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나비효과 (1)
같은 시간, 문 대위와 오 중령은 여단장인 김 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 안색이 왜 그래? 어제 못 잤나?”
오 중령이 문 대위에게 속삭여 물었다.
“건대 쉘터로부터 부사관 사망 사고 보고를 받아서 그걸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문 대위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살인 사건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김 중사의 보고에 의하면 증인이 많다지만, 아직 판단을 내리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다.
이 원사님이…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게다가 그 범인이 강 소위와 고 하사라니.
“그래? 언제?”
“그제 밤에서 어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에 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음, 오 중령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사람들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런가 보다 하고 잊어버려. 이것도 엄연한 전쟁인데, 전쟁을 하면서 전사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랄 수는 없지. 자네는 그런 일들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어. 전사자 한 명이 나올 때마다 일일이 속상해서 머리 싸매고 그럴 수는 없잖은가. 건대에서는 지금까지 몇 명이나 전사했지?”
“위탁 받은 수감자 사망 사고가 한 번 있었고, 병력 사망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문 대위의 말을 들은 오 중령은 입을 떡 벌렸다. 매일 좀비들의 습격을 격퇴하고 그사이에는 진지 구축 공사를 하는데 이번이 첫 전사자라고?
이건 뭐 괴물도 아니고… 지휘를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이 가능한 거지?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치부하기에는 다른 쉘터들과 너무 비교가 된다. 그 자신만 해도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잠실의 사상자 수를 헤아리지 않고 있었다. 오 중령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부하 장교를 칭찬했다.
“훌륭해! 첫 사상자라… 그것도 또 나름대로 아프겠구만.”
“부끄럽지만, 마음이 영 편치가 않습니다. 제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자리를 비운 대가를 치르는 건가 하는 기분도 들고요.”
문 대위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떠나기 전에 봤던 이 원사의 얼굴이 자꾸 어른거린다. 그의 대대장이 허락만 해준다면 잠시 건대로 복귀해 무슨 일인지 조사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오 중령은 애초부터 그런 가능성을 차단했다.
“에헤이! 쓸데없는 소리! 몇 만의 생명이 걸려 있는 판국에 뭔 소리야? 지금 자네 임무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다가 여단장님께서 ‘야, 뭐 다른 방안이 없냐?’고 말씀하실 때 척 나서서 청산유수로다가 보고를 올리는 거라고. 그걸 잊지 말아, 알겠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문 대위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 중령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기회가 오더라도 딱 한 번 있는 거야. 그러니까 잘해야 돼. 여단장님 성격 알잖아? 응?”
‘응?’이라는 물음 뒤에 생략된 표현을 문 대위는 알고 있다.
‘또라이.’
김 준장은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지만, 아니, 좋은 사람 편에 훨씬 더 많이 속해 있지만, 가끔 남들과 다른 지점에서 폭발하곤 한다. 그리고 일단 성질이 나면 그 고집을 꺾을 수도 없다.
그 대단한 고집과 강단의 결과물이 바로 이 잠실 쉘터와 수만의 생존자들이다. 굳이 말하자면, ‘착한 또라이’랄까.
“야, 너희들 기다리고 있었구나. 오래 기다렸겠다. 쉬어, 편히 쉬어. 더운 데 힘들었지? 요새 날씨가 무지하게 덥다고. 올해는 좀 유난스러워. 근 몇 년은 그렇게 더운지 모르고 지나갔었는데… 응, 올해는 덥다고.”
잠시 후, 김 준장이 참모들과 함께 방문을 나선다. 문 대위를 비롯한 장교들이 일제히 경례하자 바짝 마른 김 준장은 손을 내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의 크기로 비슷한 말을 쉼 없이 반복해서 떠든다. 얼핏 들으면 살짝 돈 사람의 넋두리 같지만, 그게 그의 말버릇이다.
“헬기 왔나? 태양 그룹 헬기, 지금쯤 온다고 했었는데.”
김 준장이 물었다.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 장교 하나가 나서서 대답했다.
“네. 조금 전 외부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여단장님께서 이렇게 직접 환송하지 않으셔도…….”
“아니지, 그게 아니야. 지금까지 여기 민간인들 다 내가 책임지고 보호하고 있었던 거잖아. 근데 오늘부로 옮겨 가는 거라고. 그러니까 내가 얼굴을 내미는 게 맞지. 건강하게 잘 지내시라 인사 정도는 하는 게 맞잖아. 그게 보급만 제대로 됐어도 이렇게 외부로 분산 수용하지는 않았을 건데. 하~ 미친 새끼들, 뭐한다고 편 가르기 하고…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 그 지랄하느라 보급이 안 오니까 이게 뭐야… 어쨌든 그래. 내가 인사 정도는 하는 게 경우에 맞아. 그렇지, 오 중령?”
김 준장은 오 중령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오 중령은 깍듯하게 대답을 했다. 음~ 김 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날카로운 콧날을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뭔가 고민이 있으면 항상 저 버릇을 하며 혼자 넋두리를 한다.
“쯧, 남부 지방이니까 여기보다는 낫겠지? 음, 그래. 아무래도 서울보다는 나을 거라고. 그래도 거기는 시스템이 좀 유지돼서 돌아가는 중이라니까 지내기가 거기가 더 안전할 거야. 남부 지방… 거기가 진짜 안전하기는 한가? 내가 직접 가보면 확실할 텐데, 그럴 여건은 안 되고……. 응, 여건이 안 돼. 뭐, 대기업이 그런 걸로 거짓말하지는 않겠지. 거기서 공장도 돌리고 다 하니까. 여섯 군데인가로 분산 수용을 한다고 하더라고. 여섯 군데가… 어디 어디더라? 일단 부산이 있고… 거제가 있고, 부산, 에… 포항하고, 부산이랑…….”
야구장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에 김 준장은 계속 콧날을 쓰다듬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대체 부산을 몇 번이나 더 읊으려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부하 장교들은 다들 가만히 듣고 있었다. 별것 아닌 일을 지적했다가 공연히 성질나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
☆ ☆ ☆
“으으으~ 어이구.”
의무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는 동안에 이미 민구의 귀는 신음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민구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언제나 그랬듯이 의무실 안에서는 수많은 젊은 군인들이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다.
울부짖고, 앓고,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갈망한다. 비어 있는 침대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여전히 붐빈다. 후끈거리는 열기와 알코올 냄새, 그리고 피 묻은 시트…….
여기는 잠실 쉘터 전체에서 죽음이 가장 가까운 곳이다.
민구는 입구에 가만히 서서 의사나 의무병을 기다렸다. 잠시 후, 지친 기색이 역력한 의사가 다가와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선다. 밤톨과 함께 여기를 찾았던 첫날, 걸을 수 있으면 입원이 안 된다고 말했던 그 의사다.
“이거 받으러 왔습니다.”
그가 용건을 물어보기도 전에 민구는 다 쓴 붕대 심과 소독약 통을 내놓았다. 의사가 소독약 통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린다.
무슨 환자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당연하다. 저렇게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민구는 말없이 지퍼를 내리고 옆구리의 총상을 내보였다. 이렇게 설명해 주는 편이 훨씬 빠르다. 의사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인다.
“음, 기억난다. 전에 그 양반이시구만. 근데 왜 붕대만 달라고 했어요? 진통제는? 그것도 다 떨어졌을 텐데.”
“진통제는 안 먹습니다. 어지러워서.”
“허!”
의사는 가벼운 탄성을 지르고 다시 민구의 상처를 살폈다. 꽤 아물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지독한 부상이다.
살덩어리가 날아가고 그걸 또 칼로 지졌다면서 약 없이 버틴다고?
“독한 양반이네. 그럼 여기는 어때요? 전에 비해서 좀 낫습니까?”
의사는 금이 간 민구의 갈비뼈 주변을 살짝 누른다. 까맣게 들어 있던 멍도 꽤나 풀렸다. 민구는 별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그냥 결리는 느낌뿐이다. 누군가 작정을 하고 후려치는 것만 아니라면, 갈비뼈의 고통 때문에 움직이지 못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물론 완전히 붙으려면 아직도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앞으로도 운동 꾸준히 하세요.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시고.”
붕대와 소독약을 건네주며 의사가 말했다. 민구는 그러겠다고 대답한 뒤 의무실을 나섰다. 저 안에서 어린 병사들의 신음을 듣고 있으면… 괴롭다.
“우습구나. 평생 남 비명 지르게 하는 재주로 먹고 살았던 주제에…….”
민구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7월 14일에 저질렀던 일의 여파는 너무도 크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실감이 되면서 그의 가슴속을 묵직하게 만든다.
의무실을 나와 자신의 돗자리가 깔린 곳까지 야구장을 한 바퀴 빙 돌던 민구는 한 무더기의 인파와 만났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들뜬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다. 행렬의 맨 앞에서는 깔끔한 남색 양복을 입은 젊은 남녀가 손을 흔들면서 지시를 하고 있었다.
“자! 여기 좀 보실게요! 이제부터 두 줄로 서주세요! 조금만 협조해 주시면 더 편안하고 안전하게 이동하실 수 있으세요!”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줄을 만든다. 민구는 그들과 부딪치고 싶지 않아 벽에 기대어 섰다. 아직은 팔꿈치만 세게 스쳐도 숨이 턱턱 막힌다.
‘뭐지?’
민구는 낯선 남색 양복들을 빤히 쳐다봤다. 쉘터 수용자들의 더러운 트레이닝복들 사이에서 그들의 깔끔한 양복은 단연 돋보였다.
“줄 다 서셨나요? 거기 어머니, 세 분이 서 계시네요. 뒤로 좀 가 주세요. 네에~ 감사합니다. 여러분! 한 번 더 안내해 드릴게요! 지금 야구장 밖으로 나가실 건데요, 나가시면 저희 헬리콥터가 대기하고 있으실 거예요. 그러면 그걸 타시고 인천까지 가셨다가 거기에서 대형 여객선으로 모실 거예요. 총 여행 시간은 여섯 시간 정도가 소요되실 거예요.”
남색 양복을 입은 여자가 떠들어 댄다. 말본새가 딱 사기꾼 약장수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웃으며 환호한다. 다들 잠실에서의 생활이 어지간히 지겨워져서 뭔가 새로운 자극을 원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손에 꼭 쥐어진 팸플릿에는 제법 그럴듯한 조립식주택들이 줄지어 들어선 그림이 그려져 있다. 북적거리고, 덥고, 사생활이 도무지 없는 이곳을 떠나 훨씬 더 나은 곳으로 간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헬리콥터래. 나 한 번도 타본 적 없는데…….”
“그러게. 나도 마찬가지야. 후후후, 아들, 너도 좋지?”
중간에 선 여자들이 들뜬 목소리로 대화를 나눈다. 꺅꺅꺅, 귀에 익은 아기 목소리도 한몫 거들었다. 민구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한다.
‘저건… 그때의 그 보따리 같은 놈이군.’
테라의 심부름으로 주스를 가져다줬던 꼬마다. 녀석의 엄마는 테라가 이별 선물로 준 게 분명한, 커다란 과자 봉지를 안고 있다.
“쥬쯔! 쥬쯔! 흐으~”
민구를 알아본 꼬마가 아는 체를 하며 몸을 흔든다.
‘그런가. 이 녀석도 어디론가 옮겨 가는구나…….’
민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애를 데리고 있으니까 더 나은 환경을 찾고 싶기도 할 거다.
잠시 후, 야구장 외부에서 건장한 남자들이 넷 들어왔다. 민구의 눈이 커진다. 본 적이 있는 유니폼이다. 온통 검은색 군복과 장비로 깔맞춤을 해서 얼핏 보면 군인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복장.
예전에 그가 병원 옥상에서 만났던 놈들과 한패다. 구조대랍시고 사람들을 데려가던 생양아치 새끼들.
‘이 새끼들이 여길 왜 기웃거리지?’
민구는 검은 군복들을 노려봤다. 남색 양복들이 검은 군복들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주고받는다.
저 개새끼들, 한패였나……. 그럼 이 요란한 짓들이 다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민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옥상에서 총을 맞고 죽어가던 놈이 숨을 헐떡거리며 털어놓았던 이야기를 그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구조 같은 게 아니에요…….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좀비 밥으로 줍니다. 좀비 예방약을 만들기 위한 실험이라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태양 그룹 같은 양아치들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 생각했었다. 철거를 할 때도 용역으로 투입된 만배파보다 그놈들이 더 악질이었다.
‘그럼 이 사람들은…….’
민구는 두 줄로 서서 해맑게 웃으며 남색 양복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봤다. 이 사람들은 죽으러 가기 위해서 이렇게 길게 줄을 서고 있는 셈이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일인가.
“아찌! 아찌! 쥬쯔!”
그때, 그 꼬마가 민구를 불렀다. 녀석은 제가 먹던 주스 팩을 흔들며 헤, 하고 웃는다. 녀석의 볼과 작은 입술을 홀린 듯 바라보던 민구는 아이 엄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들뜬 표정으로 옆의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옆의 여자 역시 아이를 데리고 있다.
둘 다 별 대단할 것도 없는 평범한 여자들이다. 그 평범한 여자들이 저렇게 작고 약한 자식들을 지금까지 용케 지켜내 왔다. 그런데 지금 그녀들이 자식과 함께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려하고 있다. 얄팍한 거짓말에 속아서…….
“아… 젠장.”
민구는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의 안위와 무관한 타인의 일에 끼어드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다. 어지간해서는 잔소리 같은 것도 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남이니까 정 성질에 거슬리면 두드려 패는 편이 차라리 편하다.
하지만… 테라 때문에 저 꼬마 놈과 인연이 생겨 버렸다. 한 번 정도는 위험하다고 말해줘야 할 그놈의 의리가…….
“후우~”
줄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며 민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이렇게 나설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닌데… 그 바짝 마른 계집애랑 얽히면 꼭 이렇게 자신답지 않은 짓을 하게 된다.
“아, 뭐야? 왜 밀어요? 사람 서 있잖아요!”
민구가 줄을 밀치며 앞으로 나가자 사람들이 투덜거린다. 민구는 신경 쓰지 않고 전진했다.
“지나갑시다!”
처음엔 불만스런 표정으로 돌아보던 사람들도 그의 얼굴을 보고나서는 순순히 길을 터줬다. 저 커다란 흉터와 사나운 눈빛, 별로 시비를 벌이고 싶지 않은 인간이다.
행렬의 중간에 도착한 민구는 아이 엄마의 손을 턱 잡았다. 여자는 기겁을 한다.
“헉! 왜 이러세요?”
“가지 마쇼. 이놈들 말한 거 다 거짓말이야. 가면 죽는 거요.”
“네에? 뭐야? 이 사람, 왜 이래? 좀 놔줘요!”
여자는 엉덩이를 뒤로 빼고 사정을 한다. 일행들이 물었다.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아니, 몰라…….”
그러자 여자들이 한목소리로 놔 주라고 소리를 질러 댄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구는 꼬마 엄마의 눈만 똑바로 보면서 다시 한 번 설득했다.
“따라가면 죽는다고. 생각해 봐요. 저것들이 왜 당신들을 데려다가 공짜로 호의호식시키겠소? 이전에는 모든 걸 돈 받고 팔았었는데 갑자기 천사가 되었나? 그럴 리가 없잖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수상한 소리라는 걸 알 텐데.”
꼬마 엄마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여전히 두려움에 빠져 있지만, 그래도 뭔가 의심할 여지가 있다고는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주변의 여자들 중 하나가 민구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나 이 사람 알아! 매일 비틀거리면서 야구장 안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사람이야! 끝까지 걸어갔다가 벽 치고 돌아오고, 또 이쪽 벽 치고 돌고 그러더라고.”
“맞아, 나도 봤던 거 같아……. 정상이 아니었구나. 살짝 돌았나 보다.”
여자들은 순식간에 민구를 미친놈으로 만들어 버렸다. 민구는 난감해졌다. 이래서야 말발이 먹혀들 리가 없다. 양복 입은 대기업 직원과 트레이닝복을 입은 미친놈, 둘 중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할지는 빤한 일이다.
‘젠장, 이래서 수트를 입고 다녀야 하는 건데…….’
민구가 혀를 차고 있을 때, 남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가왔다. 그의 곁에는 검은 군복 하나가 바짝 붙어 있다.
“선생님, 줄을 서셔야 해요. 안 그러시면 같이 못 가십니다.”
“개수작 그만하고 꺼져! 이 사람들 안 가!”
민구는 놈을 밀어냈다. 허! 남색 양복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민구를 되밀치려 든다.
“이 아저씨 이상한 분이네… 아야! 아으윽!.”
공격을 피한 민구는 놈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뒤로 꺾었다.
“실험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네 몸뚱이부터 쓰면 되잖아. 애꿎은 사람들 끌어들이지 말고.”
“뭔 소리야! 이 미친 새끼가! 아! 아야야!”
‘실험’이라는 말에 발끈하고 본색을 드러내던 남색 양복이 비명을 지른다. 민구는 놈의 머리카락을 쥐고 흔들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싸움이 일어나자 주변의 사람들은 소란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손이 자유로워진 꼬마 엄마도 아이를 꼭 껴안고 사람들 틈으로 숨어버렸다. 민구는 그녀를 따라가며 소리쳤다.
“이 새끼들이 당신들을 왜 데려가려는지 압니까? 괴물들 밥으로 던져 주고 실험을 한단 말이오! 약을 만들려고!”
“좀 닥쳐! 이 미친 새끼야! 어디서 정신 나간 소리를!”
검은 군복이 달려든다. 민구는 손바닥으로 녀석의 턱을 올려치고, 곧바로 팔를 돌려 사타구니를 후려갈겼다. 검은 군복은 거품을 물고 바닥에 쓰러졌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 정도의 힘을 쓰는 것만으로도 민구 역시 옆구리가 욱신거린다.
“이 미친 새끼가!”
남아 있는 검은 군복들 중 둘이 곤봉을 빼 들려 하자, 가운데에 서 있던 놈이 둘을 제지하며 나섰다.
“너, 너, 너희들은 빠, 빠져. 저, 저건 내가 처, 처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