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손실률 5%(4)
“진우야, 네 말대로라면 너는 멀리 떨어진 걸 딱 보자마자 그 거리를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알 수 있다는 거네?”
보안관이 묻자, 진우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는 너희가 그렇게 난리를 치면서 신기해하는 이유를 오히려 모르겠다. 자, 봐봐. 보안관, 지금 너랑 나 사이의 거리가 몇 미터나 되겠어?”
보안관은 눈대중을 해봤다. 진우까지… 엎어지면 닿지 않을 거리고, 팔을 뻗으면 발목은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대략… 2미터?”
“그래, 잘 알면서……. 그럼 여기서 저기까지 가늠하는 것도 같은 원리지 뭐.”
진우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제 말에 의하면 270미터 떨어져 있다는 건물을 가리킨다. 친구들은 어이가 없었다.
미친, 뭐가 같은 원리라는 거야. 엄연히 다르구만…….
“괜찮아, 괜찮아. 몇 번 연습하다 보면 금방 익숙해져. 나도 처음에는 좀 헷갈리기도 했었어.”
진우는 정말로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말했다. 그때, 규영이 조심스레 손을 들며 묻는다.
“저기… 그럼요, 형님. 그 거리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실제로 사격하는 것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요? 거리를 모르면 안 되는 건가요?”
“음…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명중률과 관련이 있어. 그게 이런 건데… 처음에 이 총의 영점을 25미터에서 조절하거든. 그러면 정확히 250미터에서 25미터와 같은 궤도를 한 번 더 지나가. 이런 식으로 포물선을 그리게 되는 거라는 이야기야.”
진우는 완만한 포물선을 그려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총알을 쏜다는 게 레이저 총처럼 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게 아니니까 위로 한 번 올라갔다가 어느 지점을 지난 뒤부터는 계속 아래로 조금씩 떨어지며 날아간다는 말이야. 이거를 탄도라고 하는데, 탄도 때문에 거리 가늠이 의미가 있어. 어떤 거리에서는 내가 겨눴던 것보다 아래쪽에 맞을 수도 있고, 또 반대로…….”
한참 설명을 하던 진우는 입을 다물었다. 규영과 임수정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의 관심과 영혼이, 어딘가로 빠져나가는 걸 확연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숙이를 끌어안고 있던 삼식이가 슬프다는 듯 중얼거렸다.
“뭔가 내가 아는 진우가 아닌 것 같아…….”
“으응, 저 새끼… 시험 점수를 몰랐으면 깜빡 속을 뻔했어. 탄도라는 둥 포물선이 어쨌다는 둥, 굉장히 공부 잘했던 놈처럼 말하네. 책이라고는 펴본 적도 없으면서.”
보안관도 고개를 끄덕이며 삼식이의 의견에 동조했다. 시퍼렇게 멍이 든 눈두덩을 문지르고 있던 유빈이 말했다.
“그런데 듣다 보니까 나는 진우가 왜 사격을 잘하는 건지 어렴풋하긴 하지만 알 것도 같아. 쟤는 총알이 날아가는 각도가 대충 머릿속으로 그려지나 봐. 거리도 딱 보이고. 신기한데? 그런 걸 감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 나는 그런 식의… 거리에 대한 감각이 별로 없거든.”
“그냥 됐어. 지금 말한 건 그냥 잊어버려. 어차피 너희가 이 총 쓸 것도 아닌데, 내가 괜한 소리 한참 떠들었다.”
진우는 얼른 손을 저으며 말했다. 사실 그런 이론들은 이들이 사용하게 될 MP5와는 거의 무관한 이야기 같기도 했다. 9㎜ 권총탄을 사용하는 기관단총으로 멀리 떨어진 목표를 맞출 일은 없다. 산탄총과 권총도 마찬가지다.
진우는 탄창이 끼워져 있지 않은 MP5를 들고 눈에 가져다 대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너희는 그냥 이것만 염두에 두면 돼. 너희 눈이랑, 이 총 뒤에 있는 가늠자, 앞에 있는 가늠쇠울, 그리고 목표가 일직선을 이뤄야 한다는 거. 그렇게 정렬을 해둔 걸 방아쇠를 당길 때까지도 유지하면 크게 벗어날 일은 없어.”
진우가 옆으로 돌아서서 사격 자세를 취하며 시범을 보이자, 일행들의 관심도는 다시 올라갔다. 역시 이론을 듣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편이 더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모양이다.
“그 이야기도 좋은데, 나는 네가 저 건물을 맞추는 것부터 보고 싶어. 네가 얼마나 멀리까지 정확하게 쏠 수 있는지 알면 앞으로 계획을 짤 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야.”
유빈이 석조 건물을 가리키며 쏴보라고 권한다. 진우는 민망함이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어휴, 됐어. 너희들, 왜 이렇게 자꾸 사람을 시험하려고 그래? 저 건물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냥 믿어도 돼. 저 정도는 쉬워.”
“…못 쏘나 보다. 그냥 군대에서 뻥만 늘은 건가 봐. 그치, 제니야?”
삼식이가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면서 제니에게 속닥거린다. 제니도 장난기가 동해서 그 장단에 맞춰준다.
“에이, 그래도 그냥 속은 척하고 넘어가요. 어쨌든 생명의 은인이잖아요. 그리고 가까이에서라도 잘 쏘는 게 어디에요.”
술렁술렁, 관객석에서 동요가 일어난다.
하… 이 새끼들…….
진우는 귀찮다는 듯 얼굴을 긁었다. 이놈들이 왜 이렇게 딴죽을 거는지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실력을 못 믿는 게 아니라, 서커스를 보고 싶다고 보채는 것이다.
“좋아.”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에서 한 번 정도 사격 선생에 대한 녀석들의 존경심을 굳건히 하고, 불안을 잠재워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진우는 MP5를 다시 가방 안에 넣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어디를 맞출지 골라봐. 그러면 쏠게.”
“어머, 정말요?”
제니와 태권소녀가 손뼉을 치며 일어났고, 삼식이와 보안관도 싸구려 망원경을 들고 설친다. 규영도 존경심이 가득한 눈으로 진우의 얼굴을 우러러보고 있다.
한참 동안이나 설치던 녀석들은 결국 진우가 270미터 떨어져 있다고 지목한 석조 건물의 맨 꼭대기 층의 우측 유리를 지목했다. 진우는 어이가 없었다. 이건 표적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수준이다.
“저거? 야… 저건 엄청 큰 표적이야. 가로세로 다 2미터 가까이 돼. 정말 저런 걸로 괜찮아? 그러지 말고 더 작은 걸 골라.”
“역시 줄자맨 대단하구나… 270미터 떨어진 건물의 유리창 크기를 알아맞히다니…….”
삼식이가 감탄하는 동안, 다른 친구들은 좀 더 어려운 과제를 찾기 위해 망원경을 돌려가며 머리를 모았다.
결국 그들은 그 건물의 외부 조명등 중에서 하나를 지목했다. 손바닥 두 개 크기 정도밖에는 안 될 만큼 작은 놈이다.
“그래, 그 정도면 괜찮겠네. 쏜다.”
진우가 모두를 둘러보고 나서 사격 자세를 취하자, 삼숙이가 터벅터벅 걸어가 진우와 친구들의 사이에 앉는다. 이쪽으로 넘어오면 안 된다고 선을 그어주는 것 같다.
아직 조준경에 눈을 대지 않은 채 진우는 다시 한 번 주의사항을 말했다.
“앞으로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야기하겠지만, 방아쇠에 손가락을 대기 전에 항상 확인해. 근처에 다른 사람이 오가지는 않는지, 그리고 표적 너머에 뭐가 있는지…….”
말을 마친 진우는 재빨리 조준을 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긴 발사음과 거의 동시에 건물의 외부 조명등이 박살 나며 떨어진다.
우와~! 우와!
망원경에 눈을 붙이고 있던 규영이 숨 막히는 신음 소리를 냈다. 망원경은 금세 여자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제니와 태권소녀, 임수정도 탄성을 터뜨린다.
“뭔데? 맞았어?”
보안관과 유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어리둥절해하는 동안, 매의 시력을 가진 삼식이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명중인데…….”
우와! 진짜네! 짱이다!
놈들이 한바탕 수선스럽게 떠들어 대는 동안 진우는 탄피를 줍고 모드를 안전으로 돌려놓았다. 그러고는 분위기가 좀 가라앉기를 기다려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장난 그만치고 연습하자.”
다들 입술이 ‘오’ 소리를 낼 때의 모양처럼 된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진우 쪽으로 돌아앉는다. 첫 번째 학생으로 나선 것은 규영이. 워낙에 열성적으로 배우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다.
목표는 도로 건너편의 건물에 걸린 대형 간판으로 정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커다란 표적이지만, 처음 시작은 그 정도면 된다.
진우는 녀석의 몸을 옆으로 틀어 반동으로 휠체어가 움직이지 않도록 하고, 바로 등 뒤에 서서 함께 총을 잡아주었다.
두근두근, 규영이의 가슴이 얼마나 크게 뛰고 있는지 총을 꽉 잡은 녀석의 손을 통해 진우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걸 잘하면 저도… 후우, 후우~ 형아들이랑 누나들을 도울 수 있을 거예요. 후우…….”
중얼거리는 규영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진우는 녀석의 귀에 대고 조용히 일러줬다.
“규영아, 숨을 크게, 그리고 천천히 쉬어. 이렇게 흥분하면 잘 안 맞아.”
“…네. 네, 형님! 후우, 후우~”
규영은 열심히 대답하고 콧구멍을 크게 벌려서 숨을 들이쉬었다. 녀석의 호흡이 안정된 것을 확인한 후, 진우는 손가락을 방아쇠울 안에 집어넣어도 좋다고 말했다.
애초부터 MP5의 탄창 안에는 세 발만 넣어뒀다. 여유 탄창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그 이상의 양을 연습으로 써버리면 실제 전투를 위한 실탄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숨을 들이마시고 참은 상태에서 저 앞에 달린 동그라미가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손가락을 당겨. 알겠지? 팔 전체를 쓰는 게 아니라 손가락만.”
진우의 조언을 들은 규영이는 콧바람을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준비가 된 걸 확인한 진우는 손을 뗐다.
자신의 힘만으로 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 게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옥상 위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주 미세하게 바르르 떨며 총을 받치고 있던 규영이 입술을 꽉 깨문 채 방아쇠를 당긴다.
타앙―
MP5에서 발사된 9㎜ 파라블럼탄은 순식간에 30여 미터를 날아갔다. 하지만 표적으로부터 벗어나 위쪽의 유리를 뚫어버렸다.
“어, 이게 왜…….”
맞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던 규영은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우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방아쇠를 당길 때 총이 흔들려서 그래. 좀 더 힘을 줘서 잡아.”
준비를 한 규영이 두 발째를 쏘았다. 명중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한결 가까워졌다. 건물의 간판 가까운 유리창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가고, 작은 구멍이 하나 생겨났다.
“보셨어요? 보셨어요? 제가! 제가 거의 맞췄어요!”
흥분한 규영이 총을 꽉 잡은 채 몸을 돌리려 한다. 진우는 재빨리 녀석의 두 팔을 꽉 잡고 총구가 사람들 쪽으로 향하지 않도록 막았다.
“안 돼, 이렇게 하면. 항상 총구 방향을 신경 써야 한다니까. 사격은 잘했어. 그 감을 잊어버리기 전에 다시 한 번 해보자.”
진우는 규영의 호흡을 가라앉히고 다시 표적을 겨누도록 했다. 규영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세 발째를 쏴서 다시 구멍 하나를 추가했다. 첫 번째보다 목표물에 한결 가까워졌기에, 그래도 일단 명중 각이다.
진우가 총을 회수할 때, 녀석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굉장히 잘했다는 칭찬과 함께 규영의 머리를 쓸어준 뒤, 진우가 모두가 앉은 쪽을 돌아보았다.
“자, 이제 다음은 누가 해볼 거야?”
“대장님! 저요, 저! 나이 어린 순서대로!”
제니가 강력한 의지를 보이며 일어섰다. 머리카락까지 질끈 동여맨 제니가 난간 부근에 서자, 이번에는 진우의 가슴이 쿵덕쿵덕 뛰기 시작했다. 조금 전, 규영이가 내뿜던 것보다 더 센 콧바람이 풍, 풍, 뿜어져 나온다.
‘내가… 제니의 등 뒤에서… 팔을 뻗어서 두 손을 마주 잡고… 후우~ 후우~’
진우는 혹시라도 혼잣말을 지껄이게 될까 봐 두려워서 입을 꾹 가린 채 코로만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흥분한 것을 알아챈 보안관과 태권소녀가 목소리를 높여 항의한다.
“어이! 군인 아저씨! 똑바로 해! 교육에 사심을 집어넣으면 어떡해! 숨소리 관리 좀 하라고!”
“맞아! 제니야, 네가 먼저 하면 안 되겠어. 너무 자극이 심한가 봐! 진우, 쟤 저러다가 심장 터져 죽겠다!”
알았어, 알았어…….
진우는 잠시 고개를 돌리고 호흡을 가라앉혀야 했다. 가르쳐야 하는 상대가 제니가 아니라 태권소녀였다고 해도 상황이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봄에 입대해서부터 지금까지 여자라고는 거의 구경을 못해본 터라, 별것 아닌 일들도 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저 좋기만 하다.
“알았으니까 그만 좀 놀려! 나 총 있다고!”
겨우 여유를 찾은 진우는 친구 놈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러고는 제니에게 MP5를 쥐어준 뒤, 탄창을 갈아 끼우는 법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애교 가득한 미소를 짓던 제니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한다.
이후에도 사격 훈련은 계속되었고, 여덟 명 전부가 차례대로 세 발씩을 쏘아봤다. 다들 처음인 만큼 해줘야 할 이야기가 많아서 유빈을 끝으로 훈련이 마무리되었을 때에는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나 있었다.
“어때, 우리? 좀 희망이 보여? 사실대로 말해봐. 형편없지?”
유빈이 커피를 건네주며 조용히 묻는다. 진우는 웃었다.
“하하, 아니, 뭐… 이제 겨우 세 발씩 쏴본 건데… 그냥 어떻게 총을 쏘는 건지에 대해서 연습한 거잖아. 그 정도 가지고는 뭐라고 평가하기에 일러.”
“그래도 어느 정도 느낌이 있을 거 아니야. ‘아, 얘는 좀 쏘겠는데?’라든가, 아니면 ‘얘는 총 쥐어줄 필요 없겠다’라든가 말이야.”
“영 아니다 싶은 사람은 모르겠고, 처음치고는 꽤 잘한다 싶은 사람들은 좀 있었지. 삼식이도 그렇고, 혜주도… 아, 그리고 의외로 제니도……. 총소리 나면 비명부터 지르지 않을까 했는데 움츠러드는 기색도 없고.”
“응, 걔도 너랑 비슷한 느낌이야. 감이 있어. 볼라라고… 이렇게 빙빙 돌리다가 던지는 무기를 만들었을 때도 그랬거든. 만든 건 난데, 처음부터 걔가 더 잘 맞추더라.”
유빈은 납득하는 눈치다. 난간 쪽에서 해맑은 표정으로 담배 피우고 있는 삼식이를 보던 진우가 말했다.
“그런데 말이지, 총으로 간판을 맞히는 것하고 사람을 맞히는 건 완전히 달라. 삼식이처럼 마음이 여린 녀석은 아무리 잘 쏘게 된다고 해도 막상 방아쇠를 당겨야 할 순간이 오면 아마… 쉽게 그러지 못할 거야. 아마 여자애들도 비슷할 것 같고.”
음, 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권소녀가 의외로 여린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다. 파라다이스 모텔에서 자신이 턱을 맞아 기절했을 때도, 그녀는 치명상을 입히려 들지 않았었다.
제니는 뭐… 좀비들을 불태워 죽였던 밤에 계속 악몽을 꿨던 전력이 있는 아이이고…….
“좀비 상대로라도 경험을 많이 쌓으면 조금은 나을 테지만, 그 정도로 실탄이 여유 있지가 않아. 그러니까 총은 그냥 최소한의 호신용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총을 들고 다니면서 사고 안 날 만큼 익숙해지기까지도 꽤 오래 걸리거든.”
진우가 말했다. 유빈 역시 아직 어설픈 친구들에게 총을 들고 다니도록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제와 같은 최악의 상황을 마주했을 때, 그냥 맥없이 무릎을 꿇고 싶지 않다는 욕심도 있었다.
“다 잘 쏠 필요는 없어. 일단은 한두 명 정도만이라도 더 집중적으로 봐줘. 그래야 잠실로 이동했다가 테라를 데리고 돌아올 때,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질 테니까.”
유빈은 진우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부탁했다. 진우는 멍투성이가 된 유빈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핏줄이 터진 유빈의 흰자 아래쪽은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고, 입술 주변에는 검붉은 피딱지가 앉았다. 진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 지경이 되고도 바로 다음 날 또 잠실로 갈 계획을 짜고 있는 거야? 유빈이, 너도 참 어지간하다.”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혼자 올라온 놈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유빈이 눈두덩을 문지르며 말했다. 진우가 물었다.
“다시 가더라도 산책로 드라이브는 너무 위험한데… 게다가 이 앞으로 지나가는 좀비 떼만 하더라도 규모가 엄청나고. 그런 데 얽혀들면 살아남기 어려워. 무슨 다른 계획이 있어?”
“…응, 아마도.”
유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불가능했지만, 네가 와준 덕에 몇 가지 길이 열렸지. 지하철을 통해서 최단 거리로 가는 방법 같은 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