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건대 쉘터 함락(3)
“정말? 진짜로?”
강 소위는 감격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고 하사의 어깨를 짚고 일어나려 했다.
“나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싶어. 정말로 전차가 없어진 건지… 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 눈을 떼면 안 될 것 같아. 중대장님 돌아오시는 걸 보기 전까지는 말이야.”
이번에는 보안관 일행이 영문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강 소위를 부축해 주던 고 하사가 대강이나마 설명을 해준다.
“지금까지 쉘터에 배치된 전차가 자리를 비웠던 건 딱 한 번뿐입니다. 중대장님을 태우고 잠실로 갔다가 왔을 때죠. 그러니까 이번에 사라진 것도 중대장님과 관계가 있는 거예요. 오늘이든 내일이든 그분을 태우고 다시 돌아올 겁니다.”
“흐음, 그러면 아저씨들은 굳이 고생해 가면서 잠실까지 가실 이유가 없겠네요.”
보안관이 물었다. 고 하사와 강 소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대장님만 돌아와 주시면 굳이 거기까지 힘들여 가지 않아도… 그리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이번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지만, 이제 재발할 일 없을 거고요. 제반 처우 면에서도 잠실보다 건대가 나아요.”
“저희는 거기에 일행이 있어서 가는 거예요. 잠실로 꼭 가야 합니다.”
유빈이 딱 잘라 결론만 말했다. 여기에서 이 사람들에게 테라가 어쨌다는 둥의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고, 해서도 안 된다. 임수정의 일행들이니까 앞뒤 계산하지 않고 일단 구했지만, 군인과 민간인은 살아가야 하는 궤적이 다르다.
“밖에 나가도 괜찮을까요? 강 소위님이 저렇게 직접 보고 싶어 하시니까.”
고 하사가 보안관과 진우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다리가 편치 않은 강 소위와 함께 이동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제약이 많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좀비가 나타나면 싸워줄 사람이 동의해 줘야 실행에 옮길 수 있다.
“그렇게 하죠. 어차피 저희도 돌아갔다 와야 해요. 수정이 누나에게 알려 드려야 하니까.”
보안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와 보안관이 앞장서고, 고 하사는 강 소위를 부축했다. 유빈과 삼식이, 태권소녀가 그 뒤를 따랐다.
삼숙이는 자유롭게 그들 사이를 오가며 동네 여기저기에 오줌을 뿌려놓고 다녔다.
“끄으응~! 끄으응!”
극장 계단을 오르면서 강 소위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신음을 뱉어 댔다. 고 하사가 부축을 해준다고는 하지만, 아직 온전히 아물지 않은 다리를 가지고 14층이나 되는 높은 건물 계단을 오른다는 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후우우~ 후우우~ 올라오긴 왔는데, 이제 갈 때가 걱정이네. 여기서 또 어떻게 내려가지?”
옥상으로 올라가 파란 하늘 아래에서 큰대자로 뻗은 강 소위가 숨을 헐떡인다. 마지막엔 그를 업고 오다시피 했던 고 하사도 엎어져서 도리질을 한다.
“아이고, 그냥 여기서 찬이슬 맞고 주무세요. 나는 이 짓 두 번은 못합니다. 하아~ 하아~”
두 군인이 숨을 헐떡이는 동안 친구들은 14층의 극장 대기실에 짐들을 가져다 놓았다. 여기 정도라면 일행 전원이 며칠을 보내도 충분할 만큼 넓다.
“여기에서 움직이지 마세요. 수정이 누나 데려올게요.”
망원경으로 쉘터 쪽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는 강 소위와 고 하사를 내버려 두고, 친구들은 다시 선로를 이용해 코스트코로 돌아왔다.
“허! 정말로? 둘 다 살아 있다고? 유빈 군, 지금 나 놀리는 거 아니야? 몸은 어때 보여?”
고 하사와 강 소위를 구했다는 이야기를 전했을 때, 임수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가리고 물었다. 제니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유빈도 웃었다.
“두 분 다 건강해 보였어요. 총 맞으셨다는 분도 꽤나 잘 걸어 다녔고. 이제 직접 가서 만나셔야죠. 아, 그런데요… 한 가지만요. 테라 이야기는…….”
“응, 무슨 말인지 알겠어. 당연히 비밀로 해야지. 그렇게 하는 편이 그 사람들에게도 더 좋을 거야.”
유빈이 한마디만 꺼냈는데도 임수정은 바로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테라가 면역자라거나, 그녀를 잠실 쉘터에서 데리고 탈출할 거라는 이야기 따위는 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군인들에게 자신들의 임무와 생명의 은인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갈등하도록 만드는 것밖에 안 된다.
그리고 이 친구들은… 군이 막아선다고 해서 뜻을 굽힐 만한 순둥이들이 아니다. 당연히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다만, 임수정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숙제가 남기는 했다. 이 친구들을 따라 잠실로 갈 것인가, 아니면 고 하사와 함께 건대에 남을 것인가.
막상 선택의 순간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그게 꽤 고르기 어려운 문제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자, 다들 자기 짐 챙기고, 움직일 준비해. 오늘부터 며칠 동안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짐을 가져다 날라야 하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미리 가방에 넣어둬.”
코스트코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에게 보안관이 말했다. 첫날은 어디까지나 멤버 전원의 이동이 가장 중요한 임무니까 가방을 무겁게 챙기지는 않았다.
다만, 진우의 탄창 가방과 검은 군복들에게서 빼앗은 총기류들은 가지고 가기로 했다. 놔두고 다니기에는 너무 소중한 장비다.
“젠장, 잘 있어라. 내 코스트코… 이 안에 있던 게 다 내 거였는데.”
셔터를 내리고 자물쇠를 잠그기 전에 신입이 한숨을 섞어가며 작별 인사를 한다. 유빈이 신입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야, 그렇게 영영 이별하는 것처럼 굴지 마. 며칠 내에 테라만 데리고 돌아올 건데 뭐. 당장 내일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해야 돼. 여러 사람이 들락거릴 거라서 자물쇠도 일부러 번호 키로 해놨구만.”
일행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지하철 선로로 내려갔다. 플래시 여러 개가 한꺼번에 비춰 대니 그리 어두컴컴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시야가 확보된다.
“괜찮아? 덜컹거려서 머리 흔들리지? 그냥 업어줄까?”
카트를 밀고 가던 삼식이가 규영이에게 물었다.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규영이를 카트에 태우고 카트 아래쪽에 녀석의 휠체어를 실었는데, 자갈밭을 지날 때마다 영 걱정이 됐다. 담요를 여러 겹 깔아놓았어도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질 것 같다. 하지만 규영은 도리질을 하며 웃었다.
“괜찮아요. 후후후, 조금 멀미가 나기는 하지만… 이까짓 것! 니체도 말했잖아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고. 나는 이 과정 속에서 조금 더 강해지는 거죠.”
그 허세 가득한 말을 들은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을 때까지는 좋았지만, 결국 두 정거장을 채 지나지 못해서 녀석의 안색은 파랗게 질렸고, 선로 구석에서 한참 토악질을 한 다음에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충격 완화 장치가 달린 이동 수단이 필요할 것 같았다.
결국 총기와 탄창 가방을 카트에 넣어 유빈이가 밀고, 규영이는 삼식이가 업고 가는 것으로 했다. 발밑이 불편하고 숨쉬기가 어려워서 몇 번 쉬어 가기는 했지만, 진우가 미리 좀비들을 잡아뒀기에 이동 자체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일행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군자역에 도착했다.
“하아~ 고 하사님… 정말…….”
“수정 씨…….”
극장 옥상에서 다시 재회한 임수정과 고 하사는 잠시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 소위가 감사 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벅찬 숨만 몰아쉬었다. 죽었을 거라고만 생각했던 상대가 이렇게 멀쩡하게 나타나다니… 이런 거짓말 같은 기적이…….
“아아! 수정 씨! 정말 고마워요!”
마침내 고 하사가 임수정을 와락 껴안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뺨에 키스를 퍼붓는다. 모두가 보는 앞이었지만 임수정도 그의 체온을 느끼면서 허리를 더 꽉 껴안았다. 사랑했던 사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설익은 관계지만,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너무 기뻤다.
“야… 유빈아, 저기… 수정이 누나랑 저 군인 아저씨 방 잡아줘야 하는 거 아닌가…….”
삼식이가 유빈의 곁으로 와서 귀엣말을 건넸다. 유빈은 높이 있는 녀석의 귀를 잡고 자신의 얼굴 가까이로 끌어당겨 속삭였다.
“제발 부탁이니까 그런 식으로 배려하는 거 하지 마. 다들 너처럼 뻔뻔하게 대놓고 그걸 하지 않아.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한다고. 은밀하게…….”
“으음, 그런가? 하긴 이 건물에 방이 몇 개인데.”
삼식이도 납득을 하고 물러났다. 임수정과 고 하사, 그리고 강 소위가 재회의 회포를 실컷 풀도록 내버려 두고 보안관 일행은 바로 아래층을 오가며 짐을 풀었다. 이제 한동안 이곳을 베이스캠프 삼아 잠실로의 이동을 노려봐야 한다.
“대체…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임수정과 제니, 그리고 규영을 번갈아보면서 고 하사가 중얼거렸다. 대단한 명사수 진우가 있다고 해도 고작 한 명뿐이다. 그런데 그 많은 인원이 그토록 과감하게 서로를 보호하면서 생존하고, 이동할 수 있었던 건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제니나 규영이가 저렇게 밝은 상태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도 도통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네에, 정말 대단하죠? 저도 많이 놀랐어요. 엄청난 친구들이에요.”
임수정은 고 하사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보안관 일행을 만난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들이 그녀를 구하고, 고 하사를 구하고, 그들을 다시 만나게 했다.
“여기에서 뭘 보고 계셨던 거예요? 건대 쉘터가 보여요?”
바닥에 놓여 있던 망원경을 보고 임수정이 물었다. 강 소위는 얼른 망원경을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
“한 번 보세요. 조금 흐릿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꽤나 멀쩡하게 보입니다. 우리 있던 건물들, 앞쪽에 쳐놓았던 철책이랑 게이트들… 그리고 대형 장벽까지 다 보실 수 있습니다.”
임수정은 고개를 꾸벅하고 그 망원경을 받았다. 한동안 그녀가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며 그저 ‘생존’해 있던 공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저 철책들… 그리고 경계하는 군인들…….
뭔가 아련하면서도 동시에 막막하다. 보안관 일행과의 생동감 넘치는 삶을 경험하고 나니, 저런 곳에서 혼자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어머…….”
한동안 망원경으로 주변을 훑던 임수정이 가벼운 탄식을 하며 말했다.
“저 사람들… 왜 저렇게 줄을 양쪽으로 세웠죠?”
“줄을 세워요?”
강 소위가 묻자 임수정은 망원경을 넘겼다.
“그… 주차장에 민간인들을 죽 세워놨어요. 그리고 차례차례 두 그룹으로 나누고 있는 것 같은데…….”
강 소위는 굳은 얼굴로 망원경을 잡았다.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다. 그런 행동을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하지만 건대 쉘터 주차장에는 정말로 모든 수용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총을 든 군인들이 바쁘게 오간다.
“뭐지? 박 소위, 이 새끼… 무슨 꿍꿍이지?”
멍해진 강 소위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장교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지금, 건대 쉘터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
☆ ☆ ☆
“순서대로 앞으로 나옵니다! 거기, 옆 사람과 떠들지 않습니다! 거리 유지합니다!”
총을 굳게 잡은 병사들이 딱딱한 말투로 지시를 한다. 건대 쉘터의 수용자들은 이 난데없는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미처 판단하지 못한 채 명령을 따르고 있다.
“허허, 이게 대체 뭔 일이랍니까, 이요섭 형제님?”
뒷줄에 서 있던 육만배가 거짓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음… 전염병이랍니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어쩜 그렇게들 음탕해서 성적으로 문란하게 굴어 대더니…….”
이요섭은 잘난 척하며 아랫입술을 근엄하게 내밀었다. 육만배에 의해 교인 대표로 추대된 이후, 이놈의 근거 없는 교만함은 아주 하늘을 찌른다. 하지만 언젠가 써먹을 날이 있겠지 싶어 육만배는 녀석을 계속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쓰고 있다.
십일조 명목으로 거둔 음식들이 거의 대부분 이미 만배파 조직원들의 뱃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조차 이놈은 모르고 있다. 그저 비어 있는 박스 개수만 맞춰보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허술하다.
만약 식량 때문에 곤란을 겪게 되는 날이 온다면, 십일조를 빼돌린 혐의는 고스란히 이 바보 녀석에게 돌아갈 것이다.
“전염병이라… 뭐, 병이 돌 수도 있지요. 근데 그걸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요?”
“저기 저 박 소위라는 장교가 화장실에서 아주 지독한 혈변을 발견했답니다. 지금 들리는 이야기는 뭐 대충 그렇습디다. 흐음… 무슨 병이 피똥을 싸게 하지? 고약하네.”
“그래서… 그 혈변 본 사람은 누구랍니까?”
“그걸 모르니까 찾아내려고 이 난리겠죠. 허허, 육 장로님, 참 답답하십니다. 그 연세 드시고도 그렇게 둔하셔서야 이 모진 세상 살아가시겠습니까?”
이요섭은 또 잘난 척을 하며 육만배를 비웃었다.
혈변이라고? 육만배는 얇은 입술을 핥으며 앞쪽에서 사람들을 검사하고 있는 박 소위를 몰래 노려봤다.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수상한 냄새가 물씬물씬 풍긴다.
‘초희 년이 밤이슬 맞고 돌아다니던 것과 상관이 있는 걸까?’
육만배는 자신의 뒤쪽에 서 있는 초희를 돌아보았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무 생각이 없는 년처럼 옆 사람과 노닥거리고 있던 초희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 얼른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박 소위와 초희라……. 거기에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박 소위에게는 이미 가희가 있고, 그렇게 미련 곰탱이 같은 인간이 감히 두 여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순정이랍시고 오로지 가희만 죽자 사자 괴롭힐 놈이다.
‘그럼 대체 뭔 개수작이지, 저 놈?’
육만배는 뱀 같은 눈을 번뜩였다. 혹시라도 자신을 전염병자 취급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미리부터 대비해 둬야 할 필요가 있다.
“다음 분! 앞으로!”
병사들이 손짓을 하면 민간인 수용자는 앞에 쳐진 줄 위에 선다. 그러면 파일을 들고 있는 병사가 질문을 던진다.
“성함, 연세, 말씀하세요!”
“장정식… 에… 서른일곱입니다.”
수용자가 이름과 나이를 말하면 파일에 기입한다. 그 과정을 다 거치면 박 소위의 차례다.
“여기 보세요. 이 라이트 따라서 눈을 움직이세요.”
박 소위는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수용자의 눈꺼풀을 벌리고 소형 플래시를 비췄다. 그러고는 플래시를 좌우로 움직인 뒤,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설사합니까?”
“의무대에서 요즘 약 받아 가셨어요? 어이, 의무병. 기록 확인해 봐라, 무슨 약 드렸는지?”
“열이 나거나 오한 있습니까?”
물론 대부분의 질문에 사람들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까딱했다가는 전염병자로 분류될 상황에서 곧이곧대로 대답할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박 소위는 동공 반응 검사를 기반으로 냉엄하고 권위적으로 판단을 내려 버렸다.
“의심!”
그에 의해 의심환자로 분류되면 곧바로 왼쪽 줄로 밀려난다. 앞으로 며칠 동안 다른 건물에서 격리 수용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아니, 근데 박 소위님이 무슨 의학 상식이 있습니까? 저렇게 진단을 할 만큼?”
“몰라. 자기가 안다니까 아는 거겠지. 에휴~ 하는 꼬라지 보면 영 미덥지 않은 인간이기는 한데, 이거는 조심해야 하는 문제니까……. 뭐, 잠실 쪽에서도 일단 격리하고 소독은 시키라고 했으니 따라보자.”
근처에서 구경하고 있던 부사관들끼리 수군댄다. 혈변도 이미 깨끗이 소독을 했다고 하고 영 이상한 구석이 많지만, 이 원사가 살아 있었을 때도 쥐새끼가 식량을 갉아 먹었다는 둥 운운했었고, 전염병이라는 문제는 일단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
현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의료 체계 수준에서 치명적인 병이 한 번 돌게 되면 그냥 거의 다 죽는다고 봐야 할 테니까.
“자! 다음!”
호명하는 병사가 손가락질을 한다. 육만배도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말하고 박 소위의 앞에 섰다.
“자, 이거 보세요.”
박 소위가 플래시를 비추고 얼굴을 들이대는 순간, 육만배는 가짜 재채기를 크게 했다.
“에치! 에이치!”
갑자기 얼굴 가득 침 세례를 받은 박 소위는 이를 악물고 장갑으로 침을 닦는다. 육만배는 쑥스러워하며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어, 어이쿠. 이거… 미안합니다. 이 재채기가… 허허, 이거, 제 침이 다 튀어서 어쩌죠?”
“괜찮습니다. 여기 보세요.”
박 소위는 끓어오르는 화를 꾹 눌러 참으며 플래시를 좌우로 돌렸다. 육만배는 놈의 눈을 잠시 노려보다가 시키는 대로 따라줬다.
“안전!”
안전 판정을 받은 육만배는 오른쪽 줄을 향해 움직였다. 그러면서 박 소위를 돌아보았다.
이 세상에 전염병 검사를 저렇게 하는 놈은 없다. 의심 판정 받은 놈을 주무르던 장갑으로 다음 놈을 또 주무르고, 아직 상태가 어떤지 모르는 놈으로부터 침 세례를 받았는데도 무서워하기는커녕 제대로 소독하려는 의지조차 없다. 이 난리를 쳐가며 검사를 하는 거라면 침이 튀었을 때 혹시라도 병이 옮을까 봐 벌벌 떨었어야 한다.
이 전염병 검사는 가짜다. 생 쇼다. 아마 혈변이니 뭐니 하는 것도 다 저 미친놈이 꾸며낸 개소리에 불과할 것이 틀림없다. 한데…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왜 이런 미친 지랄을 거국적으로 하고 있는 거지? 대체 뭘 위해서?’
처음에는 살인 사건을 목격한 자신을 환자 취급하며 격리시켜 놓고, 모종의 해코지를 하려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안전 판정을 받았으니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럼 대체 뭐가 남은 거지?
복잡한 머릿속의 퍼즐들을 맞추기 위해 육만배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먼저 검사를 받고 오른쪽에 서 있던 기동이가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회장님도 안전 판정 받으셨군요. 헤헤, 다행입니다. 저는 은근히 걱정했는데, 저희 식구들 대부분 세이프입니다. 무엇보다도 회장님이 건강하시다니까…….”
“…기동아.”
육만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녀석의 말을 끊어버렸다.
“예, 옛! 회장님!”
육만배 눈치 보는 것 하나만큼은 잘하는 놈답게 기동이는 얼른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육만배는 앞쪽을 응시하면서 조그맣게 속삭였다.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신경 바짝 곤두세우고 있어라.”
“예? 아니… 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기동이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렇게 답답한 놈이 내 오른팔 자리에 있다니……. 육만배는 답답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가지고 있는 걸 최선을 다해서 써먹는 수밖에 없다. 주변을 둘러본 육만배는 기동이에게 몸을 기울여 조용히 속삭였다.
“이 줄 세우는 거 끝나고 나면, 두섭이 놈 데려와.”
두섭이는 지금 이 쉘터 내에 있는 만배파 조직원 중에서 유일하게 군 생활을 마친 놈이다.
“끄음…….”
육만배는 박 소위를 노려보며 다시 입맛을 다졌다. 그간 몰래 숨겨놨던 강 소위의 소총을 써먹어야 할 시점이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