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338화 (338/449)

2장 손실률 5%(5)

“지하철?”

진우는 이마를 찡그렸다. 지하철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좀비들에게 포위되어 죽을 뻔했던 캄캄한 터널 속이 떠오른다.

시야가 좁아지고, 두려움은 증폭되는, 그런 공간… 사방에서 포효가 메아리치던 오싹한 기억……. 그런 곳을 일부러 골라 들어간다는 건 별로 좋은 선택 같지 않았다.

“왜 하필 지하철이야? 그냥 밝은 도로로 가도 되는데.”

진우의 질문에 유빈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야,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긴 한데… 그중 제일 큰 건 좀 더 안전하다는 이유지. 지하철 속으로는 좀비들이 들어가지 않으니까.”

“좀비들이 안 들어간다고? 진짜?”

진우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좀비들이라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보아왔지만, 그런 사실은 몰랐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 자신이 모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좀비 사태가 생긴 이후 계속 강원도에 있었고, 어제야 비로소 처음으로 지하철이 있는 공간에 도착했다.

“응, 여기에서 지내는 동안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놈은 한 번도 못 봤어. 아마 놈들 눈앞에서 누군가 그쪽으로 뛰어 들어가거나, 담배 연기를 뿜어 대지 않는 이상은 안 갈 거라고 믿어……. 그러니까 웬만해서는 엄청난 좀비 떼를 만날 일이 없어. 그냥 몇 마리 정도야.”

유빈이 설명해 준다. 진우도 햇빛과 좀비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아… 그래서 그 터널 속의 느린 좀비들도 약해져 있었던 건가?

하지만 진우에게는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그럼 엄청 좋은 거 아니야? 왜 처음부터 그리로 안 갔어? 내가 굳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은데.”

“그 안에 들어가서 한 10분 정도만 지나면 숨쉬기가 점점 힘들어져. 시꺼먼 먼지가 자욱하고, 냄새도 꽤 나고. 그래서 두 정거장마다 한 번쯤은 선로 위로 올라와서 맑은 공기를 쐬어야 해. 안 그랬다가는 점점 어지러워지더라고.”

흐음…….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아서 진우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터널의 중간에 이르렀을 때, 그 역시 산소 부족으로 비틀거렸었다. 지하철 선로 내에는 자신이 급한 대로 사용했던 자동차 타이어 공기조차 없으니, 꽤나 힘이 들 것이다.

“낯선 역 안에 좀비가 몇 마리나 남아 있을지 모르니까 중간에 밖으로 나가야 하는 순간도 위험하고, 또 건대 쪽에서부터 온 군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거든. 수정이 누나랑 그 일행을 잡으려고. 그놈들이 다짜고짜 총을 쏘거나 할까 봐 마음대로 불을 켜고 걸아갈 수가 없었어.”

유빈이 건대와 관련한 이야기를 해줄 때, 진우는 그중 절반 정도만 이해할 수 있었다. 어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한참 나눴는데도, 아직 그가 알아야 하는 게 잔뜩 남았다. 진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낯선 역에 돌아다니는 좀비 몇 십 마리 정도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긴 한데… 군인들 총은 어떻게 피하려고?”

“그게… 아직도 수색을 계속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건 저 녀석이 해결해 줘야지.”

유빈은 진우의 곁을 충성스럽게 지키고 앉아 있는 삼숙이를 가리켰다.

“어제도 우리가 거기서 두드려 맞고 있는 걸 저 녀석이 먼저 알고 알려줬다며? 그러니까 지하철 선로 안에 들어가서도 그렇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중이야. 예를 들어 사람들이 근처에 있으면 짖어준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삼식… 아니, 삼숙아, 또 신세를 지게 생겼구나……. 진우가 삼숙이의 머리통을 한 번 쓸어주는 동안 유빈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해서 이동만 할 수 있으면, 중간 중간마다 지하철역 근처에 우리가 숨을 만한 곳을 두 개 정도 만들어두고 싶어. 여기서 두 정거장 정도 떨어진 데다가 하나, 한강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또 하나. 그렇게 두 군데에 보름치 정도의 음식이랑 생필품, 그리고 비상약을 채워둘 거야. 그런 데를 마련해 놔야 조금 안심이 될 거거든.”

“그건 왜? 보험 같은 거야?”

“응. 우리들이 자리를 비우고 잠실로 가 있는 동안에 여기로 아무도 오지 말라는 법이 없잖아. 누군가가 여길 점거하고 있을 상황도 대비해 놔야지. 또… 테라를 데리고 그 잠실 쉘터라는 데를 탈출했을 때에도 우리 몸 상태가 어떨지 모르잖아. 누가 발목이라도 삐게 되면 단번에 여기까지 걸어오는 건 무리니까. 바로 근처에서 일단 회복할 수 있어야 돼.”

유빈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불행한 사건을 전부 대비하려는 사람처럼 말했다. 걱정하기 좋아하던 이 녀석의 성격이 오히려 다 강화된 걸 보며 진우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자신 외에 누군가 한 사람만 총을 휴대해야 한다면 그 역할에 가장 적합한 건 유빈이, 이 녀석일 것이다.

이 조심스러운 녀석에게 총이 맡겨져 있는 동안은, 그 자신도 등 뒤에서 오발 사고가 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니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냐? 밥 먹자.”

음식을 가지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던 보안관과 태권소녀, 그리고 제니가 돌아와 옆자리에 앉았다. 진우는 그들이 내미는 쇼핑백을 받아 테이블 위에 올리며 대답했다.

“응, 유빈이가 지하철 통해서 잠실까지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서 계획 짜고 있었어.”

“잠실? 야, 무슨 소리야, 유빈아? 네 다리를 봐. 저렇게 부어오른 다리로는 여기서 두 정거장도 못 걸어가. 그러니까 일단 밥 잘 먹고 회복부터 해야지. 서로 다 빨리 만나면 물론 좋겠지만, 잠실 쉘터는 어디 안 가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거잖아. 네 몸이 우선이라고.”

보안관은 철없는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유빈에게 말했다. 제니도, 태권소녀도 그의 편을 든다.

“그래요, 오빠. 일단 절룩거리는 것 좀 낫고 가도 돼요. 실은 꼭 가지 않아도 되고요.”

“자, 받아. 너, 어제 이거 잘 먹더라. 아참… 그리고 이거. 그거 가지러 일부러 모텔까지 갔다 왔네.”

작은 통에 든 비엔나 소시지를 진우에게 건네던 보안관이,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과 보조 배터리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고, 진우를 향해 밀었다.

신 차장이 넘겨줬던 바로 그 핸드폰이다. 어리둥절해진 진우가 핸드폰을 켜고 보조 배터리에 연결하면서 물었다.

“이건 뭔데?”

“어제 그 검은 군복 입은 새끼들이 뭐하는 놈들이냐고 물었었지? 그 안에 답이 있어. 동영상을 봐봐. 사실 그냥 내가 말로 해줘도 되는 거지만, 네가 죽인 새끼들이 얼마나 좆같은 놈들이었는지 직접 보고 나면 네 기분도 좀 덜 더러워질 것 같더라고. 혜주, 너도 저거 실제로 보지는 않았지? 괜찮겠어? 같이 볼래?”

보안관이 물어보자, 태권소녀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자. 내가 안 본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

제니가 다가와 잠금 패턴을 풀어준다. 진우는 동영상 재생기를 열었다. 폴더 안에는 날짜와 시간으로 이름 붙여진 수많은 동영상들이 들어 있었다.

“으아… 이게… 이게 진짜야? 정말로 이런 짓을 한다고? 이런 미친 개새끼들이…….”

두 개째의 파일을 보던 중에 진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동영상 속에서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줄에 묶어 좀비 밥으로 내려준다.

그롸아아아―

눈에 흰 막이 덮인 작은 회장 좀비가 희생자의 목덜미를 물어뜯자, 바닥 전체에 피가 뿌려졌다. 어찌나 생생한지, 그 피비린내가 액정 밖까지도 풍겨져 나오는 것 같다.

“이건 우리만 볼 게 아니네. 다른 사람들도 알아야 돼. 누군가 힘이 있는 사람도 알아야 하고.”

진우가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내는 동안에도 이미 그는 믿을만한 ‘힘 있는 사람’이라는 게 매우 찾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가 경험한 군에서는 그랬다.

☆ ☆ ☆

가희는 건대 쉘터 구석의 철책에 기대서서 넓은 주차장을 멍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갑작스런 이동 명령을 받은 터라 건대 쉘터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어수선했다.

근 3주에 걸쳐 쌓아온 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떠나야 하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짐을 챙기느라 바빴다.

하긴 짐이라고 해봐야 너덜너덜해진 돗자리와 얇은 싸구려 담요, 그리고 각자 아껴둔 음식 몇 가지가 거의 전부이지만…….

가희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비번 중인 군인과 여자들이 쌍쌍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인다. 그들의 공통적인 대화 주제는 이 예기치 않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어휴, 다시 잠실로 가면 우리 어떻게 해. 오빠랑 헤어지기 싫다고.”

한 여자가 투덜대는 소리가 가희의 귀에까지 들려온다. 그녀의 애인인 병사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어차피 거기에 가도 우리는 같이 움직일 텐데, 뭐.”

“만약에 안 그러면 어떡해? 오빠는 다른 데로 가버리고, 나만 남으면 어떻게 하냐고. 무섭단 말이야.”

“설마… 어휴, 괜찮아. 그런 일 없어. 그리고 만에 하나 떨어지게 된다고 해도 내가 꼭 찾아갈게. 약속해.”

병사가 다독거리자 여자는 그의 품에 기대서 눈물을 글썽거린다.

지랄, 영화를 찍고 자빠졌네. 못난 것들끼리……. 가희는 고개를 돌려 외면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구석으로 부러운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도 다들 저렇게 제 짝을 찾아서 의지하고 사네…….’

더 이상 듣고 있기 싫어서 자리를 옮기려던 가희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허리부터 시작해서 온몸 전체가 몸살 난 것처럼 쑤셔온다.

이게 다 박 소위, 그놈 때문이다. 배려라고는 없이, 가장 거친 방법으로 제 욕심만 채우는 색광.

“아야야, 젠장. 뼈마디가 다 어긋난 것 같네.”

우울해진 가희가 자신의 주먹을 등 뒤로 돌려 허리를 두들기고 있을 때, 초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여기서 뭐해? 궁상 맞게시리… 후후후, 할머니냐?”

말은 그렇게 놀리듯 하면서도 초희는 가희의 손을 치우고 대신 허리를 두들겨 준다. 잠시 허리 안마를 받고 있던 가희가 힘없이 물었다.

“초희야, 우리는 요즘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응? 뭘 하냐니? 이사 갈 준비하라고 하니까 그런 거나 하고 있어야지, 뭐.”

초희는 별생각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가희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뭘 기다리면서 하루하루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묻는 거야……. 너는 뭔가 희망이 보이니?”

“희망?”

“그래… 그런 거 있잖아. 예전에는 육 회장이 시키는 대로 낯선 새끼들이랑 같이 어울려서 술 처마시고 개처럼 얽혀서 자더라도 뭔가 바라는 게 있었잖아. 한 번만 확 떠봐라. 그러면 이런 생활도 다 바이바이다. 존나 높은 데로 올라가서 비웃어주마… 그런 생각했었다고. 근데… 지금 우리한테 그런 게 있어?”

“후후후… 이년이 또 사람 더럽게 센치해지게 만드네.”

초희는 담배 두 대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 뒤, 한 개비를 가희에게 넘겼다. 가희는 연기를 뿜어내고는 다시 초희에게 물었다.

“너, 요새 기동이 오빠가 매일 귀찮게 하지?”

“매일이다뿐이냐? 시도 때도 없어, 아주. 아무 때고 내킬 때면 옆으로 슬쩍 와서 신호 주고 가지. 어휴, 쌍! 이야기하다 보니까 또 짱나네. 만날 똥내 풀풀 풍기는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초희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진저리를 치며 이마를 찌푸렸다. 가희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물었다.

“…그것 봐. 그런 짓… 좋아서 하는 거 아니잖아.”

“지랄, 좋은 일만 하고 살아? 그럼 너는 좋아서 그 소위 놈이랑 밤마다 그 난리를 치냐? 기동이 오빠는 빨리나 끝나지만, 그 새끼는 진짜… 가희, 너 요새 거울 보니? 너 얼굴 반쪽이야. 강제 다이어트 효과 완전 쩔어.”

초희의 말을 들은 가희는 자신의 팔목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뼈와 가죽만 남아 초등학생의 팔보다도 더 가늘어진 팔목…….

“훗, 그러네. 요즘 같으면 내가 테라 그년보다 더 말랐겠다. 예전에는 그년 팔 날씬한 게 그렇게 부럽더니…….”

가희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살이 저절로 빠질 만큼 온몸의 통증도 심하다. 박 소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우악스럽게 달려들 때면, 아예 죽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벌써 이 난리가 난 지도 한 달이야. 그런데도 진정될 기미가 없어. 내가 볼 때, 우리나라는 끝났어. 연예인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질 만큼 망했다고. 그런데 우리는… 도대체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지랄을 하고 있는 거니? 응, 초희야?”

가희가 초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초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담배를 들어 보인다.

“글쎄? 그렇게 물어보니까 또 막상 대답할 말이 없네? 그냥 이런 것 얻어 피우려고?”

“그딴 담배 같은 거는 군인들 중에서 아무나 하고 연애만 하더라도 보루로 쟁여놓고 피울 수 있어. 저년들 좀 봐.”

가희는 군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여자들을 가리켰다. 뭔가 풋풋한 설렘이 그들의 주변에 흐른다.

“저렇게 별 볼일 없는 년들도 다 제가 마음에 드는 새끼들을 꿰차고 온갖 여우 짓을 하면서 놀아. 그에 비하면 우리는… 인간도 아니야. 아니, 어쩌면 주인 마음대로 접붙이는 개돼지들도 우리보다는 나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짐승들은 마음에도 없는 아양을 떨 필요가 없으니까.”

가희의 우울한 이야기를 들은 초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답답한 현실이 두통과 함께 다가온다. 초희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해, 이년아. 살아 있는 게 다행이라고… 세상이 이런 꼴로 변하고 나서 뒈진 년들도 많을 테니까……. 적어도 우리는 아직 살아 있잖아.”

가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도 위로가 안 돼. 그냥 뒈져 버리는 것하고, 뒈질 때까지 육 회장한테 빨대로 빨리는 것, 둘 중에서 어떤 게 더 낫냐고 물어보면… 후후후, 나 봐라. 아주 등골까지 다 쪽쪽 빨리고 있는 기분이다, 야.”

“어휴, 이 기집애. 박 소위랑 하는 게 어지간히 힘들고 스트레스 받나 보네. 그냥 며칠만 참아. 어차피 잠실로 가면 그 새끼가 불러내고 싶어도 못 불러낼 거 아니야. 왜? 지금 당장 너무 힘들어서 그래? 그럼 내가 하루나 이틀 정도 교대해 줄까? 뭐라고 그러면서 박 소위 방에 들어가지? 가희는 오늘 쉬어요. 그러면 되려나…….”

초희는 동정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가희를 위로해 주려 들었다. 그녀들 둘 사이에는 단순히 같은 소속사 연예인 이상의 유대감이 있었다.

온갖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접대 자리를 함께 경험하면서 쌓여온 끈끈한 정이랄까… 동병상련의 감정 같은 것이다.

“후훗, 계집애. 말이라도 고맙다, 미친년아.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그런데… 있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다시 잠실로 옮기고 나면 육 회장은 또 어떤 개새끼한테 나를 팔아넘길까? 그 개새끼가 지금 박 소위보다 더 더러운 놈이면 어쩌지… 하는 생각 말이야. 괜히 나 혼자 걱정하는 거 아니지?”

가희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푸념하자, 초희는 다시 새 담배를 물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가희야, 그냥… 포기해. 그런가보다 하고 아예 생각을 하지 마. 이제 와서 어쩔 거야. 애초에 육 회장과 연이 없었으면 모를까, 이제 와서 우리가 마음대로 하게 해줄 리가 없잖아. 우린 그 인간한테 코가 딱 꿰어 있는 거야.”

“그렇겠지……. 근데 그래도 나는 있지…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어. 그 인간이 나를 좀 놔줬으면 좋겠어. 그 잘난 보호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그냥 좀 내버려 둬줬으면… 이제 써먹을 만큼 써먹었잖아. 대체 이게 뭐야? 옛날 노비들은 문서라도 있었지, 나는 그런 것도 없는데 완전히 저 뱀 같은 노인네 물건이라고… 흐윽, 젠장. 내가 왜 아무 감정도 없는… 읍!”

“쉿! 조용히 해.”

초희가 서둘러 가희의 입을 손으로 가리며 말을 끊는다. 가희는 깜짝 놀라 초희의 시선이 향한 곳을 돌아봤다.

만배파 조직원 놈들이 근처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녀석들이 지나가고 난 이후에야 초희는 한숨을 지으며 가희의 입술에서 손을 떼었다.

“아무 데서나 그렇게 씨부려 대지 좀 마, 이년아. 별것도 아닌 신세 한탄하다가 괜히 육 회장 귀에 잘못 들어가면 뭔 짓을 당하게 될 줄 알고… 나는 가희, 너 괜히 다치는 거 보게 될까 봐 무서워. 너라도 없으면 내가 누구랑 이렇게 속을 털어놓겠니.”

가희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억울해서 그렇지. 나도 사람이다 보니까.”

“너만 억울해? 나도 존나게 분해. 그런데 억울해하면 뭐해? 힘이 없는데… 너나 나나 가진 거라곤 몸뚱이 하나뿐이어서 육 회장한테 엉겨볼 만한 힘이 없단 말이야. 그 인간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 마음대로 못 살아. 그러니까 포기하라고.”

초희는 은근히 다정한 성격답게 함께 눈물까지 글썽여 가며 가희를 달랬다. 눈물로 마스카라가 번진 초희의 얼굴과, 그녀가 조금 전 내뱉었던 말들이 가희의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얽힌다.

‘…뭐지?’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이유를 정확히 모르겠어서 가희는 얼굴을 찌푸렸다.

뭔가… 지금 아주 중요한 걸 깨달은 것 같았는데… 섬광처럼 휙, 하고 스쳐갔는데…….

“헉!”

입술을 물어뜯으며 생각의 꼬리를 잡아보려던 가희의 입에서 벅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구나… 이렇게 간단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는데… 바로 눈앞에 기회가 온 거였는데… 너는 그것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려고만 했구나…….’

가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리고 초희도 잃어버렸던 자유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나 새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박 소위에게 육만배를 죽여 달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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