로우킥을 날렸던 발을 내디디며, 그 회전력을 살려 왼발돌려차기를 했다.

다시 한 발 뒤로 물러나 그 발차기를 피한 메이저는 태권소녀가 아직 중심을 잡기 전에 공격을 해보려고 달려들었다.

그것이 태권소녀가 기다리던 반응이었다. 돌려차기의 탄력을 그대로 살린 태권소녀는 몸을 부웅 띄운 채 오른발로 녀석의 목덜미를 감아 찼다.

빠각!

제대로 들어간 발차기가 통쾌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메이저는 거인에게 패대기쳐진 사람처럼 바닥에 쭉 뻗었다. 태권소녀는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그 위로 올라탔다.

“이이익! 이익!”

메이저는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도 풀 마운트 자세를 허용하지 않으려고 발악을 한다. 태권소녀는 녀석의 팔을 잡아 아래로 내리고, 다리를 움직여 위치를 잡았다.

“하아~ 하아~”

마침내 메이저의 복부 위에 올라탄 태권소녀는 숨을 헐떡이면서, 얼굴을 가린 녀석의 팔을 잡아 벌렸다. 그러고는 벌어진 틈 사이로 오른손 정권을 찔러 넣었다.

퍽― 퍽― 퍽―

주먹이 얼굴을 때리는 단조롭고도 잔인한 소리. 메이저의 얼굴에서 코피가 튀고, 이빨은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다. 메이저의 가드는 점점 허물어지고, 주먹을 꽂아 넣는 태권소녀의 파운딩은 그 기세를 더했다.

“크흑! 컥! 으읍… 그, 그만! 졌어!”

메이저는 얼굴을 감싸보려 애를 쓰며 비명처럼 항복 선언을 내질렀다. 하지만 태권소녀는 이를 꽉 깨문 채 계속 주먹을 뻗었다.

“우리 애들! 어떻게 했어! 응? 어떻게! 했냐고! 개새끼야! 살려내! 살려내!”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한 방씩, 15년 이상을 단련해 온 주먹이 무방비로 노출된 메이저의 얼굴을 망치질하듯 두들겼다. 그동안 그녀를 못내 괴롭히던 자책과 분노의 감정이 천 프로의 집중력으로 함께 실린 혼신의 펀치다.

그의 광대뼈는 이내 움푹 함몰되었고, 얼굴 전체가 피로 물들었다. 태권소녀의 주먹 역시 살갗이 벗겨지고 피로 점철되었다.

“…뒈진 후에 애들 만나면 미안하다고 사과는 해라.”

태권소녀가 주먹을 높이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미 의식을 잃은 메이저는 피거품을 흘린 채 숨만 헐떡이고 있다. 그때, 누군가 태권소녀의 팔목을 잡았다.

“응?”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태권소녀가 매서운 눈으로 돌아본다. 그녀의 팔목을 붙잡은 것은 김 중사였다. 김 중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이제… 더 때리면 이 사람 죽어요.”

“놓으세요. 원래 그러기로 하고 시작한 싸움이에요. 동영상으로 증거도 남겨놨잖아요.”

태권소녀가 말했다. 김 중사는 크게 한숨을 내쉰다.

“이 싸움… 애초 시작된 이유가 성추행 아니었습니까? 성추행한 사람을 때릴 수는 있지만, 죽인다는 건 말도 안 돼요. 압니다, 알아요. 사실은 우리가 모르는 무슨 사연이 더 있다는 거. 하지만 국군이 지켜보고 있는데 민간인들끼리 때려죽이는 건 안 됩니다. 그러면 체포해야 해요. 지금까지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도, 우리로서는 많이 양보한 거라는 걸 좀 알아주세요. 이렇게 부탁합니다.”

김 중사는 난감하고도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아저씨가 미안하다고 해요? 정작 이 새끼들은 뻔뻔하게 고개 쳐들고 있는데…….”

“여기에서 사망 사고가 나면 우리 책임이니까요. 이 사람들은 그냥 민간인들도 아니고, 군에서 엄청나게 많이 의존하는 기업 소속입니다. 단순히 우리 쉘터가 더 이상 여기 도움을 못 받는 걸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에요. 나 하나 영창 가는 게 두려워서 이러는 게 아니라고요.”

김 중사는 손을 내밀었다. 태권소녀는 잠시 망설였다. 꼭 죽이고 싶었던, 죽여 버려도 시원치 않을 악마 같은 새끼가 자신의 손아귀 안에 들어 있다. 무방비로 놓여 있는 저놈의 관자놀이를 몇 대만 더 후려치면 죽일 수 있다.

하지만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이 군인들을 모두 곤란한 처지로 만들어도 좋을 만큼, 그 복수라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이놈을 죽여 버리는 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까…….

태권소녀는 결국 김 중사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잘했어.”

보안관은 여전히 분노로 들썩이고 있는 태권소녀의 어깨를 안아주며 말했다. 그사이, 쉐도우 실드 놈들이 달려와 기절한 메이저를 부축해 일으켰다.

“야! 양복!”

헬기 쪽으로 달려가려는 양복쟁이를 보안관이 불러 세웠다. 양복쟁이가 돌아보자 보안관은 규영의 카메라를 가리켰다.

“괜히 구라 쳐봐야 소용없어. 싸우기 전부터 다 찍어놨으니까.”

양복쟁이와 쉐도우 실드 대원들은 보안관을 노려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편, 헬리콥터에서는 진우가 쉐도우 실드 놈들과 승무원들을 대상으로 삥을 뜯고 있었다. 물론 돈은 아니고, 무기와 총알을 빼앗는 중이다.

“총알 더 숨겨놨을 것 같은데… 헛수고하지 말고 내놔.”

진우가 조금의 미안함도 없이 헬기 안을 뒤진다. 없다고 발뺌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 삼숙이가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귀신같이 다 찾아낸다. 개새끼가 덩치는 또 어찌나 큰지, 덤벼볼 마음조차 안 든다.

“너희들… 얼굴 다 봐놨는데, 겁도 안 나냐? 이런 짓 하고 뒷감당이 될 것 같아?”

무기와 실탄을 다 압수당한 쉐도우 실드 대원 한 놈이 진우를 따라온 네 명의 병사에게 협박조로 물었다. 병사들은 같잖다는 듯 웃었다.

“마음대로 해. 하나도 안 무서워. 우리는 벌써 그제 저세상 갔다 온 놈들이야.”

그 말은 진심이었다. 진우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벌써 48시간 전에 좀비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때 그 감동을 생각하면 열 번 영창을 가더라도 진우의 부탁을 들어줄 용의가 있다.

“두고 보십시오! 이 일 반드시 책임 물을 겁니다!”

모든 무기를 압수당하고 돌아가는 헬기가 이륙할 때, 양복쟁이는 전형적인 악당의 대사를 내뱉었다.

“저 새끼들 저렇게 보내면 안 되는데…….”

하늘 위로 떠오른 헬리콥터들을 보며 유빈이 중얼거렸다. 강 소위가 난감해하며 물었다.

“뭘 더 어떻게 하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해… 지금도 나는 엄청나게 당혹스러워.”

“잠실에서 사람들을 못 데려가게 하세요! 끌고 가서 다 죽인다고요!”

“나한테 그런 힘이 있으면 벌써 그렇게 했겠지! 하지만 나는 그냥 일개 소위야! 장교 중에 가장 말단이라고! 이런 계급사회에서 까마득히 높은 곳에 떠 있는 별이 정한 일에 왈가왈부할 수가 없어! 자네가 그 동영상을 지금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그걸 여단장에게 보이겠나? 이렇게 발이 묶여 있는데!”

강 소위는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강탈한, 2천 발이 조금 넘는 탄약과 무기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로는 모자란다.

당장 저녁 시간에 남쪽 철책으로 접근해 오는 좀비들만 상대하더라도, 2천 발쯤은 금세 증발해 버릴 것이다. 더 이상의 보급은 기대할 수도 없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막막해서 강 소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온다, 온다.”

잠실 쉘터의 동남쪽 철책에서는 긴장한 병사들이 계속 같은 말을 되뇌고 있었다. 자신들이 그 말만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병사들의 머릿속은 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그롸아아아아―

도로 저 멀리에서 행진해 오는 좀비들의 포효 소리가 주변 건물들에 부딪쳐 메아리치며 쩌렁쩌렁 울린다.

규모 여섯. 압도적인 숫자였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다 좀비들이다.

“하아~ 하아~ 이런 씨발… 왜 해도 지기 전부터 저 지랄이지? 밤에만 오는 것 같더니…….”

병사들은 겁에 질린 눈으로 전방을 노려보면서 조준을 했다. 이미 거리는 250. 어제의 접근 기록이 깨졌다. 이놈들… 오늘은 정말 무슨 사달을 낼 기세다.

“발사!”

좀비들이 230미터 이내까지 접근해 왔을 때, 병사들은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이제 방향을 틀 수 있는 공간도 없다.

투투투투투― 투투투― 투투― 투투투투투― 투투둑―

수십 정의 개인 화기가 불을 뿜는다. 그렇게 쉬지 않고 총알을 날려봐야 달리는 기차에 토마토를 던진 정도밖에 피해를 주지 못했다. 좀비들이 뛰어오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잠실 쉘터 철책 앞의 넓은 사거리는 온통 좀비들로 가득 덮여갔다. 이미 전차의 포격으로도 제압이 불가능한 상태! 놈들의 울음소리가 심장을 찌르는 듯하다.

그와아아악― 끄르르르―

150미터 이내까지 놈들이 접근해 왔을 때, 설치해 둔 부비트랩이 작동하고 크레모아가 폭발했다.

콰쾅!

수천, 수만 개의 파편을 맞고, 잘려 나간 좀비들의 시체가 사방으로 튄다. 그래도 놈들은 달려오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콰아앙― 퍼엉! 콰아앙―

지뢰 구간을 지나면서 폭사하는 좀비들은 더욱 늘었다. 잠실의 동남쪽은 금세 뿌연 연기로 자욱하게 덮였다.

“최대한 잡아! 아직 괜찮아!”

병사들은 퇴각하고 싶은 욕망을 꾹 누르며 열심히 좀비들의 머리를 날렸다. 아직… 철책이 몇 겹이나 있다. 그러니 아직은 안전하다.

크와아아아아아!

앞서 달려온 좀비들이 외부의 철책에 몸을 날리며 울부짖었다.

끼이이잉―

놈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철책에서 쇠가 휘는 소리가 났다.

“저기야! 저쪽! 몰리지 못하게 잡아!”

병사들은 달라붙은 놈들의 대가리를 겨누고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그래봐야 그저 발버둥일 뿐이다.

드드득!

철망이 뜯기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총소리 사이에 울리자, 병사들이 일순 얼어붙었다. 외부 철책에 아주 작은 틈이 벌어진 것이다. 뜯겨 나간 철책 사이로 좀비의 팔이 쑥 뻗어 들어온다.

놈은 가죽이 찢겨 뼈가 드러난 팔을 크게 휘두르며 울부짖었다.

그롸아아아악―!

1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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