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손실률 5%(1)
고 하사가 들어서서 문을 잠그는 것을 확인한 강 소위는 절룩거리며 구석으로 돌아가 총을 세워놓고는 벌렁 드러눕는다.
“아야야, 어이구… 고생 많았지? 그래, 우리 쉘터 분위기 어땠어? 뭐가 좀 바뀐 게 느껴져?”
강 소위는 총상 입은 다리를 부여잡고 인상을 쓰며 물었다. 고 하사는 고개를 저으며 땀을 닦아냈다.
“어떠나마나 뭐, 별 변화랄 게 없어요. 밤에 몰래 멀리서 쳐다보는 거라 자세한 거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그냥 예전이랑 똑같은 것 같습니다. 가끔 총소리 나고, 좀비들 우어우어거리고. 여전히 조명도 켜져 있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망한 분위기는 아니라는 것 정도예요.”
“젠장!”
강 소위는 눈살을 찌푸리며 탄식한다.
“뭔가 더럽게 억울한 기분이네. 그 조그만 조직에서 장교, 부사관이 넷이나 한꺼번에 빠져나갔는데 달라진 게 없다니… 그럼 우리는 없어도 되는 존재인 거냐, 뭐냐?”
“뭐, 한편으로는 다행인 거죠. 중대장님이랑 이 원사님 없다고 사병 애들 막 다 죽어 나갔으면 그것도 또 어지간히 속이 뒤집어지는 일 아니겠습니까.”
“수색은 없고? 한동안은 엄청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더구만. 으그그그, 아으, 쑤신다.”
고 하사는 물을 마시면서 도리질을 했다.
“수색하는 기미는 안 보입니다. 병력도 부족하고, 그게 당연하기도 하죠. 고작 두 사람이 개인화기 한 정 가지고 설마 지금까지 살아 있다고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그나저나 다리가 많이 욱신거립니까?”
“후우~ 간지럽다가 아프다가, 아주 죽겠어. 딱 보기에도 심각해 보이잖아.”
강 소위는 붕대로 감은 다리를 슬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달빛에 의존해서 그의 얼굴과 상처를 살피던 고 하사가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다 나았는데, 엄살 부리고 싶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큭! 크크큭! 미친! 다음에 네가 총 맞으면 나도 똑같은 말을 해주마.”
강 소위는 배를 꾹 누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진정시켰다. 진동으로 몸이 울리면 총상 입은 부위 근처의 뼈가 쑤셔온다.
“에헤이, 큰일 날 말씀 하시네. 강 소위님은 저처럼 효율적으로 의료 처치를 못하지 않습니까? 음, 그러고 보니까…….”
능글거리며 대답하던 고 하사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 소위가 물었다.
“뭔데? 왜 그래?”
“아니, 그게… 얼마 전에도 옆구리에 총 맞은 남자 하나 살려냈었던 게 기억나서요. 으음, 어쩌면 제 이 손이 완전 신의 손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수술 한 번 하지 않고 그저 시판되는 약만으로… 제가 이뤄낸 일이지만, 정말 대단하잖습니까.”
“크크큭, 빨간 약 몇 번 발라주고 신의 손 찾고 있네. 끄응~”
강 소위는 땀으로 흠뻑 젖은 군복을 펄럭거리며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역시 고 하사의 실력과 정성을 잘 알고 있다.
이 고온다습한 상황에서 오로지 발로 뛰어 찾은 약품을 가지고 이만큼이나 자신을 회복시켜 주었다. 함께 탈출한 동행이 고 하사가 아니었다면 그는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뛰어난 의무병이라고 해도 먹고 잘 곳이 없으면 제 실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군인과 좀비들에 쫓겨 다니면서 치료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건물은 그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었다.
“근데 여기 살던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갔기에 며칠째 이렇게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걸까요?”
벽에 쌓여 있는 음식물들과 생필품들을 바라보며 고 하사가 말했다. 강 소위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 이렇게 음식을 잔뜩 모아놓고… 이 정도 살림 긁어모았으려면 고생깨나 했을 것 같은데… 정작 주인만 없네. 덕분에 불청객인 우리들만 노 났지, 뭐.”
건물 내부 곳곳에는 분명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살았었다는 증거물들이 보인다.
먹다 남긴 음식이 부패한 상태나, 고린내가 풍기는 양말, 젖어 있는 옷가지… 근 한 달 동안이나 버려져 있던 다른 건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먹을 걸 더 구하러 나갔다가 좀비에게 당해 버린 걸까요? 그런 거라면 너무 불쌍한데…….”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좀 이상한 점이 많잖아. 첫째, 여기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는 거… 요즘 문단속 안 하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리고 핏자국이랑 잔뜩 빠져 있는 긴 머리카락… 실내도 사람 살았던 곳치고는 너무 어지럽혀져 있고… 뭔가 사연이 있어, 여기.”
강 소위는 사무실 바닥의 얼룩을 가리켰다. 엉켜 있는 여자 머리카락은 보기에 영 불길해서 첫날 아예 쓸어버렸다. 뭔가 대단한 난리가 한 번 났다고 하면 딱 맞을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런데 대체 어떤 난리가 나면 이렇게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어지는 건지를 모르겠다. 좀비 세상에서 귀하기 그지없는 음식들을 이렇게 내버려 두고 간다는 것도 이상하고…….
“뭐… 그런 건 됐어. 이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살아 있다면 언젠가 찾아오겠지. 그런 것보다, 함께 도망쳤던 그 여자분은 무슨 흔적도 없어? 지하철역에 가봤을 것 아니야?”
강 소위의 질문에 고 하사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날 헤어진 이후, 임수정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생사도 모르고, 끌려갔는지 어쩐지도 모른다.
워낙 다급한 상황이라 그녀의 지시를 듣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너무 후회가 된다. 그렇게…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다.
“내 다리가 좀만 더 나아지면 같이 찾아보자. 그런 표정 좀 짓지 마. 내가 죄지은 것 같아서 너무 불편해지잖아. 안 그래도 미안해 죽겠구만.”
고 하사의 침울한 얼굴을 보고 있던 강 소위가 애원조로 말했다. 고 하사는 억지로 방긋 웃어 보인다.
“미안해하지 마십쇼. 어떻게든 잘 무마해 보려던 사람이 총까지 맞아놓고, 왜 미안하기까지 해야 합니까? 진짜 개새끼들은 따로 있는데……. 그리고 제가 볼 때 강 소위님 완치되려면 아직 멀고도 멀었습니다. 그러니 안정만 취하세요. 뭐, 사실 그 사격 실력으로는 완치되었다 해도 별 도움이 안 되잖습니까.”
“크흐흐흐, 너 자꾸 웃기지 좀 말아라. 웃을 때마다 다리가 아주 두드려 맞는 것 같다고.”
강 소위는 입술을 꾹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 젠장, 웃고 있는데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시도 때도 없이 후회되는 순간들이 떠오른다.
박 소위가 재소자 작업반장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날, 문 대위 앞에서 그를 감싸주지 말아야 했다. 가희, 그 요망한 여자가 자신의 숙소를 기웃거리던 때에 그 미모에 홀려 바보짓을 할 게 아니라, 뭔가 수상하다는 의심부터 했어야 했다. 그리고… 박 소위 개자식이 이 원사님에게 총을 겨누려 할 때, 그냥 방아쇠를 당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아무도 죽지 않았어도 되고, 고 하사 역시 저렇게 생이별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다리를 절룩이며 고통스러워하는 건 그 자신이 아니라 박 소위였을 텐데.
어리석고 우유부단했다. 사람들의 목숨을 책임진다는 건 그렇게 나약한 마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 너무 분하다.
자신이 제법 약삭빠르다고 생각했던 강 소위였기에 분한 마음은 더 컸다.
“쯧쯧쯧, 또 자책 모드에 들어가셨네. 강 소위님, 잊어버려요. 앞으로 잘하는 게 중요한 거지.”
맞은편에 앉은 고 하사가 강 소위를 달랜다. 강 소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그냥… 그, 앞으로 잘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까 봐 그게 걱정이 돼서 속이 상한 거야.”
“옵니다, 와요. 문 대위님이 복귀하시면 어차피 저놈들 죄다 들통 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체력 회복하면서 기다리다가, 확성기에서 문 대위님 지휘하시는 목소리 들리면, 그때 돌아가면 됩니다.”
고 하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게 믿는 편이 더 좋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은 계속 남아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도대체 잠실에서는 뭔 놈의 회의를 하기에 그 성실한 중대장님이 이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고 있는 거지? 이래도 되는 건가?’
☆ ☆ ☆
그 시각, 한강철교에 파견 나가 작업을 하고 있던 문 대위는 중간보고를 위해 잠시 잠실 쉘터로 복귀해 있었다.
“어이, 커피 좀 타 와라. 설탕 잔뜩 넣어서 찐하게 두 잔. 문 대위, 자네도 마실 거지?”
함께 복귀한 오 중령이 당번병에게 명령하며 문 대위를 바라본다. 문 대위는 고개를 꾸벅했다.
“아, 예. 잘 마시겠습니다.”
“흐아암. 아이구, 피곤해. 이 시간에 보고가 다 웬말이야? 졸려 죽겠구만.”
커피를 받아 든 오 중령은 하품을 하며 눈을 비빈다. 졸지에 서울 탈출 작전의 공사 책임자가 된 그의 체력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공사와 전투 때문에 완전히 방전되어 있었다.
잊어버릴 만하면 한 번씩 밀려오는 좀비 새끼들도 골치 아프지만, 그보다는 꼼꼼하게 계획을 짜고, 부족한 보급 물자를 거기에 맞추는 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더 크다.
물론 대부분의 실무는 문 대위가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오 중령 역시 작업 현장인 용산역 부근으로 나가 있어야 한다. 조금 편해보자고 잠실에서 버티다가 공연히 김 준장의 눈에 띄었다가는 무슨 날벼락을 맞을지 모른다.
“어이구, 이 의자… 푹신푹신하니 좋다. 여기 앉아 있으니까 저절로 눈이 감기네.”
진한 커피로도 졸음을 다 털어내지 못한 오 중령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을 때, 김 준장이 참모들을 거느리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오 중령은 허둥거리며 일어나 경례를 한다.
“어, 어이쿠, 오셨습니까?”
“아, 아, 편하게 쉬어. 앉아. 작업하느라 고생 많았지? 음, 힘들었을 거라고. 푹 자야 하는 거 아는데, 진척이 좀 됐나 궁금해서 불렀어. 그, 뭐… 여기에서 내가 알 길이 없잖아. 또 할 말도 있고.”
김 준장은 의자에 앉으며 지휘봉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며칠 사이 그의 얼굴도 눈에 띌 만큼 야위었다. 퀭해진 눈이며 더 홀쭉해진 볼 때문에 안 그래도 칼날처럼 오똑했던 콧날은 더욱 날카로워 보인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6만의 생명을 끌어안고 간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드는 일이다.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에… 오늘 오후 19시를 기준으로 한강철교 선로 바로 앞에 수용자들을 실어 나르기 위한 선착장을 건설했습니다. 또 둔치에서 선로까지 곧바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부착하는 작업까지 완료된 상태입니다. 임시 철제 계단이 파손될 염려도 있기에 그런 상황에서 대체할 예비용 계단도 제작하고 있습니다.”
오 중령은 문 대위가 준비해 준 보고서를 넘겨가며 오늘 저녁까지의 작업 성과를 읽었다. 언제나처럼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쓸며 유심히 듣고 있던 김 준장이 물었다.
“아니야… 이거,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속도가 좀 느려. 느리다고. 좀비들이 문제인가? 그 근처에는 큰 무리들의 이동 경로 같은 게 있어? 그런 놈들이 작업을 방해하고 그러는 건가? 전투가 잦아?”
“있습니다. 그… 좀비들 때문에 교전이 일어나고 있어서 작업 속도에 약간의 지연은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 문 대위에게 보고 준비를 시켜뒀습니다.”
자신이 잘 모르는 부분을 물어오자, 오 중령은 얼른 문 대위를 내세웠다. 보고 준비를 시켜뒀다는 말은 물론 완전한 거짓이지만, 그래도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실제 전투를 총지휘했고, 워낙 똘똘하니 말도 잘하니까.
“한강철교 부근의 좀비들은 접근 방향으로 분류할 때, 크게 세 그룹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촌동과 마포, 그리고 용산역 방향입니다. 각각의 좀비 그룹들은 규모 오 중반 정도의 크기입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화력으로 완전한 섬멸을 꾀하기는 어렵습니다.”
오 중령의 기대처럼 문 대위는 당황하지 않고 즉석에서 막힘없이 보고를 해 나갔다. 문 대위는 회의실 벽에 걸려 있는 대형 지도 앞으로 이동해서 세 방향의 좀비들이 언제 접근하는지, 얼마나 자주, 또 가까이 오는지 따위를 자세히 설명했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 왜 좀비 섬멸이 어렵다는 거지? 전차포도 발포해도 된다고 했고, 폭파도 허락해 줬구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네. 인원이 부족한가? 아닌데. 지금 1개 대대 병력이 총 차출된 거잖아. 거기에 전차도 몇 대나 가 있고. 응, 몇 대나 가 있잖아.”
보고를 듣고 있던 김 준장이 손을 들어 문 대위를 제지했다. 한참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김 준장은 문 대위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런 식이면 언제부터 민간인들이 이동할 수 있겠어?”
“현 추세라면 사흘 뒤 오후부터 유람선을 이용한 이송이 가능할 것으로…….”
“늦어! 너무 늦는다고! 뭐 하나만 먼저 물어보자. 지금 그 공사를 진행하면서 전투를 병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전사자가 몇이나 나왔어?”
“다행히 아직 사망 인원은 없습니다.”
“전사자가 없다고?”
문 대위의 말을 들은 김 준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이마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바로 이거였구만. 그래, 아무래도 이 점이 걸렸어. 음, 문제가 뭐였는지 알겠다.”
생각을 정리한 김 준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오 중령을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 전투는 누가 지휘하고 있어? 서류상 지휘관 말고 실제로 병력 배치하고 명령을 내리는 게 누구냐고?”
“아… 예, 그게…….”
오 중령은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이 또라이, 지금 뭔가 불만족스러운 모양이다. 왜지?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데 왜 화가 났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혼이 날 각오는 해야 한다.
이럴 때, 자신이 전투를 담당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더 큰 추궁을 당하게 될까, 아니면 문 대위에게 전투를 일임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혼이 날까?
잠시 고민하던 오 중령은 문 대위를 지목했다.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고 공사 작업을 총괄하느라 전투까지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야는 여기 있는 문 대위에게 일임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김 준장은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문 대위 쪽으로 의자를 회전시켰다. 잠시 콧날을 쓰다듬고 있던 김 준장이 문 대위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 지금 이 상황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는 것 아니야? 지금 우리가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문 대위는 당황스러웠다. 여단장이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이유가 뭔지를 전혀 파악할 수가 없다. 문 대위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민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대피시키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지.”
김 준장은 단호하게 머리를 저어 댔다.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피시키는 거, 그거는 이 계획의 목표고… 우리는 전쟁 중인 거야. 좀비 새끼들이랑 전쟁을 하고 있다고. 내 의견에 이의가 있나?”
“없습니다.”
문 대위는 새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 준장은 다시 목소리의 날을 세워 물었다.
“좋아, 우리가 전쟁 상황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는 말이지? 그러면 이번에는 이걸 생각해 봐. 어떤 지휘관이 전장에 대대 병력을 이끌고 갔어. 자기 말로는 계속 전투도 했대. 그런데 이틀이 지나도록 아군 전사자는 제로야. 한 명도 죽지 않았다고. 이 이야기를 들으면 자네는 뭐라고 생각하겠나? 그 지휘관이 엄청나게 유능하고 부하들을 아낀다고 생각하겠나? 그런 지휘관만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겠어?”
거기까지 들었을 때, 문 대위는 김 준장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들었다. 그리고 여단장이 옳다는 것도 동시에 깨달았다. 뒤통수를 두드려 맞은 것 같은 충격이 문 대위의 머릿속을 흔든다.
“아니면 그 지휘관이 전쟁의 승패라는 큰 그림과 무관하게 자기 눈앞의 몇 백 명을 지키는 데에만 급급하다고 생각하겠나? 어느 쪽이야? 그 지휘관이 최선을 다해서 싸운 게 맞나? 정말로 유능한 지휘관이 맞아?”
문 대위는 돌처럼 굳어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최대한 안전에 중점을 두다 보니 오히려 6만이라는 거대한 숫자가 위험에 처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되었다.
대피하는 날짜가 하루하루 늦어질 때마다 이 탈출 계획의 성공 가능성도 뚝뚝 떨어질 수밖에 없다. 김 준장은 호랑이 같은 눈으로 문 대위를 쏘아보며 말을 계속 이었다.
“일단 개전이 되면, 아군 전사자가 영인 채로 마무리될 수는 없어. 그저 누군가 죽어야 하는 상황을 계속 뒤로 미루고 있을 뿐인 거라고. ‘아무도 죽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같은 이야기는 어린 애들이 읽는 동화에서나 가능한 거야. 전쟁에서 지휘관의 목표는 승리여야지, 모든 병사들의 생존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라고. 알겠어?”
“…잘 알아들었습니다.”
문 대위는 고통스럽게 대답했다. 심야에 그들을 불러들인 이유는 단순히 보고를 받기 위한 게 아니었다. 김 준장은 좀처럼 속도를 올리지 못하는 작업에 대해 문책하고 싶었던 것이다.
“뭐… 알아들었다니까 나도 더 말하지는 않겠어. 그냥 이것 하나만 기억해. 이 탈출 계획을 실행하다 보면 누군가는 죽는다. 그리고 그게 몇 십, 몇 백 명 수준에서 그칠 가능성은 없어.”
김 준장은 지휘봉 뒤쪽으로 테이블을 탕, 찍으며 말했다.
“내가 다 안고 가겠다고 했던 건 최대한 살려보겠다는 의미지, 아무도 죽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이 아니야. 손실률을 오 퍼센트라 상정하고 작업을 진행해. 육만 중에 삼천은 죽는다는 걸 각오하라고. 현 상황에서는 그만큼만 돼도 대성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