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판도라(1)
그 아이디어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가희는 가벼운 전율마저 느꼈다.
‘육만배를 죽인다… 그 뱀 같고, 쥐새끼 같은 징그러운 괴물을 죽여 버린다…….’
곱씹어 상상해 볼수록 흥분되는 일이다. 피 흘리고 쓰러져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육만배, 그리고 그의 머리맡에 우뚝 버티고 서서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놈을 깔아보고 있는 자신…….
예전 같았으면 그녀 따위가 도저히 꿈꿔볼 수 없는 계획이었다. 가희는 그저 삼류 배우일 뿐이고, 육만배는 어디까지나 뒤쪽 세계의 제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천하의 육만배라고 해도 여기에서는 그저 군인들 덕분에 하루하루 연명해 나가는 교활한 늙은이일 뿐이다.
반면에 박 소위는 총이 있고, 그것을 잘 쏠 수 있는 기술이 있다. 그리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력도 가졌다. 늙은 깡패 두목쯤이야 조용히 불러내서 그저 총알 한 방만 박아주면 된다. 심장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줄 단단한 총알.
‘하지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죽여 달라는 부탁을 하지? 공식적으로 나는 육만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이인 걸로 되어 있는데…….’
가희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미 몇 사람을 죽인 바 있는 박 소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슴없이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또라이는 아니다. 절실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 없이 부탁을 해봐야 죽여줄 리 만무하다.
‘그날 이 원사인지 뭔지 죽은 걸 봤다는 이유로 나를 협박하고 있다고 할까? 아니… 아니야.’
가희는 얼른 그 생각을 접었다. 그래봐야 그냥 걱정하지 말라고 대충 넘어가려 할 게 빤하다. 아니면 육만배를 불러내서 어쭙잖게 혼을 내주려고 할지도 모른다. 박 소위가 알고 있는 육만배는 그저 흔한 장사꾼 노인네에 불과할 테니까…….
섣불리 그런 짓을 했다가는 가희 자신만 온갖 심한 꼴을 본 뒤에 목숨을 잃게 될 거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자신이 원래 육만배의 수하였다는 걸 털어놓는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렇게 제 발등을 찍으면 지금까지 박 소위 놈에게 자신이 들였던 공만 없어진다. 그러니 가희 자신도 육만배가 나쁜 인간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처럼 굴어야만 한다.
‘뭔가 아주 절실한 이유가 있어야 해. 그리고 동시에 육만배가 실은 위험한 깡패 두목이라는 것도 알려야 하고… 그래야 박 소위가 경고 같은 쓸데없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쏴 죽이는 편을 택할 테니까. 그런데… 그럴 만한 이유가 대체 뭐지? 뭐라고 꾸며 대면 그럴듯할까?’
“야, 가희. 너 뭐해? 무슨 생각 하고 있기에 그렇게 멍해졌어?”
곁에 서 있던 초희가 어깨를 툭, 친다. 가희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쩌면… 초희, 이 계집애만 도와준다면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가희는 초희의 두 손을 꽉 잡고 물었다.
“너… 너 내 편이야? 응? 초희야?”
“뭐래, 미친년. 느닷없이 무슨 네 편, 내 편 찾고 있어, 어린애처럼.”
광기 어린 가희의 질문에 놀란 초희가 두려운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자, 가희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대답해. 너, 내 편이야? 우리 친구지? 그렇지?”
“그래, 당연한 거잖아……. 야, 오죽 네 편이면 네 대신 박 소위 새끼한테 대주겠다는 소리까지 하겠니, 이년아? 이 세상에 그 정도 의리 있는 년 별로 없다, 너. 그리고… 서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도 거의 없을 거고.”
초희는 백치미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가희를 보며 대답했다. 가희도 그녀의 의견에 동감하는 바다. 최소한 그녀들의 사이에서는 내숭이나 가식 따위가 필요 없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서로의 발가벗은 모습을 환히 들여다보는 사이라고 해도 그것이 곧 신뢰로 이어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육만배 살해 계획을 털어놓기 전에 가희는 확신할 수 있는 뭔가를 보고 싶었다. 초희가 자신을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증거를. 목숨을 건 일이니만큼, 그 정도를 바라는 건 별로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초희야, 너도 이렇게 사는 거 싫지? 응? 너도 나처럼, 내가 원하고 있는 것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지? 이런 식으로 시키는 대로 다 해야 하는 거 싫어하지?”
가희의 물음에 초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에~ 그렇다고! 당연한 거잖아. 이 지랄로 사는 걸 어떤 미친년이 좋아하겠어? 그러는 대가로 방송이라도 하나 꽂아주면 또 모를까. 에이… 아니야. 그것도 이젠 사실 지겨워. 나는 있지, 요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맨 처음 그 썩을 놈의 소속사 문을 열고 들어가던 그날, 교통사고 같은 거라도 났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 진짜 육 회장이랑 얽힌 게 내 인생 최고의 미스다.”
“그러면… 만약에 새로 인생을 시작할 수 있으면 하겠어? 응?”
“백번이라도 하지! 지금은 그냥 막장까지 내몰렸는데!”
초희가 목소리를 높여 말하자, 가희는 얼른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외곽 건물 화장실로 뛰어갔다. 누구의 눈도 닿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 다짜고짜 개인용 칸막이 안으로 밀어 넣자 초희는 생난리를 친다.
“어우, 얘 왜 이래? 야, 우리 둘이 이 안에서 뭐하자고! 너까지 왜 나를 이 냄새나는 화장실로…….”
“쉿, 조용히 해. 여기 있어.”
초희의 입을 틀어막고 조용히 시킨 가희는 주변 칸들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가희는 구석에 놓여 있던 빗자루를 들어서 거울 모서리를 힘껏 후려쳤다.
쨍강!
떨어져 내린 거울 조각이 여러 개의 파편으로 나뉘어 튄다. 그중에 하나를 집어 든 가희가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너, 이제 나랑 맹세해.”
가희가 거울 조각을 들어 보이며 중얼거리자, 초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래? 가희, 너 미쳤냐? 무슨 맹세? 광년이같이 그런 건 왜 깨고 지랄이야?”
“절대로 비밀을 지키겠다는 맹세. 혈서로!”
“뭐어? 혈서? 너 무슨 사춘기냐? 그런 유치한 짓을… 그리고 뭔 비밀인지도 모르면서 맹세부터 하라고? 얘가 진짜… 야, 야, 그거 조심해서 만져. 너 그러다가 손 다쳐.”
초희가 주의를 주는 동안에도 가희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손을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속옷 안쪽에 숨겨뒀던 부적을 꺼냈다.
후우~ 후우~ 흥분한 가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비밀이 뭔지는 맹세하고 나면 이야기해 줄게. 초희, 네가 내 편이면 맹세를 하고, 아니면 관두면 돼. 맹세할 거야? 내가 먼저 긋는다.”
가희는 초희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거울 조각으로 자신의 왼쪽 엄지손톱 아래를 그었다. 붉은 피가 순식간에 도르륵 맺혔다가 뚝뚝 떨어진다.
가희는 피가 잔뜩 묻은 엄지손가락을 부적에 대고 눌렀다. 부적 귀퉁이 위는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일그러진 모양으로 붉게 물들었다.
“아우, 진짜… 싫다. 미친년. 그걸로 손을 그으라고? 어후~ 아플 것도 무섭지만, 더럽게 화장실 바닥 굴러다니던 걸… 내가 진짜 의리가 있어서 하기는 하는데… 가희, 네년도 제정신은 아니야.”
초희는 이마를 잔뜩 찡그리고서 거울 조각과 부적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린 채, 손가락을 그었다.
윽! 가벼운 비명을 지른 초희는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빨려다가 멈췄다.
“아니지… 빨 게 아니라… 이걸로 혈서 쓰려고 했던 거지……. 여기에다가 꾹 누르면 돼? 네 핏자국 옆에? 아우, 쌍, 쓰라려.”
초희는 자신의 피를 담뿍 묻힌 부적을 넘겨주고 나서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의도했던 것보다 유리가 좀 깊이 들어가는 바람에 피도 많이 나고 고통도 크다. 초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자, 이제 지장도 찍었잖아. 그러니까 말해봐. 내가 대체 무슨 비밀을 지키기로 맹세한 건지.”
“그래… 이제 우리는 맹세했어. 그 비밀이라는 게 뭐냐면…….”
가희는 두 개의 핏자국이 안쪽으로 가도록 부적을 다시 접은 후에 속옷 안에 넣고, 초희에게 바짝 다가서서 귀엣말을 속삭였다.
“초희야, 우리… 박 소위한테 부탁해서, 잠실로 돌아가기 전에…….”
“응, 응. 그래, 좀 크게 말해.”
“…육 회장, 그 새끼 죽여 버리자.”
어머―!
가희의 말이 떨어지자 초희는 깜짝 놀라 자신의 입을 가렸다. 초희의 턱에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묻은 피가 연지처럼 남아 있다.
가희는 두려운 마음을 꾹 누르며 초희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 계집애가 과연 동조해 줄 것인가…….
금기를 건드렸다는 놀라움 때문에 커다래져 있던 초희의 눈동자에 차츰 기쁨의 감정이 담기기 시작했다.
육만배가 사라져 버린 뒤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게 될는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진다. 자신을 물건 취급하던 그 개새끼들…….
한동안 벅차게 숨을 헐떡이던 초희가 의견을 내놓았다.
“가희야, 근데 있지… 육만배만 죽여서는 안 돼. 그러면… 그렇게 하는 김에 기동이도 죽여 달라고 하자. 그 새끼도 위험해. 그리고 또 뒈져야 할 새끼들 몇 명 더 있어.”
그렇구나…….
가희도 동의했다. 육만배에 가려져서 그렇지, 기동이네 무리들도 어지간히 질이 안 좋은 개새끼들이다.
맞아, 죽이려면 그놈들까지 다 없애서 아예 만배파의 싹을 다 밟아놔야 해…….
“하아~ 하아~ 어우, 그냥 생각만 하는 건데도 좋아서 가슴이 벌렁벌렁한다. 야, 그래… 박 소위에게 부탁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응? 가희야.”
초희는 아찔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가희는 문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도 여전히 불안해서 초희의 목소리를 낮췄다.
“어우, 이년아, 목소리 좀 낮춰. 누가 들을라. 내 생각에는 있지… 초희, 네가 불쌍한 여자 역할을 하면 될 것 같아.”
“불쌍한 여자 연기를 한다고? 뭐… 청순가련이 내 전공이기는 한데… 그런데 대주지 않고 그렇게만 부탁을 해도 박 소위, 그 인간이 부탁을 들어줄까?”
“아니지. 그럴 인간이 아니라는 건 잘 알잖니. 나 살 빠진 걸 좀 봐라. 그러니까 일단 기분 이빠이 좋도록 서비스해 주고, 홀려서 정신 못 차릴 때에 슬슬 밑밥을 깔자.”
가희와 초희는 서로 손을 꼭 맞잡고 모의를 시작했다. 이렇게 두근거려 본 게 대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신선한 기분이었다.
남자를 홀리는 건 원래부터 많이 해오던 짓이지만, 그 대가로 받아내야 하는 게 살인인 경우는 이 원사를 죽인 것에 이어 이번이 겨우 두 번째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육만배의 계략 없이 오로지 그녀들의 머리만으로 뭔가를 꾸며내고 있다는 것이 더욱 그녀를 긴장되고 흥분하게 만든다.
“근데… 이미 너랑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 거기에 내가 어떻게 끼어들지? 다짜고짜 들이댈까?”
초희의 말에 가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이 인간이 의외로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대놓고 그러면 오히려 더 뻣뻣하게 굴 거야. 가끔 말하는 거 보면 자기가 무슨 대단한 도덕군자인 줄 착각하고 있더라고……. 그러니까 처음에는 점잖게 놀다가 어영부영 선을 넘어가 버려야 돼.”
“그래? 그러면… 있지, 가희야. 우리 그 패턴으로 가자. 술자리에 우연히 친구가 합석했는데, 어찌어찌 깨어나 보면 쓰리섬하고 난 다음이었더라… 하는 패턴.”
오…….
좋은 작전인 것 같아서 가희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예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어지간한 남자들조차도 그 패턴에 꽤나 맥없이 무너진다는 걸.
가만있어 봐. 그러면 초희는 언제 끼어들지? 가희는 마음속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희야… 그렇게 하고 나서 박 소위가 계속 엉겨 붙으면 어떻게 해? 제가 무슨 남편이라도 된 것처럼 이래라저래라하면… 이러다가 우리 혹시 육 회장보다 더 골치 아픈 새끼한테 코 꿰는 것 아니야?”
초희가 새삼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가희는 단호하게 도리질을 했다.
“제까짓 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잠실로 가고 나서 그냥 딱 모른 체해 버리면 되는 건데. 그 넓은 잠실에서 자기가 뭐 어떡할 거야? 육만배만 재끼고 나면 우리는 말 그대로 인생 다시 시작할 수 있어. 한동안 죽은 듯이 조용히 살다가 이번에는 진짜 나 아낄 줄 아는 남자랑 좀 사귀어봐야지.”
“그러게. 나도! 나는 이왕이면 의사였던 사람을 찾아볼 거야.”
“후후, 이 바보 같은 년아. 의사면 뭐하고 검사면 뭐할래? 이제 그런 거 다 소용없어졌어. 그냥 네 맘에 꽂히는 남자가 제일 좋은 거야. 있지… 나 먼저 나갈 테니까 시간 좀 보내고 나서 너도 나와. 그리고 손에 약 발라.”
그렇게 말하고 칸막이 밖으로 나가려던 가희가 멈칫하더니 다시 문을 닫고 들어와 초희를 꼭 끌어안는다. 그러고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나랑 맹세 같이해 줘서 고마워, 초희야. 정말 고마워.”
초희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엄청난 비밀을 공유한 사이라는 친밀감이 그녀를 사춘기 소녀처럼 들뜨게 만든다.
“그래그래, 이 계집애야. 이따가 보자.”
“예쁘게 하고 와. 신경 써야 돼.”
포옹을 끝내고 다시 문을 나서며 가희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초희는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며 웃어 보였다.
“후우우~”
가희가 떠나고 난 빈 화장실에 혼자 남겨지자 비로소 두려움과 긴장이 초희의 어깨를 짓누른다. 다리에 힘이 빠져 버린 초희는 변기에 걸터앉아 바들거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우욱! 후우, 후우, 괜찮아. 괜찮아…….”
스트레스 때문에 치솟아 오르는 헛구역질을 꾹 눌러 잠재운 초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무도 달콤하고 짜릿한 계획이지만, 만약 실패하거나 발각된다면 그녀들에게 돌아올 고통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종류일 터였다.
예전에 그녀는 만배파의 약을 빼돌리려다가 걸린 여자가 어떤 꼴을 당하는지 지켜봐야 했던 적이 있었다. 멀쩡하게 아름다운 상태로 끌려왔던 갓 스물의 여자가 비명과 광기, 그리고 피비린내 속에서 죽어가던 모습…….
지난 몇 년간 초희의 악몽을 지배하던 끔찍한 기억이었지만, 이 일을 실패하게 되면 그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할 수… 있어. 진정해, 이년아… 티 좀 그만 내고.”
담배 연기를 내뿜은 초희는 부들거리는 자신의 팔목을 꽉 잡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팔목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겨우 아물려 했던 엄지손가락의 상처에서 또 피가 배어 나온다.
“떨지 마. 이건… 메소드 연기라고 보면 돼. 너 지금 인생작을 만난 거야. 언제나 그런 큰 배역 하나 맡고 싶어 했잖아. 팜므 파탈… 살인을 부르는 치명적인 악녀… 그래, 잘할 수 있어. 평생 남을 작품 하나 찍어보자.”
초희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최면을 걸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도 여전히 죽을 만큼 두렵다.
박 소위가 근무를 교대하고 자신의 장교 숙소로 돌아왔을 때, 시간은 이미 밤 11시가 지나 있었다.
“젠장… 이 짓을 뭣 때문에 하고 있는 거지…….”
계단을 내려가며 박 소위는 욕설을 섞어 불평을 내뱉었다. 피곤하다. 이동 준비와 전투를 하루 종일 병행하느라 지친 몸도 피곤했고, 부사관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하는 통에 마음도 지쳤다. 전차장인 김 소위는 아예 자신과 말도 섞으려 들지 않는다.
“등신 새끼들… 지금 쏘고 있는 총알이 누가 구해준 건지도 생각 못하는 새끼들이, 그깟 놈의 죄수들은 어지간히 챙기고 싶어 하네.”
박 소위는 생각을 털어내 버리려고 고개를 저었다. 상부의 승인도, 다른 장교들과의 협의도 없이 임의로 수감자들을 모두 이송시켰다는 데 대해서 다들 그에게 불평을 해 댄다. 이래저래 잠실로 돌아가기 싫어진다.
물론 죄수들이 없어져서 불편해진 것은 박 소위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장 모든 이동 준비 작업을 모자란 군 병력만으로 꾸려 나가야 하니, 골치 아픈 문제가 여기저기서 툭툭 불거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죄수들 중 반 정도는 남겨뒀다가 일손으로 부려먹고 나서 나중에 넘길 걸 그랬다.
하지만 그런 모든 걱정거리들보다도 가장 아프게 그를 괴롭히는 것은, 잠실 이동 후 변화할 수밖에 없을 자신과 가희의 관계 문제다.
오늘 그가 받은 명령에 따르면, 건대 쉘터의 병력과 민간인들은 잠실로 이동 후에 단 하루만 휴식을 취하고, 곧바로 또다시 한강철교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다.
말이 좋아 하루 휴식인 거지, 실제로는 외부인이라 간주되어 24시간 격리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그때부터 가희와의 밀애를 즐길 수가 없어진다. 언제까지만 참으면 된다는 기약도 없다.
‘나는 사람을 죽였어… 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살인까지 불사한 놈이라고! 가희도 나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칠 만큼 헌신적이고……. 그런데 그런 사랑을 왜 국가가 방해하는 거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며칠이 지나고 나면 당분간 가희를 마음대로 만날 수도, 뜨거운 밤을 보낼 수도 없다는 생각에 박 소위의 가슴속은 온통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마음 같아서는 이동 준비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데, 김 중사와 전차장인 김 소위의 눈이 신경 쓰여 어쩔 수 없이 흉내만 내는 중이다.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영 답답하기만 하고… 일단 오늘은 가희를 품고 자자. 술이라도 한잔 거하게 마시고, 아주 뜨겁게…….”
어둑어둑한 복도를 지나 자신의 장교 숙소 앞에 선 박 소위는 문의 손잡이를 잡고 작게 중얼거렸다.
요즘은 장교 숙소가 거의 비어 있는 상황이어서 굳이 불편한 외부 건물까지 나가지 않고 아예 가희가 저녁부터 이곳에 와서 그를 기다린다.
보급 소대에게 뇌물로 주려고 챙겨뒀던 양주도 같이 홀짝거리고 알몸으로 뒹굴다 보면, 밤이 너무나 짧게 느껴질 지경이다.
“어, 가희, 나 왔어. 오래 기다렸지?”
박 소위는 방문 손잡이를 밀고 들어가며 밝게 웃었다. 그런데… 방 안에는 가희 말고도 한 여자가 더 있었다.
초희, 이 쉘터 내의 또 다른 연예인이자 미녀.
그녀가 가희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자신의 방 안에서 예상치 못한 여자의 얼굴을 본 박 소위는 순간 바짝 얼어붙었다.
이러면… 이 초희라는 여자에게 나와 가희의 관계가 들통나는 것 아닌가… 이 여자가 소문을 내면 어쩌지?
하지만 가희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밝게 웃으며 박 소위를 맞는다. 그녀와 초희의 앞에는 이미 반쯤 비워진 양주병도 놓여 있다.
“어서 오세요, 박 소위님. 오늘도 힘드셨죠? 가희는 하루 종일 걱정했어요. 아… 인사하세요. 가희 친구예요. 초희라고… 아시죠?”
“처음 인사드리네요. 초희라고 합니다.”
초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소곳하게 허리를 숙인다.
아, 예…….
박 소위도 주춤하면서 인사를 했다. 가희가 소개를 계속한다.
“초희는 가희랑 소속사는 다르지만 같이 드라마도 찍고 그래서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거든요. 근데 오늘은 얘가 술 한잔이 너무 하고 싶다는 거예요. 속상한 일이 있는데 여기서 일반인들은 술을 구할 수가 없잖아요. 가희는 소위님 덕분에 마실 수 있지만……. 그래서 가희가 불렀어요. 후훗, 먼저 같이 한잔하면서 기다리고 있자고 했지요.”
잠시 말을 멈춘 가희는 자신과 초희 사이의 빈자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박 소위님도 끼어요. 오늘 하루만 얘, 술친구 좀 되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