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335화 (335/449)

2장 손실률 5%(2)

‘사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수가 삼천…….’

그 숫자가 너무도 크게 느껴져서 문 대위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김 준장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다. 오히려 너무나 날카롭고 냉정하게 현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오로지 좁은 선로 위로만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서 6만이라는 수는 평소보다 더 거대해진다. 열 명씩 1미터 간격으로 줄을 세워도 그 길이만 6킬로미터에 달한다.

그 많은 사람들을 통제해 가며 이동하는데 한 명, 한 명에 신경을 썼다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니 가혹해져야 한다. 약한 자와 운이 없는 자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될 것이다.

그런 현실을 빤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소년처럼 꿈을 꿨었다. 최대한 희생을 줄이고 안전하게 이동하는 꿈을…….

그것이 아직 중대장으로서의 경력 정도밖에 쌓지 못한 문 대위의 한계였다. 그리고 지금 김 준장은 억지로 그 한계를 깨뜨린 후, 기존 사고의 틀 밖으로 문 대위를 끄집어내려 하고 있다.

“내일 오전에 선발 병력을 먼저 이동시키고, 그 뒤에 곧바로 민간인들을 따라 보내라고. 병력도 오 퍼센트 내외 손실을 각오하면 모레 오전에는 첫 민간인 이송이 가능할 거 아냐. 유람선은 준비되어 있잖아? 아까 보니까 테스트도 하는 것 같더구만. 어때? 모레 오전부터 민간인 이송 준비 되겠어?”

김 준장이 물었다.

“가능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계산을 해본 뒤, 문 대위가 대답했다.

“좋아, 그러면 내일 아침에 새 이송 계획을 수립해서 보고해. 모레부터 시작해서 일주일 이내에 모든 민간인들을 선로 위에 올려놓아야 해. 일주일. 그렇게 계획을 짜도 실제로는 열흘 가까이 걸리게 될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계획이 조금 무리다 싶을 만큼 빡빡해야 한다고. 느긋하게 여유 부리다가는 점점 늦어져서 남쪽에 도착했을 때, 늦가을이 돼버린다고. 그렇게 되면 다 굶주린 채로 얼어 죽는 거야.”

김 준장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경고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배웅하고 난 뒤, 힘이 쪽 빠진 오 중령은 의자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지친다. 갑자기 저러시네. 몇 명을 죽여야 한다는 둥, 삼천 명이 죽어야 나머지가 산다는 둥. 어휴~ 살벌해. 누가 들을까 겁나네. 와, 무섭구만. 갑자기 눈빛이 변해 가지고 전사자가 없다는 게 문제라고 하시는데… 자네도 놀랐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문 대위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 중령은 문 대위에게 계획서를 잘 만들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한 뒤, 하품을 하며 돌아갔다. 혼자 남겨진 문 대위는 지도를 빤히 보며 생각에 잠겼다.

누가 죽게 되고, 누가 살아남을지… 어디의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포기를 해야 할지… 계산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자신도 모르게 자꾸 멈칫하게 된다. 숫자 하나가 한 사람의 죽음이다. 당연히 단위가 커질수록 두려워진다.

특히 일주일 이내에 모든 수용자들을 선로 위로 옮기라는 주문이 가혹하다. 유람선을 이용한 이동만으로는 그만큼 빠르게 작업을 완료할 수 없다. 어느 정도의 위험부담을 감수하더라도 산책로를 따라 육로로 이동하는 방안을 병행해야만 한다.

“역시 마지막으로 이동하는 인원들이 가장 많이 희생될 수밖에 없겠군.”

몇 번이나 대략적인 계산을 해본 뒤, 문 대위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선발대를 따라 미지의 영역을 향해 전진하는 초기 이동 인원들도 위험하겠지만, 마지막까지 잠실 쉘터에 남아 있는 민간인들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그때쯤이면 잠실 경비 병력들은 대부분 선로 위로 재배치된 이후일 것이다.

이동의 마지막 날인 7일째에는 잠실 쉘터 전체가 거의 텅텅 비게 될 테고, 좀비 무리들의 습격을 막아낼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미리부터 통지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서로 먼저 유람선에 타겠다는 사람들로 인해 커다란 혼잡이 빚어질 것이고, 그것 때문에 또 일정이 지연될 테니까.

“으음…….”

문 대위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으며 피로해진 눈가를 꾹 눌렀다. 전쟁은 인도적이지 않다. 그 잔인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는… 마지막 날, 각 쉘터에 가능한 한 적은 숫자가 남도록 계획을 수립하는 것 정도다.

“오 퍼센트라…….”

자신의 앞에 놓인 보고서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던 문 대위는, 볼펜을 들어 ‘3,000’이라는 숫자에 두 줄을 긋고, 새로 ‘2,000’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첫째 날 이동 가능한 인원부터 계산하기 시작했다.

사망자의 수를 2천 명 이하로 끌어내리는 것이 그의 새로운 목표에 추가되었다.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꼭 해야 하는 임무다.

다음 날, 아침 식사가 끝날 무렵부터 잠실 쉘터 내부의 스피커와 확성기에서는 안내 방송이 시끄럽게 울려 댔다.

그리고 그걸 들은 사람들은 분노와 걱정 사이를 오가며 동요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젠킨스는 짜증스러웠다.

“으으! 웽― 웽― 시끄럽기도 하군. 저게 지금 대체 뭘 알리고 있는 거지?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겁을 먹은 거고? 응? 테라 양, 알려줘.”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에 지친 젠킨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테라에게 물었다. 산책을 하는 동안 그녀와 나누는 오붓한 대화가 저 망할 확성기 때문에 방해를 받은 것이 몹시 불쾌하다.

“우리들 전부 다… 이동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에요. 쉘터에 있는 모든 민간인들, 한 명도 예외 없이 전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래요.”

알려주는 테라의 표정에도 당혹감이 가득하다. 젠킨스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전부 다 이동이라고? 어디로? 다른 쉘터가 생겼나? 음… 멀리 가는 건 싫은데… 무릎도 아프고, 피곤하기도 해서. 논리적인 흐름으로 볼 때, 슬슬 부메랑이 이 근처에 배치될 것이기도 하고 말이야.”

“다른 쉘터가 아니에요. 열차 선로를 따라 걸어서 남쪽으로 간대요.”

“남쪽? 이야기가 어째, 점점 이상해지는군. 거리는 알려주지 않았고?”

“그냥… 남쪽 지방이라고만 했어요. 내일부터 이동을 시작한다고… 원하는 일행이 있으면 그들과 함께 지원하라고요… 이게 무슨 일일까요? 너무 갑작스러워요.”

테라는 불안한 눈으로 젠킨스를 바라본다. 그렇게 겁먹고 두려워하는 표정이 또 얼마나 좋은지! 덕분에 젠킨스는 짜증스러운 와중에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가학성을 자극할 만한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너무도 희귀한 보석이라는 걸 알면서도 부숴 버리고 싶을 정도다.

“먼저 분명한 건…….”

젠킨스는 턱을 긁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엄청나게 먼 곳으로 갈 모양이라는 거야. 만약 가까운 곳으로의 이동이라면 거리를 밝혔겠지. 그래야 사람들이 불안해하지 않거든.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건, 이들이 우리를 아주 멀고 먼 나라로 데려가겠다는 의미라고 보면 돼. 너무 가혹한 조건을 미리부터 일러주면 그만큼 반발도 커질 테니까 일부러 숨기는 거지. 흐음… 무슨 짓인지 모르겠군. 이렇게 멀쩡한 데를 버려두고 말이야.”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어서 젠킨스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그간 불평도 많이 했지만, 이 쉘터 정도라면 그래도 꽤나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렇게 안정적인 시스템과 이 든든한 건축물을 버리고 선로를 따라 걸어가야 한다니… 뭔가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한 모양이다.

‘멀리… 아주 멀리 걸어가야 한다고? 그것도 자갈로 가득한 선로 위를…….’

테라는 붕대로 감아둔 자신의 발가락을 내려다보았다. 한 번의 생명을 더 얻은 대가로 상처는 아직도 다 아물지 않았다. 피가 비칠 정도니 당연히 닿으면 아프다.

이 발로 아픔을 참아가며 장거리 이동을 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 여정이 될 것이다.

“역시 그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군.”

산책을 포기한 젠킨스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채 말했다. 충격에 휩싸인 테라도 그에게 일어나라는 소리조차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서 있다.

“그거라는 건 뭐죠?”

“식사지. 요즘 이상하게 양이 줄어든 것 같다고 내가 불평을 했지 않나. 물론 테라 양, 귀하는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소식가이지만……. 이 군인들 말이야, 보급물자의 한계에 달한 거야. 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쪽으로 가면 뭐가 달라지지? 거기에 보급 창고라도 있는 걸까?”

젠킨스는 나름 예리한 추리를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근처에 부메랑이 설치되지 않으면 JL로의 복귀가 정말 힘들어질 것 같다. JL의 직원들은 MJ가 서울을 벗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아… 스트레스 때문에 당분의 유혹이 커지는군. 테라 양, 그 주머니 나에게 줘. 어지간히 지쳐 보이는데, 그런 것까지 들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아프군.”

테라가 멍해져 있는 틈을 타서 그녀의 간식 주머니를 손에 넣은 젠킨스는 주스부터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꿀꺽, 두어 모금 만에 주스 팩을 다 비운 젠킨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해, 테라 양. 우리는 함께 JL로 가면 돼. 선로 따위 누가 걸을 줄 알고? 그러니 안심하고 나에게 의지해. 그건 그렇고, 우리는 여기에 언제까지 머무를 수 있다고 하던가?”

“…내일부터 이동을 시작해서, 일주일 내에 전원이 선로로 가야 한다고 했어요. 거기까지는 유람선을 타고 가게 될 거라고.”

“일주일? 그러면 아무리 길게 잡아도 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거잖아? 설마… 후후후, 테라 양, 농담이 너무 심하군. 후후후… 내 심장이 그리 건강하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놀리고 싶은가?”

빙글거리던 젠킨스의 얼굴에서 점차 웃음기가 사라진다. 테라는 농담을 하는 게 아니었다. 순식간에 흘러나온 식은땀을 쓸어내리며 젠킨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야석의 의자들마다 좌절한 사람들이 주저앉아서 두려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일주일 만에 전부 이동을 한다고? 유람선을 몇 대나 보유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미 명령은 통보되었고, 그들이 아무리 간절하게 원한다고 해도 8일 이후부터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 다른 수용자들과 마찬가지로 젠킨스도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 테라 양. 귀하의 의견이 어떤지 내가 물어봐도 되겠나?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인지 말이야.”

젠킨스의 질문을 받은 테라는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잘… 모르겠어요. 그저 지금은 너무 혼란스러워서… 대체 어디로 가게 되는 건지…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무작정 끌려가야 한다는 게 너무 부당하게 느껴져요. 물론 저는 그저 보호 받는 신분이니까 지시를 따라야겠지만요. 불안하네요.”

“이런… 불쌍하기도 하지. 괜찮아, 괜찮아……. 테라 양, 그렇게 괴로워하지 마. 함께 JL로 가면 된다니까? 아직 8일이나 여유가 있다고. 그사이에 분명히 새 좌표 메시지를 매단 드론이 등장할 거야. 그리고 논리적으로 봐도 이번에는 이 근방이 포함될 수밖에 없어.”

젠킨스는 어떻게든 테라를 꾀어 붙잡아두기 위해 애를 썼다. 갑자기 그녀가 선로 쪽으로 이동하겠다고 나서든가 하면 큰일이다.

무엇보다도 안전하지가 않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예 만나지 않았다면 모를까, 기적처럼 알게 된 널 키드를 이렇게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새로 부메랑이 설치될 위치에 이 근방이 포함될 것이라는 계산만큼은 거짓말이 아니다.

문제는 그게 언제 설치되느냐 하는 것이겠지만… 8일 정도라면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

“후우~ 당혹스럽네요. 여기에서 머물 수 없게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테라는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들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젠킨스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재빨리 통통한 두 손을 내저었다.

“이것 봐, 테라 양. 그렇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 마, 제발 부탁이야.”

그의 과장된 몸짓과 표정을 보며 테라가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뭐라고 할지 모르시잖아요.”

“아니, 알아. 알겠어! 분명히 이렇게 말하려고 했을 테지! ‘젠킨스 씨, 부디 꼭 백신을 만드세요. 저는 JL로 가지 않아요. 군인들의 주변에 머무르는 게 가장 안전하니까요’ 다 알아!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할 때마다 하도 많이 거절을 당하다 보니 이제는 외울 수도 있을 지경이야!”

젠킨스는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말이지, 그래도 나는 귀하를 포기할 수가 없다네, 테라 양. 마지막까지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마음뿐이야! 이 이상한 강제 이동은 너무나 허술해! 안전해 보이지가 않는다고! 나는 테라 양이 그 불완전한 계획의 희생자가 되는 걸 원치 않아.”

“저도 위험한 건 무서워요. 하지만 여기에는 어차피 더 이상 머물 수 없는걸요.”

“영원히 머물라고 하는 게 아니야! 다만 일주일! 일주일만 더 생각을 해봐 줘! 마지막 날까지 여기에서 함께 있어달라고 애원하지는 않을게. 하루 전날까지 고민을 해봐도 역시 떠나야겠다 싶으면 그때 가라고. 어느 날 갑자기 JL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잖아, 응? 이렇게 애원할게!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지만, 돌아오는 건 정말 힘들다는 걸 알잖아?”

젠킨스는 두 손을 꽉 마주 잡고 살찐 다람쥐처럼 흔들어 댔다. 테라는 고개를 저었다.

“이해가 안 되네요. 젠킨스 씨, 도대체 제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세요?”

“소중한 사람이지.”

젠킨스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여유 따위 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젠킨스는 자신의 왼팔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만약 신이 거래를 제안한다면, 내 이 팔… 이까짓 것 하나쯤 없어도 괜찮아. 테라 양과 함께 JL로 갈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 두 다리도 내줄 수 있어.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해! JL의 의수와 의족으로 대체하면 되니까! 테라 양은 지금 내게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존재야! 그런 존재를 다시 못 보게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미쳐 버릴 것 같아!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 한 말들은 결코 거짓이 아니야. 뭘 걸면 믿어주겠어?”

“젠킨스 씨… 좀 진정하세요.”

테라는 젠킨스의 흥분을 가라앉히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미친 것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의 팔다리를 두드리는 금발의 외국인.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고도 넘친다.

“나를 진정시키려면 귀하가 약속을 해줘. 그게 유일한 길이야.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더 여기에서 머물며 어디로 갈지 고민을 해주겠다고…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응?”

젠킨스는 미친 사람처럼 지껄여 댔다. 테라의 마음을 돌릴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어머니의 영혼도 팔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이 작고 가냘픈 여자는 그만큼 소중하다. 너무도 소중한 실험 대상이고, 백신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재료다.

“그 남자! 그 흉터남자의 일도 생각해 봐! 내가 전에 이야기했었잖아! 그의 외사근은 이제 완전히 손상되었기 때문에 평생을 불편한 채로 살게 될 거라고! 하지만 JL에 가면 완전히 이야기가 달라져. 근육세포를 배양해서 이식해 줄 수 있다고! 그 모든 일들을 해줄 수 있지만, 여기에서 헤어져 버리면 그걸로 끝이잖아! 귀하는 저 사람에게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우리가 또 만나는 일이 있겠냐고? 이 선로 여행이 어디로 가는 건지, 목적지도 모르고 있는데!”

젠킨스는 어린 아이처럼 애원을 해 댄다. 테라는 망설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까짓 며칠을 더 여기 있는다고 해서 크게 손해를 볼 일은 없을 것 같다.

사실 그녀 역시 누구보다도 이 장소에 미련이 많은 사람이었다. 결국 테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젠킨스 씨. 여기에서 며칠 더 지내면서 고민을 해볼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 결정이 그리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아요.”

“고마워! 고마워!”

젠킨스는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쏟아내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바닥으로 향한 그의 눈동자가 빛난다.

체면은 바닥에 떨어져 버렸지만, 급한 대로 시간은 벌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어떤 방법으로 이 보석 덩어리를 곁에 묶어둘 수 있을지 그것만 고민하면 된다.

절대로 그녀가 떠나게 두지 않을 것이다. 테라는 오로지 그의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 그녀 자신에게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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