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더 킹 오브 건대 (4)
제니의 질문을 들은 유빈은 잠시 멍한 얼굴로 전방만 주시했다. 이런 곤란한 이야기는… 그냥 못 들은 척해도 되는 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하던 유빈은 제니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기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용기… 없을 거 같은데…….”
“용기요? 하! 무기도 없이 가방 하나만 메고 좀비 사이로 뛰어다니는 사람이 꽃 선물할 용기는 없다고요? 그게 그렇게 무서운 일이에요?”
제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화가 날 법한 대답이었는데도, 아직도 바짝 다가앉아 있다. 그 시선을 마주하기 어려워서 유빈은 떼꾼한 눈 주의를 문대며 말했다.
“꽃 선물 자체가 무서운 건 아니지만, 네가 원하면 언제라도… 라는 조건이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거니까…….”
“겁쟁이!”
“…겁쟁이인 것 맞아. 생일인데 그렇게밖에 말 못해서 미안해.”
유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을 했다. 맞는 말인데… 그걸 긍정하고 나니, 어쩐지 우울해지는 것 같다. 젠장…….
“와아, 비겁해. 이렇게 차가운 말을 하면서 또 치사하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표정 짓는 것 좀 봐. 완전 선수라니까.”
제니는 유빈의 턱 끝을 손가락으로 쥐고 가볍게 흔들며 자기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선수? 이렇게 장난감 취급을 당하는 선수도 있나?
운전 중인 유빈은 얼굴이 돌아가면서도 시선으로만은 전방을 주시하려고 애를 쓰며 물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표정? 그게 뭔데?”
“바로 지금 이 표정이요. 뭐가 그렇게 걱정이 많은지 눈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 있잖아요. 눈은 겁먹은 강아지처럼 축 처졌고.”
유빈의 미간에 생겨난 주름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제니가 말했다. 유빈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이, 그게 뭐야… 난 또 내가 엄청 멋있는 표정이라도 짓고 있는 줄 알았네. 그건 그냥 인생 자체가 걱정인 사람 얼굴이잖아.”
“그런 표정으로 먼 데를 보면서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얼굴을, 옆에서 보는 게 좋다고요.”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도대체? 뭐가 그렇게 복잡해? 어떤 상황을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귀찮다는 듯 투덜거리면서도 유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럴 용기가 없다’고 한 대답… 유빈으로서는 꽤 미안해하며 한 말이었는데, 이렇게 농담을 하는 걸 보니 정작 제니는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다.
“애들한테 연락해야겠다. 자동차 소리 들었을 거야.”
신입 일행이 몸을 숨기고 있는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자, 유빈이 허리띠에 끼워져 있던 무전기를 꺼냈다. 제니가 유빈의 손을 탁 잡으며 말했다.
“내려오라고 하지 말고, 그냥 ‘불 지르고 올게, 기다려!’라고 해요. 나는 아직 숨도 실컷 못 쉬었는데, 저기 있는 여자들 만나게 되면 또 수건으로 얼굴 가려야 한다고요. 알았죠?”
응? 하지만…….
이 어색한 이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던 유빈이 망설이자, 제니가 애교 가득한 코맹맹이 소리를 낸다.
“아이잉~ 생일이잖아요. 생일 선물 하는 셈 치고, 그렇게 해요.”
“…생일 선물?”
“네. 잘 생각해서 대답해요. 나 총 있어요.”
기어 박스 근처에 놓아둔 MP5를 장난스럽게 두들기며 제니가 말했다. 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 지르는 데 같이 가는 걸 생일 선물이라고 치는 건 좀 이상하지만, 편하게 숨 좀 쉬어보겠다는 데야…….
“규영아, 나야. 잘 있지?”
유빈은 무전기의 송신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 치이이익, 아! 형! 네! 잘 있… 요. 형은요? 치익, 다들 괜찮아요? 저기… 자동차 오는 게 보여요! 치이익.
“아, 그 차, 내가 타고 있어. 좀비들 다 잡았고… 다들 잘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 사거리에 불만 지르고 와서 그리로 올라갈게. 알았지?”
― 치익, 진짜요! 와! 다행이다! 치익, 네! 기다릴게요, 형! 조심해요! 치익.
유빈은 그러겠다는 말을 전하고 무전을 끊었다. 제니는 그제야 좌석에 기대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둘이서 불장난을 하러 가요!”
제니는 문이 없이 뻥 뚫려 있는 조수석 바깥쪽으로 팔을 쭉 펴서 내밀고, 손으로 바람을 가른다. 온몸으로 바람을 만끽하고 있는 그녀에게 유빈이 말했다.
“어어, 위험해. 손 내밀지 마.”
“하하하, 겁쟁이! 뭐가 위험해요! 이 길에 우리밖에 없잖아요. 나란히 달리는 차도 없고, 뒤에서 달려오는 차도 없다고요!”
밝게 웃는 제니의 웃음소리가 도로 뒤편으로 날아가 흩어진다. 그녀의 말처럼, 모든 것이 멈춰진 고요한 도시 속에서 오직 그들만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끼이익―
군자역 사거리에 도착한 유빈은 자동차를 오른쪽 방향 쪽으로 비스듬히 세웠다. 하이 빔의 환한 조명을 받은 사거리의 모습은, 불타 죽은 자동차들의 공동묘지 같다.
검게 그을린 자동차들의 차체가 거의 두 블록에 달할 만큼 죽 이어졌고, 그 사이사이에는 불과 열기에 끌려왔다가 타 죽어버린 좀비들의 시체도 섞여 있었다. 페인트 좀비들이다.
“와아, 끔찍하네요. 왜 저렇게 불을 좋아하는 걸까요?”
불에 탄 좀비 시체들을 보며 제니가 눈살을 찌푸린다. 유빈은 라이트를 켜둔 채 자동차의 열쇠를 빼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 잘 모르겠어. 어쩌면 불이 종족 보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어쨌거나 저놈들이 불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돼서 다행이지, 뭐. 당장 이 페인트 좀비들만 해도 만약에 이렇게 불을 질러서 방향을 틀지 못했으면, 상황이 꽤 심각해졌을 거야.”
유빈은 진우의 탄약 가방과 총 가방을 넣고, 어제 불 지르고 남았던 재료가 든 배낭과 빠루를 꺼낸 뒤, 트렁크의 문을 닫았다.
이 주변에 살아 있는 사람이 없을 확률이 거의 100퍼센트일 테니 사실 이렇게까지 꼼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위험 요소는 제거해 두는 편이 낫다. 다른 것도 아니고, 진우의 총알과 총이니 더 각별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
유빈은 플래시로 사거리의 오른쪽 방향을 꼼꼼히 비춰봤다. 예상했던 대로 위험 요소는 없다. 여기에 남겨져 있던 좀비 무리들은 이미 불에 타 죽어버렸으니까.
동시에 태울 만한 재료도 별로 마땅치가 않았다. 이미 대부분의 차량들이 한 번씩 화염에 휩싸였던 터라 거기에는 불을 못 놓는다. 비가 온 직후라서 더 그렇다.
“가게를 찾아보자. 불에 잘 탈 만한 물건이 많은 가게로.”
“응, 그래도 돼요. 제가 이렇게 총으로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으니까. 진우 오빠가 인정한 명사수랄까요.”
제니가 옆구리에 찬 MP5를 내보이며 말했다. 유빈은 제니와 함께 좀 더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빵집, 휴대폰 가게, 음식점, 커피 전문점 따위의 현 시점에서는 아무 쓸모 없는 가게들을 지나니, 몇 개의 가구점과 이불 가게가 나타났다.
“오, 좋다! 여기.”
넓은 매장 가득 꽉꽉 들어차 있는 이불들을 보며 유빈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근처의 다른 매장들도 가구점, 이만한 재료라면 아주 큰 불을 지를 자신이 있다.
콰창―
빠루로 이불 가게의 유리문을 부순 유빈은 플래시 불빛을 앞세우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제니도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
“읏차!”
유빈은 벽 진열대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이불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중 몇 채는 바람이 잘 통하는 곳까지 끌고 가 얼기설기 쌓았고, 몇 채는 따로 빼서 가게 바깥쪽으로 던져 뒀다. 저것들은 가구점에 불을 지를 때, 사용할 계획이다.
이불을 어느 정도 어질러 놓은 뒤, 유빈은 배낭에서 라이터 기름통을 꺼내 가게 여기저기에 뿌렸다. 그러고는 제니와 함께 밖으로 빠져나와 팸플릿 뭉치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라이터를 가져다 대자마자 종이 뭉치에서 붉은 불꽃이 피어오른다. 유빈은 활활 타오르는 종이를 이불 더미 근처에 던져 넣었다.
“우와아~!”
금세 커다랗게 번져 일렁거리며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제니가 어린아이처럼 감탄했다. 수천만 원, 어쩌면 수억 원에 달할지도 모르는 양의 이불들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여 검은 연기를 내뿜는다.
“쿨럭! 쿨럭! 으아, 더 보고 있고 싶은데, 연기가 너무 매워요.”
몇 차례 기침을 한 제니는 목에 걸고 있던 수건을 다시 끌어 올려 입과 코 주변을 막았다.
그 쉰내 나는 수건을 또…….
유빈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마가 찌푸려지는 것 같았다.
“뒤로 물러나. 그리고 그 수건은 이제 버리자, 제니야. 이따가 애들 있는 건물로 가면 아래층 슈퍼에서 내가 새 수건으로 구해다 줄게. 아니면 차라리 마스크를 쓰든가. 오다 보니 약국 있더라.”
“안 버려요. 불안할 때 오빠 냄새 맡고 있으면 안정감이 든단 말이에요. 어제랑 오늘 내내 이게 얼마나 큰 의지가 됐다고요.”
뒤쪽으로 물러나면서 제니가 말했다. 저런 쉰내가 내 냄새라니… 반항하고 싶었지만, 제니가 워낙 단호해서 유빈은 더 말하지 않았다.
이불 가게의 불이 어느 정도 안정세로 접어들었다 싶어졌을 때, 두 사람은 미리 꺼내놓은 이불을 질질 끌고 가구점 쪽으로 위치를 옮겼다.
화륵―!
라이터 기름을 적신 이불을 불쏘시개 삼아 불을 지르자, 나무와 솜이 가득한 가구점은 순식간에 뿌연 연기와 뜨거운 불길로 뒤덮였다.
그렇게 한 가게씩 건너 세 가게를 불덩어리로 만들어놓고 난 후에야 유빈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날름거리는 불꽃이 옆 가게들로 번져 나갈 기미가 보인다. 이 불길은 페인트 좀비들이 닥쳐들 새벽을 한참 지난 뒤에도 꺼지지 않고 타오를 것이다.
“이제 가자.”
붉은 화염에 뒤덮인 거리를 보며 유빈이 말했다. 제니도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은 자동차를 세워 둔 곳까지 물러났을 때에는, 그 부근까지도 환해질 만큼 이미 불이 크게 번져 있었다.
“잘 타네요. 원래 법대로라면 우리 지금 얼마나 큰 죄 저지른 걸까요?”
제니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유빈도 멈춰 섰다. 기세가 사나워진 불꽃은 바람을 타고 춤을 추며 사방으로 불똥을 날린다.
“원래 법대로? 그러면 방화잖아. 그것도 여러 군데에 여러 번 질렀으니까 연쇄 방화. 음… 적어도 몇 년은 살아야 하지 않을까? 방화에 대한 처벌이 꽤 세다고 하더라고.”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요? 화염병 만들 때, 얼마나 감옥에 갇혀 있게 될지도 같이 찾아봤어요?”
“그때는 눈이 돌아가 있어서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그리고 미성년자였고. 법 이야기는 나중에 어디선가 주워들은 거야.”
유빈은 트렁크에 짐들을 다시 넣으며 대답했다. 제니에게 차에 타라고 하자, 제니가 입을 가렸던 수건을 벗으며 손을 든다.
“…잠깐만요. 우와, 제 수건에 재 붙은 것 좀 봐요. 완전 새까맣게 됐네. 얏! 날아가라!”
제니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수건을 털었다. 유빈은 곁에 서서 멀뚱멀뚱 기다렸다. 그때였다. 제니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옆으로 확 턴 수건이 유빈의 눈가를 때렸다.
“아윽!”
유빈은 눈을 감싸 쥐고 가벼운 비명을 질렀다. 대단한 부상은 아니지만,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눈을 얻어맞았으니 눈앞에 별이 돌고, 눈물이 찔끔 난다.
“어머, 어떡해! 맞았어요? 괜찮아요?”
제니가 깜짝 놀라 묻는다. 유빈은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아니, 아니… 별거 아니야. 그냥 스친 거야.”
“어디 봐요. 어머… 다쳤나 봐…….”
유빈의 볼에 손을 얹은 제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빈은 괜찮다는 대답을 하려고 했다. 사실 이렇게 호들갑을 떨 일도 아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엇!”
쪽, 소리와 함께 입가에 스친 달콤하고 부드러운 감촉. 유빈은 바짝 얼어붙었다. 제니의 입술이 그의 입술 위로 잠시 포개졌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는지 모를 만큼 너무 당혹스러워서 좋은 줄도 모르겠다.
유빈은 따끔거리는 눈에 힘을 주어 억지로 떴다. 그의 눈앞에는 제니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있다.
“하하하하! 오빠한테서 생일 선물 받았다!”
제니가 과장되게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불빛을 옆으로 받은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면서도 애잔한지… 유빈은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저렇게 아름다운 아이가 나 같은 바보 때문에 자존심 같은 것도 다 버리고 도둑 키스까지 하게 된 걸까…….
제니의 손을 잡은 유빈은 천천히 그녀를 당겨 꼭 끌어안았다.
쿵쿵― 쿵쿵― 쿵쿵―
제니의 심장박동이 맞닿은 가슴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진다. 심장 뛰는 소리조차 사랑스럽다.
하아아~ 유빈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게 비를 맞고 땀을 흘렸는데도 그녀에게서는 맑은 물 냄새가 난다.
잠시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고만 있던 유빈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
“…네.”
작게 대답하는 제니의 목소리에 조금 전의 그 당돌한 모습은 없다. 유빈은 크게 숨을 몰아쉬고 다시 이야기했다.
“내년 생일에도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
“…같이 있자, 라고 말해요.”
유빈의 어깨에 볼을 묻은 제니가 말했다. 목덜미에 닿는 그녀의 숨결을 느끼면서 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년 네 생일에도 이렇게 같이 있자. 꼭 살아남아서.”
“네.”
잠긴 목소리로 대답한 제니가 조금 사이를 두고 물었다.
“그때도… 이렇게 겁쟁이일 거예요?”
하아~ 난감한 질문이다. 유빈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생각해 봤다. 아닐 거라고 말할 자신은 없었다. 보안관이 제니를 좋아한다는 걸 빤히 알고 있는데…….
유빈 역시 제니가 못 견디게 좋지만, 보안관의 마음도 몸도 다치는 건 원치 않는다. 차라리 자신의 가슴이 찢어지는 편이 낫다.
마음은 그런데… 정작 자신의 두 팔은 제니를 꼭 끌어안고 있다. 이 이상한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걸까? 위선?
“괜찮아요. 그 대답은 내년에 해도 돼요.”
유빈의 침묵이 길어지자, 제니가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잠시 더 꼭 끌어안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는 게 아까울 만큼 달콤했고, 동시에 조금 슬펐다.
이렇게 좋은데, 그걸 드러낼 수 없다는 게… 언제 또 이렇게 꼭 껴안아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그리고 내년 여름이라는 말이 너무도 멀고 거창하게 느껴지는 현실이, 그들의 마음을 묵직하게 만든다.
“갈까?”
조금만 더 그녀를 안은 채 있고 싶다는 욕망을 억지로 꾹 누르며 유빈이 물었다. 제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어깨와 목에 느껴진다.
유빈은 정말 힘들게 몸을 뗐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제니는 부끄럽다는 듯 이마를 가린다. 위험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신데렐라가 돌아갈 시간이네요.”
제니는 손에 꼭 쥐고 있던 수건을 묶어 다시 목에 걸고, 뒷자리에 던져 놨던 후드 티를 걸쳤다.
귀찮고 불편하더라도, 건대를 벗어날 때까지는 이렇게 변장을 하고 주목을 받지 않는 편이 낫다.
“머리 조심해.”
조수석에 제니를 앉힌 유빈은 운전석 문을 열고 들어가 시동을 걸었다. 사거리 오른편에 질러둔 불은 건물들의 2, 3층까지 번져서 주변 하늘을 온통 훤하게 밝히고 있었다.
“저게 벽난로고, 우리는 지금 별장에 막 도착한 거라면 정말 좋을 텐데.”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면서 제니가 중얼거렸다. 별장은커녕 변변한 집도 가져 보지 못한 유빈이지만, 사실은 그 역시 비슷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감사해요. 어제부터 오빠가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너무 무서웠거든요.”
제니는 유빈의 옆얼굴을 쓸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빈은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 몇 번 토닥거려 준 뒤, 기어를 후진으로 바꿨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친구들에게로, 그리고 재투성이의 냉혹한 현실로.
“오늘부터 우리 1일이라고, 혜주 언니한테만 살짝 이야기해도 돼요?”
후진으로 차를 돌리고 있을 때, 제니가 물었다. 조금 전까지의 부끄러운 소녀가 아니라, 다시 장난꾸러기로 돌아간 목소리였다. 유빈은 쓸쓸하게 웃으며 핸들을 틀었다.
“아니… 그건 좀… 내년 생일까지 겁쟁이로 있어도 봐준다더니…….”
“하하하, 또 그 표정 짓는다. 하여간… 네에, 나도 알아요. 티 내면 안 된다는 거.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니는 유빈의 볼을 한 번 쿡, 찌른 뒤, 두 손을 얌전히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마치 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 되느냐고 묻는 것 같은 몸짓이다.
자동차의 속도가 올라가자 그녀의 긴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정신없이 휘날린다. 마치 처음 만났던 벌판에서의 그 모습처럼, 사람의 혼을 다 빼놓을 기세다.
‘예쁘다.’
유빈은 그 말을 정말 하고 싶었지만, 애써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차를 몰았다. 여기서 더 감정을 고조시키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다. 마냥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 수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