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건대 쉘터 함락(4)
건대 쉘터의 의심 환자 분류가 거의 끝나갈 무렵, ‘안전’ 판정을 받은 오른쪽 줄에는 불과 50여 명만이 남았다. 그 외 나머지 압도적인 대다수는 ‘의심’ 혹은 ‘위험’으로 분류되어 왼쪽 줄로 밀려났다.
의심이나 위험 환자 중 3분의 2 이상이 남자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위험 환자들은 살아 있는 병균처럼 취급 받아 가장 구석으로 몰렸다.
“쿨럭, 쿨럭! 나는 그냥 몸살이에요! 아니, 찬 바닥에서 자느라 기침 좀 한다고 그걸 무슨 죄인 취급하면 어쩝니까?”
위험 환자군에서 살려 달라는 식의 애원이 빗발친다. 불운하게도 때 맞춰 감기에 걸렸거나, 사소한 복통에 시달려 약을 타 먹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박 소위는 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혈변을 본 사람이 자백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제가 몇 차례나 기회를 드렸는데도 꼭꼭 숨어 계시잖습니까? 그러니 여러분 모두가 연대책임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억울하다고 말하기 전에 책임감을 좀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가족이나 친구, 동료가 여러분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요!”
“그… 그러면 우리는 언제 여기서 나갈 수 있나요?”
중년 여자가 눈물을 그렁거리며 물었다. 이 분위기,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 사방에서 콜록대는 소리까지…….
죽음이 바로 머리 위에 드리워진 것 같은 기분이다. 기침 같은 걸 해선 안 되는 분위기 때문일까, 직전까지 멀쩡하던 사람들도 괜스레 목구멍이 간질간질하며 자꾸만 큼큼거리게 되었다.
“잠실 이동 당일 군의관이 함께 온다고 했으니, 그때 나오시면 됩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공포로 옭아매 둔 박 소위는 그들을 쉘터 남쪽 끝의 건물로, 그러니까 그가 이 원사를 쐈던 건물로 몰아넣었다.
정비가 채 끝나지 않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건물이지만, 괜찮다. 어차피 며칠만 참으면 잠실에서 보낸 장갑 트레일러가 그들을 태우러 올 테니까.
혼란스럽기는 의심 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대부분 이렇다 할 증상도 없는 상황에서 그저 박 소위의 판단에 의해 이쪽으로 밀려나 버린 경우였다. 당연히 억울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 봐 두렵다.
“저기… 우리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리요… 안 아파요. 설사도 안 하고…….”
잔뜩 겁에 질린 의심 환자들이 병사들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거기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선 넘지 않습니다!”
병사들은 강경한 말투로 의심 환자들을 저지했다. 그들과 몸이 닿는 것조차도 꺼림칙하고 싫다. 이미 좀비라는 강력한 전염병을 직접 목도한 바 있기 때문에 전염에 대한 두려움은 엄청나게 커져 있는 상황이었다.
“여러분, 진정하세요. 진정하십쇼! 괜찮습니다!”
위험 환자 분산 수용을 끝낸 박 소위가 의심 환자들 쪽으로 걸어가 확성기를 잡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겁에 질린 눈동자로 박 소위의 입만 바라보았다. 그가 말하는 대로 자신의 운명이 결정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는 항변조차 하기도 어렵다.
“동공 반응과 체온 때문에 격리되셨기는 하지만, 아직 여러분은 환자로 확정된 게 아닙니다! 인솔자의 명령에 따라 접촉을 최소화하시고, 안정을 취하시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잠복기가 지날 때까지도 아무 일이 없으면 되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박 소위는 제멋대로 떠들어 댔다. 어차피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의 전염병. 이 사람들도 가상의 전염병 의심 환자들이니 무서울 게 없다.
물론 아무도 죽지 않는다. 다만, 그가 육만배를 죽이고 가희, 초희와 함께 자신만의 하렘을 꾸미는 데 발판 노릇을 시키기 위해 약간의 불편을 주었을 뿐이다.
“어후, 나는 진짜 안 아픈데… 아픈 사람들이랑 같이 있다가 옮으면 어떡해.”
“우리 물건은요? 개인 소지품을 다 놔두고 왔는데?”
희망적인 이야기를 듣자 의심 환자들은 술렁이며 안도감을 표시한다. 박 소위는 얼른 그들을 조용히 시키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쉘터를 깨끗하게 살균하고 소독하는 동안 여러분은 임시 거처에서 지내시게 될 겁니다. 거기에서도 청결을 신경 쓰셔야 합니다! 락스 희석액을 나눠 드릴 테니까, 자신의 주변을 계속 소독하시고,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세요! 개인 소지품은 소독이 끝난 뒤에 돌려 드립니다. 자! 이제 설명 다 드렸으니까 이동하십쇼! 이동!”
박 소위는 그들을 몇 개의 건물에 분산 수용했다. 겁을 잔뜩 줘놨으니, 이제 며칠 동안 주는 밥만 먹고 나면 열심히 락스칠을 하느라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못할 것이다.
“위험 환자들도 그렇지만, 저 의심 환자들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해주세요. 전염이 번지기 시작하면 이거 감당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마 잠실에서도 우리를 안 받아줄 겁니다.”
철책 문을 잠그고 나서 박 소위는 김 중사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돌아섰다. 김 중사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망나니 같은 새끼가 주도권을 잡고 휘두른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역시도 전염병이 두렵기는 하다.
사실… 제대로 씻지도 못하는 여름철에 이 정도의 인원이 단체 생활을 하고 있으니, 전염병이 돌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리고 제대로 된 치료도 기대할 수 없다.
“자, 여러분은 현재 안전하다고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잠복기라는 게 있으니까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이 물탱크에 있는 물은 안전이 확인될 때까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물을 최대한 아껴서 사용하세요! 그리고 쉘터 본관은 지금부터 철저히 소독을 해야 하니까 여러분도 숙소를 옮깁니다.”
안전 판정을 받은 소수의 인원 앞에 선 박 소위는 근엄한 얼굴로 떠들어 댔다. 태양 그룹으로 보낸 수감자들이 묵던 숙소로 그들을 데려간 박 소위는 경비병들을 양 옆에 세워두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혹시라도 지시를 어기고 임의로 외부 출입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바로 신병 구속하고 의심 환자 숙소로 보내겠습니다. 여러분이 외부로 나올 수 있는 건 별도의 지시를 받고 인솔자와 함께하는 경우뿐입니다.”
그렇게 모든 준비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박 소위는 득의만면해져서 건대 쉘터 본관으로 돌아왔다. 텅 비어버린 체육관과 주차장에는 잠이 덕지덕지 붙은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병사들만이 남았다.
어제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몇 시간 자지도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깨어나 그 난리를 쳤으니, 당연히 피곤하고 졸리다.
“아… 얘들 이거, 완전히 뻗기 직전이네… 큰일입니다. 쉘터 소독도 해야 하고, 할 일이 산더민데… 저 물탱크, 저건 이제 불안해서 못 쓴다고? 뭐지? 필터가 문제인가? 정수제 넣지 않았어요? 야, 이제 정수제도 못 믿는 건가?”
부사관들에게 다가간 박 소위는 짐짓 걱정하는 체하며 운을 띄웠다. 부사관이 막막하다는 듯 대꾸했다.
“소독은 차차 한다고 해도, 물탱크는… 저거라도 마시지 않으면… 지금 가지고 있는 포장 생수만으로는 이 더운 날, 한나절도 못 버틸 텐데요.”
“외부로 나가서 징발을 해 와야죠, 뭐. 지금 잠시 몸뚱이 좀 편하자고 저 물 먹었다가 우리 애들 피똥 쫙쫙 쏟아내기 시작하면 누가 책임집니까?”
외부…라는 단어를 들은 부사관들의 얼굴이 굳는다. 게이트 밖으로 나가는 건 아무래도 찜찜하다. 게다가 다음 징발 대상 가게는 장벽 너머에 위치해 있다. 어린이대공원역 너머까지 멀리 삥 돌아 나가야 하는 위험한 길. 까딱했다가는 대형 좀비 무리에 휘말린다.
멀쩡한 정신에 체력이 좋을 때라도 긴장이 될 일인데, 지금 저렇게 잠도 다 깨지 않은 애들을 데리고 나갔다가는…….
“에이그, 어쩔 수 없구만. 제가 어떻게 해볼 테니까 그만들 걱정 하십쇼. 보고 있기도 힘드네요.”
부사관들의 두려움을 읽은 박 소위가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간 근무조에서 한 서너 명만 빼서 제가 직접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이 애들은 일단 조금이라도 자 둬야 야간 근무 설 것 아닙니까?”
박 소위는 인자한 장교 연기를 하며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부사관 중 하나가 걱정스레 한마디 했다.
“아니… 서너 명이라고 해봐야, 물의 무게가 있으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마실 만큼 차에 실으려면 너무 시간이 한참 걸릴 텐데요.”
“그거는 생각이 있습니다. 안전 판정 받은 민간인분들 손을 좀 빌려야죠. 그분들 중에서 몇 명만 일꾼으로 좀 부리겠습니다. 웬만하면 그렇게까지 안 해야 맞는 거긴 하지만, 지금 비상사태니까요. 서로 도와야죠.”
부사관들은 찜찜해하면서도 박 소위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의 결정을 반대해 봐야 ‘그러면 당신이 직접 애들 데리고 하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어서다.
“그럼, 그렇게들 알고 계세요. 아참, 야간 근무 서시려면 잠깐이라도 좀 주무십쇼.”
박 소위는 부사관들에게 통고를 하고 수감자 숙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그는 존재하지도 않는 전염병을 핑계로 모두의 혼을 쏙 빼놓았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된다.
박 소위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동안 수감자들의 숙소에 갇혀 버린 육만배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수감자들을 가둬두던 곳이다 보니 문도 튼튼한 자물쇠로 잠겨 있고, 창문의 유리도 모두 빼놓았다.
제대로 한 방 맞았다. 숨겨둔 총은커녕 간단한 연장조차 꺼낼 틈도 없이 맨몸뚱이인 채로 이곳에 밀려나 버렸으니…….
이래서야 꼼짝없이 우리 속에 갇힌 짐승 신세다. 마음대로 출입도 안 되고, 큰 소리를 내봐야 들어줄 사람도 몇 명 안 된다.
“여기 우리 애들 몇 명이나 있냐?”
육만배는 기동이를 구석으로 불러 조용히 물었다.
“네, 회장님. 총 여섯 명입니다. 아, 회장님이 찾으시던 두섭이도 옆방에 있습니다.”
대답하는 기동이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녀석은 아직까지도 위기의식이 생기지 않은 모양이다.
‘여섯이라…….’
참으로 애매한 숫자여서 육만배는 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까지 합해서 일곱 명. 그러면 전체 조직원들의 반도 안 된다. 박 소위가 만배파를 타깃으로 삼고 이런 짓을 벌이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대체 이런 희한한 짓의 목적이 뭐지?’
육만배는 관자놀이를 꽉 누르며 고민에 잠겼다. 뭔가 좋지 않은 촉이 온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어버린 건지를 모르겠다.
“안 되겠다. 초희 년 잡아다가 좀 족쳐 봐야겠어.”
답을 찾지 못한 육만배는 혼잣말처럼 기동이에게 명령을 내렸다.
“초희요? 데리고 올까요?”
“음, 일단 몇 대 쥐어박고 끌고 와. 얼굴은 건드리지 말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소리 죽여 인사를 한 기동이가 방문을 나섰다. 그가 한 발짝을 떼자마자 확성기 소리가 왱― 하고 울린다.
“방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돌아갑니다!”
복도 끝에 앉아 감시를 하고 있던 경비병들의 경고가 복도 전체를 울린다. 기동이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손을 저었다.
“아니! 밖에 나가려는 게 아니오! 잠깐 요 위층에 가서 이야기만 좀 하고 오려고 해요! 내 아는 동생이 지금 걱정을 하고 있을 것 같아서!”
사실 남자와 여자를 층을 나누어 분리 수용했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여기가 정말로 교정 시설이나 군대도 아니고, 이게 뭐하자는 건지… 하지만 경비병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가십쇼! 여자분들은 운동 시간에 만나실 수 있습니다! 더 경고하지 않겠습니다!”
“젠장, 갑자기 뭐 이렇게 까탈스러워! 우리는 안전 판정을 받았다고! 왜 죄지은 새끼처럼 취급해, 씨팔!”
기동이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쾅! 소리가 나게 쇠문을 닫아버렸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벽을 걷어찼다.
커다란 덩치의 그가 욕설을 입에 담고 씩씩대자 방 안의 분위기는 금세 경직됐다. 사람들은 기동이의 눈치를 보며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복도에 경비병들이 배치된 것과 달리, 방 안은 아무런 치안 보장이 없다. 가벼운 사고 정도는 신경 써주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러니 알아서 몸을 사려야 하는 상황이다.
“앉읍시다, 기동 씨! 다른 분들 불편해하십니다.”
육만배가 무감정한 말투로 명령을 내리면서 자신의 옆자리를 두들겼다. 기동이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그의 옆으로 가 얌전히 앉았다.
잠시 동안 불편한 침묵이 방 전체에 깔렸다. 그 고요함이 깨진 것은, 10여 분이 지난 뒤였다.
“이 방 인원, 전원! 밖으로 나옵니다!”
경비병이 문을 열고 외쳤다. 방 안에 들어 있던 10여 명의 남자들은 경비병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육만배는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기동이에게 속삭였다.
“올 게 왔다. 기동아, 기합 바짝 넣고 있어라.”
그들은 내부 게이트 밖의 공터로 인도되었다. 먼저 나와 있던 다른 방의 남자들이 두리번거리며 어설픈 목례를 건넨다. 잠시 후, 여자들도 나와 옆줄에 선다. 가희와 초희도 그중에 포함되어 있다.
“일손이 모자란 긴급 상황이라 건강한 분들께 협조 좀 구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작업을 해야 합니다. 두 조로 나누겠습니다. 한 조는 쉘터에 남아 내부 소독 작업을 하고, 다른 한 조는 외부로 나가 우리가 마실 식수를 징발해 와야 합니다. 둘 다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니까 지시에 잘 따라주십쇼! 지금부터 호명하는 분들은 쉘터 소독 작업입니다.”
말을 마친 병사는 확성기에 대고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옆줄로 빠져나가는 걸 보면서 육만배는 사나운 눈동자를 굴렸다.
결국 그의 조직원들의 이름은 하나도 불리지 않았다. 가희 년과 초희 년까지도 호명되지 않은 걸 보면 저년들과 무관한 것 같기도 하고…….
점점 더 수상해진다. 대강 나누는 게 아니라 대체 왜 이름을 불러서 특정하는 걸까?
“이름이 호명되지 않은 분들은 외부 작업조입니다! 저희 군이 안전하게 여러분을 이송하고 호위하는 동안, 여러분은 저기 보이는 트럭에 식수와 기타 필요한 물품을 적재하시면 됩니다! 남자분들은 트럭의 화물칸에, 여자분들은 승합차에 승차하십쇼!”
남아 있던 남자들은 트럭에 차례로 올랐다. 워낙 짐칸의 차고가 높아 짧은 사다리를 걸쳐 놓아야 한다.
육만배는 재촉을 받으면서도 뒤쪽으로 계속 물러났다. 초희 년과 가희 년이 어찌 반응하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가희는 평소처럼 고귀한 척하며 차에 올랐다. 그리고 초희는 희희낙락 밝은 얼굴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차에 오르려 할 때,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 소위가 손을 내밀어 잡아준다.
‘오호라!’
육만배는 마음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저 하루 종일 찡얼대기 좋아하는 초희 년이 불평 한마디 없이 외부 작업에 끌려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했는데, 두 연놈이 손을 덥썩 잡을 때 주고받는 눈빛으로 확실해졌다. 저년들은 이미 박 소위가 모종의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다. 다 한패다.
“빨리 타십쇼!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병사들이 육만배를 사다리로 몬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트럭 짐칸에 올랐다.
“두 군데에 들러서 식수를 징발할 겁니다! 여러분 중 절반이 먼저 내려서 작업을 하고, 나머지는 그 다음 가게까지 이동합니다! 이동 중에 흔들리니까 손잡이 꽉 잡으십쇼!”
주의 사항을 일러준 병사가 사다리를 트럭 위에 올려두고 문을 닫는다. 양쪽으로 짐칸의 문이 닫히는 순간, 육만배는 모든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였나…….’
박 소위의 계획이 눈앞에 그려진다. 두꺼운 쇠로 위아래와 사방이 다 막힌 이 짐칸은 그야말로 움직이는 관이다. 달아날 수도 없고, 반항할 수단도 없다.
‘아마도 두 번째 가게까지 가서 우리를 죽일 생각이겠지. 먼저 한 무리가 빠져나가고, 여기에 나와 기동이, 두섭이… 우리 식구들 일곱 명만 남았을 때.’
문을 살짝 열고 박 소위가 방아쇠를 당기면 무방비 상태로 꼼짝없이 맞게 된다. 일곱 명이든, 칠십 명이든 그냥 죽는 거다. 아니, 뭐하러 총을 쏘겠어. 수류탄이나 하나 까 넣으면 그냥 끝나는데…….
‘그래… 결국 나를 재끼고 싶어졌구나… 워낙 골빈 년들이라 그 정도 생각은 못할 것 같았는데, 딴에는 애썼군.’
육만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년들 농간에 호락호락 놀아난대서야 그동안 쌓아온 그의 이름 석 자가 아깝다. 절대 여기서 죽지는 않을 것이다.
“어, 어이쿠! 어지간히 흔들리네. 이거 괜찮나…….”
트럭이 출발하자 손잡이를 붙잡으며 이요섭이 앓는 소리를 한다. 육만배는 이 바보 놈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요섭 대표님, 근데 이거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육만배가 말했다. 어차피 짐칸에는 군인이 타고 있지 않으니까 목소리를 죽일 필요도 없다. 이요섭은 식은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음, 너무하기는 하는데… 뭐, 일손이 없다니까요.”
“아니, 누구는 안전한 쉘터에 남아서 걸레질이나 하면 되는데, 우리는 왜 이 무서운 데를 끌려 나와야 합니까? 게다가 이걸 좀 보십쇼. 이 트럭 안에 탄 사람들, 거의 다 교인들입니다. 이거는 일종의 차별이고, 박해입니다.”
육만배는 자신과 이요섭, 그리고 조직원 놈들을 차례로 가리켰다.
“으음, 그러고 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이요섭이 고개를 끄덕인다. 트럭에 탄 열댓 명의 사람들 중 아홉 명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 본인과 육만배 쪽 무리 일곱을 제외하면, 실제로는 교인이 한 명 더 섞여 있을 뿐이지만 이요섭은 그런 전후 사정 같은 건 모른다.
“문이 열리면 대표님이 엄하게 좀 꾸짖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항의를 안 하고 그냥 넘어가면 다음에도 또 이렇게 우리 형제들만 위험한 곳으로 내몰릴 테니까요. 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대표님.”
“저희도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육만배의 눈짓을 읽은 조직원 놈들도 한목소리로 말하며 허리를 굽혔다. 우쭐해진 이요섭은 턱을 쓸며 말했다.
“허허, 참… 그렇게까지 부탁을 하니까 한마디 하기는 해야겠습니다. 허, 이놈들 참… 잘 좀 할 것이지, 이렇게 우리 형제들 마음을 상하게 하나…….”
“따끔하게 야단을 치셔야 합니다, 따끔하게. 우리의 운명이 대표님께 달린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육만배는 계속 놈의 기분을 추켜세우며 심리적인 압박을 주었다. 그리고 기동이와 나머지 놈들에게는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판사판의 순간이 다가온다.
끼이익―
트럭이 멈췄다. 만배파 조직원 중 한 놈이 사다리를 얼른 집었다. 그리고 뒤쪽에서 철컹거리는 소리가 난다. 짐칸 문을 여는 소리다. 육만배는 눈을 부릅뜨고 그쪽을 노려보았다.
“이동하면서 힘드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사다리부터 내리고, 저희가 호명하는 분들은 내리십쇼. 그분들이 1조입니다.”
문을 양쪽으로 활짝 연 상병이 말했다. 총으로 무장을 하고는 있지만, 단 두 명. 게다가 일병 한 놈은 명단이 적힌 종이에 시선이 꽂혀 있다.
이 태평한 태도로 보아, 이 군인 놈들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까맣게 모르는 모양이다. 육만배로서는 더할 수 없는 호기다.
“아니, 근데! 내가 교인 대표로서 뭐 한마디 좀 해야겠습니다!”
육만배에게 등을 떠밀린 이요섭이 병사들에게 다가가 항의를 시작한다. 박해니, 차별이니… 하는 단어들을 이요섭이 나열하기 시작하자, 상병은 짜증스런 얼굴로 대꾸했다.
“무슨 교인 차별을 한다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물러나세요! 작업에 방해됩니다.”
병사들의 시선이 이요섭에게 집중되어 있는 동안 사다리를 대는 척 하던 조직원은 힘차게 뛰어내리며 가까이에 있던 일병의 얼굴을 사다리로 후려쳤다. 그와 동시에 만배파 조직원들은 한꺼번에 트럭 문을 향해 달려갔다.
“으악!”
일병의 비명. 철제 사다리에 강타당한 그의 얼굴은 처참하게 찢겨 피가 낭자하다. 상병은 뒤로 물러나며 총구를 겨눴다.
“이야! 이 씨발 놈아!”
기동이가 이요섭의 허리를 차서 트럭 아래로 밀어버렸다. 황망한 표정으로 허공에 떠올라 총 든 상병을 덮치는 이요섭! 상병의 총에서 발사된 총알은 당연히 그의 몸을 꿰뚫을 수밖에 없었다.
투투투― 투투투―
이요섭의 몸뚱이가 벌집처럼 너덜너덜해진다. 앞서 있던 만배파 조직원 하나도 목을 관통당해 쓰러졌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일병을 공격했던 조직원이 뛰어와 상병의 손을 사다리로 후려갈겼다.
“컥!”
손가락이 짓뭉개진 상병이 총을 떨어뜨린다. 목덜미에 다시 한 번, 그리고 어깨와 다리에, 날카로운 쇠사다리 공격이 퍼부어진다.
상병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 앞으로 쓰러졌다. 바로 옆에서는 기동이가 빼앗은 대검으로 일병의 목을 긋고 있었다.
푸슛―!
붉은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아무 죄도 없는 선량한 젊은이의 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