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판도라(2)
“아… 네… 가희 씨 친구셨군요……. 그… 편안하게 드십쇼.”
박 소위는 머뭇거리며 존댓말로 대꾸했다. 가희가 대체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그저 난감했다.
그리고… 뜨거운 밤을 기대하고 들어왔는데, 혹시 오늘은 그 짓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에 약간 짜증스럽기도 했다.
그의 표정을 읽은 것일까? 초희라는 여자는 다시 앉지도 못한 채 눈치를 보고 있다가 자신의 짐을 주섬주섬 챙기며 작별 인사를 하려고 한다.
“어휴, 저 때문에 두 분이 영 서먹하시네요……. 그렇지 않아도 이것저것 신경 쓰실 일이 많으셔서 스트레스 받으셨을 텐데… 그러지 마시고 앉으세요. 저는 이만 나가볼게요. 가희야, 술 잘 마셨어. 고마웠다.”
“아니야, 아니야. 얘, 이상한 소리 하네. 박 소위님이 그런 거 신경 쓰실 분인 것 같아? 아니거든! 가희는 그렇게 속 좁은 남자랑 사랑에 빠지는 여자 아니라고요.”
서둘러 초희의 팔목을 잡아 앉힌 가희가 박 소위에게 다가와 귀엣말을 한다.
“박 소위님이 그렇게 화난 얼굴로 보시니까 쟤가 무서워서 저러잖아요. 가희는 제 피앙세가 그런 남자라고 오해 받는 거 싫단 말이에요.”
“아, 아니… 화가 난 게 아니라 좀 놀라서…….”
박 소위는 손을 내저으며 부정하다가 목소리를 한 톤 더 낮춰 물었다.
“대체 저분에게 뭐라고 한 거야? 우리 사이 다 이야기했어? 철저하게 비밀로 하자고 했던 건 가희였잖아.”
“후후후, 왜요? 안 돼요? 박 소위님, 여자는요… 비밀을 갖고 있는 걸 좋아하지만, 때로는 자랑도 하고 싶어 하는 존재라고요. 박 소위님처럼 멋진 애인이 있는데, 제일 친한 친구한테도 자랑을 못하면 아마 가슴이 답답해서 미쳐 버릴걸요? 초희, 쟤는요… 절대로 가희에게 해될 이야기 하고 다닐 애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가…….
박 소위는 가희의 어깨 너머로 초희의 얼굴을 힐끔 엿봤다. 초희는 눈을 내리깐 채 연신 머리를 귀 너머로 쓸어 넘기고 있다. 가희는 박 소위의 귀에 입술을 붙이다시피하며 귀엣말을 계속했다. 가희의 입김이 귓불을 간질이며 귓구멍을 타고 들어오자 지쳐 있던 온 몸의 신경에 가벼운 전율이 인다.
“두 시간만… 딱 두 시간만 같이 마셔주세요. 어차피 저 애도 그쯤엔 가야 돼요. 그럼 그때부터 우리만의 시간이에요. 가희도 박 소위님이 몸서리쳐지도록 그리웠다고요.”
말을 마친 가희는 슬쩍 박 소위의 허리춤을 쓰다듬는다. 박 소위는 움찔하며 초희의 눈치를 살폈다.
여자들이란… 이상하구나……. 왜 이리 과감하지?
박 소위는 가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힘드셨죠? 박 소위님이 용감히 지켜주신 덕분에 오늘도 가희랑 초희는 무사히 살아남았습니다. 후훗, 자… 받으세요.”
박 소위가 접이식 의자에 앉자 좌측에 앉은 가희는 애교 가득한 눈웃음을 지으며 양주를 따라 준다. 박 소위의 잔을 채운 가희는 초희 쪽으로 술병을 내밀었다.
“자, 너도 받아. 우리 건배하자.”
“아니, 얘, 잠깐만. 나는 박 소위님한테 달라고 할래. 후후후, 주인이 먼저 한 잔 따라 주셔야 마음 편하게 마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초희는 박 소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웃음을 쳤다. 가희도 더는 권하지 않고 술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아, 네… 그럼 제가 따라 드리죠.”
박 소위는 초희와 가희의 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건배 후, 입을 적신 가희가 자신의 볼을 쓰다듬으며 배시시 웃는다.
“있지… 가희는 지금 너무 행복해요. 가희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랑, 제일 사랑하는 박 소위님이랑 이렇게 오붓하게 술을 마실 수 있다니 꿈만 같은걸요.”
“어머, 어머, 쟤 저렇게 꿈같은 표정 짓는 거 진짜 오랜만에 보네. 계집애, 박 소위님이 좋기는 정말 어지간히 좋은가 보다. 박 소위님, 소위님은 가희가 저한테 얼마나 자랑했는지 모르죠? 자기가 꿈에 그리던 사람을 만났다고 어찌나 자랑하는지… 외로운 사람 가슴까지 다 흔들어놓는다니까요.”
“자랑할 만하잖아! 초희, 너도 오늘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까 알겠지? 가희가 왜 그렇게 폭 빠질 수밖에 없는지?”
“후훗, 그래. 잘생기셨다는 건 인정. 뭐, 그래봐야 남의 떡이지만… 그래도 정말 군인이라는 게 안 믿겨져요. 배우 하셨어도…….”
초희는 입술을 핥으며 박 소위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칭찬을 듣는 박 소위의 기분도 덩달아 들떴다. 비록 가희와의 불같은 밤을 방해하는 불청객이라고는 해도 그녀 역시 눈이 즐거워지는 미녀 배우니까 당연한 일이다.
사실 초희가 잠실에서 이쪽으로 이송 왔을 때부터 박 소위는 그녀의 몸매와 얼굴을 몰래 눈으로 훑었었다. 가희와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비교도 해보았고, 때때로 초희가 고 하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은근한 질투심마저 생기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 고 하사 놈은 뒈져 버렸을 게 분명하고, 초희는 자신의 방에서 술을 마시며 미남이라는 칭찬을 하고 있다. 이만하면 자신을 승자로 분류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다.
“어머, 잔이 비었잖아요. 그러면 이번에는 제가 한 잔 따라 드릴까요?”
박 소위가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이는 것을 보고, 초희가 술병 쪽으로 손을 뻗는다. 그러자 가희가 얼른 먼저 병을 집어 들고 고개를 저었다.
“후훗, 안 돼. 박 소위님 술잔은 가희가 채울 거야. 가희는 질투심이 많걸랑.”
“어우, 뭐야? 한 잔 정도 어떠니, 얘. 내가 무슨 네 애인 빼앗으려는 사람도 아닌데…….”
“어머머? 누가 뺏긴데? 박 소위님은 가희만 사랑하셔. 욕심난다고 엿보면 안 돼요. 그쵸? 박 소위님, 저만 예뻐하시는 거죠?”
“아니죠? 애인이라 말을 못하는 것뿐이지, 실은 가희보다 제가 더 인물이 낫죠?”
한바탕 만담을 늘어놓던 두 여자가 마주 보며 까르르,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를 낸다.
후후, 후후후……. 박 소위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가희와 단둘이 보내는 밤만이 유일한 즐거움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한 명이 더해진 유쾌한 분위기도 꽤 괜찮다.
뭔가… 좀비 세상이 아니라 과거의 평범한 사회로 돌아가 높은 사람이 된 채 접대를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좋군요, 능력이 있는 애인이라는 건… 가희가 아니었으면 이런 건 꿈도 못 꿔봤을 거예요.”
박 소위가 따라 준 술을 홀짝이면서 초희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따금씩 고개를 푹 숙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박 소위의 얼굴에 거의 고정되어 있다. 둔한 박 소위조차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인 눈길이었다.
“우울했거든요. 요새… 산다는 게 뭔지 하는 회의도 들고… 하지만 오늘 가희랑 이렇게 한잔하면서 마음을 풀고, 또 둘이 이렇게 행복한 모습을 보니까… 저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어요. 박 소위님처럼 멋있고 믿음직한 사람 만날 수 있을 때까지요……. 저, 잔 비었어요.”
초희는 박 소위의 무릎을 살짝 쓰다듬으며 잔을 내밀었다. 박 소위는 그녀가 왜 우울하다고 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앞으로 숙인 그녀의 가슴골을 훔쳐보는 데에만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다.
흐음, 가슴은 가희보다 더 큰 모양인데……. 아닌가? 둘이 비슷한가? 박 소위는 술을 따라 주는 동안 계속해서 곁눈질을 해 댔다.
“후아~ 덥네요. 이렇게 찐득한 여름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몇 순의 술잔이 더 돌았을 즈음, 초희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고, 스커트 자락을 펄럭였다.
창이 없는 지하여서 가뜩이나 더운데, 좁은 공간 안에 청춘 남녀가 세 명이나 술을 마시고 모여 있으니 방 안의 공기는 그야말로 확확 달아오른다.
“가희처럼 이렇게 단추를 좀 더 풀러. 그렇게 싸매고 있으니까 덥지.”
가희는 초희 쪽으로 팔을 뻗어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려고 했다. 초희는 당황해하며 도리질을 했다.
“아니, 아니… 너는 박 소위님이 애인이니까 그렇게 해도 되지만, 나는 그러면… 박 소위님이 비웃으시면 어떻게 해. 여자가 영 단정치 못하다고…….”
“얘는, 그런 게 어디 있니? 가희 애인이 네 친구지. 그냥 편하게 있어. 그쵸~ 박 소위님? 그래도 되죠?”
이 상황에서 고개를 저을 남자가 있을까?
박 소위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가희의 적극적인 권유로 블라우스 단추를 명치께까지 풀어 헤친 초희는 한 손으로 가슴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흘끔흘끔 박 소위의 눈치를 본다.
그 모습이며 얼굴의 각도가 꽤나 자극적이어서 박 소위의 숨소리는 약간 거칠어졌다.
“우리 박 소위님은 육사 다니실 때, 럭비하셨었다아? 그래서 있지, 허벅지가 정말 단단해. 보통 사람들하고는 달라.”
가희가 먼저 바짝 다가앉으며 박 소위의 허벅지를 쓴다. 초희도 슬쩍 몸을 기울여 ‘진짜?’ 하며 반대쪽 다리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브래지어와 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어머! 정말이네. 세상에… 이런 근육으로… 우리 가희를 밤마다… 박 소위님, 너무하셨다. 가희, 쟤는 몸이 약해서 이런 파워 감당하지 못할 텐데……. 어휴, 저 계집애가 요새 행복해하는 게 다 이유가 있었네. 그냥 잘생겨서 좋은 게 아니었어!”
박 소위의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고 누르던 초희가 음란한 농담을 던지면서 미소를 지었다.
“어머, 얘 좀 봐! 못하는 말이 없어. 어휴, 가희는 부끄러워서 못 듣겠다.”
가희는 두 손으로 볼을 감싸는 시늉을 하며 뒤쪽으로 물러난다. 하지만 초희의 손은 여전히 박 소위의 다리에서 떠날 생각이 없다. 박 소위도 다리를 빼거나 하지 않는다.
“후후,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어렸을 적으로 돌아간 것 같아요. 왕 게임 해요! 가희, 그거 하고 싶어졌어요.”
멍한 눈으로 빈 곳을 응시하고 있던 가희가 갑자기 생기가 나서 안주로 먹고 있던 막대 과자를 빼 든다.
“왕 게임?”
“네에~ 왕 게임이요. 번호 정해놓고 왕 뽑은 다음에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하는, 그거 있잖아요. 박 소위님이 1번, 초희가 2번, 그리고 가희는 3번. 짧은 거 뽑으면 왕. 룰은… 으음, 아픈 것만 빼고 다 되기!”
가희는 아양을 피우며 번호까지 지정해 주고 나서 과자 한 개의 끝을 오독 깨물어 먹었다. 그러고는 세 개의 과자를 주먹 안에 숨겨 쥐고 내밀었다.
“어우~ 나는 그런 거 잘 못하는데…….”
박 소위가 동의하기도 전에 초희가 먼저 과자를 빼 든다. 길다.
큼큼, 박 소위도 한 개를 뽑았다. 짧다. 그가 왕이 되었다.
“자요, 이제 명령을 내리시옵소서, 대왕님. 후후훗.”
가희와 초희가 색기 가득한 눈웃음을 치며 박 소위에게 말했다. 박 소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명령을 내렸다.
“음, 2번 원샷.”
“어우, 그게 뭐야! 너무 시시해요. 후후후후~ 그거는 왕이 아니라도 어차피 마시는 거잖아요.”
별것도 아닌 명령에 여자들은 까르르 웃었다. 초희가 위스키 잔을 한 번에 비우고 게임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가희가 왕이 되었다.
“가희 하는 거 잘 봐요. 왕 게임 명령은 창피하고 그런 거여야 한다고요. 2번! 바지 벗어!”
“바지? 나 바지 없는데?”
초희는 당황한 척하며 자신의 스커트를 펄럭인다. 멍해진 가희가 이마를 쓸면서 중얼거린다.
“어? 네가 2번이었어? 나는 박 소위님 바지 벗기려고 한 건데…….”
“그럼 이거는 무효야? 다시 명령 할 거야?”
초희의 물음에 가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왕 명령은 딱 한 번이고, 바꾸는 것도 없어! 가희 왕이 명령한다! 바지 없으면 치마라도 벗어!”
“뭐어? 진짜? 아휴~ 이 계집애… 취해 가지고 번호를 혼동하는 바람에 내가 이게 무슨 꼴이야……. 뭐, 어쩔 수 없지, 게임이니까……. 가희 너어, 이제 두고 봐.”
잠시 박 소위의 눈치를 보던 초희는 돌아서서 치마를 벗었다. 치마를 접어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초희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녀의 속옷을 보자, 박 소위의 심장은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이 게임… 이런 거를 다들 하고 살았던 건가…….
“자! 빨리 한 잔씩 마시고 또 해! 내가 왕만 됐단 봐라!”
초희는 열의를 불태우며 잔을 들어 올렸다. 두 번의 게임을 거치는 동안 박 소위는 웃옷을 다 벗어야 했다.
게임의 왕이 다시 박 소위의 차지가 되었을 때, 잠시 두 여자의 눈치를 보던 박 소위는 갈라진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3… 3번하고 2번, 뽀뽀해.”
가희가 부끄러운 듯 웃으며 초희에게 다가가 그녀의 무릎 위에 앉는다. 초희도 미소를 지으며 입을 살짝 벌린다.
박 소위가 내린 명령은 그저 ‘뽀뽀’였을 뿐인데, 두 여자는 서로의 입술과 혀를 한없이 에로틱하게 탐하며 웃어 댔다.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 박 소위의 눈앞에서 라이브로 펼쳐진다.
후우~ 후우~ 거칠어진 박 소위의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아우, 이게 뭐야. 나는 왜 계속 당하기만 해? 이러면 재미없는데…….”
길고 끈적한 키스를 마치고 가희가 자리로 돌아갔을 때, 초희가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잠깐 다음 게임 하기 전에 화장실 좀.”
가희가 문을 열고 나가자 한껏 달아올랐던 방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적어도 박 소위에게는 그랬다.
오늘 처음 보는 애인의 친구가 그의 바로 앞에서 팬티 차림으로 앉아 있는 상황… 게다가 둘뿐. 아무리 술의 기운을 빌었다고는 해도 뻘쭘할 수밖에 없다.
“박 소위님…….”
초희가 바짝 붙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박 소위는 목석처럼 뻣뻣해졌지만, 피하려 들지 않았다.
“가희요, 요즘 정말 행복해해요. 쟤랑 알고 지낸 지 오래됐지만, 저렇게 밝게 웃는 얼굴은 정말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쟤는 사실 무지하게 여리고 슬픔이 많은 애거든요. 그러니까 박 소위님이 더 신경 써주시고 아껴주셔야 돼요. 물론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앞으로도 그 마음 변치 마세요. 가희가 아파하는 모습은 정말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런 말을 하면서 초희는 박 소위의 가슴에 볼을 비비고,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께로 가져갔다.
말과 행동이 완전히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상황이다. 이상하다. 그러나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박 소위는 굳이 거절하지 않고 즐겼다.
‘그래… 이건 허용 가능한 범위의 장난이야. 술에 취했으니까 이 정도는 이상한 게 아니야…….’
박 소위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신과 초희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용서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희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두 사람은 황급하게 떨어졌다.
“미안해요, 가희 때문에 리듬이 깨졌죠? 후후후. 아참, 그리고 제가 우리 소위님, 비타민도 안 챙겨드렸었더라고요.”
가희는 두 사람 사이의 이상한 기류를 알아채지 못한 사람처럼 밝게 웃었다. 그러고는 약을 입술로 물어 박 소위의 입안에 넣어줬다.
“아유~ 우리 예쁜 소위님.”
어지간히 취했는지, 가희는 비틀거리며 계속 배실배실 웃는다. 그러면서도 또 잔을 비운 후에 게임에는 열심히 동참했다.
몇 번의 야릇한 벌칙이 지나가고 다시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을 때, 계속 벌칙만 받고 있던 초희가 드디어 왕 과자를 뽑았다. 초희는 두 손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후후후, 이제 다들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걸… 준비됐지?”
“어우~ 임금님, 제발… 가희한테 너무 힘든 거 시키시면 안 돼요…….”
가희는 의자에 기댄 채 반쯤 눈을 감고 있다가 맥없이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도로롱― 도로롱―
그녀가 가볍게 코고는 소리를 낼 때마다 가슴이 들썩인다.
“얘, 가희야! 나 처음 왕 됐어. 명령 좀 해보자. 벌칙 받고 자.”
초희가 어처구니없어 하면서 가희를 부른다. 하지만 대답이 없다.
“어머, 쟤는 진짜… 완전히 애기 같네요. 저 자는 모습 좀 보세요.”
한없이 친구를 아끼는 듯 중얼대면서도 초희는 다시 박 소위의 품에 바짝 다가와 안긴다.
“가희는 참 좋겠어요. 이렇게 잘생기고 섹시한 남자랑…….”
초희는 박 소위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볼과 입술을 쓰다듬었다. 박 소위의 눈은 이미 욕망으로 벌겋게 취해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지만… 저도 사람이라서 조금은 질투가 나네요. 그냥… 제가 잠실에서 그렇게 오래 있지 않고 조금만 더 빨리 여기로 왔더라면…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랬으면… 상황이 바뀌었을 수도 있을까요? 내가 박 소위님의 연인이고… 가희는 제 친구라서 이 방에 있는… 이런 생각 하는 거, 나쁜 건가요?”
박 소위의 바지 지퍼를 따라 부드럽게 손을 움직이며 초희가 물었다. 박 소위는 숨을 헐떡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는 달라붙는 초희를 밀어내기는커녕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고 있었다.
이 상황이… 분명히 이성적으로는 곤란하고 싫어야 하는데… 너무도 기분 좋고 흥분된다. 그래서 거절할 수가 없다.
자신이 미처 모르고 살아왔던 내면의 비열함이 자꾸 명령을 내린다. 연인의 친구를 범해보라고… 도덕의 경계를 넘어가 보라고…….
그가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정조관념 따위가 아니라, 혹시라도 초희가 거절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 일이 가희에게 들키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있었다.
“…1번.”
초희가 박 소위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처음엔 박 소위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후후후, 교태 섞인 웃음을 지은 초희가 박 소위의 귓불을 살짝 깨물고 나서 다시 말했다.
“내가 왕을 뽑았었잖아요. 대답해요, 1번.”
“아… 네… 후우… 그, 그랬었죠.”
박 소위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초희는 그의 무릎에 올라타 앉으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박 소위의 땀투성이 목에 가볍게 입을 맞추던 초희가 속삭였다.
“명령을 내릴게요. 가희는 잠이 들었지만, 하고 있던 게임은 끝을 봐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