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371화 (371/449)

3장 파멸의 그늘 (3)

“네…….”

테라는 조금 긴장하면서도 반가움을 표현하며 미소를 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아기에게 주스 심부름을 시켰을 때, 이 남자는 분명히 말했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자기가 먼저 찾아오겠다고.

지금 그 순간이 온 것일지도 모른다, 테라로서는 마음의 빚을 갚을 수 있는 순간이.

“뭐라고 하는 거야, 이 남자?”

젠킨스가 테라에게 물었다. 테라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저와 이야기를 하고 싶대요.”

“가까이 오는 게 싫은 사람이라곤 보기 어렵군, 테라 양. 내가 놀림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어쨌든 사생활의 영역이니까… 난 이만 빠지지. 즐거운 대화 나누길.”

젠킨스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 자리를 피하려 하자 민구가 녀석의 뒷덜미를 턱, 잡았다.

“아니, 너도 여기에 있어. 네가 꺼낸 이야기 때문이니까.”

그런 후, 민구는 다시 테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하얀 얼굴과 앙상한 팔다리를 가만히 훑어보던 민구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는 그녀의 새끼발가락을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놈 말이 네가 죽어간다고 하더군. 물론 눈치로 넘겨짚은 거긴 하지만, 그 발가락이 도무지 낫지 않고 계속 피를 흘린다고 하는 것 같던데. 그러면서 자기 회사로 너를 데려가면 고칠 수 있다는 식으로…….”

민구의 시선을 보고 발가락 이야기가 나올 것을 깨달은 젠킨스도 황급하게 소리를 질러 댔다.

“테라 양! 내가 이 사내에게 거짓말을 했어! 이 사내가 수상했다고! 자꾸 귀하의 발가락에 흥미를 보이면서 물어보는 통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어! 귀하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제발 그냥 그렇다고 해줘! 나는 두드려 맞고 싶지 않아!”

“시끄러워! 좀 닥치고 있어!”

중간에 말이 끊긴 민구는 젠킨스의 뒷덜미를 한 번 호되게 흔들었다.

컥, 컥, 셔츠에 목이 졸린 젠킨스가 헛기침을 해 댄다. 언뜻 보자면 폭행처럼도 여겨질 수 있는 장면이지만, 비 오는 날이라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민구는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테라에게 물었다.

“너를 자기 회사로 데려가면 낫게 할 수 있다고 했어,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황당한 이야기 같았지만, 한 가지만은 말이 되는 것 같더군. 그 발가락의 상처, 그렇게 작은 상처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낫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거든. 이놈이 한 말… 사실인가?”

젖은 머리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민구를 보며 테라는 잠시 뜸을 들였다. 우호적인 태도로 부탁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점도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그보다 난데없는 불치병 이야기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그것이 너무 난감하다.

젠킨스의 장단에 놀아나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발가락이 낫지 않는 이유를 사실대로 말하자니, 그러면 좀비에게 물린 것까지 모두 털어놓아야 할 판이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 그것을 이 남자에게 이야기해도 되는 걸까? 강 실장이라는 호칭 외에는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는 사람인데…….

눈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겨 있던 테라는 민구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친구가 된 건가요?”

“뭐?”

그녀가 갑자기 엉뚱한 걸 물어본다고 생각한 민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건 관계없잖아?”

“아니요, 관계있어요. 친구라면 누군가의 건강에 대해 물을 때, 진심으로 걱정하기 때문이겠죠. 그렇지 않고 타인이라면 그저 호기심일 뿐이고요.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제가 가진 상처를 내 보이기는 싫어요. 지금 아저씨는 어느 쪽인가요?”

당돌한 계집애… 걱정을 해줬더니…….

사실을 듣고 싶으면 관계부터 다시 세우자는 거다. 민구는 테라의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를 바라보며 대답할 말을 골랐다. 마침내 민구는 입을 열었다.

“…호기심은 아니야. 그 정도로는 부족한가?”

이번에는 테라가 또 침묵에 빠졌다. 젠킨스는 두 남녀가 주고받는 짧은 대화를 눈치로라도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을 굴렸다. 아직 이 흉터사내가 화를 내지 않고 있는 걸 보면, 그의 거짓말이 들통난 것은 아니다.

“제가… 잘못 물어본 것 같아요. 먼저 웃어주라고 항상 엄마가 그러셨는데… 제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친구니 뭐니 찾았네요. 그렇게 큰 도움을 받았으면서 뻔뻔하게… 아저씨한테, 그냥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테라는 힘없이 웃고 나서 작게 한숨을 들이쉬고 이야기를 이었다.

“제 발가락은… 물려서 잘려 나간 거예요.”

물렸다니… 그 괴물들에게 물렸단 말인가? 하지만 그러면 당연히 변하는데…….

트럭을 훔치던 밤, 괴물들에게 물렸던 놈들이 하나씩 괴물로 변해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던 민구로서는 테라의 말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가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테라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작은 상처가 한 달 동안 낫지 않는 게 이상하죠? 저도 이해가 안 돼요. 그런데 젠킨스 씨 말에 의하면, 이렇게 물린 부위 근처가 아물지 못하는 게 어떤… 유형의 특징이래요. 단 한 번의 면역을 가지는… 그런 사람들이 가끔 나온다고요.”

“한 번의 면역? 저놈은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어?”

민구가 또 예민한 걸 물었다. 테라는 젠킨스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솔직히 대답했다.

“우리나라에 좀비들이 퍼지기 전에, 어떤 나라에서는 이미 그것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었대요. 젠킨스 씨도 그런 분들 중 하나고요.”

젠킨스의 회사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실험체로 썼으며, 따지고 보면 좀비 사태가 발발한 책임이 거의 전적으로 그쪽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젠킨스와 이미 약속을 한 이야기니까.

“음…….”

민구는 짧게 신음하면서 흉터 주변을 긁적거렸다.

기묘한 이야기다. 이렇게 가냘픈 계집애가… 몸에 힘이라곤 없게 생긴 여자가… 괴물에게 물리고도 변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니…….

하지만 그렇게 놀라면서도 민구는 테라의 말을 받아들이는 데 크게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지금까지 아수라장을 헤쳐 오면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해 온 그였기에, 세상에는 별 특이한 우연들이 다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이번에는 그 우연이 이 계집애에게 일어난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런데… 귀한 것은 언제나 욕망의 대상이 된다. 이 외모에, 그런 특이한 성질이라면… 당연히 욕심내는 인간이 많을 수밖에 없다.

문득 걱정이 든 민구는 등 뒤와 위쪽을 돌아봤다. 멀리 내야석 상단 쪽에 한 놈이 앉아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 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는 아니다. 그래도 민구는 목소리를 조금 낮춰 다시 물었다.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지?”

“아직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그저 너무 무섭기만 해서… 저를 구해준 고마운 군인분들에게도 거짓말을 했어요. 첫날에… 단지 물렸다는 이유만으로 맞아 죽는 사람들을 봤거든요. 그리고 그 뒤로도 계속 버릇처럼 거짓말을 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여기 이놈에게는? 이놈은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이던데?”

민구는 턱으로 젠킨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여전히 그의 손아귀에 뒷덜미를 잡혀 있는 젠킨스는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민구의 눈치를 살폈다.

“젠킨스 씨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냥 그분이 제 상처를 보고 눈치껏 추측하신 것뿐이에요. 하지만 전문가이니까,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테라는 순진한 얼굴로 대답했다. 결코 노려보는 게 아닌데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그녀의 눈빛을 응시하면서, 민구는 자신이 값비싼 답을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는 그녀에게 진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꾹 참아왔던 비밀을 말하도록 강요한 것이나 다름없다.

‘젠장, 불치병보다 더 곤란한 비밀을 알아버렸군…….’

민구는 경솔했던 자신을 자책했다. 발가락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편이 좋았을걸…….

앞으로 그녀를 볼 때마다 계속 마음이 더 쓰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제는 엎질러진 물. 주워 담을 수는 없다. 민구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다시 물었다.

“그래… 그건 알아들었어. 그럼 죽어간다는 이 사기꾼 먹보의 말, 그것도 사실인가?”

“그 부분은 잘 모르겠어요……. 저에게 해준 말과 아저씨에게 해준 이야기가 서로 다르다고 하니, 어느 쪽에 사실을 이야기한 건지… 젠킨스 씨가 저에게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지만, 혹시 제가 천천히 죽어간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죠.”

‘죽어간다’는 단어를 말할 때, 테라의 눈에는 왈칵 눈물이 맺혔다. 침착하고 당당하게 말하자고, 자기연민 같은 싸구려 감정에 빠지지 말자고 마음을 굳게 먹었었는데, 갑자기 너무 서러워져서 그런 결심이 힘없이 무너진다.

이런 상황에서 죽고 싶지는 않다. 엄마와 제니, 너무도 보고 싶은 두 사람의 얼굴을 끝내 못 보고…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안에 떨며… 그런 죽음은 너무 외롭고 쓸쓸하다.

테라는 잠시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닦아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젠킨스 씨는 정직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분은 아니에요. 만약 제가 죽는다는 말이 사실이었다면 저에게도 해주시지 않았을까요? 물론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하더라도 저는 JL로 따라가지는 않았을 테지만요.”

“흠, 이놈이 나를 가지고 놀았다는 말로 들리는군. 이놈 말만 믿고 따라갔었다가는 너나 나나 뭔가에 이용당하고 제 명에 못 죽을 뻔했다, 이거지?”

민구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놈의 말에 속아 넘어가 이렇게 바보 같은 일에 휘말려 버렸단 게 분하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다.

민구는 왼손으로 잡고 있던 젠킨스의 뒷덜미를 거칠게 잡아 당겼다. 120킬로그램은 우습게 넘길 커다란 몸뚱이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다.

“설마? 설마, 테라 양? 유다처럼 나를 팔아먹은 거야? 내가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도 내 말이 맞는다고 해주지 않았단 말이야? 왜? 귀하를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했잖아? 그럼 내가 이 난폭한 사내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했더라면 좋았겠어? 귀하의 보석 같은 발가락은 역겨운 좀비들의 위장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일회성 면역자인 귀하의 상처에서는 끊임없이 기이한 재생과 파괴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귀하가 나한테도 끝내 인정하지 않았었던 그 이야기를! 전부 다 했어야 옳았다는 거냐고?”

민구의 성난 얼굴과 움켜쥔 주먹을 보고 잔뜩 겁을 먹은 젠킨스는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폭력은 무섭다. 얼굴과 온몸에 가해질 고통이 너무도 두렵다. 특히 이 남자의 폭력성은 한층 더 무섭다.

“젠킨스 씨, 진정하고 목소리 좀 낮춰요. 사람들이 듣는다고요.”

테라는 당황하며 젠킨스를 달래려 들었다. 하지만 젠킨스는 오히려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누가 듣는다는 거야? 이 부근에 귀하와 나, 그리고 이 난폭한 남자밖에 없잖아! 누구? 저기 저 멀리 있는 머저리 같은 녀석?”

젠킨스는 멀리 내야석 위쪽에 아까부터 앉아 있던, 야구 모자 쓴 남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악을 썼다.

“저 녀석이 조금 전 내가 사용했던 은유적인 표현을 모두 알아들었단 말이야? 그럴 리가 없잖아! 자, 봐! 내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고 저 녀석을 불러보지. 그래도 놈은 모를 거야… 윽!”

미친놈처럼 떠들어 대던 젠킨스가 비명과 함께 입을 다문다. 옆구리에 박힌 민구의 펀치 한 방 때문이었다. 숨이 콱 막혀서… 제대로 쉬어지지가 않는다.

“끄허어억~ 끄허억!”

젠킨스는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버둥거렸다. 그래도 민구는 아직 녀석을 놔줄 생각이 없다.

“넌 아주 오랫동안 혼나야 할 것 같다. 내 지금 기분이 그래.”

그는 젠킨스의 멱살을 꽉 잡은 채 의자 쪽에 밀어놓고 중얼거렸다. 젠킨스는 각도 때문에 발도 온전히 딛지 못하고 켁켁거리기만 한다.

“제발 그만하세요. 그러다가 죽을까 봐 무서워요. 가뜩이나 심장이 약한 분인데… 네? 제발요.”

테라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간절히 만류했다. 민구는 잠시 더 젠킨스의 멱살을 틀어쥐고 꽉 조였다가, 녀석을 의자 쪽으로 밀어버렸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은 젠킨스는 보랏빛으로 얼굴이 변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아~”

일단 더 이상의 폭행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한 뒤, 테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위쪽을 돌아봤다.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잠시 고개를 아래쪽으로 돌렸던 야구 모자의 남자는 다시 무심한 얼굴로 금세 비가 갠 하늘에 시선을 던지고 있다.

젠킨스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또 설사 들었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그다지 문제가 될 가능성은 없기는 하다.

“너는 빠져. 나는 이놈이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알아야겠으니까. 그리고 사람 가지고 놀았으면 사용료도 내야지.”

민구가 테라에게 말했다. 감정 없이 차가운, 그러면서도 위압적인 목소리. 테라의 개입이나 간섭에 대해서 조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실하게 전해진다.

젠킨스는 공포에 질려 민구를 바라보고 있다. 물론 테라도 젠킨스가 밉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폭력에 맡겨둘 수는 없다.

“화가 나시겠지만, 그냥 이 정도에서 넘어가면 안 될까요? 벌써 한 대 때리셨고, 그냥 어설픈 사기꾼 흉내였는데…….”

테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민구는 대번에 거절했다.

“안 돼. 너… 웃기는 놈이구나? 화장실에서의 그놈들이 뒈지도록 맞을 때에는 아무 말도 안 했잖아?”

“그건… 그때는…….”

민구가 그날의 일을 꺼내자 테라는 말문이 막혔다. 민구는 젠킨스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놈이 그 새끼들보다 착한 놈이라고 믿나?”

그렇지 않다는 건 테라가 오히려 더 잘 안다. 화장실에서 그녀를 범하려 했던 남자들은 한두 명의 개인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지옥으로 만든 젠킨스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조무래기들일 뿐이다.

젠킨스는 수많은 사람들을 실험대에 올려서 좀비가 되도록 만들었던 악마적인 실험의 주체 중 한 명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젠킨스는 새로 백신을 만들어서 이 사태를 진정시킬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니 여기에서 이 강 실장이라는 사람의 주먹에 맞아 죽거나, 혹은 미리부터 겁에 질려 심장마비로 죽어버리면 안 된다.

“이분에게 스스로 속죄할 기회를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속죄를 어떻게 한다는 거야?

민구는 테라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또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젠킨스가 흥분한 목소리를 냈다.

“어, 어어!”

“시끄러워. 아가리 다물고 있어.”

그를 돌아보며 위협하던 민구가 젠킨스의 시선이 향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끔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내던 그 비행체가 다시 나타나 스타디움의 천장 구조물 사이로 날아오고 있다.

테라도 그쪽을 돌아보았다. 구조물에 가려져 아직 뒤쪽의 메시지는 보이지 않는다.

“왔구나! 그래! 구원의 손길이 때맞춰 왔어!”

젠킨스는 흥분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JL의 전투 구조 요원들이 오면 이 흉터사내에게 단단히 복수를 해주리라고 생각하니, 이제 그리 무섭지도 않다.

그때, 첫 두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D… K…….”

젠킨스는 조금 실망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괜찮다. 아직 두 개나 코드가 더 남아 있으니… 그리고 긍정적인 신호이기도 하다.

DK, 월드컵경기장이 있던 좌표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인구 밀집 지역을 선택할 것이라는 그의 추리가 맞았다. 곧바로 두 번째 코드도 눈에 들어온다.

“K… M…….”

두 글자 기호를 읽는 그 짧은 순간 동안 젠킨스의 얼굴에는 긴장이 가득했다.

이것도… 아니다. 저건 아마… 용산… 용산에 대체 뭐가 있지?

어쨌든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제 남은 기회는 하나… 그게… 설마…….

마지막 코드가 눈에 들어온다. 젠킨스는 눈을 질끈 감고 아무렇게나 기도부터 했다. 아주 간절하게 몇 번이나 입속으로 외우고 또 외웠다.

WF! WF! WF!

그러고는 떨리는 마음으로 눈을 떴다.

나는 포 카드야. 에이스 포 카드! 설마… 상대가… 스트레이트 플러시일 리는 없지… 그런 우연은…….

“아니… 잘못 본 거야…….”

젠킨스는 실성한 사람처럼 눈을 비볐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을 꽉 모아 쥐고 다시 떴다. 몇 번을 봐도 YL이다. WF가 아니라…….

“으아아아아! 아아아!”

마지막 코드를 확인한 젠킨스는 의자에 머리를 짓찧으며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WF가 아니라니! YL! 왜 저렇게 생뚱맞은 위치를 골랐단 말인가! 왜! 이렇게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곳을 내버려 두고!

“뭐야, 이놈? 갑자기?”

갑자기 발작을 시작한 젠킨스를 보며 민구가 물었다. 공포에 질려 자해하는 놈들은 흔하게 봤지만, 이놈이 그런 타입일 줄은 몰랐다.

“젠킨스 씨! 진정해요! 괜찮아요! 그러다가 정말로 죽어요!”

테라가 젠킨스의 세 겹으로 접힌 목을 잡으며 소리쳤다. 어찌나 세게 의자를 들이받았는지, 그의 이마에서는 벌써 피부가 찢겨 피가 흘러나온다.

“이건 말이 안 돼! 왜! 왜 한강의 북쪽부터 훑어! 으아아아! 바보 같은 놈들! 나는 이제 시간이 없단 말이야! 끄으으으!”

젠킨스는 눈물과 침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민구는 잠시 놈이 지랄해 대는 대로 내버려 뒀다. 뭔가 캐야 할 게 아주 많아 보이는 놈이다. 이런 건 그냥 흔한 사기꾼의 모양새가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작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상단의 야구 모자 쓴 남자는 야구장 내부로 빠져나갔다. 혹시라도 자신을 알아볼까 싶어, 남자는 세 사람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쓰고 있던 야구 모자를 쓰레기 통 안에 던져 넣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누가 따라오기라도 할까 봐 그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씨발… 놀라라. 테라가, 테라가… 그랬었구나…….”

남자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얼른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혹시라도 그 흉터남자가 자신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두려워서였다.

☆ ☆ ☆

건대 쉘터에서 슬슬 총소리가 뜸해진 건 C동에 탄창을 전달해 준 지 한 시간 반 정도가 흐른 뒤였다.

신중하게 조준 사격을 하던 병사들이 좀처럼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있다.

이미 좀비들의 수가 확연히 줄어들어 버린 지금, 잠시도 쉬지 않고 빠르게 뛰어다니는 좀비들만이 남았다. 밀집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던 때와는 달라서 이 빠른 놈들은 좀처럼 맞추기 쉽지 않다.

“명중률이 확 떨어진 것 같은데… 저쪽 사람들은 그만 쏘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저러다 정작 실탄 필요할 때 또 모자라겠네.”

주차장을 보고 있던 진우가 말했다. 비를 맞아가면서 40분 정도나마 자고 일어난 후라 몸은 꽤 가뿐하다.

이제 빠르게 기동하는 정예 병력으로 고립된 각 건물들을 순회하며 해방시켜 줄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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