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파멸의 그늘 (2)
가뜩이나 어수선한 잠실 쉘터의 분위기는 비가 내리면서 더욱 급박해졌다. 위성 쉘터에서 지원 온 전차들이 몇 대 보강되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예방책 정도에 불과하다.
혼전 상황이 벌어져 좀비들과 민간인이 뒤엉키게 되면 아무리 강력한 전차라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결국 민간인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달려가야 한다.
넓은 주차장에서 100명씩 모여 이동 연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대부분 학교에서 체육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특히 남자들은 군 경험이 있지만, 문제는 체력과 담력이었다. 그리고 날씨…….
오늘처럼 비가 오는 기상 상황은 이동에 최악이다.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 때문에 시야는 좁아졌고, 호흡은 힘들다. 젖은 옷은 몸에 휘감기듯 척척 달라붙고, 짊어지고 있는 짐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이 모든 부정적 요소들 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미끄러운 바닥이었다. 전차와 차량들이 지나다니면서 조금씩 흘린 기름들은 물기로 젖은 아스팔트에 기름 막을 형성했고, 달리기를 하다가 행여 거길 밟기라도 하면 곧바로 발이 쭉― 미끄러지면서 바닥에 나뒹굴기 십상이었다.
그러면 줄이 흩어지고 이동의 속도가 확 줄어든다. 좁은 간격을 유지하며 뒤에서 따라 달리던 사람들도 덩달아 발이 걸려 넘어지게 마련이다.
“어흑!”
호되게 넘어진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동정이나 배려가 아니라, 원망과 의심이었다. 넘어진 사람이 부상 부위를 문지르고 있으면, 곧바로 군인이 달려와 큰 소리로 묻는다.
“계속 뛸 수 있습니까? 못 뛰겠으면 열외로 빠집니다!”
오전 이동을 했던 팀에서 몇 차례 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군인들의 목소리에도 날이 서 있다.
“네? 네! 뛸 수 있어요! 안 다쳤습니다!”
“지금은 연습이니까 다행이지만, 실제로 이동 중에 이렇게 넘어지면 큰일 납니다! 거기는 태풍이 왔을 때 쓸려온 흙도 있어서 더 미끄럽습니다! 그러니 장신 바짝 차립니다! 알겠습니까?”
다그치는 병사들도, 거기에 시달리는 민간인들도… 모두 두려움과 긴박함에 사로잡혀 있다. 변변치 않은 신발 때문에 여러 번 넘어지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발목을 잡는다는 이유로 이동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배제…는 무서운 말이다. 열외로 구분된 사람들은 주차장 구석으로 내몰려 민간인들의 연습을 지켜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모두가 빠져나간 뒤, 텅 빈 잠실에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그것이 사람들에게 한계 이상의 용기와 체력을 끌어내도록 강요했다.
“바닥을 잘 보고 뜁니다! 자기 주위의 사람들이 넘어질 것 같으면 최선을 다해서 돕습니다! 그렇게 해야 모두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자, 다시 한 번 연습해 보겠습니다! 제가 수신호를 보내면 달리는 겁니다! 준비!”
비록 짧게 주어진 연습 시간 동안이지만, 군인들은 자신의 분대가 맡은 100인의 민간인을 훈련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게이트 밖을 나가는 순간, 그들과 자신들의 운명이 하나로 묶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동 예정자들이 야구장 외부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아직 내부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복도에서 러닝 연습을 하는 사람들의 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헐렁한 신발이나 샌들을 신은 사람들은 테이프를 얻어다가 발과 신발을 고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짐을 가방 하나 크기에 맞도록 정리해서 미리 싸두고 있었다. 조금 불편한 걸 감수하더라도 늘 가방을 지고 다녔다. 언제라도 돗자리만 챙겨서 일어날 수 있도록…….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에서 여유가 사라진 데에는 군인들이 확 줄어버린 야구장 내부의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
꽤 많은 병력이 철로로 먼저 이동해서 경비와 공사를 병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로 야구장 실내에서 돌아다니는 군인을 보기가 어렵다. 그러니 민간인들로서는 다들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간에 하루라도 먼저 이동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암시장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배낭 하나밖에 짊어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상인들은 더 이상 건빵이나 음료수 따위의 부피가 큰 물건들을 받지 않았다. 덕분에 시장을 찾는 발길도 확연히 잦아들었다.
물론 수요도 거의 없어서 거래 자체가 잘 이뤄지지 않았다. 예전의 절반 값으로 건빵을 내놓아도 도무지 팔리지가 않는다. 다들 이동을 위해 몸을 더 가볍게 만들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중인데, 과자 따위를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투투투투투― 투투투투투―
또 총성이 시작됐다. 철책 부근으로 접근해 오는 놈들의 수와 빈도가 늘어남에 따라 하루에도 몇 차례씩 총성이 울려 댔다.
야구장 내부의 사람들에게는 비록 좀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그 길고 지루한 총성만으로도 분위기를 한없이 무겁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아, 젠장… 아깝네. 이 주스들이랑 건빵… 씨발, 갑자기 이동인지 뭔지 한다고 그래서 이렇게 남의 장사를 방해하고 지랄이야…….”
애송이 암시장 상인이 건빵 박스를 발로 툭툭, 건드리며 짜증을 부렸다. 젠킨스의 만년필을 집어 던졌던 바로 그놈이다. 민구에게 칼을 팔았던 놈이 자신의 배낭을 열어 보이며 웃는다.
“씨발, 그까짓 것 얼마나 된다고. 그냥 버려.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이 가방 안에 든 것 좀 봐라.”
놈이 자랑스럽게 들어 보이는 가방 안에는 휴지로 겉을 둘둘 말아둔 시계들이 잔뜩 들어 있다. 놈은 열 개 이상의 반지가 꿰어진 굵은 목걸이를 흔들며 말했다.
“이게 다 얼마였겠냐. 이 지랄이 안 났으면 평생 이런 걸 만져나 봤겠어? 이런 시계 하나만 해도 천만 원이 넘었을 텐데. 이런 게 바로 자수성가라고 하는 거다, 이 새끼야. 우리가 해낸 거야.”
“하긴… 근데 암만 그래도 물건을 버리는 건 아까우니까 그렇지. 어라? 저거 봐라, 저 새끼 왔다. 큭큭크.”
끌탕을 하던 애송이 놈이 갑자기 실소를 터뜨렸다. 놈의 옆에 서 있던 한패들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다들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홍조 띤 얼굴로 나타난 젠킨스 때문이었다.
“하이~ 클리어런스 세일?”
젠킨스는 투실투실한 손을 잠시 흔들고 나서 곧바로 과자에 탐욕스런 시선을 던졌다. 애송이 상인 놈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나, 이 새끼 진짜… 큭큭큭, 오늘도 올 줄은… 정말 한결같은 새끼네. 다른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몸을 좀 가볍게 만들 수 있을까 해서 난리인데, 너는 진짜 꿋꿋하게 오로지 처먹는 거에만 관심이 있구나. 큭큭큭, 내가 볼 때 이 새끼는 뇌라는 게 아예 없는 것 같아.”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그 많은 걸 다 처먹을 수 있지? 창자가 곧은창자인가?”
“곧은창자? 그게 뭐야?”
“그냥… 창자가 일자로 쭉 뻗어있어서 처먹으면 곧바로 똥으로 나오는 거지. 그게 아니면 나는 잘 이해가 안 돼. 이 새끼… 건빵 한 박스 이틀 만인가 다 처먹은 적도 있었지? 큭크큭, 말이 쉽지, 밥 세끼랑 배급 나오는 과자까지 다 처먹고 또 건빵을 그만큼 배에 쑤셔 넣은 거야. 사람이냐?”
이미 표정이나 어조로 경멸의 의미는 충분히 전달 받았지만, 놈들이 뭐라고 놀려 대든 간에 젠킨스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신중하게 과자를 골랐다.
어차피 이런 시선쯤이야 익숙하다. 그런 것보다 단 며칠 동안이라도 먹을 것을 확보해야 한다.
조금 뒤, 젠킨스는 결국 가장 적은 비용으로 위장을 채울 수 있는 건빵을 골랐다.
“아이 원트 디스! 하우 매니?”
젠킨스는 최대한 우호적인 표정을 지으며 애송이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온 담배를 펴 보였다. 두 개비, 흉터사내의 붕대를 갈아주고 모은 것이다.
“야, 이 새끼 담배 두 가치 가져왔는데, 건빵 몇 봉지 줄까?”
“그냥 다 줘버려. 그까짓 팔리지도 않는 걸 뭘 세고 있어? 그리고 그래도 돼. 따지고 보면 저 새끼만 한 단골도 없잖아.”
“하긴 저놈 시계랑 목걸이, 반지… 뭐, 웬만한 건 다 우리가 챙겼지… 야! 옛다! 그냥 박스째 가져가. 인심 썼다.”
애송이 상인은 젠킨스의 손바닥에서 담배를 집은 뒤, 건빵 박스를 발로 툭, 차서 밀었다. 예상치 못한 양을 받게 된 젠킨스는 어리둥절해져서 애송이들을 둘러보았다. 놈들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젠킨스에게서 받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지껄인다.
“갖고 꺼지라고, 새끼야. 어차피 가게 접는 마당에 주는 보너스라고 생각해라.”
“오케이! 아이 갓 잇! 땡큐! 땡큐 소 머치!”
혹시라도 놈들의 마음이 변할까 봐 두려워서 젠킨스는 허둥지둥 건빵 박스를 들고 뛰었다. 물론 채 20미터도 벗어나지 못해 곧바로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풀린다.
젠킨스는 벽에 기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이 달려온 거리를 뒤돌아보았다.
“하아~ 하아~ 나도 좀 하는군. 이렇게 멀리 뛸 수 있다니… 하아~ 테라 양과 산책을 했던 게 그냥 허튼짓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 하아~”
어처구니없는 평가를 내리고 나서 젠킨스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담배 두 개비로 과자 한 박스를 통째로 얻었다. 이만하면 앞으로 나흘 동안 이곳에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
건빵을 소중하게 안고 이동하던 젠킨스는 사물함 섹션 앞에서 테라와 마주쳤다.
“어머, 젠킨스 씨. 그건 뭔가요?”
테라는 건빵 상자에 눈길을 주며 물었다. 젠킨스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아, 하하… 아무것도 아니야, 테라 양. 그냥… 암시장의 상인들과 비즈니스를 한 최종적 결과물이라고 할까?”
“설마… 그거 다 과자인가요? 그걸 다 드시려고요? 요즘 겨우 식사량이 조금 줄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테라의 얼굴에 실망하는 빛이 스친다. 젠킨스는 얼른 거짓말을 했다.
“걱정하지 마, 테라 양. 이걸 한꺼번에 다 먹을 정도로 미련한 젠킨스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네. 다 귀하의 덕분이지. 이건 어디까지나 비상용 식량이야. 지금처럼 이렇게 식사 배급이 줄어들다가는 언젠가 뚝 끊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잖아. 그때를 대비하려는 거라고.”
그가 장황한 변명들을 늘어놓고 있을 때, 멀리 대민 지원 센터 방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분노한 여자들의 고함과 남자들의 목소리가 섞여 있다.
테라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쪽을 돌아본다. 젠킨스도 말을 끊고 함께 그쪽에 시선을 주다가 테라에게 물었다.
“굉장히 소란스럽군. 테라 양, 저 시끄러운 논쟁은 왜 발생하게 된 건가? 누가 저렇게 큰 소리를 내는 거지?”
“…도보 이동을 해낼 자신이 없는 분들이 모여서 태양 그룹 수용소로 보내 달라는 거예요.”
테라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타이양? 거기로 이동하는 계획은 이제 무산된 거 아닌가? 그 흉터남자와 사원들이 일대 난투극을 벌였다고 테라 양으로부터 들은 것 같은데… 흠, 대중이란 원래 현명과는 거리가 먼 존재이긴 하지만, 그토록 폭력적인 기업에 자발적으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저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군.”
“저분들은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아요. 건강이 좋지 않으신 분들도 있고, 특히 아이 엄마들이 그래요. 혼자서 달리기도 벅찬데 어린아이를 데리고 뛰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 헬기를 제공하고 배로 남부까지 수송해 준다고 했던 태양 그룹이 생각나는 모양이에요.”
음, 젠킨스는 수염이 덥수룩한 턱을 긁으며 생각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만일 그 자신에게 누군가 2킬로미터 정도를 뛰라고 명령한다면, 그건 곧 죽으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 역시도 더 편안한 이동 수단을 찾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을 것이다.
“다 이해했어. 하지만 아직 테라 양의 그 아름다운 얼굴에 그늘이 가득한 이유만은 찾아내지 못하겠군. 귀하는 뭣 때문에 그렇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설마 테라 양도 달리기에 자신이 없나? 하긴… 그 장난감 같은 샌들에 젓가락처럼 가느다란 다리, 거기에 다친 발가락 조합이라면… 장거리 이동이 무서울 만도 하군.”
젠킨스의 질문에 테라는 고개를 저었다.
“달리는 것 자체는 무섭지 않아요. 발가락이 아픈 건 좀 불편하지만, 무대 위에선 언제나 이 정도 굽의 구두는 신고 춤을 췄으니까요. 전 그냥… 저분들이 걱정스러워요. 소문에는 그 아저씨가 태양 그룹에 끌려가면 좀비 밥으로 죽게 된다고 말했다던데, 혹시 그게 사실이면 어쩌나 싶어서…….”
뭐야, 이런 상황에서도 남 걱정을 하고 있었던 건가?
젠킨스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테라가 달리기를 무서워하는 것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자신과 함께 JL로 갈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이니까.
“불확실한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고르고 나름의 이유를 대는 건 무의미하지만, 타이양이 자선단체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확실해. 흉터사내의 말은 배제하고 생각하더라도 위험부담은 분명하게 존재하지. 왜? 거기로 가지 말라고 말리고 싶은가?”
“음, 그런 생각도 많이 들어요. 그래서 몇 번 만류도 해봤고요. 하지만 뭐라고 해도 잘 믿어주지를 않아요. 저분들에게는 그냥 태양 그룹만이 유일한 희망인 것 같더라고요.”
“그야… 저 밖으로 뛰어나가야 하는 도보 이동이 워낙 위험하고 무서우니까 그밖의 유일한 선택지를 강제로 사랑하게 되는 걸 테지. 사실 현재의 상황에서 100퍼센트 안전한 곳은 따로 있는데 말이야. 바로 JL이지.”
젠킨스는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는 척하며, 테라에게 JL로 함께 가자는 의미를 전달했다. 그러면서도 강요한다는 인상은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꾸 반복적으로 강권하면 반발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일단 6일째까지는 같이 있어주겠단 약속을 받았으니, 그걸 지렛대 삼아 이 소중한 보석의 마음을 아주 조금씩 비집어 열어야 한다.
“젠킨스 씨는 확고하게 믿고 계시는군요. 다음에 올 메시지는 이 부근을 지목할 거라고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잘 납득이 가지 않는 게 있어요.”
테라는 특유의 감정을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젠킨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젠킨스가 물었다.
“뭐지, 그 납득이 가지 않는 거라는 건?”
“부메랑이라고 하셨던가요? 그 젠킨스 씨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수신 장치요. 그게, 어떤 방식으로 설치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 위주로 설치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여기는 현재 서울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중 하나고요. 그러니 논리적으로는 이 주변에 가장 먼저 설치되었어야 할 것 같은데요.”
테라는 조곤조곤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젠킨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 재미있어. 하지만 실제로는 이렇다네, 테라 양. 무장 세력들이 보호하고 있는 곳은 일단 안전구역으로 분류되지. 다시 말해서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의미고, 생명의 위협으로부터는 안전하다는 말이기도 해. 그러니 그 주변보다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다른 곳을 우선으로 해서 구조 계획을 짜는 편이 더 효과적이야. 지금까지 세 번의 메시지는… 음, 이런 비밀을 이야기하는 건 나답지 않은 짓이지만, 뭐, 우리 사이니까……. 서울의 중심부부터 외곽까지를 나선형으로 그리며 돌았어. 이제 테라 양의 말처럼 인구 밀집 지역을 선택할 차례지.”
“그렇다고 해도 이곳에 부메랑이 설치되지 않을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잖아요. 만약 그렇게 되면… 그러니까, 여기 부메랑이 오지 않으면, 그 경우에는 어떻게 하실 계획이세요?”
테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지만, 그 질문은 젠킨스의 심장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그의 불안을 표면으로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그가 판단할 때, 인구 밀집 지역에 잠실이 포함될 가능성은 굉장히 높다. 아주, 꽤 많이, 무척 높다.
포커로 예를 들자면, 에이스 포 카드를 들고 있는 사람이 이길 수 있는 확률과 다를 바 없는 정도랄까. 에이스 포 카드를 잡고 있으면서 베팅을 불안해하는 플레이어가 몇이나 될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스 포 카드는 무적의 패가 아니다. 만약 상대방이 스트레이트 플러시라면…….
아니, 아니…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지.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어쩌자는 거야…….
젠킨스는 얼른 그 부정적인 우려들을 떨쳐 버리고 허세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 가능성은 10만분의 l 정도라고 해두지. 어때? 무시할 만한가?”
“글쎄요… 그렇게 무시해도 될까요? 젠킨스 씨는 100만분의 1 확률로 존재하는 아나 필락시스 진조차 그리 드문 경우가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만일의 경우에 대해서도 생각해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자, 운동하실까요?”
테라가 농담 반, 진담 반의 태도로 말했다.
젠장, 그렇군. 젠킨스는 확률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그녀의 환기를 통해 새삼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이 아나필락시스진인 줄로만 알고 있으니 저렇게 말하지만, 실은 널 키드인 그녀가 존재할 가능성은 1억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그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확률은 더욱더 낮게 떨어진다.
“치안이 점점 나빠질 것 같아 불안하군. 이렇게 군인들 보기가 어려워서야 당장 강도를 당한다고 해도 아무도 도와줄 것 같지가 않아. 테라 양이 있는 곳은 위험하지 않나?”
비가 조금씩 들이치는 내야석 쪽으로 자리를 옮겨 걷던 젠킨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많은 군인들이 바쁘게 움직이던 그라운드 위조차 썰렁하게 비어 있다.
“아직까지는요. 아이들이랑 어머니들이 함께 계셔서 괜찮지만, 저분들이 어디론가 이동하고 나면, 그때는 정말 무서울 것 같기는 하네요.”
테라는 이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쓸쓸해진다는 식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많은 귀여운 아기들… 위험한 곳으로 가려는 걸 보고 있으면서도 도울 수가 없다. 그게 괴롭다.
“그럼 어쩌라고요! 우리보고 애를 안고 죽어버리라는 말이에요? 응? 우리가 여기에서 다 자살이라도 하면 만족할 건가요? 계속 똑같은 대답만 하지 말고, 윗사람들에게 물어보기라도 해줘요! 아니면 그 사람에게 우리를 데려가 주든가! 목숨이 걸린 일이라고요!”
대민 지원 센터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의 악다구니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다. 악을 쓰는 사람부터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해하는 사람까지 나온다.
사정만 들어보면 다들 구구절절하다. 하지만 병사들은 그저 정해진 답변밖에 할 수 없다.
“이동이 어려운 분들께는 추후에 대책이 마련되는 대로 새로 통보를 할 겁니다. 그러니 좀 더 기다리셔야 합니다.”
“기다리라는 말 좀 그만해! 당신들은 그냥 그 말만 하고 끝이지만! 이쪽은 목숨이 걸려 있다고! 이걸 봐! 당신들 시키는 대로 따라 뛰다가 발목이 돌아갔어! 부은 거 보여? 그런데 이 발목으로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못 뛴다고!”
사람들은 격하게 항의를 하고, 또 애원을 하며 매달렸다. 견디다 못한 현장 책임자 소위가 항복 선언을 했다.
“알겠습니다. 여러분의 뜻이 그렇다는 걸 상부에 보고하도록 할 테니까, 하루만 기다려 주십쇼. 그리고 일단 이 종이에 서명을 해주세요. 태양 그룹 수용소로 가시길 원하는 분이 몇 분이나 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을 해야, 상부에서도 이 일에 좀 관심을 가지실 겁니다.”
소위의 말이 끝나자 항의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금은 작아졌다. 그리고 분위기도 차츰 진정되어 갔다.
사람들은 대민 지원 센터 한구석에 모여서서 자신의 이름을 적고, 사인을 했다. 이름 옆에 ‘꼭 태양 그룹으로 보내주세요. 부디 살려주세요’라고 쓰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들 필사적이군. 이동에 대해 걱정이 없는 건 나와 저 사내뿐인 것 같아.”
내야석과 외야석의 경계 근처까지 걸어갔을 때, 젠킨스가 외야석의 흡연 구역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에는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아가며 담배 연기를 내뿜는 민구가 서 있었다.
테라와 젠킨스를 알아본 민구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바로 담배를 재떨이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걸이로 야구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떤가, 테라 양. 지금 귀하의 이웃들이 다 이주해 버리고 나면, 나와 저 사내가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나는 아무런 무력이 없지만, 저 난폭한 남자라면 테라 양을 지켜줄 수 있을 테니까.”
민구가 사라진 것을 보고 젠킨스는 테라에게 말했다. 테라는 쓸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분은 제가 가까이 가는 걸 싫어해요.”
“어째서? 미치지 않고서야 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다가오는 걸 싫어할 리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젠킨스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기운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흉터사내다. 어느 틈에 가까이 다가온 흉터사내가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진 얼굴로 테라에게 말했다.
“이야기 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