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348화 (348/449)

4장 에너자이저(4)

진우와 보안관이 코스트코로 되돌아왔을 때,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유빈의 엄청난 걱정과 잔소리였다.

“야! 무전이 안 터지는 데까지 가버리면 어떻게 해! 암만 기운이 넘쳐도 그렇지! 최소한 더 멀리 간다는 말 정도는 하고 가야 할 것 아냐!”

여전히 눈두덩이 보랏빛으로 부어올라 있는 유빈이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를 지른다. 어찌나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지, 그의 입술은 바짝 말라 다시 찢어졌을 정도다.

하긴 주특기가 걱정인 놈인데, 친구 둘이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었으니… 녀석이 몇 시간 동안 얼마나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오늘 수십 마리의 좀비를 때려잡고 멀리까지 모험을 하고 온 두 에너자이저는 두 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모은 채 서 있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한 10분 정도는 군소리 없이 핀잔을 들을 각오를 했다. 그러나 유빈은 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어휴~ 진짜, 어린애처럼 굴지 좀 마라. 왜 그렇게… 후우~ 뭐,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됐어.”

친구들의 가슴을 한 번씩 가볍게 친 뒤, 유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진우가 얼른 유빈의 어깨에 한 팔을 두르며 녀석을 달랬다.

“알았어. 근데 있지, 우리 그냥 무작정 놀러만 다닌 거 아니야. 군자역에 네가 바라는 비밀 기지에 딱 맞는 후보도 찾아놨어. 진짜로. 그치, 보안관?”

“응, 응. 기가 막혀. 보안 좋고, 전망 좋고, 역세권에…….”

보안관도 반대쪽에서 어깨를 감싸 안으며 유빈을 홀렸다. 유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비밀 기지? 어휴~ 너희 근데 군자역까지 갔었냐? 진짜 기운도 넘친다. 겁도 어지간히 없고…….”

“아니, 조금이라도 위험했으면 안 갔지. 진우, 저 새끼 완전 편리해. 그냥 다 쏴 죽이면서 쭉쭉 나가거든. 예전에 우리들끼리 가면서 긴장했던 거 생각하면 안 돼. 그 정도 속도가 아니야. 그리고 그 건물도 진짜로 꽤 괜찮아. 14층짜리 건물인데… 거기 옥상에 올라가면 바로 건대 쉘터도 보이고… 지금 텅 비어 있어서, 그냥 옮겨 가기만 하면 된다고.”

보안관이 진우와 군자역의 고층 건물을 동시에 자랑한다. 듣다 보니 유빈의 판단에도 장점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선로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어린이대공원과 건대의 직전 지하철역이라는 점이 특히 끌렸다. 어쩌면 이 근처보다 거기쯤이 더 임시 거처로 적합할는지도 모르겠다. 유빈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내일이라도 같이 한 번 가보자.”

“네가 가게?”

옆에 앉아 있던 태권소녀가 놀라서 물었다. 유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자 태권소녀는 바로 손을 뻗어서 유빈의 오금을 톡 쳤다. 말 그대로 가볍게 톡―!

“아윽! 야, 너… 왜?”

갑작스런 타격에 유빈은 무릎이 꺾인 채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검은 군복 놈들에게 삼단봉으로 두들겨 맞았던 오금과 허벅지가 엄청나게 시큰거린다. 태권소녀는 냉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살짝 건드린 거야. 그게 아팠으면 네 몸 상태가 어지간히 안 좋다는 말인 건데, 그 다리로 움직여도 될까 모르겠네. 공연히 염증만 악화되는 거 아닌가?”

“야이 씨! 태권도 국가 대표한테 맞으면 아픈 게 당연하지! 그게 내 몸이 안 좋아서 그러냐?”

유빈이 다리를 문지르며 찡얼거리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태권소녀도 한바탕 웃고 나서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같이 가더라도 힘든 건 멀쩡한 애들한테 맡겨. 너는 계획을 짜면 되니까. 혼자 모든 걸 다 맡아서 하려고 하지 말라고.”

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모여 앉아 늦은 저녁을 먹으며 내일의 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전에 유빈이, 진우, 보안관, 삼식이, 혜주가 먼저 방문을 해 보고, 안전이 확인되면 오후에 모두가 같이 이동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일 계획에 대한 세부 사항들을 정리하는 동안 해는 져버렸고, 주차장 안은 순식간에 어둠에 묻혔다.

“그럼 내일 아예 거기로 먹을 것도 좀 가져다 놓는 거야?”

랜턴으로 주변을 밝히며 삼식이가 물었다. 진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내가 음식을 짊어지고 다녀보니까 일주일 치든, 이 주일 치든 먹을 건 별문제가 안 됐었는데, 물이 엄청 무거워.”

1리터만 하루 치로 잡아도 이 주일이면 14리터, 무게도 무게지만 일단 부피가 엄청나다. 평지라면 카트에라도 담아서 끌고 간다고 하겠지만, 지하철 선로다 보니 걷기도 불편하고 계단도 수없이 오르내려야 한다.

“그렇게 한 번에 다 하려고 하면 힘드니까, 며칠에 나눠서 계속 방문할 때마다 가지고 가면 돼. 한 이삼 일 치씩 가져간다고 생각하면 별로 많지 않아. 너무 빨리 끝내 버리려고 하면 탈이 나더라. 내 얼굴 좀 봐. 겁 없이 한 번에 한강까지 갔더니 이 모양이 됐잖아.”

유빈이 말했다. 퉁퉁 붓고 멍투성이인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다. 불쌍해야 하는데 조금 웃긴다.

“저기… 군자역까지 갔었다고 하니까 혹시 지하철역에…….”

모두의 입이 잠시 멈추었을 때, 임수정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보안관은 그녀가 뭘 묻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아, 저도 혹시 누나 일행분들 무슨 흔적이라도 찾아볼 수 있을까 싶어서 찾아는 봤는데요, 근데 거기 지하철역이 엄청 어수선해서 쉽지가 않더라고요. 오랫동안 꼼꼼히 수색을 하지는 못했어요. 내일 가면 같이 또 둘러봐요.”

“미안해.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닌데, 그 근방에 찾아갔었다니까 생각이 나서…….”

임수정의 말에 보안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그때 누나랑 같이 갔다가 중간에 돌아왔던 게 계속 마음에 걸렸었어요. 근데 이제는 여기 이 진우가 있으니까 얼마든지 빠르게 왔다 갔다 할 수 있거든요. 그렇게 미안해하지 마세요. 자기 일행 만나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은 건데요, 뭐. 게다가 그분들은 부상도 당한 상태고요.”

“고마워, 그렇게 이해해 줘서.”

임수정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 험하고 모진 시절에 이런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잘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행운이다. 게다가 강인하기는 또 얼마나 강인한지…….

안전한 요새를 벗어났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지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또 낯선 곳을 찾아가겠다고 나서고 있다. 전혀 기죽은 기색 없이 오히려 즐기는 사람들처럼 당당하게…….

“너 괜찮아? 제니야, 안색이 별론데?”

태권소녀가 옆자리의 제니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동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부터 줄곧 그녀는 표정이 굳어 있다.

“네, 그냥…….”

제니는 볼을 두드리며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랜턴의 불빛에 비친 모두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던 제니가 말했다.

“…이제는 정말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 ☆

건대 쉘터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박 소위의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하루 종일 배꼽 부근을 간질이던 욕망은 점점 그 크기가 커지고 강렬해져서 이제는 호흡마저 거칠게 만든다.

‘시간 더럽게 안 가는군…….’

지난 30여 분 동안 박 소위는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의 기대에 비해 너무 느리게 흐르는 시간 때문에 시계가 고장 난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해봤다.

‘으음, 좋았단 말이지… 진짜 짜릿했어.’

멍하니 어젯밤의 일과 오늘 아침 가희와의 대화를 회상하던 박 소위는 미친놈처럼 히죽거렸다. 가희 하나만으로도 분수에 넘치는 여복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젯밤에는 그녀의 친구까지 함께해서 소설 속에서나 봄직한 뜨거운 밤을 보냈다. 상상해 보지도 못했던 짜릿한 경험. 그야말로 극락이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술에 취해 벌인 실수라거나, 하룻밤의 미친 불장난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가희가 부끄러워하며 했던 말이 그를 더욱 설레게 했다.

“박 소위님, 미안하지만 오늘 밤에도 초희 또 놀러 오라고 해도 돼요? 가희는 초희가 이동하기 전, 단 며칠 동안만이라도 계속 행복해하는 걸 보고 싶어요.”

가희의 그 말을 들었을 때, 박 소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물론 겉으로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면서 그게 가희가 원하는 거라면 그렇게 하라고 말해주고 나왔었다.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박 소위는 밤이 되면 또 두 미녀를 품을 수 있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중이다.

‘참, 나라는 놈도 대단하단 말이야…….’

박 소위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뜨거운 콧김을 내뿜었다. 두 여자 모두에게서 사랑을 받을 만큼 매력적이기도 하고, 그 두 여자를 모두 녹초로 만들 만큼 에너지가 넘친다. 그렇게 하고도 오늘 다시 그녀들을 만날 생각에 들떠 있다니…….

마침내 지겹기 짝이 없던 근무 시간이 종료되었을 때, 박 소위는 활짝 웃는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이제 담배 한 대 시원하게 빨고, 숙소로 돌아가 가희와 초희를 마음껏 농락하면 된다. 오늘은 두 번째 경험이니만큼 어제 미처 용기가 나지 않았던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볼 계획이다.

“박 소위, 잠시 이야기 좀 하지.”

마음 바쁜 그를 불러 세운 것은 전차장 김 소위였다.

뭐지? 박 소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놈은 요즘 자신과 도통 말을 섞으려 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배 한 대 같이 피우자. 부사관들도 기다리고 있어.”

김 소위는 박 소위를 끌고 외곽의 건물로 향했다. 예전에 민구가 고 하사로부터 치료를 받으며 누워 있던 곳이다. 먼저 와서 담배 연기를 뿜으며 기다리던 부사관들이 그들을 보고 가볍게 인사를 건넨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다들 모여서…….”

박 소위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김 소위에게 물었다. 지은 죄가 있는 터라 이렇게 다들 모여 있는 걸 보니 불안해진다. 혹시 자신이 이 원사를 죽였다는 걸 이놈들이 알아채기라도 한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아, 내가 내일 잠실로 복귀해야 하거든. 그것 때문에 그래.”

김 소위의 설명을 들은 후에야 박 소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K―2 손잡이 부근에서 맴돌던 그의 손이 그제야 내려간다. 그리고 이 모임에 대한 관심도 급격하게 식어버렸다. 박 소위에게 담배를 권하고 불을 붙여준 뒤, 김 소위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위성 쉘터에 배치되어 있던 전차들에게 내일 13시까지 잠실로 복귀하라는 일괄 명령이 전달되었습니다. 저도 예외가 아니어서 여러분보다 먼저 이곳 건대 쉘터를 떠나야 합니다.”

부사관들은 다들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 중사가 손을 들고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명령이 내려왔는지 알고 계십니까?”

“뭐… 자세한 사정 같은 건 따로 설명되어 있지 않았지만, 짐작은 갑니다. 잠실에서 한강철교로 이동하는 경로에 엄호할 수 있는 화력이 더 필요한 거겠죠.”

김 소위가 말했다. 운용 가능한 병력의 규모가 제한적인 현 상황에서 위성 쉘터마다 한 대씩 분산되어 있는 전차는 당연히 사령부에서 가장 욕심낼 만한 전력이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동명령을 내릴 정도라면, 아마도 첫날 이동의 성과가 어지간히 좋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물론 거기도 상황이 긴박하다지만… 갑자기 전차가 사라지면 여기는 또 어떻게 하라고…….”

부사관 중 하나가 불만을 토로하자, 김 중사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야, 거기랑 여기는 일단 보호하고 있는 민간인 수가 다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잠실에서 한 시간 동안 이동하는 민간인 수가 여기 전체 수용자 수보다 많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할 거면 아예 부대 전체를 함께 이동을 시키든가 하면 될 텐데…….”

그 뒤로 계속 대화가 이어졌지만, 박 소위는 더 신경 써서 듣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에 남아 있을 시간은 길게 잡아도 일주일 안쪽. 벽까지 쌓아서 최대 규모의 좀비들을 차단해 놓았으니 전차가 빠진다고 해도 크게 위험하지 않을 터였다.

물론 마지막 날에 잠실로 이동할 때 조금 불안해지겠지만, 그런 것까지 미리부터 걱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골 아픈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있으면, 단 1분이라도 더 환락의 시간을 보내는 데 쓰고 싶다.

“위엣 분들이 어련히 알아서 지시하셨을까. 그냥 따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전 피곤해서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김 소위, 자네도 수고. 내일 볼 수 있으면 한 번 더 보자고.”

박 소위는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회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마음대로 돌아서 버리는 그를 향해 다들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까짓 것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 시간과 정력을 사용할 데가 없는 머저리 새끼들이 찌질거리는 데 끼어서 이 소중한 밤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가희! 초희! 나 왔어! 후후후.”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가며 박 소위는 뻔뻔하게도 두 여자의 이름을 모두 불렀다. 그렇게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숙소 안에는 가희밖에 없었다. 혹시 화장실에라도 갔나 싶어 박 소위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초희의 흔적을 찾았다.

“오셨어요? 오늘도 고생 많으셨죠?”

쓸쓸한 표정으로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가희가 힘없이 고개를 숙인다. 오늘 아침 색기 넘치는 제안을 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이다.

혹시 뒤늦게 그 관계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것일까? 그러면 이제 그 야릇한 재미는 더 못 보는 건가? 그건 싫은데……. 박 소위는 불안한 표정으로 가희의 눈치를 살폈다.

“…초희는 없어요. 안 온대요.”

가희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박 소위의 맥도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잠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박 소위는 가희의 옆에 앉아서 빈 술잔을 집었다. 가희가 따라 주는 술을 한 잔 마시고 나서 박 소위는 부끄러움도 없이 물었다.

“왜? 무슨 일이야? 혹시 싸웠어?”

냉정히 생각해 보면 초희가 오지 않는 게 사실 너무 당연한 일인데도, 지금 박 소위의 머릿속에서는 그렇지 않다. 자신의 것을 누군가 빼앗아간 것 같은 박탈감이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두 여자가 자신에 대한 질투 때문에 싸움이라도 벌였다면 얼마든지 달래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몰라요. 이야기하지 않을래요.”

가희가 까탈을 부리며 다시 술잔을 채운다. 박 소위의 눈초리가 한층 더 사나워졌다.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멋대로 찾아왔다가 아무 때나 가버리면 그만인 줄 아나…….

“흥, 웃기는군. 그렇게 변덕스러운 여자였나? 그런데 가희, 너는 기분이 왜 이렇게 안 좋아?”

겨우 화를 가라앉힌 박 소위는 가희를 끌어당겨 무릎 위에 앉히며 물었다. 두 여자를 희롱하는 자극은 물 건너가 버렸지만, 일단 자신의 눈앞에 사랑스러운 가희가 있다. 이 끓어오르는 욕정은 그녀에게 풀면 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기분 풀어. 가희가 이렇게 우울해 있으면 나까지 기운이 빠진단 말이야. 응?”

박 소위는 능글맞게 웃으며 가희의 스커트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가희가 몸을 비틀어 그의 손을 피하며 새침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가 박 소위에게 처음으로 거절의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애써 눌러왔던 박 소위의 분노가 터졌다.

“대체 왜 이래? 어제 일 때문에 그래? 그게 내가 졸라서 한 일이야? 네가 부탁했잖아! 서로 쿨하게 즐겼고! 근데 그래놓고 이러기야?”

박 소위는 가희의 팔목을 꽉 잡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에는 두 여자를 기대했었는데, 이제 한 여자마저 뜻대로 안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분개의 감정으로 치닫게 했다.

“가희가 언제 그것 때문에 그렇대요? 박 소위님은 마지못해서 억지로 한 일인지 몰라도 가희와 초희한테는 어젯밤이 정말 큰 기쁨이었다고요. 인생의 선물 같은 밤이었어요… 흐흑!”

고개를 모로 틀고 있던 가희가 왈칵 눈물을 쏟는다. 박 소위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이마를 찌푸렸다.

“그, 그럼 왜 이러는데? 대체 왜 울어?”

“그냥… 묻지 말아주세요. 어차피 박 소위님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예요. 너무 위험하다고요.”

가희는 얼굴을 가린 채 울먹였다. 바르르 떨리는 그 입술이 또 은근히 섹시해서 박 소위는 뜨거운 콧김을 내뿜었다.

후우~ 한숨을 내쉬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박 소위가 말했다.

“나 성질 급한 사람이야. 좋은 말로 물어볼 때, 문제가 뭔지 빨리 이야기해. 그리고 나… 가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꽤 힘이 있어. 자, 말해봐.”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박 소위의 눈치를 잠시 살피던 가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초희요… 어젯밤에 여기에서 우리랑 함께 있었던 게 걸려서 오늘…….”

거기까지 말하고 가희는 또 눈물을 닦는다. 박 소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오늘 뭐? 뭐가 어쨌다는 거야?”

“죽여 버리겠다는 소리를 들었대요. 허락도 받지 않고 아무 데나 흘리고 다닌다면서. 칼로 목을 겨누고 위협을 하는데, 너무 무서웠대요… 그래서 싹싹 빌었대요. 다시는 그런 일 없을 테니까 한 번만 살려 달라고…….”

“아무 데나라고? 어떤 개새끼가 그딴 소리를 겁도 없이… 누구야? 초희에게 애인이 있어?”

박 소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누가 감히 초희를 칼로 위협해! 애인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가희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애인… 없어요. 초희는 그런 것도 못 만들어요. 왜냐하면 걔는 가희랑 달라서 소속사 사장의 노예거든요. 벗으라면 벗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노예. 소속사 사장이 깡패라서… 너무 무섭다고… 박 소위님에게 고마웠다고 전해 달래요. 흐윽!”

가희는 또 눈물을 쏟는다.

내 쉘터 안에 깡패가 있어? 그것도 그 가엾은 초희를 겁박하는 깡패가? 제까짓 놈이 깡패라도 그렇지, 감히 내 여자를…….

박 소위의 눈에서는 불이 쏟아질 것 같다.

“그 깡패가 누구야? 가희는 알지? 말해.”

“어쩌시려고요? 그 사람 엄청나게 무서운 인간이래요.”

“무서운 인간? 훗, 진짜 무서운 게 뭔지를 보여주지. 아주 죽여 버리겠어.”

박 소위는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걸려든 건가?’

눈물을 짜내고 있던 가희의 눈이 빛난다. 이쯤 흥분해 있으면 이름을 알려줘도 될 타임이다. 가희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나서 박 소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박 소위님도 아는 사람이에요. 육만배 사장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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