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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묵시록 82-08-317화 (317/449)

3장 Jet (3)

그 후로 한참 동안 진우는 제트스키를 샅샅이 뒤져서 꽤 많은 걸 찾아냈다. 앞쪽에 자동차 트렁크 같은 물품 보관 장소가 있고, 이중으로 된 그 아래쪽 구석에 배터리가 고정되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좌석을 들어내면 그 밑에는 엔진이 있고…….

그럼 뭘 하냐고, 젠장! 그중에 어떤 게 망가졌는지를 모르는데!

후우우~ 진우는 성질을 가라앉히기 위해 몇 번이나 크게 숨을 내쉬어야 했다.

마냥 안전하다는 게 확인되기만 해도 그 역시 이렇게 초조해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몇 분 거리에 있는 저 6번 국도 위로 언제 수백의 좀비들이 지나갈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게 그를 불안하게 만든다.

손아귀에 쥐었다고 생각한 자유가 아주 견고하고 복잡한 껍질을 덮어쓰고 있어서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게 화가 났다.

끄으응―

삼식이가 다가와 진우의 팔을 핥는다. 그가 하도 씩씩대고 있으니 불안해졌나 보다.

“아, 괜찮아. 너한테 화난 게 아니야. 그런 표정 하지 마.”

삼식이의 눈을 보고 조금 평정심을 찾은 진우는 자신의 이마를 두드렸다.

“좀 진정해라… 너, 더 험하고 힘든 길도 계속 헤쳐 왔잖아. 다 와서 왜 이렇게 흥분해.”

그래그래… 진우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불과 몇 킬로미터. 여차하면 그냥 내달려서 가도 된다.

지금 이렇게 신경을 쓰고 시간을 보내는 건 좀 더 편안하고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는 작업이다.

“후우~ 좋아. 일단 배터리부터 갈아보자. 사실 그게 제일 수상해. 조금 전에도 시동이 걸리기는 했었어. 엔진이 완전히 돌아가지 않았던 것뿐이지. 배터리 갈아 끼우는 것 정도야, 뭐… 자동차랑 비슷하겠지.”

진우는 혼잣말을 하면서 제트스키의 조종간을 가볍게 두드렸다. 여기에서는 이게 아주 소중한 장사 수단이었을 테니까, 분명히 교체용 배터리와 연료 따위도 구비해 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연장도 갖춰져 있을 테고.

“근데 이거 바꾸는 데 뭐가 필요한 거지? 드라이버인가?”

진우는 앞면의 물품 보관 트레이를 들어내고, 안쪽을 들여다보기 위해 조종간 위로 몸을 기울였다. 그래도 별로 여의치가 않다.

진우는 로프를 당겨 근처에서 떠다니고 있는 고무보트를 앞쪽으로 옮겨왔다.

“읏차!”

로프를 바짝 당겨 쥐고 제트스키에 고정시킨 진우는 고무보트 쪽으로 옮겨갔다. 이제야 좀 보기가 편하다.

“이걸 젖히고 이거를 푸는 건가? 헛갈리려나? 뭐, 바로 옆에 똑같은 모델이 있으니까 정 기억이 안 나면 그걸 풀어보면 되겠지.”

한동안 제트스키의 앞쪽에 고개를 박고 있던 진우는 뭔가 이상해서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자꾸 첨벙거리며 물보라 일으키는 소리가 난다.

“으아앗! 뭐, 뭐야!”

진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좀비가! 좀비가 물속에서 개헤엄을 치며 다가오고 있다. 대체 언제부터 접근하고 있던 건지, 거리도 엄청 가깝다.

“이익!”

진우는 본능처럼 K―2를 잡기 위해 가슴팍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0.1초 만에 깨달았다. 자신의 개인화기는 두 겹으로 입구를 봉해놓은 비닐봉지 안에 꽁꽁 싸두었다는 걸. 구명조끼를 더듬거리던 진우의 손에 권총이 걸렸다.

그롸아아아―

좀비는 고무보트에 한 손을 턱, 걸치면서 포효했다. 놈이 몸을 끌어 올리기 위해 체중을 싣자 보트가 흔들린다.

하필 지금은 맨발이라서 발로 차버린다는 것도 너무 위험하다. 진우는 중심을 잡으면서 서둘러 권총을 꺼내 녀석의 머리를 겨눴다.

타앙― 타앙―

첫 방에 좀비의 미간이 뚫린 것을 보았지만, 진우는 다시 방아쇠를 당겨 한 발을 더 쐈다. 두 방째 탄환은 놈의 뒤통수를 뚫고 나갔다. 보트에 매달렸던 좀비는 맥없이 고개를 늘어뜨리며 보트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하아~ 젠장! 하아~”

물살에 밀려 선착장 쪽으로 흘러가는 좀비의 시체를 노려보며 진우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전혀 몰랐다.

제트스키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도 하지만, 아예 강 쪽으로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한강물을 타고 좀비가 떠내려올 줄이야……

“하긴… 삼척 원전이 무너지던 날에도 바다에서 왔었는데…….”

혹시 떠다니는 좀비가 더 있나 싶어서 진우는 권총을 꽉 쥔 채 주변을 돌아봤다. 폭이 300미터에 이르는 넓고 깊은 강. 이렇게 큰 강이니 뭐가 나온대도 이상할 게 없긴 하다.

하지만 좀비들은 좀… 물속에서 갑자기 뛰쳐나와 발목을 잡고 끌어내리는 좀비라는 건 정말 오싹하다.

“이제 물 쪽에도 신경을 써야겠네……. 이것도 고치고, 물에도 신경 쓰고, 도로 쪽에도 신경 쓰고… 젠장, 해야 할 거 되게 많네.”

햇빛이 반사돼서 반짝거리는 수면을 바라보며 진우는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이 앉아 있는 보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니지… 생각해 보니까 힘들게 제트스키 같은 걸 고치려고 땀 뺄 필요가 뭐가 있어. 여기에 이렇게 훌륭한 보트가 있는데……. 그래, 그냥 노를 저어서 가면 되잖아! 어차피 물길 방향 따라 가면 되는 거 아냐? 별로 멀지도 않은데!”

말을 하다 보니 정말 그럴듯한 발견처럼 여겨졌다. 애초에 6인용 보트, 자신과 삼식이, 그리고 탄창이 든 배낭과 가방, 음식 따위를 모두 싣는다고 해도 충분히 버텨낼 수 있다.

그리고 다행히도 강물은 잠실이 있는 서쪽으로 흐른다. 그러니 그 자신은 그저 가끔 노를 저어서 방향을 조정해 주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그걸 생각 못하고 있었다니!

말이 나온 김에 진우는 얼른 선착장 위로 올라와 직원 숙소를 향해 맨발로 뛰었다. 그리고 보트와 나란히 세워져 있던 노를 집었다. 노는 길이가 짧고 한쪽 끝으로만 물을 저을 수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하는 건가……. 삽질 하는 거랑 정반대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진우는 손잡이와 대를 잡고 팔을 돌려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해본 적 없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제트스키나 이거나 별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이건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훨씬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좋아, 이걸로 한강 주파다! 여기에서 미적거리고 있을 이유가 없어!”

기세 좋게 외친 진우는 노를 쥐고 보트로 돌아왔다. 제트스키에 바투 묶어놨던 로프를 풀고 있을 때, 삼식이가 훌쩍 뛰어 보트 위로 옮겨 탄다.

“그래, 잘했어! 어차피 같이 가야 하니까 연습 때부터 참여해야지! 일단 지금은 한 100미터 정도만 가보자! 삼식아, 떨어지지 않게 꽉 잡아! 나 엄청 빨리 저을 거다!”

삼식이에게 윙크를 해주고 나서 진우는 힘차게 노를 저었다.

첨벙! 첨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이 높이 튄다.

그러나… 상상했던 것과 달리 보트는 힘차게 나아가지 않는다. 물가로 밀리는 물살보다도 추진력이 약해 점점 선착장 쪽으로 밀려갈 뿐이다.

하아암― 삼식이가 크게 하품을 하며 멀리 떨어진 교량들을 돌아본다.

“이게… 왜 이러지? 이렇게 젓는 게 아닌가?”

당황한 진우는 자세도 바꿔보고, 노를 넣는 방향도 좌우로 조정해 가며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자신의 힘이 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노 젓기는 만만치가 않다.

일단 무엇보다도 보트의 크기에 비해 노를 젓는 인원이 너무 부족하다. 보트 바닥이 평평한 점도 스피드를 죽이는 것 같고…….

몇 번이나 물가 쪽으로 밀려나는 바람에 노로 물을 젓는 횟수나, 땅을 밀어내는 횟수나 크게 차이가 없어져 버렸다. 방향 없이 부유하는 보트 위에서 진우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사공이라는 직업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구나.”

한참 땀을 흘리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이제 겨우 물가에 달라붙은 채 20여 미터나 왔을까. 그렇게 팔이 빠져라 노를 휘저었는데, 그 보람도 없이… 게다가 아직 짐은 하나도 싣지 않은 상태인데…….

진우는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노를 저어 잠실까지 보트를 타고 간다는 게 얼마나 허황된 계획인지 절감했다. 죽을 만큼 힘이 들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안전이 너무 취약하다.

이렇게 느릿느릿 움직이다가 물에 떠내려오는 좀비 떼라도 만나거나, 도로를 걷던 좀비들이 물로 뛰어들어서 보트에 구멍이라도 난다면 그때는…….

“제트스키를 고쳐야겠네.”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온 진우는 로프를 묶어 보트를 고정시키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 ☆ ☆

“참, 산책로 상황은 어땠어? 거기 이제 차로 지나갈 만해?”

늦은 점심 식사가 끝나갈 때쯤, 삼식이가 물었다. 보안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어떨지 모르겠네. 아직 물은 고여 있기는 한데, 그래도 전에 비하면 많이 빠진 거라서 한 번 시도해 볼 만은 해 보였어. 아슬아슬하게 지나갈 수 있든지, 아니면 물에 잠기든지. 반반?”

“거길 왜 지나가야 되는데? 어딜 가려고?”

신입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묻는다. 보안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히 일러주기로 했다. 어차피 모두의 앞에서 한 번은 말해야 하는 일이다.

“…잠실.”

“뭐어? 잠실엔 왜?”

신입이 물어본 거지만, 태권소녀와 규영의 시선도 보안관을 향해 쏠린다. 보안관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테라를 만나려고.”

“너 미친 거 아니냐? 테라는 너 아니어도 잘살고 있다는데, 걔 얼굴 한 번 보려고 그 먼 데까지 목숨 걸고 간다고? 이렇게 편한 데를 놔두고?”

신입은 두 팔을 벌려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코스트코를 가리킨다. 보안관은 반박하지 않았다. 사실 별로 틀린 말은 아니다. 좀비 세상에서 이 정도로 안정적인 삶을 누린다는 게 얼마나 꿈같은 이야기인가.

테이블 전체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신입이 씩씩거리는 소리가 가장 크게 울려 대고 있다. 자기 때문에 분란이 생겨나는 것 같아 제니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테라의 생존 소식을 전했던 임수정도 속이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태권소녀가 침묵을 깨며 물었다.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거기에서 계속 있을 거야, 아니면 데리고 나올 거야?”

글쎄? 보안관은 이마를 찌푸리며 되물었다.

“어떻게 하는 게 더 나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네. 여기 있으면 잘 먹고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어서 좋고, 거기에 있으면 죽을 걱정 안 해서 좋을 거고, 장단점이 있으니까… 근데, 그게 중요한 건가?”

훗, 태권소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 말이야… 무슨 결정을 하기 전에 앞뒤도 좀 따져 보고 그래라. 만날 제니 기분만 생각하지 말고. 별로 크지도 않은 뇌의 99퍼센트가 제니로 채워져 있으면 어떻게 하냐?”

“아니, 무슨 제니 기분만 생각했다고 그래? 왜? 너는 잠실 가는 거 반대야? 억지로 권하지는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태권소녀가 자신을 질책한다고 생각하는지 보안관의 언성이 커진다. 태권소녀는 그를 잠시 노려보다가 아예 상대하지 않고 임수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니, 잠실 쉘터라는 데 어때요? 한 번 들어가고 나면 몰래 빠져나오기 힘들까요?”

“글쎄… 빠져나온다는 걸 상상도 안 해봐서… 다들 들어가기 급급한데 누가 거기에서 나오려고 하겠어. 밖에 나오면 언제 좀비에게 죽을지 모르는데. 그래도 굳이 말하라고 하면, 음… 철책이 있고, 경비 보는 군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무슨 교도소처럼 도망치는 사람들 감시하는 건 아니니까.”

“그럼 눈치 보다가 몰래 빠져나오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란 말이죠?”

“그렇다고 생각해. 사실 군인들은 그런 문제에 거의 관심 가질 틈도 없을 거야.”

임수정과 문답을 마친 태권소녀는 보안관을 돌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봤냐? 이런 게 앞뒤 따져 보는 거다, 이 바보야.”

발끈하려는 보안관의 입을 막고, 유빈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혜주, 너는 잠실로 갔다가 테라를 데리고 다시 나오려고 그러는 거야? 되게 의외인데? 왜 그렇게 하려는 건지 좀 듣고 싶어.”

“뭐… 듣기 좋은 소리 하려고 하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런 거 말고 제일 솔직하게 말하자면, 테라가 가진 그… 항체라는 걸 나도 좀 갖고 싶어서.”

태권소녀는 별로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수정에게 속삭여 물었다.

“언니, 언니는 이런 거 공부한 사람이잖아요. 테라가 면역자라면 그 애 피 수혈 받았을 때, 나도 면역이 생기는 거죠? 맞죠?”

“좀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지만, 그 전염 방식이 일반적인 병균이나 바이러스와 같은 식이라면 항체가 있는 혈청을 주사하는 게 효과가 있을 수 있지.”

뭔가 애매한 듯도 했지만, 태권소녀는 일단 자기 주장이 맞는다고 이해하기로 했다. 혈청이 뭔지는 몰라도 면역자인 테라만 확보해서 데리고 나오면 그 정도 사소한 문제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을 거다.

“테라 피를 수혈 받을 거라는 거라고? 뭘로?”

“그거야 당연히 주사기로 뽑아서, 다시 주사기로 넣는 거지! 근처 병원 아무 데나 가도 주사기 정도는 잔뜩 널려 있을 건데, 그런 거는 걱정거리도 아니야.”

보안관의 바보 같은 질문에 태권소녀는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피를 내놔라!’라니… 너무 솔직한 그녀의 대답에 유빈과 제니는 잠시 멍해졌다. 그런 낌새를 눈치챈 태권소녀가 제니에게 물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무리한 걸 요구하는 거 아니잖아? 이쪽은 목숨 걸고 먼 길을 가는 거란 말이야. 그 정도 보상을 바라는 게 뭐가 나빠. 제니야, 대답해 봐. 네가 지금 테라 입장인데 만약에 누가 너한테 와서 테라를 만나게 해줄 테니까 피를 좀 나눠 줘, 라고 하면 싫다고 하겠어? 나는 그 정도 안 아까울 것 같은데… 죽지 않을 정도라면 다 주겠어. 내말이 맞지?”

“…맞아요.”

기에 눌린 제니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태권소녀는 테이블 주위에 앉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속물처럼 들리겠지만, 항체 안 필요한 사람 있어? 보안관! 너만 해도 어제 까딱했으면 죽을 뻔했어. 그것도 제니까지 함께 위험했었지. 나? 삼식이? 오늘 우리 둘 다 좀비 이빨이랑 요 정도 차이로 비껴갔고. 싸움으로 하면 내가 분명히 이기는데, 좀비한테는 살짝 물리기만 해도 그냥 지는 거잖아. 끝이란 말이야. 그런 거 너무 허무하고 또 억울하다고. 지금까지 이렇게 힘들게 싸우고 버텨서 기껏 살아남았는데.”

아무도 태권소녀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너무나 동감이 되는 말이었다. 좀비 이빨에 잠깐 물렸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친구를 잃어야 하는 사람도 다 억울하다.

만약 테라의 피로 그런 악몽을 지울 수만 있다면, 그러면 더 이상 매일 밤을 불안에 떨며 보내지 않아도 된다.

“테라 피가 필요하다는 건 나도 알겠어. 근데…….”

유빈이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너는 왜 꼭 걔를 데리고 도망 나오겠다고 하는 거야? 그러려면 또 한참을 고생해야지 여기까지 올 수 있는데… 그냥 거기에서 지내면서 몰래 피를 주고받는 수도 있잖아. 그러는 편이 훨씬 더 안전할 것 같은데?”

“그건 안 돼.”

태권소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걔를 데리고 도망쳐 주는 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의리야. 너 한 번 생각해 봐. 네가 높은 사람이야. 힘이 있어. 그런데 어느 날 테라가 면역자라는 걸 알게 됐어. 그러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아… 쟤는 인류의 희망이구나. 쟤 건강을 아껴가며 연구를 진행해서 모두를 살리고 우리는 걔한테 항상 감사하자’ 그럴 것 같아? 아니! 아닐걸? 당연히 아무한테도 안 알려주고 그냥 자기가 독차지할 거야. 그래서 애는 죽든 말든 피를 잔뜩 뽑아 가지고 자기도 맞고, 자기 가족, 친구, 돈 많이 내는 놈들한테 나눠 주겠지.”

“에이, 설마! 인간이 어떻게 그러냐? 나도 사람들 안 믿지만, 그건 좀 오바다.”

신입조차 어처구니없다는 듯 손사래를 친다.

“인간이 어떻게 그러냐고? 어린애 같은 소리 하지 마! 황금 알을 낳는 거위 배를 갈라서 죽인 것도 인간이야!”

태권소녀의 반론이 너무도 유치해서 신입은 눈을 똥그랗게 떴다.

야… 그건 동화잖아.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고. 어린애 같은 건 너잖아……. 신입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들키지 않으면 되잖아. 안 들키면 된다고. 그러면 높으신 분이고 나발이고 테라가 면역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하여간 답답하다니까.”

“아니. 아무리 감춰도 사람 마음은 티가 나게 되어 있어. 내가 이 레깅스만 입고 나오면 네가 아무리 안 보는 척해도 자꾸 네 시선이 향하는 걸 내가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테라도 마찬가지야. 자기 딴에는 철저히 감추려고 하지만 숨기는 거 오래 못 가. 어떤 식으로든 알려지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힘센 놈들에게 들키기 전에 빨리 데려와야 돼. 그게 걔도 살고 우리도 사는 유일한 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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