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355화 (355/449)

5장 건대 쉘터 함락(6)

박 소위는 다시 대검을 들어 올렸다.

“하아~ 하아~”

흥분해서 거친 숨을 내뱉는 박 소위의 가슴은 심하게 들썩이고, 그의 피 묻은 칼끝은 가볍게 떨렸다.

눈앞에서 울부짖는 초희와 고통스러워하는 가희의 모습을 보면서도 동정심 따위는 들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들의 비명을 원하는 폭력적인 욕망만이 그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더러운 년들의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려야만 상처 받은 그의 자존심이 회복될 것 같다.

“이러지 마요! 그간 쌓은 정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사랑한다면서요!”

초희가 가희를 부축하며 애원한다. 박 소위는 눈을 부릅뜨며 악을 써 댔다.

“아가리 닥쳐! 이 개 같은 년들아! 나는 모든 걸 버리려고 했어! 가희, 저년을 위해서 살인까지 했다고! 그런데… 그런데 너희는! 너희는 끝까지 나를 가지고 놀았어! 이 천하의 쌍…….”

광인처럼 울부짖으며 힘차게 칼을 내리찍으려던 박 소위가 멈칫한다. 얼굴을 강타당해 바닥에 쓰러져 있던 승합차 운전병이 총을 집어 들려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새끼야! 무슨 짓을 하고 싶어서!”

박 소위는 이미 피투성이인 운전병의 얼굴을 세차게 걷어차고 녀석의 개인화기를 멀리 밀어버렸다. 얼굴과 가슴, 옆구리를 잇달아 걷어차인 운전병은 끙끙 앓기만 할 뿐,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다.

그를 완전히 제압했다고 생각한 박 소위는 다시 가희 쪽으로 돌아섰다. 그때였다.

투투투― 투투둑― 투투둑―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대고, 자동차와 근처 상가의 유리들이 박살 난다. 박 소위는 다급하게 허리를 숙여 승합차 뒤에 숨었다.

투둑― 투투둑―

두섭이와 기동이는 서로 교대해 가며 계속해서 총알을 퍼부었다. 손가락이 날아간 두섭이가 지시를 하면, 만배파 조직원이 탄창을 갈아 끼워준다.

기동이와 두섭이는 그걸 받아 번갈아가며 방아쇠를 당겨 박 소위의 목숨을 노렸다. 박 소위의 등과 전투모 위로 깨진 유리 조각들이 쏟아졌다.

“이… 이런 개새끼들! 어디서 감히!”

거북이처럼 잔뜩 움츠리고 있으면서 박 소위는 이를 빠득 갈았다. 두 여우 년들에게 놀아났다는 것도 분하지만, 그 배후에 쓰레기 같은 깡패 새끼들이 있었다는 것이 더욱 화가 나는 일이다. 덕분에 그의 인생도 놈들과 같은 수준으로까지 끌어내려졌다.

키리리릭, 부우우웅―

트럭에 시동이 걸리고 엔진이 풀가동되는 소리가 들려온다. 쏟아지는 총알을 피하기 위해 박 소위가 자동차 뒤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동안 트럭 운전병으로부터 열쇠를 빼앗아온 육만배 일당이 달아나는 소리였다.

“도망가지 마! 덤벼! 이 겁쟁이 새끼들아!”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박 소위는 벌떡 일어나 트럭을 겨냥했다. 그러고는 사정없이 난사했다. 어차피 건대 쉘터에 남아 있는 총알을 거의 다 쓸어왔으니, 실탄은 충분히 여유가 있다.

팅팅팅팅― 팅팅―

그가 쏜 총알들이 대형 트럭의 두꺼운 강판에 맞고 튕겨져 나온다.

콰직―! 콰직―!

부우웅―

트럭은 거리의 여기저기에 부딪치고 총알 세례를 받으면서도 어느새 유턴을 마쳤다. 쇠파이프로 덮어놓은 앞 유리창 너머로 조폭 새끼들의 얼굴이 보인다.

박 소위는 급하게 탄창을 갈아 끼우고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팅― 팅팅―

트럭의 사이드 미러가 날아가고, 유리창에 여러 개의 총알구멍이 생겨났다. 거미줄 같은 실금이 쫙 간 운전석 유리!

그러나 타고 있는 놈들을 맞추지는 못했다. 좀비들의 공격에 대비해서 보강하느라 박아둔 쇠파이프가 보호해 준 때문이다. 트럭은 순식간에 박 소위의 옆을 지나쳐 건대 쪽으로 달려간다.

“으아아아아아!”

도로 위로 뛰어나간 박 소위는 트럭을 쫓아 달려가며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바퀴라도 맞춰서 트럭을 멈추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놈들의 기동력을 마비시킨 뒤, 기어 나오는 녀석들을 하나하나 사살해 버리면 된다.

팅― 티잉―

퓩! 피슉~!

박 소위의 노력은 보상을 받았다. 총알에 꿰뚫린 트럭의 오른쪽 뒷바퀴에서 둔중한 소리가 울리고, 바람이 빠져나간다. 금세 트럭의 중심이 기울어 비틀거리고, 휠이 바닥에 끌렸다.

“죽어어~! 죽어! 이 개새끼들!”

약간의 성공을 거둔 박 소위의 더욱 흥분해서 날뛰며 사정없이 총구를 휘둘렀다. 난사된 총알이 트럭 짐칸과 왼쪽 뒷바퀴를 때린다.

텅― 터텅―!

휠에 갈린 타이어 조각이 너덜너덜해진 채 튕겼다. 하지만 양쪽 뒷바퀴의 공기를 잃고 휘청거리면서도 트럭은 계속 달렸다. 뛰어서 쫓는 박 소위의 속도로는 이미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거리가 벌어져 버렸다.

“야, 이 비겁한 쓰레기들아! 덤벼보라고!”

박 소위는 멀어져 가는 트럭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그의 간절한 바람이 이뤄지려는 것일까, 저 멀리 달아나던 트럭이 제대로 코너를 돌지 못하고 철책을 들이받으며 비틀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콰드드득! 우드득!

트럭의 무게와 속도 때문에 철책은 모기장처럼 뜯겨 나갔다. 계속 미끄러지던 트럭은 장벽을 들이받고 넘어지면서야 겨우 멈춰 섰다.

우르르르―

부서진 장벽의 파편들이 흙먼지와 함께 쏟아져 내린다. 막아놓았던 쉘터의 외곽 한쪽에 커다란 균열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심각한 상황을 마주하면서도 박 소위의 머릿속에는 놈들을 모두 사살할 수 있다는 환희의 감정만이 떠올랐다. 뒷문을 열고 기어 나오는 육만배 일당이 모두 벌레처럼 하찮게 보인다.

“으하하하하! 이 개새끼들아!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나? 으하하!”

광기 가득한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박 소위는 K―2의 탄창을 뽑아 잔탄 수를 확인했다.

남은 실탄의 수는 세 발. 새 탄창을 장착하기 위해 전술 조끼를 더듬던 박 소위가 잠시 멈칫했다.

“…벌써 다 쐈나?”

예비 탄창이 없다. 전술 조끼에 장착하고 있던 여섯 개의 탄창을 모두 사용했다니… 순식간에 엄청나게 퍼부은 셈이다.

“뭐, 탄창은 얼마든지 있어.”

자신의 배낭에서 탄창을 보충하기 위해 돌아선 박 소위의 눈에 승합차에서 뛰어내리려는 민간인 여자들이 보였다.

그렇게는 안 되지. 못 도망가. 박 소위는 승합차 쪽으로 다시 뛰어가며 총구를 하늘로 겨누고 두 발을 쐈다.

타앙~! 타앙!

“꺄꺄아악!”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멈칫한다. 박 소위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동작 그만! 거기 서! 움직이면 다 사살할 거야! 멈추라고!”

박 소위는 승합차를 향해 달려가며 탄창에 들어 있던 마지막 한 발로 앞쪽 건물의 유리창을 부쉈다.

여자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쇳소리를 냈다. 공포로 얼어붙은 여자들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박 소위가 악을 썼다.

“왜 도망가? 응? 당신들이 왜 도망가느냐고? 나를 믿고 보호해 달라고 해야 할 것 아니야? 빨리 차에 타!”

여자들은 공포에 질려 박 소위를 바라보았다.

너를 믿으라고? 살인에, 아군 폭행에, 사방에 총질을 하고, 가희와 초희에게 칼을 휘두르던 미친놈을 믿으라고?

이 정신병자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조차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 두 년은 어디 갔어? 응? 어디 갔냐고?”

여자들을 승합차에 싣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박 소위가 가까이에 있는 파마머리 여자의 멱살을 움켜쥐고 물었다.

“두 년이라니… 누구요?”

“가희, 초희, 그 개 같은 년들 말이야! 어디 갔어? 봤잖아?”

박 소위가 마구 윽박질러 대자 파마머리는 눈물이 가득 고인 채 고개를 저었다.

“제가… 제가 어떻게 알아요?”

이이익―!

파마머리를 승합차 안에 밀어 처넣은 박 소위는 배낭을 조수석에 던지고 운전석에 올랐다. 두 년이 도망친다고 해봐야 갈 수 있는 거리라는 건 어차피 빤하다. 전차로 차량들을 밀어 길을 터둔 지역 내에서 숨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차를 타고 쫓아가 육만배를 죽인 뒤, 그년들은 천천히 잡아 조지면 된다. 그년들이 충분히 후회하고 뉘우칠 수 있을 만큼 천천히… 아주 고통스럽게…….

박 소위는 기어를 후진으로 바꾸고 힘차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그런데… 승합차는 도무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기어를 바꾸고, 모든 페달을 다 밟아 봐도 소용이 없다.

“이게 왜 이래! 씨발, 차까지 왜 이 지랄인데!”

성질을 이기지 못해 핸들을 두드리던 박 소위의 눈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보였다. 보닛 아래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였다.

다급하게 뛰어내려 확인해 보니, 이미 엔진룸 부근에는 무수한 총알구멍이 나 있다. 총격전을 주고받는 동안 입은 데미지다.

“이런… 이런 좆같은…….”

당황한 박 소위는 시계를 보았다. 좀비들이 이 부근을 지나가기까지 남아 있는 시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이제 겨우 20여 분. 그렇게 위험한 시간대를 골랐던 이유는 그가 다른 병력들로부터 고립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밀려드는 좀비 때문에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질 때, 자신은 트럭 뒤쪽의 일곱 놈을 죽이고, 가희, 초희와 함께 두 번째 목표 슈퍼마켓 주변으로 사라질 계획이었다.

그러면 아무 걱정 없이 먹고 자면서 계속 뜨거운 사랑만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주 오랫동안… 구조대가 그들을 찾아낼 때까지.

사라진 인원이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해서 30명 가까이 되니까 구조대는 반드시 올 거라고 믿었다. 군이 포기하더라도 태양 그룹은 구조대를 보내줄 것이라 생각했다. 만일을 대비해 위치를 표시하기 위한 연막탄도 두 개나 챙겨 왔으니까.

그런데…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자동차마저 박살 나버렸다. 박 소위는 승합차의 바퀴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이제는 복수고 뭐고 따질 것이 아니라, 당장 좀비들로부터 살아나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되어버렸다.

“내려! 다 내려!”

박 소위는 배낭을 메고 여자들의 목덜미를 잡아 끌어냈다. 계획 변경. 지금부터는 이 슈퍼마켓 주변에서 음식을 빼 오며 버텨야 한다.

마침 여자들도 잔뜩 있으니 성적으로 굶주릴 일이 없다. 자물쇠가 튼튼한 집만 찾으면 그가 원래 세웠던 계획과 얼추 비슷해진다.

“따라와! 빨리!”

“그냥… 그냥 저희 놓아주시면 안 돼요? 예? 제발 살려주세요!”

거리로 끌어내려진 여자들은 눈물범벅이 되어 박 소위에게 사정을 했다. 무릎을 꿇은 그녀들을 억지로 일으키며 박 소위는 도로의 서쪽을 가리켰다.

“살려주려고 이러는 거잖아! 이 멍청한… 이 소리를 들어봐! 이 소리! 안 들려? 좀비들이 온다고! 몇 천 마리나 되는 놈들이란 말이야!”

여자들의 얼굴에 공포가 덮쳐든다. 흥분과 두려움 때문에 미처 인지하지 못했었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귓가를 자극하는 이 소리는… 좀비들의 포효다. 그 악취가 느껴질 만큼 꽤나 가까워져 있다.

“알아먹었으면 일어나!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 피해야 돼!”

박 소위는 여자들을 이끌고 슈퍼마켓 건물의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2층의 저축은행 사무실은 유리문이지만, 스테인리스 셔터가 올려져 있었다.

그만하면 충분히 튼튼하다고 판단한 박 소위는 앞뒤 가리지 않고 여자들을 전부 안으로 밀어 넣었다.

“더 안으로 들어가! 아무 사무실로라도 들어가라고! 문가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빨리!”

박 소위는 여자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셔터를 내렸다. 그러고는 유리문을 잠갔다.

찌이잉―

또 엄청난 강도의 두통이 뇌를 흔든다. 낮에 이따금씩 이렇게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고, 아무 생각도 없어진다. 마약의 부작용이지만, 박 소위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너무 격무에 시달리고 스트레스를 받아 몸이 경고를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으으으~ 젠장! 으으!”

박 소위는 욕설을 내뱉으며 여자들이 숨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은 박 소위는 수통을 꺼내 목을 축였다. 대체 얼마 동안이나 이렇게 악을 써가며 싸웠었는지 잘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하아~ 하아~”

입가를 훔친 박 소위는 여자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섬뜩한 시선이 향하자 여자들은 더욱더 바짝 한 덩어리로 달라붙으며 벽 쪽으로 물러났다.

“훗! 내가 무서워?”

박 소위는 코웃음을 치며 여자들에게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그는 창가로 걸어가 블라인드를 확 걷어버렸다.

“내가 싫은 사람은 지금 말해. 나가게 해줄 테니까. 조금 있다가 이 아래로 좀비들이 지나갈 때, 창문 밖으로 던져 주지.”

으흐흐흑~!

여자들 사이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박 소위의 상할 대로 상한 기분을 조금은 달래준다. 가희와 초희에게 못한 앙갚음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박 소위는 여자들이 울도록 내버려 둔 채 그의 수중에 들어온 여섯 명의 여자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가희, 초희만은 못하지만, 이 여자들과 식량이 다 떨어질 때까지 새로 알게 된 쾌락의 세계 속에서 군림하리라.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두통은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극장 옥상의 고 하사 일행이 육만배와 박 소위 간에 일어난 총격전을 알아차린 것은 이요섭이 사망한 첫 총성이 울렸을 때였다.

당시 옥상에는 두 군인 외에 네 사람이 더 있었다. 규영이와 신입, 태권소녀, 그리고 임수정. 나머지 인원은 음식을 날라 오기 위해 고 하사들이 숨어 있던 건물로 가 있는 상황이었다.

타앙― 타타타타타―

평소보다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총소리에 깜짝 놀란 강 소위는 재빨리 망원경을 들어 올렸다. 그들이 위치한 극장에서 3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멈춰 선 트럭과 승합차 사이로 총알들이 날아다니고, 사방의 유리창이 박살 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트럭 짐칸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각도 때문에 파악되지 않았지만, 좀비와 싸우는 게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피범벅이 된 아군의 시체가 쓰러져 있는 모습도 보였다.

“뭐, 뭐야? 왜 갑자기 서로 총질을 해?”

강 소위는 깜짝 놀라 외쳤다. 장벽 외부까지 트럭이 나와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아군끼리 총질을 해 댄다는 게 더 황당했다.

망원경을 돌리던 강 소위는 승합차 뒤에서 사격하고 있는 박 소위를 알아보았다.

“박 소위…….”

강 소위가 가증스러운 놈의 이름을 불렀다. 박 소위, 저 미친놈이 또 뭔가 저지르고 있는 모양이다. 승합차 내부에는 울부짖는 여자들이 잔뜩 타고 있다.

“박 소위요? 저도 좀 봅시다, 강 소위님!”

고 하사의 말에 강 소위는 망원경을 넘겼다. 박 소위와 두 명의 병사가 한 방향으로 쏴대고 있다는 걸 확인한 고 하사는 트럭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슬쩍, 그가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기동이 놈이다.

그렇다는 건… 아마도 육만배라는 놈 역시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고 하사는 강 소위에게 다시 망원경을 건네며 말했다.

“저기… 그 두 잡놈이 서로 싸우는 것 같은데요? 박 소위랑 육만배랑 말입니다. 왜일까요? 뭔가 저희들끼리 사달이 났을까요?”

“가희, 그 여자도 있네…….”

고 하사의 말을 들으며 망원경을 꽉 움켜쥐고 있던 강 소위가 중얼거린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어느 정도 객관적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개 같은 놈들끼리 서로 원수진 것처럼 쏴대 봐야 이쪽에서는 그저 반가울 뿐이니까.

“억! 저 미친 새끼가!”

그런데 박 소위가 승합차 운전병을 후려치는 걸 본 강 소위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망원경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미 놈에게는 아군도, 적군도 없는 상황인 것 같다.

도로 위에 아군이 쓰러져 있는데 도와주기는커녕, 박 소위는 오히려 곁의 병사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중이었다.

“더는 못 참겠어!”

망원경을 내려놓은 강 소위는 자신의 총을 가지고 계단 쪽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고 하사가 그의 뒤를 쫓는다.

“강 소위님! 어디 가십니까?”

“트럭 있는 곳으로! 저 미친놈을 막아야지!”

강 소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고 하사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안 됩니다! 그 몸으로 어딜 간단 말입니까? 박 소위랑 맞싸워서 이기시겠습니까? 어떻게요? 우리는 총알도 몇 발 없어요!”

“그렇다고 여기에서 구경만 할 수는 없잖아! 저 새끼 손에 죄 없는 사병 애들이랑 민간인들 죽어나가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그럼 저 새끼랑 나랑 다를 게 뭐야?”

얼굴이 붉게 상기된 강 소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고 하사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내밀었다.

“자요, 기대요! 혼자 못 가시잖습니까!”

고 하사는 강 소위를 부축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임수정과 태권소녀가 달려와서 외친다.

“가면 안 될 것 같아요! 저 사람들 있는 곳, 오른쪽에서 좀비들이 오고 있다고요. 꽤 가까워서 시간여유가 별로 없어요!”

“저희도 봤습니다! 서두를게요! 아흐으으!"

기세 좋게 대답하던 강 소위가 부상당한 다리를 움켜쥐며 비명을 지른다. 서두르는 마음과 달리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14층이나 되는 높은 건물의 아래까지 내려간다는 건 힘들고, 아프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1층에 내려섰을 때, 강 소위의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무리예요!”

뒤따라 내려온 임수정과 태권소녀가 만류한다. 강 소위도 무리라는 걸 잘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피가 끓어서 도저히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수가 없다.

“왜 내려오셨습니까?”

진우의 목소리.

강 소위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총소리를 듣고 은신처에서 달려온 보안관 일행이 서 있었다.

얼― 얼―!

삼식이는 오르막 도로의 남쪽을 향해 짖어 댄다. 태권소녀가 손뼉을 치며 진우를 맞았다.

“어! 그래, 진우! 너 잘 왔어! 이 아저씨 좀 말려. 아니다. 네가 도와줄 수 있으면 좀 도와줘. 좀비들도 몰려오고… 아주 난리야!”

“무슨 일인데… 총소리 뭐야?”

상황 파악이 안 된 진우에게 고 하사가 간단히 설명을 해줬다. 바로 몇 백 미터 앞에서 미친 박 소위가 민간인과 아군 병사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댄다고. 강 소위가 고 하사의 말을 가로막았다.

“고 하사! 그만! 다른 것도 아니고, 군 내부에서 총격전이 벌어진 상황인데, 민간인을 끌어들이면 안 돼!”

그런 후, 강 소위는 진우에게 말했다.

“진우 씨, 고 하사랑 나 살려준 것 고마워요. 사격 실력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하지만, 이건… 이야기가 달라요. 군인들끼리 해결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도 정 돕고 싶으면, 탄창만… 탄창 몇 개만 부탁할게요.”

후우~ 진우는 한 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무관한 사람들이랑 얽히는 것도 싫고, 군인들과 얽히는 것도 싫다.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지휘관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병이 생기는 게 훨씬 더 싫었다. 그런 이유로 죽어간 동료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간다.

결심을 굳힌 진우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신분에 대해서는 우리 서로 입을 다물고 있는 것뿐이잖습니까. 가시죠. 군인들끼리 해결하러…….”

1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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