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에너자이저(5)
“뭐? 육 사장이?”
박 소위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럴 리가… 그 사람 이름 있는 교회 장로에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는데… 내가 이 원사를 죽였을 때도 내 편을 들어줬었고…….
박 소위의 혼란을 읽은 가희는 뚱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것 봐요. 박 소위님이 알아도 소용없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냥 잊어버리세요. 초희는 이미 충분히 고마웠대요. 평생 간직할 추억이 생겼다고…….”
“아니… 그게 아니야. 너무 의외라서 그러지. 확실해? 가희가 잘 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잘못 안다고요? 초희가 오늘 낮에 울며불며 해준 이야기인데?”
피식, 얼굴에 흐르던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채 가희가 한쪽 입을 찡그리며 웃는다. 비웃음을 산 것 같아서 박 소위의 자존심은 상처를 입었다.
“이해해요. 좋은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었으니까 이상하게 들리겠죠. 가희도 처음에는 그랬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 겉보기하고는 달리 정말 악질이래요. 뭐… 어쩌겠어요. 초희만 불쌍한 거지.”
가희는 한숨을 지으며 박 소위를 외면했다. 그는 아직까지도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지 않다.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그때였다.
똑똑―
작고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 그리고 곧바로 초희의 속삭이는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온다.
“가희야, 가희야… 나야. 혹시 잠들었니?”
“아니야! 안 자. 어서 들어와!”
가희는 박 소위의 허락도 받지 않고 벌컥 문부터 열었다. 박 소위도 놀란 눈으로 그쪽을 돌아보았다.
“후후후, 미안해요. 두 분이 행복하게 계시는데… 자꾸 이렇게 방해를 하네요. 잠깐 얼굴만 뵙고 가려고요.”
가희의 손에 끌려 황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온 초희가 부끄러워하며 웃었다. 기분 탓인지 박 소위의 눈에는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박 소위의 기억 속에서 뜨거웠던 어젯밤이 되살아난다. 가희가 그녀의 두 손을 꼭 잡고서 물었다.
“너 이렇게 오면 안 되잖아. 위험하지 않아?”
“으, 응? 뭐가?”
초희는 박 소위의 눈치를 살피며 딴청을 피웠다. 가희는 울먹이며 말했다.
“괜찮아, 박 소위님도 다 아셔. 가희가 말씀드렸어.”
“뭐어? 아휴~ 이 기집애, 진짜~ 비밀로 해달라고 했잖아. 그러면 내가 뭐가 되니? 어후, 부끄러워.”
초희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한동안 그렇게 하고 있던 초희가 이내 결심을 한 듯 가희에게 말했다.
“나 술 한잔 줘. 다들 자는 것 같아서 몰래 빠져나왔어. 그래봐야 오래는 못 있겠지만.”
그리고 가희가 술을 따르는 동안 초희는 박 소위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박 소위님.”
박 소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초희가 말했다.
“제 신세가 어떤지 들으셨다니까 굉장히 부끄러워요. 발가벗겨진 것보다 훨씬 더요. 이제… 이렇게 뵈러 오지 못할 것 같아요. 대체 어떤 놈이랑 붙어먹고 왔냐고 오늘 아주 곤욕을 치렀거든요. 후후후… 우습죠? 대체 내가 왜 육만배, 그 사람 물건처럼 취급당해야 하는 건지……. 그래도요, 저는 끝까지 박 소위님 이름은 대지 않았어요. 이렇게 멋진 분한테 혹시라도 피해가 가면 안 되니까요.”
말을 멈추고 잠시 박 소위의 얼굴을 보고 있던 초희는 진한 키스를 선사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박 소위가 충분히 달아오를 만큼 뜨겁고 육감적인 입맞춤이었다.
“하아~ 이 부드러운 감촉. 영원히 못 잊을 거예요… 크흑.”
입맞춤이 끝나고 나서 초희는 그 말과 눈물을 남기고 일어섰다. 방을 나가려던 그녀의 팔목을 가희가 붙잡았다.
“술이라도 한잔 마시고 가. 따라뒀어.”
“마음 같아서야 정말 그러고 싶지. 그런데 그래도 될지 모르겠어. 너무… 무서워서. 그 인간… 정말로 잔인하단 말이야. 나 또 걸렸다가는 정말로 죽을지도 몰라.”
초희는 덜덜 떨면서 박 소위와 닫혀 있는 문을 번갈아 보았다. 가희의 시선도 박 소위에게 고정되어 있다.
“…초희.”
마침내 결심을 한 듯 박 소위가 초희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여기 앉아. 앉아서 자세히 이야기해 봐. 대체 무슨 일이야? 아무리 육만배가 네 소속사 사장이고 깡패라도 그렇지, 이런 상황에서까지 왜 네가 그놈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데?”
“이야기하자면 길어요…….”
못 이기는 척 박 소위의 옆자리에 앉은 초희는 거짓 눈물을 찔끔거려 가며 육만배가 얼마나 지독한 인간인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딱히 꾸며낼 것도 없었다. 오히려 실제로 있던 일에서 몇 가지 정도는 덜어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이 더러운 년 취급을 당하지 않을 테니까.
물론 육만배의 악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초희는 쉬지 않고 손을 놀려 박 소위를 흥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을 품고 싶다는 욕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박 소위가 육만배를 죽여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초희는 잘 알고 있었다.
“후우~ 그 개새끼, 그런 쓰레기였나…….”
초희의 넋두리를 다 듣고 난 박 소위는 입술을 꾹 깨물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그간 잘해줬던 게 후회가 된다. 이 원사 사건 이후로는 고마운 마음에 웬만해서는 놈이 부탁하는 것도 들어주려고 노력했었는데, 그런데… 쓰레기 같은 깡패 새끼였다니…….
박 소위가 가장 경멸하는 부류다.
‘그놈을 어쩌지?’
양팔로 초희와 가희를 끌어안은 채 박 소위는 생각에 잠겼다. 만약 육만배가 보통의 수용자라면 놈을 구속하는 게 가장 편한 방법이다. 조직폭력배 새끼가 무고한 사람들을 협박했다고 죄를 덮어 씌워버리면 된다.
하지만… 놈을 무조건 따르는 신도들이 꽤 많다는 것을 박 소위는 잘 알고 있다. 순진한 수용자들 사이에서 놈의 인망이 아주 높다는 것도. 그러니 갑자기 그런 죄목을 씌우려고 해도 반대하는 놈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문제들보다도 더 불편한 사실이 있다. 바로 놈이 그날 밤의 목격자라는 점이다. 육만배, 그놈은 박 소위가 이 원사를 쏴 죽였던 걸 본 놈이다.
지금이야 무슨 생각에서인지 박 소위의 편을 들어주고 있지만, 만약 관계가 틀어지면 어떤 방식으로든 주둥이를 나불거리고도 남을 것이다.
‘이래저래 처치하기가 곤란한 놈이군… 아예 죽여 버리는 편이 깨끗할지도…….’
생각을 정리한 박 소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이미 그는 두 명을 죽여봤다. 좀비에 물린 죄수 놈과 이 원사. 죽여 버리려고 쐈던 강 소위까지 포함하면 셋이나 된다.
거기에 하나쯤 더해진다고 해도 별로 괴로울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놈도 쓰레기 같은 죄수 새끼니까.
술이라도 한 병 주는 척하고 이곳으로 몰래 불러서 쏴 죽여 버리면 될 것 같다. 장교 숙소에서 물건을 훔치는 놈이어서 쐈다고 하면 된다. 깜깜해서 누구인지는 몰랐는데 경고를 무시하고 오히려 위협하려 들었다고…….
녀석의 시체에 권총을 쥐여놓으면 100퍼센트 정당방위다.
“…초희야.”
계획 수립까지 마친 박 소위는 초희의 어깨를 감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바짝 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무 걱정 하지 마. 육만배, 그 새끼는 내가 처리해 줄게.”
아아~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입김을 느낀 초희가 눈을 빛낸다.
“섣불리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 인간, 어떻게 해서든 도망쳐서 복수할 테니까요. 그것도 소위님이 아니라 저에게… 저는 그게 무서워요.”
“아니.”
박 소위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저었다.
“죽은 새끼는 복수를 할 수 없어.”
“…그럼, 저를 위해서!”
초희가 감격해하며 눈물을 글썽인다.
응, 박 소위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살인을 예고했다.
“아아, 그럼 저는 자유예요. 이제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이렇게 가희랑 박 소위님이랑 함께 그냥 행복하기만 하면 돼요. 아아~, 감사합니다, 박 소위님.”
“잘됐다, 잘됐어!”
가희도 눈물을 닦으며 손뼉을 쳤다. 그리고 두 여자는 박 소위의 영혼이라도 빨아들이겠다는 듯 번갈아가며 정신없이 입을 맞춰 댔다.
“아니지, 그게 아니야…….”
박 소위의 군복 단추를 풀고 있던 초희가 갑자기 바짝 얼어붙었다. 기쁜 자극이 멈추자 박 소위는 짜증스러워졌다.
“또 뭐야? 육만배, 그 새끼 내가 죽여준다고. 그럼 걱정 없잖아.”
“…죄송해요. 근데 그놈 하나만 어떻게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어요. 육만배 부하들이 있거든요. 바로 이 쉘터 안에…….”
“부하…들?”
부하가 있는데다가 심지어 그게 여러 명이라고? 박 소위의 눈썹이 치켜올라 간다.
내가 지금까지 죄수로 부려먹었어야 할 인간쓰레기들을 지켜주고 있었단 말인가. 치정에 얽힌 분노 못지않게 커다란 짜증이 그의 가슴속에서 폭발했다.
문 대위, 이 등신 같은 새끼… 수용자들을 무조건 감싸고돌더니 이 지랄이 날 줄 알았다. 내부가 이렇게나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었는데 등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잘난 척만 오지게 했던 거구나…….
“몇 명이나 돼?”
박 소위가 잔뜩 흥분한 채 물었다. 죽여야 할 사람이 늘어난다는데 그게 무섭거나 두렵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에 든다. 감히 나를 기만하고 선량한 국민인 척하고 숨어 있었어? 죽여 버려야지… 아무렴… 쓰레기들은 쓰레기답게 대해야 하고 말고…….
“여섯 명이요…….”
초희가 박 소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미 가희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른 놈들이다. 기동이가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고, 놈의 똘마니들 중 못된 녀석들은 다 포함시켰다.
그놈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 계획도 못 짜는 것들이다. 굳이 힘들게 죽여 버리지 않아도 된다.
“꽤 많구만.”
박 소위가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육만배까지 더하면 총 일곱.
초희와 가희는 떨리는 가슴을 꽉 움켜쥐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역시 너무 많은가? 여기에서 거절해 버리면……. 그때는 육만배와 기동이만이라도 죽여 달라고 애원할 참이었다. 그 두 새끼만 이 세상에 없어도 숨쉬기가 한결 편안해질 것 같다.
“좋았어.”
하지만 그녀들의 걱정과 달리 박 소위는 광기 어린 미소까지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여자를 협박한 깡패 한 새끼를 죽이는 건 개인적인 복수지만, 국민들 사이에 숨어든 조직을 와해시키는 건 정의의 실현이다.
한 놈이든 일곱이든 죽이는 데 큰 차이는 없다. 그냥 연사 모드로 두고 방아쇠만 당겨 버리면 되니까. 문제는 놈들을 어떻게 모이도록 하고 증인을 남기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보는 눈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그래… 그거 좋겠어. 그러면 되지…….”
갑자기 제법 쓸 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른 박 소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벌떡 일어났다. 가희와 초희는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왜 그러세요, 박 소위님? 무서워요….…”
“아니야. 너희가 왜 무서워해, 내가 있는데.”
박 소위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두 여자의 입술을 한 번씩 어루만지면서 물었다.
“가희야, 초희야, 너희 나랑 같이 있는 거 좋지? 둘 다 내 거 맞지?”
두 여자는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자유가 바로 눈앞인데 무슨 말이든 못하랴 하는 심정이었다.
“가희는 매일… 박 소위님이랑 같이 눈뜨고, 눈감고 싶어요. 박 소위님이 가희를 안아만 주면 다른 건 아무 상관 없어요.”
“저는… 지금 이런 것도 꿈만 같아요. 오죽하면 이렇게 잠깐 얼굴을 보고 싶어서 목숨을 걸었겠어요.”
두 여자의 애타는 고백을 듣고 마음을 확인한 박 소위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더러운 쓰레기 새끼들도 소탕하고, 이곳에서 두 여자와 질릴 때까지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아서이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나 잠시 일 좀 보고 올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지 그 깡패 새끼들 이름이나 적어두고 있어.”
가희와 초희에게 명령한 박 소위는 총을 챙겨 들고 방을 나섰다. 그러고는 곧바로 쉘터를 벗어나 남쪽 게이트를 지키고 있는 전차 쪽으로 걸어갔다.
“음? 박 소위, 웬일이야? 쉬어야겠다면서?”
전차 위에 걸터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김 소위가 놀라며 물었다. 박 소위는 최대한 정상인의 표정을 가장하고 입을 열었다.
“생각을 해봤는데… 내일 전차 이동할 때 말이야, 민간인들도 최대한 함께 이동시켰으면 해서.”
“민간인들을? 그 사람들은 아직 이동 예정일이 멀었는데?”
“알지. 그런데 사실 전차가 호위하는 게 가장 안전한 이동 방법이라는 건 분명하잖아. 지정 이동일에 같이 못 갈 바에는 아예 미리 데려가는 게 어떠냐는 거지.”
박 소위의 말을 들은 김 소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지상으로 이동하는 수단 중에 전차보다 더 든든한 호위는 없다. 민간인들의 생존 확률을 높인다는 면에서는 고려해 볼 만한 사항이다.
“좋은 이야기지만, 뭘 타고 가? 여기로 장갑 트레일러가 배정된 게 닷새 뒤인데.”
김 소위의 질문에 박 소위는 게이트 안쪽으로 들여다 놓은 대형 트럭을 가리켰다.
“저게 있잖아. 안전성 면에서는 저 트럭이랑 전차 조합이 장갑 트레일러보다 못할 것 같지 않다고.”
대형 트럭은 외부 물품을 징발해 올 때 사용하던 것으로, 일단 차고가 월등히 높고 짐칸에 철제 덮개가 덮여 있다.
운전석 유리에도 철창으로 보강을 단단히 해두었기 때문에 저 안에 병사들을 태우고 나가서 좀비들에게 피해를 입은 적은 아직 없었다.
“흐음… 말 들어보니 나쁜 생각은 아닌데… 어쩐다?”
전차장 김 소위도 고민에 빠졌다. 그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 소위가 이런 제안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얼이 빠진 미친놈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민간인들을 걱정하는 의외의 면이 있었다는 게 놀랍다.
“상부에다 말이나 한 번 해봐. 무슨 대단한 위반을 하는 것도 아니고, 민간인을 호송하겠다는 건데 들어줄 만하다고 생각해. 내 판단으로는 말이지.”
김 소위가 갈등하는 것을 보고 박 소위는 설득을 계속했다. 김 소위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데 저 트럭에 아무리 빽빽하게 태워도 다 타기는 어려울 거야. 통제 인원까지 생각하면 기껏해야 절반 정도? 여러모로 어려운 면이 많네.”
“그게 어디야. 적어도 그 사람들은 안전해지는 거잖아. 뭐… 내가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문제지만, 그래도 생각해 보라고 하고 싶었어.”
박 소위는 사람 좋은 미소를 꾸며내 짓고서 김 소위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차피 이 녀석이 민간인들을 모두 인솔해서 가는 무거운 책임을 혼자 도맡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상부에 건의를 해봐도 당연히 거절당할 것이다. 높으신 분들은 계획에 없던 변화를 거절한다.
하지만 이렇게 한 번 말을 해뒀으니 나중에 트럭에서 어떤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변명할 수 있는 여지는 마련되었다. 모든 것은 좀 더 안전한 이송을 위한 것이었다는 변명…….
“하암~ 어휴, 걱정만 하고 잠을 못 잤더니 계속 하품이… 아무래도 나 먼저 들어가서 자야겠다. 내일 새벽에 다시 이야기해 보자고.”
밑밥을 깔아두는 데 성공한 박 소위는 하품을 연발하며 김 소위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서둘러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이제 할 일을 했으니 즐길 차례다.
“어디 다녀오신 거예요? 가희, 걱정했어요.”
“저도요. 얼마나 무서웠다고요. 이… 가슴 두근두근하는 것 좀 보세요.”
박 소위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희와 초희는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와 저마다 한쪽씩 그의 손을 잡아끈다.
‘훗, 이 귀여운 것들. 아주 나에게 단단히 홀렸구나.’
두 미녀의 육탄공세를 만끽하며 박 소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육만배와 그 똘마니 새끼들만 정리하고 나면 그녀들과 아주 뼈가 녹을 때까지 즐길 것이다. 단 셋이서… 오붓하게…….
한강 철교 따위는 나중에, 이 여자들과의 극한의 쾌락조차 지겨워질 때, 그때 가면 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민간인 인질뿐이다. 민간인들이 조난되어 있는 한, 군에서는 그들을 찾고 구조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후하하하하!”
그 생각만으로도 즐거워서 박 소위의 손놀림은 더욱 거칠어졌고, 그의 웃음소리는 크게 울렸다. 가희와 초희는 간드러지는 비명으로 박 소위의 흥분을 더욱 고조시켰다.
박 소위가 가희로부터 약을 받아먹고 쾌락의 폭풍에 휩싸인 때로부터 한 시간 뒤, 그의 숙소에는 두 명의 여자만 깨어 있었다.
드르렁~ 드르렁~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 버린 박 소위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서 큰 소리로 코를 골아댄다.
“끄응… 아이고, 어휴, 죽겠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속옷과 옷가지를 챙기면서 초희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허벅지에는 몇 군데나 멍이 들어 있다. 모두 다 박 소위가 우악스럽게 움켜쥐는 바람에 생긴 것들이다.
도대체 이 남자… 왜 이렇게 거칠고 여자를 위할 줄 모르는지… 그저 함부로 다뤄주면 여자가 기뻐한다고 믿는 모양이다.
“괜찮겠어? 많이 힘들었지?”
문밖으로 나와 초희를 배웅하면서 가희가 속삭였다. 초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겨우 이 정도만 참으면 자유인데… 백 번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녀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가희에 대한 동정도 있었다. 겨우 이틀째에 이렇게 몸 전체가 쑤셔 대는데… 이런 미친 새끼를 가희는 근 몇 주 동안이나 매일 상대해 왔다.
“조심해서 가. 그리고… 잘 자…….”
탈진한 가희가 가녀린 팔을 흔든다. 초희도 고개를 끄덕여 주고 돌아섰다. 컴컴한 구석으로 가서 그녀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매운 연기와 함께 설움이 폐부를 찌른다.
“큭!”
초희는 갑자기 터지는 눈물을 닦았다. 차라리 만취해서 아무것도 모를 때가 좋았다. 혹시 무슨 실수라도 할까 봐 맨 정신인 채로 버티며, 약에 취한 놈의 비위를 맞춰주고 나면 견디기 힘든 모멸감이 밀려온다.
“씨발… 괜찮아, 이년아. 그냥 엄청 야한 베드신 찍었다고 생각해. 어차피 진심이 안 담겨 있으면 뭔 짓을 했어도 아무 의미 없는 거야.”
눈물을 찍어내고 담배 연기를 몇 모금 더 빤 초희는 숨을 고르고 나서 쉘터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그러고는 자기 자리로 가서 얇은 담요를 머리까지 푹 뒤집어쓰고 누웠다. 이제 며칠만… 며칠만 더 참으면 이 연기로 대상을 거머쥘 수 있다.
그녀가 담요를 풀썩거리고 있을 때, 구석의 그늘 속에 숨어 있던 한 남자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육만배였다.
육만배는 얇은 입술을 꾹 깨물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으음, 저년… 벌써 이틀째 밤이슬을 맞고 돌아다니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