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박 이병, 쉘터 구하기(1)
진우의 난데없는 군밍아웃에 강 소위는 침을 꿀떡 삼켰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그래, 가자.”
강 소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 하사는 그제야 좀 살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좋고 나쁜 것을 떠나 강 소위의 사격 실력은 절대 박 소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야, 기다려 봐. 너만 가려고?”
보안관이 진우를 붙잡는다. 진우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군인들만 쉘터 안으로 보내주고 금방 올게.”
“금방 올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리 만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찢어지는 건 안 돼, 이 새끼야.”
보안관은 진우의 전술 조끼를 탁,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조심해서 싸우고 있어. 내가 금방 규영이 업고 와서 뒤따라갈 테니까, 우리 기다려. 절대로 너 혼자 저 부대 안으로 들어가지 마.”
“좀비들이 가까이 오고 있다던데…….”
“그러니까 더 같이 있어야지. 네 탄창 가방이랑 먹을 거 챙겨서 늦지 않게 따라잡을게.”
“그래, 알았어!”
진우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고 하사와 강 소위, 삼숙이와 임수정이 쫓아갔다.
“이것 봐! 이렇게 양쪽으로 부축을 해줘야 뛸 수 있는 양반이 뭘 싸운다고!”
임수정과 함께 강 소위를 양쪽에서 부축하고 달려가며 고 하사가 핀잔을 준다. 하지만 그 역시도 강 소위의 의로움이 싫지는 않았다. 아마 고 하사가 강 소위의 위치에 있었더라도 비슷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사람이 있어요! 여자 둘이고, 부상을 입었습니다!”
앞서 달리던 진우가 외쳤다. 고 하사와 강 소위도 보았다. 길 한쪽으로 밀어둔 자동차와 가로수 사이에 피투성이가 된 초희와 가희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가희는 이미 빈사 상태였고, 초희는 그런 가희를 부둥켜안아 어떻게든 일으켜 세워보려 애를 쓰고 있었다.
“가희야! 정신 차려! 여기! 여기 좀 막아! 피나잖아! 아우, 야! 목 좀 꽉 붙잡으라고!”
초희는 눈물과 피가 범벅이 된 얼굴로 울부짖으며 가희를 깨우려 애를 썼다. 하지만 가희는 피가 끓는 소리를 내며 이따금씩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운에 부치는 상황이다.
“하아아~ 초…희야… 미안…해… 어서 가… 그냥… 너라도… 도망… 하아, 하아~!”
“안 돼! 이 기집애야! 우리 둘이 자유롭게 살자고 했잖아! 이제 그렇게 됐어! 너만 정신 차리면 돼! 조금만! 조금만 더 가자, 응? 가희야!”
가희를 들쳐 업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초희는 그제야 진우 일행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고 하사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콱 박혔다.
“어! 의사 오빠! 군인 의사 오빠!”
초희는 간절히 손을 흔들며 고 하사를 불렀다. 그가 요즘 왜 쉘터에서 사라졌었는지, 그 사건의 배후에 누가 있던 건지 따위는 머릿속에서 계산되지 않았다.
하마터면 그가 죽을 뻔했던 사건의 원흉이 바로 자신의 곁에 있는 가희라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지금 초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 군인 의사가 총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며 다 죽어가던 강 실장을 살려낸 사람이라는 사실뿐이다. 이 사람이 도와주면… 가희는 살아날 수 있다.
“초희 씨…….”
그녀들의 앞에 멈춰 선 고 하사가 힘없이 대꾸했다.
너무도 끔찍하고 의외인 광경.
영원히 뺀질거릴 것만 같던 두 여자의 온몸은 피로 흠뻑 젖어 있다. 초희의 팔에도 가희의 가슴에도, 깊게 파인 칼자국이 나 있다. 하지만 피의 대부분은… 가희의 목에서부터 흘러나온 것으로 보였다.
한때 곱고 하얗던 그녀의 목덜미는 잘린 경동맥에서 뿜어진 피로 온통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부 자체의 색깔도 푸른색을 띨 만큼, 출혈은 심각했다.
“군인 의사 오빠! 가희 좀, 가희 좀 살려주세요! 박 소위가 칼로 찔렀는데… 얘가 좀 이상해요! 너무 차갑고… 자꾸 쓰러져요……. 흐으윽! 네? 제발 부탁할게요! 제발요!”
고 하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희를 살리려면 종합병원급의 의료 시설과 인력이 필요하다.
“이미 너무…….”
“안 돼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이렇게 죽는 건… 너무… 흐윽!”
초희는 고 하사의 손을 잡고 애원하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 언니… 끄르륵~!”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던 가희가 임수정을 알아보고 힘없이 입을 연다.
가장 무서웠을 때, 가희가 마음을 열고 잠시나마 기대보려 했던 사람. 그런데 자신 때문에 죽은… 죽었다고만 믿었던 사람이 그녀의 눈앞에 있다.
“…다행이에…요. 커흑~ 계속 미안…했는데…….”
가희는 역류한 피 때문에 그륵거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가희 씨…….”
임수정은 가희의 앞에 앉아 그녀의 눈을 보며 이름을 불렀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날 밤 옆자리에 앉아 덜덜 떨며 몰래 담배를 피우던 약한 여자, 그렇지만 여러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위기에 처하게 만든 악녀. 추억도 있고, 원한도 있다.
“끄으윽! 세 번… 다 지나갔었나 봐요…….”
가희가 고개를 모로 떨군 채 중얼거린다. 처음에 임수정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가희는 칼에 베여 옷이 벌어진 자신의 가슴을 힘겹게 손으로 쓸며 다시 말했다.
“그… 부적이요… 후우~ 벌써… 세 번 다… 썼었던 건가 봐요… 어쩐지… 영 불안…하더라…….”
가희의 눈에 눈물이 또르르 맺혔다가 흐른다.
“끄으으으~! 후우우우~ 얘는… 그 일하고… 아무 관련이 없어요… 후우우~ 초희, 얘는…….”
초희를 향해 고개를 돌리려던 가희의 목이 힘없이 뒤로 넘어간다. 힘겹게 울리던 그녀의 숨소리가 멈췄다.
“야! 가희야! 이년아! 안 돼! 그러지 마!”
초희는 오열하며 가희에게 팔을 뻗었다. 고 하사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켜 세운다.
“다 끝났어요! 그만! 이제 여기에서 벗어나야 돼요!”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아 보여서 잠시 멈춰 서 있던 진우는, 고 하사가 초희를 끌고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소름이 끼치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좀비가 바짝 다가와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100여 미터를 더 내달린 진우의 눈에 도로가에 쓰러져 있는 병사의 모습이 보였다. 꿈틀대는 걸 보면 아직 살아 있다.
“우리 부대 애야!”
비지땀을 쏟으며 뒤따라오던 강 소위가 말했다. 만배파가 쏜 총에 맞아 쓰러져 있던 트럭 운전병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트럭도, 박 소위도 자취를 감췄고, 주변에는 시체만 잔뜩 널브러져 있다.
“야! 정신 차려! 나 강 소위야…….”
일단 트럭 운전병을 향해 달려가려던 강 소위를 진우가 붙잡았다.
“쉿!”
진우가 왼손으로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한다. 그러고는 그를 끌고서 길가의 오른편으로 가 밀쳐져 있는 자동차들 뒤에 몸을 숨겼다.
“왜? 뭔데?”
강 소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목소리를 낮췄다. 이 어린 친구들의 재주가 워낙 신기에 가깝다는 말을 고 하사로부터 계속 들어왔기 때문이다.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뭔가를 이 녀석들은 느끼고 볼지도 모른다.
“저쪽에… 개인화기로 무장한 사람들이… 어쩌면 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있습니다. 아마 저 슈퍼 건물이나 그 옆 음식점 건물 주변에…….”
진우는 자신이 지목한 건물들을 계속 눈으로 훑으면서 조용히 설명을 해줬다. 강 소위는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시선을 따라가 봤다. 무슨 흔적이라도 있는가 싶었지만… 개뿔, 아무 단서도 없다. 그냥 주변과 다를 바 없는 난장판이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뭘 보고 그런 판단을 내린 거야?”
강 소위가 물었다. 진우는 총을 들어 조준경을 눈에 가져다 대고 나서 왼손으로 삼숙이를 가리켰다.
“얘가 거길 향해 서서 낮게 짖었습니다.”
이야기가 점점 더 황당해지는 바람에 강 소위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확실히 시꺼먼 개새끼는 침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의젓하게 그쪽을 바라보고는 있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개처럼. 하지만 이게 논리적으로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여기에 왜 숨었습니까? 도로에 쓰러져 있는 병사… 우리 중대 애인 것 같던데,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임수정과 함께 초희를 끌고 합류한 고 하사가 강 소위의 등 뒤에 쪼그려 앉으며 속삭였다.
“저쪽에 뭐가 숨어 있대… 저 개가 알려줬다고…….”
강 소위는 바보 같은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찾았습니다. 슈퍼 건물 2층 남쪽입니다. 저 사람이 누구입니까?”
진우는 총을 그 자리에 고정시킨 채 다가와서 눈을 대보라고 신호를 보냈다.
강 소위는 몸을 기울여 조준경에 오른쪽 눈을 갖다 댔다. 무성하게 자라난 초록색 가로수 사이로 창문이, 그리고 그 안쪽에 너무도 낯익은 얼굴이 드러났다가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박 소위, 이 개자식…….”
강 소위는 이를 꽉 물며 중얼거렸다. 계속 훌쩍거리고 있던 초희가 박 소위라는 이름을 듣고 눈을 부릅뜬다.
“박 소위! 죽여야 돼요! 그 개새끼! 가희, 불쌍한 애를!”
“알았어요, 알았어요. 조용!”
고 하사가 얼른 그녀의 입을 막았다. 고 하사의 손 위로 초희의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민간인들도 있습니다. 제가 본 건 여자만 세 명. 어떻게 합니까?”
진우가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강 소위는 초희에게 물었다.
“박 소위가 일행이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저놈에게 한패가 있었냐는 말입니다.”
“몰라요… 그냥 미친 새끼처럼 개지랄을 했었어요. 자기 부하도 막 까고… 아마 혼자일걸요?”
고 하사가 손을 떼자, 초희는 쿨쩍거리며 대답했다. 강 소위는 진우에게 말했다.
“후우~ 그럼 저 민간인들은 인질인 모양이야.”
“지금은 박 소위라는 사람이 시야에 잡히지 않습니다. 블라인드가 걷혀 있는 저 창문 앞으로 와야 하는데…….”
조준경을 통해 창문을 겨누며 진우가 말했다. 강 소위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만약에 내가 창문 쪽으로 불러내면 제압할 수 있겠나?”
“제압, 어렵습니다. 전투모도 쓰고 있고, 창문으로 보이는 면적이라야 얼굴과 어깨 정도뿐인데… 어설프게 부상을 입혔다가는 내부의 민간인들에게 어떤 화풀이를 할 지 장담 못합니다.”
진우는 단칼에 고개를 저었다.
역시 맞추기는 어렵겠지……. 강 소위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긴 너무 어렵지? 각도도 그렇고, 그늘이 진 상태에서 저 작은 표적을 순간적으로 맞춘다는 건… 저 새끼도 총을 쏴댈 텐데. 하아~ 그럼 어떻게 한다…….”
조준경에서 눈을 뗀 진우는 강 소위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원래 뒤에 이으려던 이야기를 마저 했다.
“사살할 수는 있습니다.”
냉정하게 그 말을 하는 진우의 얼굴 위로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드러나지 않아서 강 소위의 목덜미에는 소름이 돋았다. 이 녀석은 제압과 사살을 다른 의미로 썼던 모양이다.
후우~ 한 번 숨을 내쉬어서 목소리를 가다듬은 강 소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부탁해. 내가 말을 건네볼게… 여의치 않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당겨줘. 아… 꼭 맞춰야 돼, 실수 없이. 여러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꼭.”
“실수하지 않습니다.”
진우는 다시 조준 자세로 돌아갔다.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질 만도 한데, 녀석의 총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강 소위는 진우로부터 두어 발짝 옆으로 자리를 옮겨서 차량 위로 고개를 내밀고 슈퍼 건물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박 소위! 나다! 강 소위야! 박 소위!”
그의 고함 소리는 박살 난 창문들을 통해 박 소위의 귀에 닿았다.
강 소위?
이미 죽었어야 할 녀석의 목소리가 난데없이 들려오자, 박 소위는 깜짝 놀라 블라인드가 내려진 창 쪽으로 다가갔다.
웅성거리는 여자들을 조용히 시킨 박 소위는 블라인드의 틈을 살짝 벌려서 밖을 내다봤다. 정말로 강 소위가 그 자리에 서 있다.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저 어리바리한 새끼가? 그리고… 왜 하필 이때 여기에 와 있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한꺼번에 몰아서 일어났다. 이쯤 되면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무리다.
“…애초부터 다 한패였던 건가?”
눈알을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박 소위가 멍청한 결론을 내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희, 초희, 육만배, 그리고 강 소위 저 얍삽한 새끼까지… 다 한패였던 거다. 그래서 육만배 패거리가 저놈을 빼돌린 뒤…….
그다음 단계의 추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찾는다는 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박 소위의 마음속에서는 순식간에 자신을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이상한 논리의 비약이 이루어졌다.
그래, 저 개새끼도 한통속이었어… 나만 이용당한 거야…….
그렇게 원망하기 시작하니 죄책감은 사라지고 분노가 끓어오른다. 그동안에도 강 소위는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 대고 있다.
“박 소위! 이제 그만둬! 아직 돌이킬 수 있다! 더 문제를 일으키지 마라!”
“닥쳐! 이 개새끼야! 뻔뻔하게 어디서 그따위 소리를 지껄여?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박 소위는 발끈해서 악을 썼다. 그러고는 위치를 옮겨 유리가 깨져 있는 창문 밖으로 총구를 내밀었다. 육만배도, 가희도 다 놓쳤지만, 강 소위 저 개새끼는 대갈통에 바람구멍을 내줘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박 소위는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치면서 가늠자에 강 소위의 머리가 걸리도록 총구를 내렸다.
타앙―
주변 건물들 사이로 메아리를 만들며 퍼져 나가는 한 발의 총소리.
그와 동시에 박 소위의 오른쪽 눈이 뻥 뚫렸다. 박 소위의 눈꺼풀을 찢고, 안구를 터뜨린 뒤, 사선으로 뼈를 꿰뚫고 들어간 총알은 그의 뇌를 사정없이 휘저으며 반대편의 두개골을 뚫고 나갔다.
퍽―
박 소위의 전투모에 가로막혀 더 비행하지 못한 총알의 운동에너지 때문에 그의 머리와 몸 전체가 휘청거렸다.
바로 옆의 창문에 두 줄기의 피가 튀었다. 박 소위의 시체는 머리로 창틀을 들이받은 뒤 튀어나와 한 바퀴 빙― 돌면서 창문 아래로 기울어 떨어졌다.
털썩―
바닥에 떨어져 내린 박 소위의 전투모가 벗겨져 데구루루 구른다. 전투모 내부에 갇혀 있던 뼛조각들과 피, 뇌수가 왈칵 쏟아지며 보도를 적셨다. 뻥 뚫린 박 소위의 눈이 하늘을 향해 있다.
“꺄아악―!”
2층에서 반 박자 늦게 터져 나온 여자들의 비명을 들으며, 강 소위는 멍한 얼굴로 박 소위의 시체와 녀석이 떨어져 내린 창문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찰나의 일이었다. 박 소위가 창밖으로 몸을 기울인다고 느낀 순간 이미 총소리는 울렸고, 그 한 방에 모든 상황이 종료되어 버렸다.
‘대체… 언제 조준을 한 거지? 저 많은 창문 중에서 저곳으로 얼굴을 내민다는 보장도 없었는데… 뭐, 저런 괴물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강 소위는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푸하아~ 잠시 잊고 있던 호흡을 다시 하면서, 강 소위는 진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 나쁜 놈 죽였어? 다 끝난 거?”
그제야 합류한 보안관이 진우에게 물었다.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진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강 소위에게 말했다.
“가시죠, 강 소위님.”
“…간다고?”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강 소위가 멍한 반응을 보이자, 보안관이 목소리를 높여 진우를 거들었다.
“그래요, 아저씨! 저 울부짖는 여자들 데리고 빨리 더 위층으로 도망가자고요! 2층은 너무 가까워요. 좀비들이 눈치챌 겁니다!”
“나는 쟤들 챙길게! 누구 한 사람만 더 도와줘!”
고 하사는 도로가에 쓰러져 있는 트럭 운전병과 승합차 뒤의 병사를 챙기기 위해 뛰어갔다. 삼식이가 얼른 그를 돕기 위해 나섰다.
“제니야.”
슈퍼 건물로 들어가기 전에 유빈이 조용히 제니를 불렀다. 그러고는 얼굴을 좀 가리라는 시늉을 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제니가 이 무리에 있다는 소문이 군인들 사이에 퍼지면 비밀스럽게 움직이기는 다 트는 거다.
“아! 알았어요, 오빠.”
제니는 유빈의 목에 걸려 있던 수건을 당겨 뺀 뒤, 자신의 코와 입을 가렸다.
“자요, 이제 못 알아보겠죠?”
수건의 매듭을 묶고 후드 티의 모자를 푹 뒤집어쓴 제니가 물었다.
“아니, 그런 것 보다… 그거 내가 종일 땀 닦던 거라… 냄새가 어마무시할 텐데… 그걸 코에…….”
“좋아요, 오빠 냄새.”
제니는 작게 속삭이며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인다.
뭐, 어쩌겠어. 자기가 좋다는데야……. 유빈은 더 말하지 않고 진우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2층에서는 여러 가지 소리들이 시끄럽게 울려 댔다. 여자들의 비명과 울부짖음. 모두 진정하라는 진우의 외침. 정신이 하나도 없다.
“여기서 시간 끌지 말고 맨 위층까지 쭉쭉 올라가자! 내가 앞장설게! 너희도 거기에 너무 모여 있지 말고 따라와!”
보안관이 해머를 꽉 쥔 채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규영이를 카트에서 내린 뒤 등에 업은 신입과 태권소녀가 그 뒤를 따르고, 유빈과 제니도 줄줄이 쫓아갔다.
“삼식이가 짊어지고 온 짐도 갖고 와야 돼!”
최고층인 6층의 사무실 안에 탄창 가방과 MP5 가방을 내려놓은 유빈은 다시 계단을 되돌아 내려갔다.
좀비들의 악취는 아주 가까워져 있다. 서둘러야 한다. 고 하사는 부상당한 병사들을 부축하고 오느라 정신이 없고, 2층의 여자들은 이제야 강 소위를 따라 올라온다.
“다 왔나?”
미친 듯이 서둘러서 6층으로 피난을 마친 유빈이 바쁘게 손가락을 꼽아가며 인원 점검을 했다. 의식이 가물거리는 두 명의 부상병에, 얼이 빠져 있는 초희까지 구석에 앉아 훌쩍이는 걸 보면 누락된 인원은 없는 것 같다.
“후우우~ 젠장, 난리네.”
그제야 유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잠시 후, 도로를 가득 메우고 수천의 좀비들이 걸어온다. 서쪽에서 접근해 온 좀비들은 방향을 꺾어 남쪽으로 전진했다. 어제 보안관과 진우가 보았던 그놈들이다.
“저놈들, 건대 쉘터로 가는 건가요?”
유빈이가 강 소위에게 물었다. 강 소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런데 큰 위협은 안 돼. 어차피 철책 앞에서 좀 시끄럽게 굴다가 돌아가니까.”
조준경으로 남쪽 건대 쉘터 방향을 살피던 진우가 그 말을 듣고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철책… 다 뜯어지고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