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더 킹 오브 건대 (5)
규영과 신입이 기다리고 있는 건물에 차를 세우고 유빈이 올라갔을 때, 제일 먼저 그를 맞은 것은 삼숙이였다. 그런데 반응이 별로 호의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으르르― 얼― 얼―!
삼숙이는 녀석답지 않게 이를 드러내고 사납게 짖어 대다가 또 앞발로 유리창을 두드려 댔다. 이게 열리기만 하면 콱 깨물어주겠다고 다짐하는 것 같은 기세였다.
랜턴 조명을 등지고 있는 녀석은 지옥에서 온 악마견, 그 자체다. 처음으로 보는 녀석의 난폭한 모습에 유빈은 당황해하며 손을 내저었다.
“야! 나야, 나! 수상한 사람 아니고, 진우 친구라고!”
그래도 소용이 없다. 삼숙이는 어지간히 분이 안 풀리는지 계속 문을 긁으면서 으르렁거렸다. 이래서야 문을 열기가 망설여진다.
저 커다랗고 날카로운 이빨… 스치기만 해도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누가 좀 말려줬으면 좋겠는데, 짐 정리에 여념이 없는 신입과 임수정은 이쪽의 심각성을 잘 모르는지 별 반응이 없다.
“뭐해요, 오빠? 개랑 눈싸움하는 것도 아니고.”
유빈이 문손잡이를 꼭 붙잡고 쭈뼛거리자, 뒤쪽에서 기다리던 제니가 물었다. 유빈은 얼빵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저 새끼 때문에 들어가기가 좀… 계속 진우 기다리다가 내가 오니까 화난 거 같아…….”
“어휴, 그럼 달래주면 되지. 비켜봐요.”
제니는 유빈을 물러나게 하고 서슴없이 문을 열었다.
어어… 조심해. 물리면…….
유빈이 바보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 동안에 제니는 박수를 두 번 짝짝, 치고 삼숙이를 향해 팔을 벌렸다.
“삼숙아! 언니한테 와! 진우 오빠 보러 가자!”
얼―
삼숙이는 짧게 한 번 짖고, 얼른 제니에게 안겨 그녀의 손을 핥았다. 뭉뚝하게 뿌리 부분만 남은 녀석의 꼬리가 엄청 빠르게 씰룩거린다. 제니는 녀석의 얼굴을 쓸면서 웃어준다.
“어이구, 그랬어? 진우 오빠 보고 싶었어? 아이, 착해.”
좋아서 펄쩍펄쩍 뛰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냥 애완견이다. 유빈도 자신이 괜히 겁을 먹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 인마. 너 왜 조금 전에 왜 그렇게 짖어? 난 놀랐잖아.”
유빈이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려고 하자, 헥헥거리며 재롱을 떨던 삼숙이가 고개를 홱 돌리며 또 으르르, 이를 드러낸다.
이번엔 붉은 잇몸까지 고스란히… 눈도 어지간히 사납게 뜬다.
“알았어, 알았어… 안 건드릴 테니까 진정해.”
유빈은 손을 들어 올리며 천천히 녀석의 옆을 돌아 일행들 쪽으로 걸어가 인사를 건넸다. 좀비들을 다 잡았다는 것과 보안관, 진우, 태권소녀가 지금 건대에서 왕처럼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는 소식 따위를 간략하게 전하고, 이동할 순서에 대해 일러줬다. 민간인 여자들, 부상자, 그리고 친구들의 순이다.
“내려갈 준비 후딱후딱 해요! 딱 나오라 그러면 나올 수 있게! 자기만 편하겠다고 늑장 부리다가 다른 사람 피해 주는 꼴은 난 못 봐주니까!”
신입은 권위적인 목소리로 민간인 여자들에게 말했다. 완장질이 아주 체질인 놈처럼 자연스럽다. 임수정이 제니에게 다가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유빈은 사무실 벽장 속에 총알 가방을 몰래 숨겼다. 그렇게 다급한 일을 다 하고 나서야 규영이에게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 있었다.
“다친 사람이나 아픈 사람 없었고?”
“네. 저 군인 아저씨들이 계속 앓기는 했는데… 저기 저 초희라는 연예인 여자 있잖아요. 그 누나가 워낙 열심히 돌봤어요. 붕대 갈고 약 발라주다가 미안하다고 하면서 막 울고… 나머지는… 그냥 다른 누나들은 얌전히 밥 먹고 조용히 있었어요. 수정이 누나랑 같은 쉘터에서 지냈었으니까 안면 정도는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면 수정이 누나한테 물어보더라고요.”
호, 그래?
유빈은 초희를 한 번 돌아봤다. 부상병들 옆에 지키고 앉은 그녀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삼숙이는? 저놈은 말썽 피우지 않았고? 지금 보니까 엄청 성질이 날카로워졌네.”
유빈은 손가락으로 등 뒤의 삼숙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의 질문을 들은 규영이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우리는 걔 성질나 있는 줄도 몰랐는데요? 그냥 평소랑 똑같았어요. 이름 부르면 오고, 밥 잘 먹고, 건대 쪽으로 난 창문 조금 열어주면 거기 창틀에 발 올려놓고 조용히 구경하고. 한 번도 큰 소리 낸 적이 없어요.”
“그래? 근데 왜 나한테 갑자기 저러지? 내가 혹시 쟤가 싫어하는 냄새를 묻혀 왔나?”
유빈은 자신의 팔과 어깨, 셔츠에 번갈아 코를 대보며 킁킁거렸다. 불을 질렀을 때 배인 재 냄새에 찌든 땀 냄새가 좀 섞였을 뿐, 그 외에 별다른 건 없다.
그가 그렇게 바보처럼 냄새를 맡고 있는 걸 보던 규영이 잠시 망설이다가 엄청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기요, 형. 내가 볼 때에는 냄새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쟤한테 있어서 형 서열이 자기보다 낮은 거예요. 개는 서열을 엄청 중요하게 여기는 동물이거든요.”
디이잉―
충격. 유빈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한 눈으로 규영과 삼숙이를 번갈아 돌아봤다. 삼숙이는 제니와 임수정의 사이에서 아주 신이 나 있다.
이럴 수가… 내가… 개보다 서열이 낮았다니…….
그런 게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 앞뒤가 들어맞는다. 저 개새끼는… 한 번도 자신에게 순종적인 애교를 부리지 않았던 것 같다.
“와, 젠장… 하다 하다 이제는 개한테까지 깔보였다니…….”
유빈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중얼거렸다. 분하기는 하지만, 단기간 내에 처리할 수는 없는 문제니까 일단은 돌아와서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려가요! 여자분들이니까 여섯 분 한꺼번에 다 타셔도 될 것 같아요. 금방이니까 좁더라도 끼어 앉으세요.”
민간인 여자들에게 다가간 유빈이 말했다. 어차피 짐도 없는 사람들이니, 그동안 먹던 음식 정도나 싸 가지고 가면 된다.
여자들은 신입의 눈치를 힐끔 본 뒤에, 그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유빈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왔다.
참, 이놈이나 저놈이나 우습게 보기는 매한가지다. 유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좋아해 주는 건 제니와 친구들밖에 없나 보다.
어쨌거나 유빈은 여섯 명의 여자를 승용차 안에 꽉꽉 눌러 태우고, 건대 쉘터에 데려다 주었다. 여자들은 엉망으로 변한 쉘터의 모습에 잠시 놀라는 것 같았지만, 이내 소리를 지르고 자기 일행들에게 달려가 안기며 기뻐했다. 그들 역시 누군가의 가족, 친구, 연인들인 것이다.
이후에도 유빈은 두 번이나 더 쉘터와 군자역의 건물 사이를 왕복했다. 좀비들에게 돌을 깨서 던지다가 다친 사람들을 돌보고 있던 고 하사에게 두 명의 부상병과 초희를 인도해 주고, 마지막으로 제니, 규영이, 신입, 임수정, 그리고 삼숙이를 태웠다.
그때까지도 군자역 우측에서는 뜨거운 열기와 함께 벌건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삼숙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건대에 도착하고 차 문이 열리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간 삼숙이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기가 막히게 진우를 찾아냈다.
조금 전에야 겨우 사람들의 가마에서 해방되어 넋 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진우도 벌떡 일어나 녀석을 반겼다.
“삼숙아!”
얼― 얼―
진우와 삼숙이는 싸구려 멜로 영화의 두 주인공처럼 서로를 부르며 핥고 보듬고 생난리를 쳤다.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삼숙이의 침이 사방으로 튄다. 어둠 속에서 얼핏 잘못 보면, 꼭 삼숙이가 진우를 잡아먹는 것 같다.
“어이구~ 하여간에 뜨겁네, 뜨거워. 개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태권소녀와 함께 친구들을 맞던 보안관이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둘 다 사람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좀비들과 싸울 때보다도 더 지쳐 보인다. 유빈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삼식이는 안 보이네?”
“모르겠어. 이 건물 안 어딘가에 있는 건 확실한데, 계속 눈에 띄었다 안 띄었다 반복하는 중이야. 아주 제철 만났지.”
보안관이 생각하기도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 유빈은 자신이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 불을 지르러 가기 전에 녀석을 에워싸고 있던 수많은 여자들이 떠오른다.
돌을 깨서 좀비들한테 집어 던지는 동안에도 주변의 여자들과 그렇게 분위기가 좋았는데… 이렇게 기쁘고 흥분된 상황에서야 뭐,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근데 우리까지 여기에서 자야 되냐? 나는 쉘터라고 해서 좀 그럴듯한 데인 줄 알았는데, 완전 난민 수용소네. 딱 보니까 똥 쌀 데도 마땅치 않겠구만. 아, 좀비 썩은 내도 장난 아니네. 우린 그냥 원래 있던 그 건물로 돌아갈까?”
신입이 체육관 내부를 훑어보며 말했다. 어둑한 랜턴 불빛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현 상황은, 그의 싸가지 없는 말과 별로 큰 차이가 없었다. 총알도, 물도, 화장실도 부족해 보인다.
“그러게. 우리가 외부에 나가 있는 게 오히려 더 나을 것 같기도 하고.”
규영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태권소녀도 신입의 말에 동의하는 눈치다.
“하지만 만약에 진우 오빠랑 보안관 오빠가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이 사람들 엄청 불안해하지 않을까요? 굉장히 많이 의지하던데…….”
제니는 갑자기 영웅이 사라진 다음에 사람들이 느낄 충격에 대해 걱정했다. 신입의 말도, 제니의 말도 둘 다 옳다. 어차피 계속 운명을 같이하며 함께 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당장 내일이라도 이 사람들의 안전이 확실해지기만 하면, 자신들은 잠실로 이동해서 테라를 구하러 떠나야 한다.
“이 사람들은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당장 임시방편으로 좀비들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고는 있지만, 계속 그럴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태권소녀의 질문에 유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상상할 수 있었던 한계는 좀비들을 모두 잡고, 생존자들을 모두 가장 보강이 잘된 건물에 모아두는 것까지이다. 그 뒤에 국군에서 어떤 조처를 취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한 바가 없다.
“아무래도 강 소위님이랑 이야기 좀 하고 오는 게 낫겠다.”
유빈은 꼼짝도 하기 싫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삼숙이에게 꼭 붙잡혀 있던 진우가 위층을 가리켰다.
“아, 강 소위님이랑 김 중사님, 3층에 계시겠다고 하더라. 거기에 작전 회의실인지 뭔지가 있다고.”
“알았어. 더 늦기 전에 만나봐야지. 아참, 쟤… 오늘 생일이야. 이제 10분 정도도 안 남았지만.”
계단으로 뛰어가던 유빈은 뒤를 돌아보고 제니를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말했다.
정말? 아, 맞다! 우와, 축하해!
태권소녀와 보안관, 임수정이 제각기 한마디씩 하며 손뼉을 쳤다. 제니는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덕분에 살아서 이렇게 생일을 맞았습니다.”
친구들이 제니를 중심으로 모여 웃는 걸 잠시 더 지켜본 유빈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키고 있는 군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통과한 유빈은 3층으로 올라갔다.
거기에는 서너 명의 군인들이 모여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플래시 몇 개로 밝혀둔 조명은 어둑하다.
“오, 잘 왔어.”
유빈을 보자, 강 소위와 김 중사는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로 맞았다.
“불을 지르러 갔었다고 하던데, 그럴 거면 우리 병사들이라도 몇 명 데려가지그랬어.”
강 소위가 말했다.
아… 예…….
유빈은 어색하게 웃었다. 저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들에게 당신들 몰래 진우의 총알을 감춰두기 위해 혼자 갔노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냥… 오늘은 다들 기뻐하고 있는 중이라 저 혼자 갔어요. 그렇게 위험한 일이 아니기도 했고요.”
“안 위험할 리가 있나. 좀비들이 언제 어디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내일부터는 우리 쪽에서 담당할게. 우리도 아직 가용한 차량이 있어. 군자역 쪽이지?”
“네, 사거리에 가면 어느 방향에 불을 질러야 하는지 보일 겁니다. 워낙 다 새까맣게 타 있을 테니까요. 확실히 해두려면 열세 시간 정도 주기로 한 번씩 불을 지르면 될 거예요. 근데…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으려나요? 구조 요청하시면 내일이라도 잠실에서 이동수단을 보내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유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강 소위와 김 중사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상황에서 그 정도로 신속한 구조를 기대하는 건 어려워. 우리 몇 백 명 때문에 장갑 트레일러 운용 일정을 변경해 줄는지도 잘 모르겠고. 바랄 수 있는 건 그저 공중에서의 실탄 보급 정도야. 그건 헬리콥터로 실어다 주면 되는 거니까.”
“그렇군요. 그럼 그 실탄은 언제 가져다준다고 하던가요?”
“그게 말이지… 이야기가 좀 길어지는데…….”
강 소위는 곤란해하며 뒤쪽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유빈은 플래시를 움직여 텅 빈 테이블과 그 너머의 깨진 유리창을 비춰보았다.
뭔가 무거운 게 놓여 있던 자국도 보이고 케이블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정작 테이블 위는 텅 비었다. 그리고 파편 몇 조각만 겨우 남은 유리창.
“거기에 있던 게 ‘전술용 다자간 고속 통신 접속 제어기’라고… 잠실과 교신 가능한 신형 통신 장비였는데, 좀비들이 뭔 지랄을 하다가 그랬는지 3층 아래로 떨어져서 아주 박살이 나 있더라고. 체육관 옥상에 설치해 둔 이 안테나선만 남았지.”
강 소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유빈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저희 같은 애들도…….”
거기까지 말하던 유빈은 아차 싶어 힐끔 눈치를 봤다. 다행히 그 방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특수 요원 같은 게 아니라는 걸 이미 다 알고 있는 눈치다. 유빈은 말을 계속했다.
“그냥 보통 사람들이라고 해도 각자 작은 무전기를 하나씩 구해서 들고 다니는 때에, 이 큰 쉘터에… 무전기가 하나뿐이었다고요?”
“설마 그럴 리야 있겠어? 여기에 하나, K―2 전차에 하나, 그리고 담벼락 받고 자빠져 있는 트럭에 하나, 이렇게 세 대를 배치했지. 전차는 잠실로 가버렸고, 트럭은 총알을 뒤집어쓰고 벽도 들이받아서 만신창이고, 그리고 이건 좀비가 동반 자살을 해버린 거야. 젠장, 나도 말하면서 안 믿기는군. 이렇게 운이 없을 수가 있나?”
강 소위는 끊긴 안테나 케이블을 손으로 빙빙 돌리면서 말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유빈이 물었다.
“그런데도 강 소위님 표정은 그렇게까지 심각해 보이지는 않네요? 무슨 다른 방법이 있는 거죠?”
“하하하, 아… 유빈 군, 진짜… 하하!”
강 소위는 유빈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며 웃었다.
“엄청 위태로운 상황인 척해서 장난 좀 쳐보려고 했는데, 안 통하네. 하여간… 응, 그 말이 맞아. 군용 무전기는 다 박살이 났는데, 다행히 민군 협력 업체에서 지급하고 간 무전기는 남아 있더라고. 이놈들은 중계기를 얼마나 많이 달아놨는지, 우리 것보다 더 빵빵하게 잘 들려. 조금 전에 그쪽에다가 요청을 했어. 건대가 실탄 부족으로 고사 상황이란 걸 잠실에 대신 좀 전해 달라고.”
“민군 협력 업체요? 으음… 그런 것도 있군요. 그러면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 건가요?”
유빈은 그 업체가 어디인지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굳이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는 일이다.
음, 강 소위는 덥수룩하게 자란 턱수염을 북북 긁으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업체 쪽에서 잠실에 무전을 보내는 건 즉각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아마 지금쯤은 잠실에서도 우리 상황을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이런 야간에는 헬리콥터가 잘 안 뜨거든. 아무래도 사고 가능성이 높으니까. 아마 내일 오전에 탄약 준비해서 정오경에는 싣고 오지 않을까? 보급이 원활하지 않다고는 하지만, 설마 총알 아끼려다가 사람 죽이겠어?”
다행이다… 유빈은 이제 이 지독한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하며 안도했다. 지금 시간이 이미 자정. 그리고 총알이 오는 건 내일 정오. 겨우 열두 시간만 기다리면 이 사람들도 무장을 갖출 수 있고, 그러면 웬만한 돌발 사태 정도는 충분히 자력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발전기를 팽팽 돌린다거나, 대형 솥에 물을 끓이는 것 같은 미친 짓만 하지 않으면, 갑자기 몰려든 좀비들에게 포위될 가능성도 높지 않다.
목숨을 걸고 구해낸 사람들이 무사히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된 것 같아, 유빈의 기분도 꽤 좋았다.
“정말 잘됐네요.”
유빈이 말했다. 강 소위도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래, 잘됐지. 다, 유빈 군과 친구들 덕분이야… 내려가기 전에 나랑 캔커피 한잔하자고. 지금 워낙 없는 살림이 되어버렸지만, 그 정도 대접은 할 수 있어.”
강 소위는 박스에서 캔커피 두 개를 꺼내 든 뒤, 유빈의 부축을 받으며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체육관 외부까지 걸어 나온 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강 소위가 캔커피의 먼지를 닦아 건네며 조용히 물었다.
“유빈 군 일행은 어떻게 할 계획인가? 잠실로 간다고 했었지?”
“네.”
유빈은 커피를 마시면서 대답했다. 하루 종일 실온에 방치된 뜨뜻미지근한 캔커피였지만, 당분과 카페인이 보충되자 그래도 한결 기운이 난다.
“그래서 말인데… 어차피 우리도 사흘 뒤에 출발이야. 우리랑 같이 장갑 트레일러로 이동하는 건 어때? 유빈 군 일행이 워낙 뛰어나다는 건 잘 알지만, 아무래도 잠실까지 간다는 건 위험스러운 일이니까 말이야.”
강 소위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딱히 진우를 붙잡아두고 싶다거나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정말 순수한 호의에서 하는 말 같았다. 당연히 그 방법이 더 편하고 안전하다.
하지만 유빈의 계획은 모든 사람들이 다 이동해서 잠실에 정착하는 게 아니다. 일부는 여기에 남고, 소수의 인원만이 잠실로 가서 테라를 몰래 데리고 나오는 거다.
‘진우 요원’을 왕처럼 숭상하는 이 사람들과 함께 요란하게 잠실에 입성했다가는, ‘몰래’ 빠져나온다는 것의 난이도가 엄청나게 올라가 버릴 것이다. 게다가… 진우는 신분도 좀 걸린다.
“고마운 말씀이긴 한데, 저희는 따로 들를 데가 있어서요.”
유빈은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강 소위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그래. 그럼 내일 오후까지라도 여기에 있어줘. 일단 잠실에 요청은 1만 발 정도를 해뒀거든. 요청한 대로 다 지급해 주지는 않겠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게 보급이 오면 진우 군에게 얻어 쓴 실탄은 갚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