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규모 여섯 접근 중! (2)
다음날인 17일 오전, 이미 용산 철로로 이동해 있던 김 준장의 앞에는 두 가지 보고서가 올라와 있었다. 둘 다 그의 결정을 요하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규모 여섯이라…….”
첫 번째 보고서를 뒤적거리면서 김 준장은 날카로운 콧대를 문질렀다.
“규모 여섯, 그러면 10만이 넘는다는 건데… 잘못 본 것 아니야? 사병 애들이 겁먹고 긴장해서 그냥 규모 오 정도 되는 놈들을 보고 난리쳤을 가능성은 없어? 그럴 수도 있다고. 사람이라는 게 무서워지면 이성적인 판단이 잘 안 되잖아.”
그의 넋두리를 듣고 있던 참모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워낙 본 병사들도 많았고, 장교들도 여럿 됩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영상으로 기록된 화면을 봐도, 그 규모가 대충 맞는다고 합니다.”
“흠… 그래? 본 사람이 여러 명이라 이거지?”
김 준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규모 여섯의 좀비들… 골 아픈 존재들이 아닐 수 없다. 여의도와 강남 쪽에 규모 칠이 존재한다는 보고만 받았지, 실제로 그가 야전에서 조우했던 최대 규모는 오 중반 정도였다.
그 정도를 쓸어내는 데도 꽤나 애를 먹어야 했다. 공격 헬기와 전차가 없었다면 엄청난 병력 손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공격 헬기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운용 가능한 헬기라고 해봐야 수송용 헬기나, MD500 정도의 작은 헬기들 정도가 전부다. 쏟아부을 수 있는 화력의 한계가 있다.
“역시 디코이를 좀 더 오래 유지했어야 하는 거였나 보구만… 디코이가 효과가 있는 게 맞았나 봐. 하여간 염병할 새끼들 때문에…….”
볼펜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김 준장이 욕설을 내뱉었다. 디코이란 좀비들을 그쪽으로 유도하기 위해 야간에 조명을 밝혀뒀던 몇 개의 건물들을 말한다.
잠실 쉘터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몇 군데를 마련해 놓고, 발전기를 돌려 야간에 그 주변을 환하게 밝혔었다.
빛과 음파가 좀비들을 유인할 거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놈들의 눈과 귀를 혼란스럽게 하겠다는 취지에서 중저음 확성기까지 간간이 틀었는데, 보급이 끊기고 당장 유류가 아쉬워지자 어쩔 수 없이 가동을 중지했었다. 그 대가가 이렇게 돌아오는 것 같아 김 준장은 영 마음이 불편했다.
“십만… 십만 이상이 쳐들어오면, 저지한다는 게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아. 응, 힘들 거라고. 주력 병력도 다 이쪽으로 옮겨온 상태고, 전차도 그렇고… 야구장 내부로 들어가서 농성하는 것 외에는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 어때? 그렇지 않나?”
김 준장이 참모들에게 물었다. 물론 아무도 명확한 대답을 하려 들지 않는다. 공연히 나섰다가 책임질 언행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들 소위로 임관했을 때에는 나름 총기가 빛나는 군인이었을 텐데, 한 계급씩 승진할 때마다 입이 무거워지는 이상한 병이라도 도는 것 같다. 결국 결정은 김 준장의 몫으로 남겨졌다.
“잠실에 남아 있는 민간인이 얼마나 되지?”
결정을 내리기 전에 김 준장은 다시 한 번 민간인의 수를 확인했다. 참모들이 서류를 넘겨가며 수치를 확인하고 대답했다.
“오늘 정오가 지나면 1만 5천 정도 남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1만… 그러면 3분의 2 정도가 이미 이동을 마쳤다는 거잖아… 이동 페이스를 좀 올려봐. 오늘 최대한으로 이동시켜 보라고. 장갑 트레일러도 민간인 이동에 적극 활용하고. 그리고 좀비들은… 동남쪽에 추가로 방벽부터 한 겹 더 치라고 해. 기존 철책에서 50미터 정도 안쪽으로.”
난데없는 김 준장의 제안에 참모진들은 당황스러워했다.
“여단장님, 그럼 이쪽에서 다시 잠실로 철책 구축 공사를 추진할 병력을 보내는…….”
김 준장은 참모들의 말을 끊으며 책상을 쾅! 두드렸다.
“하, 참 답답한 소리! 진짜… 누가 그런 정식 공사 하라고 했나? 방벽이라고 했잖아! 철책이 아니라, 방벽! 주차장에 방치되어 있는 차량들이라도 끌어다가 차벽이라도 치라고! 그러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 아냐? 그… 차량들을 이중 삼중으로 세워두고, 그 위에 레이저 와이어라도 깔아. 그런 게 아무래도 다만 얼마쯤은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거라고. 안 그래?”
“그, 그렇습니다! 지당하십니다!”
“그래, 지금 어차피 전면전은 안 돼. 그러니까 궁여지책이라도 내보라는 거야. 이동 속도를 높이고, 임시 방벽을 보강해. 그거 외에 별도로 추가 대응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버리고 갈 곳인데, 거기에 화력을 낭비할 수는 없지. 낭비하면 안 된다고. 그다음에… 태양 그룹 이동 건인데… 하, 참나, 이거 마음에 안 들어…….”
태양 그룹으로 보내 달라는 민원이 많다는 보고서를 보며 김 준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김 준장은 서명했다는 사람들의 수를 대충 눈으로 훑고 나서 서류를 탁탁, 두들기며 물었다.
“이 사람들… 전에 그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르나? 왜, 민간인 하나가 죽도록 두들겨 맞았었잖아? 여자들도 머리끄덩이 좀 잡히고 그러지 않았나?”
“네.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워낙에 여단장님께서 속 시원하게 해주셨다고, 쉘터 내에 칭송이 자자했답니다. 그런데도 또 도보 이동보다는 그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가 봅니다. 정상적인 판단이 잘 안 되는 모양입니다.”
참모들은 그 짧은 대답 안에도 아부를 섞어 넣었다. 김 준장은 답답하다는 듯 보고서를 노려봤다.
태양의 수용 시설 분위기가 강압적이고 폭력적일지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그쪽으로 가고 싶어 한다는 건, 이쪽으로 도보 이동하는 것이 그보다 더 두렵다는 말이다. 매서운 눈빛 아래에서 지방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의 턱 선이 오늘따라 더욱 날렵해 보인다.
“애 엄마들이나 노약자라고 여기 적혀 있는데, 장갑 트레일러로 이동시켜 줄 수 있다고 좀 달래봤어? 이제 병력, 유류 수송이 대충 마무리 단계니까 오늘부터는 그걸 활용할 수 있잖아? 아, 아니다. 잠깐만…….”
말을 끊은 김 준장은 콧날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하긴… 그렇게 해서 무사히 선로까지 도착한다고 해도 어차피 이 사람들은 300킬로미터 이상의 도보 이동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부상자들, 노약자들, 아이 엄마들…….
애초부터 예상 손실 범위 내에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자기 살길을 찾아가게 해달라고 애원하는데, 계획대로 움직이다가 죽으라고 강요하는 건 못할 짓이다. 게다가 규모 여섯 짜리 좀비들은 자꾸 접근해 온다고도 하고…….
“태양 놈들하고는 이야기해 봤어? 전에 그 폭력 사건에 대해서는 뭐라고 해?”
김 준장은 태양 그룹과 친분이 있는 참모에게 물었다. 참모는 눈치를 슬슬 보며 대답했다.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단장님께 꼭 사죄를 드리고 싶다는 말도 전했고요. 그 폭행에 가담했던 직원은 강등한 상태라고…….”
그래?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 준장은 보고서들을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하긴 놈들이 헬기 가격으로 지불한 대가가 얼만데, 그렇게 하고도 교훈을 얻지 못했으면 그건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쯤이면 타협을 해줘도 괜찮을 것 같다. 가뜩이나 산재한 고민거리들이 많은데, 언제까지 이것만 들여다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일단 장갑 트레일러 이동으로 유도해 보고, 그래도 태양 그룹 행을 고집하면… 그때는 더 이상 군에서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다는 걸 고지한 후에 허가해 주는 걸로 하지. 뭐, 어쩌겠어?”
“네. 알겠습니다, 여단장님. 말씀하신 대로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잠실의 수뇌부에서는 두 가지 결정이 내려졌다. 사실 그것 외에는 달리 뚜렷한 대안이 없기도 했다.
☆ ☆ ☆
여단장의 명령이 내려진 뒤, 잠실 쉘터의 대민 지원 센터는 그 전보다 더욱 북적였다. 태양 그룹으로의 이동이 허가되었다는 것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로또라도 맞은 것처럼 기뻐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장갑 트레일러를 이용해서 보다 안전하게 이동이 가능하다고 군인들이 아무리 설명을 해봐야 그런 걸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태양 그룹의 양복 입은 직원들과, 그들이 타고 왔던 헬리콥터 생각들뿐이었다.
“가지 마! 그러지 말고 그냥 우리랑 같이 가자! 장갑 트레일러인지 뭔지도 태워준다고 하잖아. 전에 보니까 태양 그룹 직원들 막 사람 때리고 그러더구만. 그런 데를 왜 가려고 해?”
“그 사람 난동 피운 건 생각도 안 하고 때렸다고만 하네. 막말로 여기에서 군인들한테 그 정도 진상 짓을 했어봐, 그랬으면 그 사람만큼 안 두들겨 맞았을 것 같아? 나는 그래서 오히려 더 마음에 들어. 불량배들이랑 말 안 듣는 놈들은 개 패듯 패야지, 그래야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못 준다고!”
다른 사람들이 말려봐야 소용이 없다. 한 번 태양 그룹으로 굳어버린 마음은 어지간한 일 따위로는 흔들릴 기미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메이저가 민구를 더 심하게 때려주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기도 했다. 물론 그 사건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은 아니다.
“줄을 서서 사물함 번호를 적어주세요! 이름 다 쓰셨으면 짐을 챙겨 동쪽 게이트로 나가서 대기하시면 됩니다. 거기, 밀지 마세요!”
대민 지원 센터의 병사들은 짜증을 꾹 참으며 사람들을 단속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이렇게 들떠 있으면, 100인 대를 짜서 이동하려고 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준다.
“몇 시에 와요? 응? 태양 그룹에서 언제 와주신대요?”
“시간을 조율 중입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점심시간 이후에는 아마 도착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병사들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앞다투어 데스크로 몰렸고, 싸움을 하듯 서류 위쪽에 자기 이름을 먼저 쓰려고 몸싸움을 벌였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대민 지원 센터 앞으로 모여들었다.
“젠장, 왜들 이래, 진짜. 저런 사람들은 그냥 뛰어가도 충분하겠구만…….”
5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줄 세워 정리하던 병사가 짜증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겉보기에는 건장한 남자들도 태양 그룹으로 가는 헬기에 타고 싶다며 아이를 동반한 여자들과 줄 다툼을 하고 있다.
그 줄에는 어제 우연히 젠킨스의 독백을 들어버린 그 야구 모자의 남자도 서 있었다.
“성함이랑 사물함 번호 적으시고, 이 줄 따라 나가시면 됩니다! 아, 혹시 함께 이동하고 싶은 일행 있으십니까? 그러면 그분들이랑 함께…….”
“일행 없습니다.”
병사들의 설명에 야구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혼자 살아남았고, 그리 사교적이지 않은 성격 탓에 이 쉘터에서 지내는 내내 별다른 친구도 만들지 않았다.
밥을 혼자 먹을 때 외롭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찌질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타일러 젠킨스도 몰라볼 만큼 찌질한 사람들과는 특히…….
직업상 외국 경제지를 즐겨 읽던 야구모자는 이미 젠킨스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잠실에서 그를 만났을 때 깜짝 놀랐었다.
세상에, 이런 거물이 나와 같은 공간에 있다니…….
이것을 운명적 기회라고 느낀 야구모자는 늘 젠킨스의 주변을 먼발치에서나마 맴돌았다. 언젠가 어떤 계기가 만들어지면, 젠킨스와 친분을 쌓아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하면 이 좀비 사태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때, 그 거구의 엄청난 인맥을 통해 신분상승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그런데… 그는 젠킨스와 좀처럼 가까워질 수 없었다. 이미 말했듯이 야구모자는 사교성이 부족했고, 젠킨스는 음식과 테라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젠킨스의 이웃으로 사나운 흉터남자까지 가세해 버린 뒤로는 다가가 말을 건넨다는 것 자체가 엄청 난이도가 높은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던 중에 야구모자는 젠킨스의 분노에 가득 찬 독백을 들었고, 테라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놀라운 비밀을…….
야구모자는 그제야 젠킨스와 테라가 그토록 긴밀하게 붙어 다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세계적인 제약 회사 겸 의료 기기 회사의 간부와 좀비 면역자…….
그야말로 돈이 뚝뚝 떨어지는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얼마나 큰 이권이면 폭력배까지 개입해 버렸겠는가.
비밀을 알고 나서 야구모자가 느낀 가장 큰 감정은, ‘분함’이었다. 그의 바로 앞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파이가 나누어지려 하고 있다.
면역자인 테라가 커다란 한 덩이를 먹을 테고, 젠킨스는 말도 못하게 큰 액수를 챙길 것이고, 하다못해 폭력배인 흉터남자도 보호세 명목으로 뭔가를 요구하는 듯 보였다.
비밀을 알고 있는 것들끼리 쉬쉬하며 장래 발생할 이익을 챙기려고 하고 있는데, 야구모자 본인에게는 단 한 푼도 생길 가능성이 없다. 그 역시도 비밀을 알고 있는데… 그건 너무 억울하고 분하다.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직접 세 사람의 사이에 개입해서 자신의 몫을 요구할 만한 용기도, 흉터사내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배짱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힘을 빌릴 만한 친구도 없었다.
그러니 야구모자로서는 그저 분할 뿐이었다. 돈이 되는 엄청난 비밀을 알고 있는데, 그걸 돈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테라는… 군인들의 우상이고 여신이니까, 군인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리고 사실 군은 그에게 이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렇게 분하고 답답하고 안타까울 때, 태양 그룹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원했다. 태양 그룹에서는 당연히 그의 정보에 관심을 가질 것이고, 대가를 지불해 줄 것이다.
‘만세!’
셀터 동쪽 주차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태양 그룹의 헬리콥터가 오기를 기다리며 야구모자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만세를 불렀다.
이제 그에게 기회가 왔다. 인생 일대의 빅 찬스! 수용소에 도착해서 자신의 방을 안내 받게 되면 직원에게 말하리라.
면역자에 대해 알려줄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소중한 정보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 좀 받고 싶다고… 그러면 직원은 이렇게 말하겠지.
‘그, 그건 제 수준에서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군요… 기다려 주십시오.’
직원은 좀 더 권한이 있는 간부에게로, 그 간부는 더 고위 간부에게로 자신을 안내할 것이다. 이사 정도 되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때 입을 열자고, 야구모자는 다짐했다.
보답으로는… 후훗, 백신 관련 사업의 주식 2퍼센트와 태양 그룹 해외 영업부의 부서장을 맡겨 달라고 하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차피 백신이 나오면 이 지긋지긋한 좀비 세상도 종말을 고하게 될 테니, 그는 새로 건설되는 시대에 귀족처럼 살아가면 된다.
“크크큭.”
성공한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져서 야구모자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박고 킥킥거렸다. 햇살에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 앉아 있어도 괴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그는 들떠 있었다.
☆ ☆ ☆
보안관 일행은 건대 쉘터의 주차장 구석에 나와 앉아 있었다. 주변에서는 좀비 시체들이나, 여기저기 던져진 돌을 치우는 평탄화 작업과 철책 보강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헬기가 착륙할 때 혹시라도 문제가 없게 하기 위해서인데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렸다. 민간인과 군인들이 한데 힘을 합쳐 일을 하고 있는데,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는 게 어지간히 뻘쭘하다.
하지만 보안관 일행이 도우려고 나설 때마다 만류하는 사람들이 열댓 명씩 따라붙는다. 사람들은 그들이 일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저 편하게 쉬시란다. 덕분에 성미에 안 맞는 강제 휴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점심 먹을 때쯤에는 온다고 하지 않았어?”
한 모금 정도밖에 남지 않은 물병을 흔들면서 보안관이 물었다.
“그러긴 했었는데… 뭐가 계획대로 잘 안 되는가 보네.”
주변 지도를 살피며 잠실로의 이동 계획을 점검하던 유빈도 고개를 들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점심시간은 이미 아까 지나갔고, 벌써 오후 두시 반이 넘었는데 총알을 실은 헬기는 올 기미가 없다. 프로펠러 소리 같은 거라도 좀 들렸으면 싶지만, 사방 어느 쪽을 둘러봐도 하늘은 고요하다.
“야, 그 강 소위라는 사람이 너한테 구라 친 거 아니냐?”
신입이 물었다. 유빈은 녀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되물었다.
“뭐가 생긴다고 그런 구라를 치겠어?”
“그야 모르지. 저러다가 갑자기 와가지고, ‘아, 유빈 군, 미안한데… 총알 조금만 더 빌리지. 어차피 이따가 갚으면 되니까……’ 뭐, 이럴 수도 있고.”
신입은 나름 진지하게 연기까지 해가며 대답했지만, 유빈은 그냥 콧방귀만 뀌어주고 말았다.
그래도 은근히 걱정이 되기는 한다. 꼭 총알 천 발을 돌려받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다. 이러다가 정말로 해가 질 때까지도 지원이 오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것이 걱정스럽다.
“아무래도 좀 더 시간 걸릴 것 같지? 끄응~ 그러면 나는 그사이에 잠깐…….”
보안관의 넓은 어깨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삼식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려 한다. 보안관과 진우와 유빈이 동시에 녀석을 붙잡아 앉혔다.
“이제 그만해, 새끼야. 너 그러다가 진짜 죽어.”
“하하하, 죽기는 왜 죽어. 그냥 친구들 좀 사귀는 것뿐인데.”
삼식이는 뻔뻔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어제 밤을 거의 꼴딱 새다시피 놀고 나서도 아직 뭔가 더 해보겠다는 의욕이 남아 있다는 게, 친구들로서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탄약 받자마자 바이바이 하기도 좀 민망할 것 같기는 하다.”
진우가 멀리 북쪽 철책의 경비병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구 상병과 황 일병도 그 무리에 끼어 있다.
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강 소위가 난처한 얼굴로 다가왔다.
“참, 이거… 미안해서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군. 헬기가 왜 이렇게 안 오는지… 조금만 더 기다려 줘. 혹시 해서 무전으로 물어는 봤는데, 확실히 전달했다고 하니까 말이야.”
강 소위는 몇 번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나서 작업 현장으로 돌아갔다. 그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지만, 난감하기는 했다. 지금은 괜찮지만, 만약 더 늦게까지 시간을 잡아먹고 나면 보안관 일행도 오늘 잠실로 출발하기는 텄다.
그렇다고 해서 총알도 변변히 없는 이 많은 사람들을 그냥 놔두고 갈 만큼 매정하지도 못하다. 그럴 거였으면 애초부터 구조를 위해 그렇게 애를 쓰고, 목숨을 내 걸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두 시간이 넘게 지났다. 아무 하는 일 없이 앉아서 남들이 일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은근히 고역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코스트코에서 워낙 편히 지냈던 시간들의 부작용이랄까, 답답하다.
“아, 군대… 씨발, 좆 구려. 약속 졸라 안 지키네.”
담배를 마음대로 못 피우는 것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신입이 인상을 찌푸리고 짜증을 부린다. 그때, 이미 시간은 다섯 시가 지났다.
“야, 신입. 짜증 그만 부려. 나도 별로 기분 좋지 않기는 한데, 누군들 좋아서 이러겠냐. 오줌 싸고 온다. 줄이 좀 짧았으면 좋겠는데.”
보안관이 신입을 달래주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을 한 번 가려고 해도 줄이 워낙 길어서 20분은 우습게 기다려야 하고, 게다가 비위생적이다. 단체 생활이란 게 불편하기 짝이 없다.
투투투투투― 훙훙훙훙― 투투투투―
그제야 아주 작게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온다. 친구들은 소리를 쫓아 서쪽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손톱만큼 작게 보이는 두 대의 헬리콥터가 건물들 사이로 다가오는 중이다.
근데 어째… 뭔가 낯이 익은 게 있다.
“아, 오래 기다렸지! 이제 오나 봐! 하하하, 작업이 되게 밀려 있었나 보네. 어휴우~ 난 진짜… 안 오면 어쩌나 해서 간이 요만해졌었다니까! 군에서 안 오고 저기에서 오네.”
강 소위와 김 중사도 진우의 어깨에 팔을 얹으며 웃었다. 친구들의 얼굴이 일제히 굳어가는 걸 보며 김 중사가 물었다.
“왜? 헬기가 이렇게 가까이 나는 거 보는 게 처음인가? 하하, 바람이 엄청나지?”
친구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처음 보는 게 아니라 너무 낯이 익어서 문제다. 저 검은색 기체, 그리고 헬리콥터 아래에 달려있는 이상한 그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새끼들.
민관 협력 업체… 태양 그룹에서 쓰는 빨간 주사기… 그걸 전해준 건 건대에서 온 임수정…….
유빈은 아뿔싸 하는 표정을 지으며 강 소위에게 물었다.
“…민관 협력 업체라는 데가 태양 그룹이었던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