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가장 뜨거운 날 (6)
“히익!”
계단의 중간을 내려가던 신입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비명이 터진다. 발아래에서 삼식이의 뒤통수가 겨냥되는 것을 목격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유빈도, 태권소녀도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올라가! 올라가!”
뒤돌아선 유빈이 잔뜩 찌푸린 인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며 속삭였다. 일행 중 보안관과 삼식이를 제외한 여섯 명은 곧바로 계단 위로 되돌아 뛰었다.
퉁탕퉁탕, 퉁탕―
계단의 요란한 발소리를 듣고 A조 조장은 고개를 힐끔 위로 돌렸다. 하지만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의 뒤쪽에 서 있던 A조 2호부터 4호까지 세 명의 대원들이 총구를 위로 겨누며 소리쳤다.
“내려와, 이 개새끼들아! 쏜다! 빨리 내려와!”
유빈은 멈추지도 않았고, 뒤돌아 내려가지도 않았다. 고분고분 그런 말을 들을 것 같았으면 애초 카니발이 헬기에게 쫓겼을 때 그 자리에 멈춰 섰어야 한다.
타앙―
샷건이 불을 뿜자 난간과 계단 사이에 무수한 작은 흠집들이 생겨났다. 물론 어디까지나 위협이었지, 맞아 죽으라고 쏜 건 아니었다.
으아~! 신입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용케 중심을 잃지 않고 문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제니도, 임수정도, 태권소녀와 유빈도 건물 내부로 굴러 들어갔다.
“하아아~ 하아아~ 뭐야? 뭐야? 쟤네 왜 여기에 있어? 네 명이 전부 아니었어? 또 있었어?”
태권소녀가 숨을 몰아쉬며 바깥쪽을 내다본다. 영문을 알 수 없기는 유빈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분명히 봤다. 헬기의 아래쪽에 매달린 그물 감옥 같은 데에서 네 명이 내리는 것을…….
그래서 그놈들을 다 해치웠다. 그런데 또 네 명이…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악몽도 아니고…….
“야! 이 개새끼들아! 빨리 안 내려와? 전부 다 쏴 죽여 버리기 전에 빨리 내려오라고!”
유빈의 그림자를 본 3호가 계단 입구에 서서 고함을 지른다. 놈들의 저 경고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조금 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저놈들은 기본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원한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에 놈들이 여기로 올라와서 피투성이가 된 채 기절해 있는 자신들의 동료를 발견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때는 감정이 개입된다. 그리고 자기 동료를 다 때려 눕혀 버린 상대에 대한 두려움도 작용할 것이다.
달아나려면 놈들이 아직 위협사격을 하는 이때 달아나야 한다. 그게 성공할 확률이 몇 배나 높다. 처음 건물에 진입했던 네 놈이 좀비들을 다 쏴 죽여준 덕에 지하철까지 가는 길도 열렸다.
그런데… 어떻게 친구를 놔두고 달아난단 말인가. 보안관과 삼식이를 여기에 두고…….
월―! 월! 컹! 컹!
어느새 한 마리가 늘어 총 네 마리가 된 셰퍼드가 계단 주변에서 시끄럽게 짖어 댄다. A조 조장이 삼식이의 가방을 뒤지는 것을 목격한 유빈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 버렸다.
저 안에 총이 들어 있다. 놈들에게서 빼앗은 총이. 이제 저놈들도 뭔가를 깨닫고 방심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가진 무기라고는 야구 배트 한 자루와 태권소녀뿐인데, 잔뜩 독이 오른 채 총을 앞세우고 다가오는 네 사람과 맹견 네 마리를 모두 제압하고 친구들을 구해내야 한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때, 2층의 외부 계단 근처에서 아우성이 들려왔다.
“A조? A조 왔어? 여기야! 여기! 묶여 있어! 풀어줘!”
태권소녀에게 맞은 놈들이 깨어난 모양이다. A조 조장이 자신의 조원들에게 명령했다.
“다 올라가! 데리고 내려와! 개도 데리고 가!”
“예!”
세 놈이 개와 함께 건물의 뒤편으로 돌아 뛰어간다. 유빈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졌다.
“어? 규영이랑 신입은?”
다시 달아나던 유빈은 그제야 자신의 주변에 태권소녀와 제니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니가 코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으로 계속 뛰어갔어요. 수정이 언니도 같이.”
유빈은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어쩌면 그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모두 다 같이 여기에서 죽어버리는 건 결코 정답이 아니다. 유빈은 두 사람을 이끌고 코너를 돌아 내달렸다.
불안해서 보안관과 삼식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멍하니 보고만 있어서는 실제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도 끌려 내려가서 나란히 총구 앞에 서봐야 이미 잡혀 있는 친구들이 기뻐할 리 없다.
“키야아~ 이 새끼들 봐라? 존나게 발칙하네?”
계단 아래에서는 A조 조장이 삼식이에게서 빼앗은 총기를 뒤쪽으로 밀어놓으며 보안관과 삼식이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웃옷을 벗고 있는 저 근육덩어리 새끼의 몸 여기저기에 피가 잔뜩 튀어 있다. 특히 커다란 두 주먹은 온통 피투성이다. 심상치 않은 놈이다.
“야, 너 보통 괴물이 아닌가 보다? 허허, 징그러운 새끼. 저, 저 피 좀 봐. 행여라도 또 까불 생각 하지 마라. 너 움찔하기만 해도 이 새끼는 뒈지는 거야.”
A조 조장은 보안관을 보고 웃으며 삼식이의 뒤통수를 총구로 탁탁, 두들겼다. 보안관은 자신의 두 주먹을 힐끗 내려다봤다. 조장 놈을 곤죽으로 만들 때, 녀석의 코와 입에서 튄 피다.
‘젠장, 좀 닦고 올걸… 저 새끼들이 방심하고 가까이 달라붙기는 다 글렀군.’
보안관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가 기다렸던 기회는 녀석들이 삼식이와 자신을 포박하기 위해 다가올 순간이었다.
총을 든 채 겨누고만 있지 않으면 세 명까지는 문제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래서야… 이제는 좀 더 상황이 어려워졌다.
한동안 개 짖는 소리가 건물 내부에서 요란하게 울려 댄 뒤, A조 검은 군복 세 놈은 기절했던 B조의 세 놈을 부축해 가며 계단을 내려왔다.
“…는 죽었습니다. 여기가 끊겨 가지고…….”
A조 4호가 조장에게 보고를 한다. A조 조장은 때려죽일 듯한 눈빛으로 보안관을 노려보았다. 놈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다 정해진 모양이다.
물론 보안관은 딱히 억울하지는 않았다. 그가 죽인 게 맞으니까. 그런 것보다 보안관은 유빈이 어떻게 하고 있을지가 걱정스러웠다. 분명 구하려들 텐데, 이 상황에서 그건 쉽지가 않다. 그 녀석마저 여기 잡혀 버리는 꼴을 봐야 한다면… 너무 비참할 것이다.
“근데, 셰퍼드들은 어디에 두고 왔어?”
A조 조장이 묻자 대원들이 건물의 끝 쪽을 가리켰다.
“두 마리는 뒤쪽 계단 앞에 두고, 또 두 마리는 지하철역이랑 이어진 데 지키라고 했어요. 도망칠만한 데가 거기밖에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럴 거 같으면 아예 쫓으라고 하지?”
“저기 1층, 지금 냄새가 장난이 아니에요. 커피 가루 잔뜩 날아다니지… 화장품 진열대가 박살 나서 스킨 냄새가… 어후~ 냄새라도 좀 날아가고 쫓으라고 하려고요.”
A조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보안관에게 얻어터졌던 B조 조장은 수통의 물을 쏟아부어서 얼굴의 피를 닦아내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를 썼다.
“아… 슈밧, 셔 숏 같은 새히…….”
찢어진 눈꺼풀에 물이 들어가자 B조 조장은 가뜩이나 엉망인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리고는 보안관을 노려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앞니가 다 날아간 데다 부러진 코뼈가 부어올라서 발음이 어지간히 뭉개지고, 또 샌다. 그는 A조 조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후우~ 고마어… 신쌰 너한테 큰 신쉐 진다. 하아~ 아 슈밧, 슘 쉬기가 숀나게 힘흐네. 코가 이 모양이라셔.”
“신세는 무슨… 그냥 네가 하도 조용하기에 그게 이상해서 내려줘 보라고 했어. 만날 여자 돌리면서 무슨 짓 하는지 무전으로 중계하던 놈이 오늘은 한 번도 연락이 없으니까 말이야.”
A조 조장은 B조 조장의 어깨를 다독인다. B조 조장은 부러진 왼손가락을 움켜쥐고 인상을 찌푸렸다.
“하아~ 헬리코터 어디쎠? 나… 벼원 가야 돼… 아, 슈바, 쇼나 아후네…….”
“내가 잡은 것들 일단 가져다 놓으라고 했어. 열셋에 여기서 잡은 거 여덟에 우리랑 개까지 다 못 탈 것 같더라고.”
“후우~ 흐래, 샬해쎠… 아으, 내 이빨……. 숀가약도 후여지고… 이 쉽쉐히 때문에!”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부러져 나간 앞니들을 더듬거리던 B조 조장은 분하다는 듯 보안관의 얼굴을 후려쳤다.
보안관은 적당히 대줬다. 슬쩍 피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봐야 놈을 자극하는 것밖에 안 된다. 묶여서 두들겨 맞느니 이렇게 슬쩍 충격을 완화해 가며 맞아주는 편이 훨씬 낫다.
금방 보안관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입술이 터진다. 물론 그래도 얼굴 전체에 피멍이 들고 부어오른 B조 조장 놈이랑은 비교가 안 된다.
“야… 누가 3단봉 숌 힐려수어. 내 허는 위에 쎨어쓰리고 왔나 봐. 하아~ 컥! 하아~”
오른 주먹을 이용해 후려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분이 안 풀리는지, B조 조장은 A조 멤버들에게 손을 벌렸다. A조 조장이 자신의 3단봉을 건네줬다.
“자, 여기… 이걸로 패라. 근데 저 새끼 혼자서 네 명을 작살냈다고? 너희 총도 안 가지고 올라갔어?”
“아니… 저희는 저 새끼가 아니고… 후우~ 어떤 개 같은 년 때문에… 어우, 목이야… 목이 완전히…….”
B조 3호가 뒷목을 주물러 대면서 대답했다. ‘개 같은 년’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잠시 머뭇거리면서 목소리를 줄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창피하다. A조 조장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큭큭큭, 기지배한테 맞았다고? 그거 무슨 신식 농담이냐? 덩치가 존나 큰 년이야?”
“아니에요. 그냥… 쪽 뻗어서 늘씬한 년인데… 겉모습만 보고 방심을 한 틈에… 당했습니다. 어우, 어지간히 맵게 치네요. 으… 아마 태권도 선수인가 봐요. 발차기 하는 폼이…….”
“그래? 그런 나쁜 년이 있어? 잡아서 아주 뒈질 때까지 존나게 괴롭혀 주자. 죽은 사람 복수는 해야 할 것 아니야?”
A조 조장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A조 대원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다들 청담동에서 재미를 실컷 보고 온 터라 여자 욕심은 없었지만, 이번 강간은 적극적으로 동참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니… 가만이쎠 봐. 내 복슈후터 먼저 하쟈. 이 쉬할 쉐키!”
B조 조장은 보안관을 노려보며 3단봉을 휘둘렀다.
빠악―!
허벅지를 맞은 보안관이 비틀거리자 B조 조장은 머리를 노리고 재차 3단봉을 들어 올렸다. 아주 대갈통을 터뜨릴 심산이었다.
턱―
그런데 3단봉이 뒤쪽의 기둥에 부딪친다. B조 조장은 자세를 바꿔봤다. 그래도 각이 나오지 않았다.
“뒤쪽으로 걸어가. 넓은 데로 나가.”
A조 조장이 보안관에게 명령했다. 보안관은 듣지 않았다. 자신을 패려는 놈이 3단봉을 더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도록 물러서 주는 일 따위 해줄까 보냐?
그가 고집을 피우자 A조 조장은 삼식이의 뒷목을 개머리판으로 후려쳤다.
“으윽!”
이미 손이 뒤로 묶여 있던 삼식이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엎어졌다. A조 조장은 삼식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참아. 저 덩치 큰 새끼가 말을 안 들어서 그러는 거니까 나를 원망하지는 말고.”
그러고는 한 번 더 때릴 요량으로 개머리판을 높이 든다.
“그만! 내가 움직인다. 그만 때려!”
보안관은 손을 들어 보이며 뒤로 순순히 물러났다. 넓은 잔디밭 앞에 멈추자 B조 조장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와 3단봉을 들어 올린다.
나머지 놈들도 삼식이를 끌고 천천히 따라와서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
빠악!
테이크 백을 마음껏 하고 휘두르는 풀스윙이 보안관의 어깨를 강타했다. 보안관은 움찔하면서도 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걸로 머리라도 맞았다간 그 순간 게임 끝이다. 요령껏 피해가며 적당히 근육이 많은 곳을 대줘야 한다.
빠악! 빠악!
B조 조장이 몇 대를 더 때렸을 때, 삼식이가 절규하듯 외쳤다.
“그만 좀 때려! 그만!”
“이건 또 왜 나서고 지랄이야!”
A조 조장은 삼식이의 오금을 차서 무릎을 꿇리고, 등짝을 개머리판으로 두들겼다.
큭, 흙먼지를 씹으며 바닥에 엎어진 삼식이가 보안관을 올려다보았다.
‘삼식아, 좀 기다려. 기회가 한 번은 올 거야.’
보안관은 삼식이를 향해 아직 묶이지 않은 자신의 손을 내보이며 눈짓을 했다. 삼식이도 그가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건지 다 알아들었다.
“하아~ 하아~”
계속 3단봉을 휘두르던 B조 조장이 한숨을 내쉬며 잠시 멈췄다. 부러진 코 때문에 숨도 쉬기 어려운데, 매질을 할 때마다 오히려 그 자신의 온몸이 다 부서지는 것 같다. A조 조장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좀 물러나서 쉬엄쉬엄 죽여라. 그동안에 애들 보내서 다른 새끼들도 잡아올 테니까.”
그런 후, A조 조장은 자신의 조원들을 향해 명령했다.
“이 새끼들 잡아와. 새끼들이라고 했지만, 사실 이제 와서는 여덟 명이든 뭐든 그런 건 상관없어. 얘들 때린 그 개년, 그것만 잡아오면 돼. 그년이 비명 지르고 우는 걸 봐야 액땜이 될 것 같으니까. 알았어? 키가 껑충하게 큰 년이라고 했으니까 빨리 잡아와.”
그때, 유빈과 태권소녀, 제니는 1층의 사무실 안에 숨어 있었다. 그들이 달아나려 했을 때, 지하철로 이어진 통로는 이미 개들에게 점령당한 뒤였다.
급한 대로 화장품 전시대를 엎고, 커피를 쏟아부어 일시적으로 개들의 코를 속여보려 했지만, 상황만 놓고 보면 갇힌 셈이다. 이래서야 일찌감치 달아난 신입 일행보다도 오히려 못하게 되었다.
“이 창문… 여기로 도망갈 수 있을까?”
유빈은 사무실의 창문을 열어보며 중얼거렸다. 바닥까지 까마득하게 높아 보인다. 그래도 여기에서는 지하철역의 입구가 보인다. 내려가기만 하면 도망갈 수 있다.
유빈은 두 여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제니도 몸이 가볍고, 태권소녀의 운동신경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조금만 몸을 늘어뜨려 거리를 줄인 뒤 뛰어내리면… 착지가 가능할 것 같았다. 유빈은 제니와 태권소녀에게 말했다.
“내가 나가서 개들이랑 사람 시선을 다 끌게. 강이 보이는 쪽에서 최대한 시간을 보내볼 테니까, 나한테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로 내려가. 내려가서 지하철로 들어가.”
“아, 아니에요. 오빠, 나 이제 떨어져 있기 싫어요. 아까 한 번 숨었던 걸로 충분해요. 죽어도 같이 죽을 거예요.”
제니가 유빈의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태권소녀도 유빈의 제안을 탐탁치 않아 하는 눈치였다. 유빈은 제니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저 새끼들이 바라는 게 우리가 다 같이 죽는 거야. 그렇게 안 되도록 막으면 내가 이기는 거고, 우리 같이 잡히면 그 새끼들이 이기는 거야. 저 새끼들 뜻대로 되는 꼴은 못 보겠어. 제니야, 내가 이기게 해줘. 부탁이야.”
‘잡히면 저 새끼들 뜻대로 되는 꼴을 봐야 한다’는 말을 할 때, 유빈은 태권소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들이 잡히면 유빈과 보안관은 두 사람이 처참하게 짓밟히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한다. 그냥 깨끗하게 죽는 걸로 끝이 나는 게 아니다. 유빈은 설명을 계속했다.
“신호를 정할게. 내가 위층에서 계속 웃어 대면 거기에 놈들이랑 개랑 다 모여 있다는 의미니까 그때 창문으로 뛰어. 너희는 몸이 가벼우니까 신발 끈 같은 걸로 거리를 조금만 줄이면 할 수 있어. 지하철을 따라 계속 쭉 가면 상봉역이 나와. 7호선이잖아.”
말을 마친 유빈은 태권소녀와 제니를 한 번씩 꼭 안아주고 나서 문고리를 살짝 돌렸다. 만류하기 위해 손을 뻗는 제니를 태권소녀가 잡았다.
바깥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다. 유빈은 뒤돌아 고개를 끄덕여 주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컹― 컹― 컹―
지하철 쪽으로 다가가자, 길목을 지키고 있던 셰퍼드 두 마리가 짖어 대며 쫓아온다.
유빈은 뒤돌아 내달렸다. 그가 가진 무기라고는 검은 군복에게서 빼앗은 대검 한 자루뿐인데, 그의 실력으로는 그것만 가지고 저 훈련 받은 개들을 못 이긴다.
반대편을 지키고 있던 개들도 동료 개들의 소리를 듣고 쫓아왔다. 네 마리. 유빈은 얼른 계단을 뛰어올라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덤벼들려는 놈들을 대검을 휘둘러 위협했다.
애초에 그렇게 훈련 받은 때문인지, 개들은 쉽사리 덤벼들지 않고 계속 짖어 대기만 했다. 사람을 몰아놓고 주인인 검은 군복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유빈은 계속 뒷걸음질을 쳐서 애초에 그가 약속했던 것처럼, 한강이 보이는 커다란 전면 창을 등지고 섰다.
잠시 후, 검은 군복 세 놈이 반대쪽에서 올라와 개들과 함께 그를 에워싼다.
아, 젠장……. 유빈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보안관과 삼식이를 패고 있는 놈들도 셋, 이놈들도 셋. 그럼 어딘가에 한 놈이 더 있다는 말이다. 그놈의 위치를 알기 전까지는 신호를 보낼 수가 없다.
“아, 요 존만 한 새끼!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 기어 나왔지? 후후후, 칼 안 버려, 이 새끼야? 아니다. 그런 것보다 그 계집애들 어디 있어? 내 목 걷어찬 년이랑, 나머지 년들 말이야.”
아까 태권소녀의 화려한 돌려차기에 날아갔던 놈이 총을 겨누면서 말했다.
역시… 이놈들은 여자를 원한다. 유빈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 도발을 했다.
“그래, 걔들 예쁘지? 응, 근데 그걸 하면 더 끝내줘. 나는 서비스 많이 받아봤지. 젠장, 그래서 정이 좀 쌓인 줄 알았더니, 이런 상황이 되니까 뒤도 안 보고 도망가 버리네?”
“이 씨발 놈이 다짜고짜 말을 놓고 지랄이야! 확 쏴버릴까 보다. 도망을 쳐? 어디로?”
“어디긴, 우리 숨어 살던 아지트겠지. 제깟 년들이 어디로 가겠어. 제 친구들 있는 데로 가겠지. 다 똑같은 년들이니까.”
여자가 더 있다는 말에 검은 군복들의 얼굴에 흥미가 인다. A조의 2호가 물었다.
“계집애들이 더 있다, 이거지? 그게 어디냐고?”
“내가 그걸 왜 이야기해 주냐? 내가 재미 못 볼 바에야 너도 못 보는 게 나은데. 그년들을 바친다고 나를 살려줄 것도 아니잖아?”
유빈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고 애를 썼다. 한 놈의 위치를 아직 파악 못했다. A조 4호가 갑자기 뛰어들며 3단봉으로 유빈의 손을 후려쳤다.
윽―!
유빈은 대검을 놓치며 비명을 삼켰다. 곧바로 옆차기가 날아든다. 유빈은 비틀거리며 창문 쪽까지 밀려갔다.
‘오리 보트네…….’
그 순간, 유빈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리 보트들이었다. 멀지 않은 선착장에 오리 보트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아직 번화가를 벗어나기 전의 밤이 기억난다. 저걸 타고 무인도까지 간다고 호기롭게 말하던 삼식이의 얼굴… 이제 그런 웃음을 다시는 볼 수 없겠지…….
“말하라고! 이 개새끼야! 기집년들 어디로 갔어?”
두 명의 검은 군복이 유빈을 흔들어 대며 번갈아서 주먹을 날린다. 눈에서 불꽃이 튀고, 입안에 피가 고인다. 옆구리에 무릎이 꽂힐 때면 숨이 턱 막혀온다. 남은 한 놈의 위치를 찾을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 ☆ ☆
진우는 전속력으로 한강을 내달리고 있었다. 속도 때문에 물살 위에서 통통 튀어 오르는 느낌이 처음에는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이제는 짜릿하게까지 느껴진다.
이 속도감! 이 맞바람!
그는 미소를 지으며 핸들을 꽉 잡았다. 다리들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가 뒤로 멀어진다.
휘이익― 올림픽대교.
휘이익― 잠실철교.
그리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또 하나의 다리가 나타났다. 잠실대교다.
물론 진우는 지금까지 그가 어떤 다리들을 지나쳐 왔는지 그 이름 따위 모른다. 그리고 그의 앞에 가로로 펼쳐진 잠실대교의 아래에 수중보가 있어서 배들이 통과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역시 알지 못했다.
우기에 2미터도 안 되는 낙차를 파악하기에는 그가 모는 제트 스키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어! 또!”
수중보의 바로 앞에서야 진우는 거기에 얕은 물이 흐르는 건축물이 숨겨져 있다는 것과 건너편에 낙차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팔당댐의 그 높은 폭포를 날아본 그였기에 두렵지는 않았다.
이까짓 것!
진우는 물살에 튀어 오르는 기세를 살려 제트스키를 기둥 사이로 밀어 넣었다.
텅! 찌지직―
바닥이 뭔가에 긁히는 소리가 났지만, 그래도 제트스키는 낙차와 소용돌이를 넘어서서 힘차게 튕겨져 나갔다. 반면, 고무보트는 보에 부딪치며 또 한 번 심하게 패대기쳐졌다.
“어? 이… 이거 왜 이래?”
보를 지나쳐 얼마를 더 달렸을 때, 제트스키의 엔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쓰로틀을 조정해 보고 핸들을 틀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 젠장… 거기를 그렇게 지나오면 안 되는 거였나? 완전 망가졌나 본데… 물 위에서 불이 나다니 별꼴을 다 보네, 쯧!”
빨리 멈추면 되지만, 문제는 방향 전환이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었다. 몇 번을 시도해 봐도 직진과 아주 미세한 우측 전환밖에 안 된다.
잠실로 가려면 왼쪽으로 틀어야 한다고!
진우는 고무보트를 돌아보았다. 그거라도 타고 가면 좋은데, 저건 이제 바람이 완전히 빠져서 물에 잠기기 직전이다.
결국 진우는 강북 쪽에 제트스키를 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선착장이 있었다.
“그래, 뭐, 오리 보트면 어떠냐. 어차피 멀리 갈 것도 아니고, 강만 건너는 건데…….”
제트스키에서 내린 진우는 일단 개인화기 방수 팩부터 풀어서 K―2를 들고 전술 조끼를 착용했다.
이제 땅에 내려섰으니 또 좀비에 대해서 신경을 써야 한다. 그가 고무보트에서 탄창 가방과 배낭을 꺼내 들었을 때, 삼식이가 서쪽을 보며 낮게 짖었다.
얼―! 얼―!
진우는 삼식이의 옆으로 다가서서 머리를 쓸어주며 물었다.
“왜 그래, 삼식아? 거기 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