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Deus Ex Machina (5)
“응?”
진우가 수상한 낌새를 느끼게 된 것은 절벽 위에서 굴러 떨어진 자잘한 돌들이 도로를 때리며 낸 소리 때문이었다.
진우는 조준경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 몸을 날린 시꺼먼 그림자들이 햇살을 가리며 떨어져 내리고 있다.
“으아아아!”
진우는 비명을 지르며 총구를 위로 돌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한 놈의 대갈통이 관통되고, 가슴을 맞은 두 놈은 옆으로 비껴 떨어졌다.
콰작, 아스팔트를 때리며 뼈가 부러지는 기분 나쁜 소리.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위기를 넘겼음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세 마리가 전부가 아니었다. 절벽 위에서는 더 많은 좀비들이 진우를 노리고 뛰어내리고 있다.
옆으로 한 바퀴 굴러 거리를 확보하며 일어난 진우는, 필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면서 모드를 3점사로 바꿨다.
투투둑― 투투투― 투둑― 툭, 투투둑―
정신없이 사방을 훑는 동안 탄창이 바닥난다. 진우는 총을 옆으로 비스듬히 틀어 돌리면서 빈 탄창을 날리고, 왼손으로는 전술 조끼에서 새 탄창을 꺼내 끼워 넣었다.
삼척 원자력발전소에 처음 배치되었을 때만 해도 어색한 동작이었지만, 이제는 거의 조건반사처럼 빠르고 정확하다.
“삼식아! 뒤로 빠져! 일로 와!”
진우는 삼식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곧바로 다시 발포했다. 뼈가 부러진 채 벌떡 일어나려던 좀비들이 가슴과 머리가 꿰뚫리면서 고꾸라진다.
총성이 들리자 삼식이는 언제나처럼 진우의 곁으로 뛰어와 뒤쪽에서 기다려 줬다.
다행이다. 녀석이 좀비들 사이에 껴서 멋모르고 뛰어다니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테니까.
그롸아아아―
좀비들은 발목이 돌아간 상황에서도 맹렬한 기세로 아가리를 쩍 벌린 채 달려든다.
턱, 진우의 등이 중앙분리대에 닿았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좀비들과의 거리는 불과 차선 하나 반. 아주 작은 허점이라도 보였다간 그대로 끝이다.
공연히 분리대를 넘어가 보려고 뜸을 들인대도 결과는 좋지 않을 게 분명하다. 결국 이 자리를 사수하며 모조리 다 쏴 죽이는 수밖에 없다.
투투둑― 투두둑― 투투둑―
진우는 미친 듯이 눈을 돌려가며 움직이는 모든 것에게 총알을 박아 넣었다.
좀비들의 머리가 터지고, 턱이 날아가고, 갈비뼈와 내장이 튀어나온다. 다리뼈가 부러진 좀비들이 고꾸라지면, 그 사이로 멀쩡한 놈들이 비집고 나와 달려들었다.
물론 그런 놈들의 미간에도 진우가 날린 총알이 박히며 선명한 구멍을 뚫어버렸다.
철컥―
진우는 두 번째 탄창을 갈았다. 그사이, 불과 3초도 되지 않는 짧은 화력 공백의 틈에 좀비들은 진우와의 거리를 좁혔다. 순식간에 대여섯 마리의 좀비들이 진우를 에워싸고 접근해 온다.
투투둑― 투투둑― 투투투― 투두둑―
진우는 우에서 좌로 몸을 빙 돌리며 열심히 방아쇠를 당겼다. 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꿰뚫린 좀비들이 바로 발밑에서 코를 박고 쓰러진다.
그롸아아악―
네 발로 기어서 달려온 좀비가 진우의 발목을 낚아채려 한다. 진우는 새 등산화를 들어 녀석의 턱을 냅다 걷어차 버렸다. 그런 후, 뒤로 밀려난 녀석의 머리와 목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놈의 꿈틀거림이 멈췄다는 걸 확인하기도 전에 진우는 곧바로 몸을 틀어 다른 녀석들의 몸과 골반을 향해 난사를 퍼부었다. 그리고 다시 총구를 위로 올려서 뛰어오른 좀비의 머리를 박살 냈다.
으직!
뒤통수에 주먹만 한 구멍이 생긴 좀비가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쓰러졌다. 꺾여 버린 놈의 목 위로 뇌수가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다.
그롸아아아악―
우측의 사각에서 달려드는 기척! 진우는 얼른 다리를 뺐다. 중심을 잃은 몸이 앞으로 기운다. 레슬링 선수가 태클하듯 진우의 하체를 덮치려던 좀비의 머리와 등짝이 눈에 들어온다.
진우는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상황에서도 녀석의 뒤통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투투둑―
좀비의 뒤통수와 목덜미, 등짝에 한 줄로 이어진 총구멍이 뚫렸다. 뇌수와 체액이 튀어나온 좀비의 시체 위로 엎어진 진우는 얼른 몸을 돌려 전방을 겨눴다. 두 마리가 네 발 맹수처럼 달려온다.
투투둑― 투두두―
진우는 여섯 발을 쏘고 나서 다급하게 일어났다.
미끈, 좀비의 체액을 밟은 발이 휘청한다. 덕분에 진우는 좀비 시체의 뒤통수에 얼굴을 박아야 했다.
큭!
오물 때문에 일순 가려진 시야. 진우는 남아 있는 모든 총알을 퍼부어 제압사격을 하며 기어서 뒤로 물러났다. 그가 다시 일어났을 때, 더 이상은 움직이는 좀비가 없었다.
“하아~ 하아~”
그제야 진우는 차오르는 숨을 내쉬며 다시 탄창을 갈았다. 지나간 1분여는 그야말로 제대로 호흡할 겨를도 없이, 그저 방아쇠만 당겼던 시간이다.
전부 다 해서 몇 마리가 떨어져 내린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불과 몇 미터 앞에는 좀비들의 시체가 만든 작은 언덕이 불룩하게 솟아 있다.
“이리 와. 뒤로 가자, 삼식아.”
진우는 삼식이를 이끌고 카트를 세워둔 방향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엉망으로 뒤섞여 있는 좀비 시체 더미를 노려보고 있다.
그르르거리는 울음소리. 아직도 채 죽지 않은 놈들이 있다.
풀썩―
좀비 시체 더미의 한쪽 귀퉁이가 허물어지며 두 놈이 네 발로 기어 나온다.
타탕― 탕―
진우는 놈들이 땅을 내딛기도 전에 머리를 날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도 또 한 마리가 바닥을 기다가 대가리가 터진 뒤에야 움직임을 멈췄다.
“하아~ 이 새끼들…….”
비로소 이 난감한 교전이 끝을 맺었다. 이제 한숨 돌려도 된다.
진우는 어지럽게 널브러진 놈들의 시체를 노려보면서 자신의 얼굴에 묻어 있는 놈들의 체액을 닦아냈다. 진우의 몸짓을 본 삼식이가 몸을 일으키며 그의 얼굴을 혀로 핥아주려 든다.
“아니야, 아니야. 삼식아, 하지 마. 이거 더러워.”
진우는 삼식이의 얼굴을 피했다. 물리지만 않으면 감염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걸 먹도록 놔두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녀석은 나중에 그 혀로 또 자신의 입 주변을 핥아댈 테니까…….
“너… 넌 괜찮아? 응? 다친 데 없어?”
진우는 삼식이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 보며 물었다. 땅에 맞고 튄 도탄이나 부러진 뼛조각에 부상을 당했을까 봐 걱정이 된다. 자신이 다급하게 움직이다가 밟았을 수도 있다.
헤엑, 헤엑, 삼식이는 불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오히려 진우의 몸 이곳저곳에서 냄새를 맡는 중이다. 좀비를 인식하지는 못해도 자신의 친구가 뭔가 커다란 위기를 겪었다는 것만은 알고 있는 눈치다.
다행히 녀석은 멀쩡했고, 진우 자신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 다만, 기껏 갈아입은 새 옷은 완전히 먼지와 땀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이제야 좀 진정이 된 삼식이는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돈다. 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미안해. 좀비 경계는 내 담당인데… 저 멀리 있는 놈들한테 정신이 팔려서 바로 머리 위로 지나가고 있는 걸 몰랐네. 젠장, 저 앞에서 워낙 정신없이 빙글거리면서 잔뜩 돌아다니니까…….”
진우는 방금 전 좀비들이 떨어져 내린 절벽 위쪽을 노려보았다. 저런 데는 대체 뭐한다고 돌아다니고 있었던 거지?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오늘 하루 종일 대체 몇 마리나 좀비를 죽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경기도가 아주 요란하게 환영인사를 해주고 있다.
“아, 맞다.”
진우는 다시 총구를 들어 멀리 그가 걸어가야 할 방향을 살폈다. 700여 미터 전방의 도로는 또다시 행진하는 좀비들로 채워져 있다.
“벌써 한 바퀴 돈 건가?”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분 싸우지도 않았는데 그사이에 놈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건 회전 반경이 엄청나게 좁다는 의미다.
직경 100여 미터 안에서 빙글빙글 돈다는 이야긴가……. 팽이 흉내를 내는 게 아니라면 무의미한 것 같은데… 대체 뭐지?
어쨌든 진우는 좀비 무리들을 계속 주시했다. 놈들이 만약 그렇게 작은 원을 그리면서 제자리 순찰 중이라면, 그로서는 별로 나쁠 게 없다. 그 구역만 피해 나가면 되는 거니까.
잠시 후, 직진하던 좀비들이 방향을 바꿔 회전을 시작했다. 그런데 방향이 조금 전과 달랐다.
“어? 아닌데… 아까는 분명 좌회전이었었는… 아하!”
상황이 파악된 진우는 총구를 돌려 놈들이 향하는 방향을 살폈다. 이번 회전은 우측, 그러니까 조금 전 양평 번화가 쪽으로 들어가던 놈들과 지금 그가 보고 있는 놈들은 서로 다른 좀비 무리들인 것이다.
지금 700미터 전방의 6번 국도에는 적어도 두 개의 커다란 좀비 떼가 순찰 중이다. 한 무리당 아무리 적게 잡아도 500마리 이상은 된다.
물론 죽이려고 마음을 먹으면 다 쏴 죽일 수는 있다. 그런데 그래봐야 아무런 의미 없는 짓일 뿐이다. 어차피 그에게 있어 저곳은 서울까지 이르는 긴 경로 중에 한 지점에 지나지 않으니까.
“으아~ 이 동네 이상하네. 뭐, 이렇게 순찰 도는 좀비들이 많아? 강원도랑은 또 다른 건가… 아니면 거기도 여기랑 별로 다르지 않은데 내가 도심으로 지나오질 않아서 모르고 있었던 건가.”
진우는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인구 밀집 지역에 가까워지니, 생존에 필요한 룰이 좀 달라진다. 지금까지처럼 잘 쏘고, 달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더 시간을 두고 관찰을 해서 이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도태된다.
이제 겨우 경기도 끝자락일 뿐인데… 서울에 가까워지면 얼마나 더 복잡해질까?
카트로 돌아와 물을 마시고 배를 채우면서 진우는 고민에 빠졌다. 옆에서는 삼식이가 아주 맛있게 자기 몫의 밥을 먹어 치우고 있다. 진우는 삼식이의 등을 쓸어줬다.
“삼식아.”
녀석은 곁눈질만 힐끗 하면서 건성으로 얼― 하고 대답한다. 진우는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녀석의 뜨끈뜨끈한 체온과 심장박동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오늘 양평까지 못 가겠어. 저기 통과하려면 규칙을 알아야 하는데… 그 규칙이 너무 복잡해. 몇 킬로미터 안 남았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다, 야.”
그늘에 등을 기대고 앉아 푸념을 하는 진우의 눈앞에 아까 보았던 현수막이 다시 떠오른다.
제트스키…….
어쩌면 수수께끼 같은 좀비들의 이동 규칙을 파악하는 것보다 제트스키 타는 법을 독학으로 익히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애초부터 사람 타라고 만들어놓은 거니까.
“물이라…….”
진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 나쁜 생각 같지도 않다. 어차피 잠실로 가는 길, 한강을 타고 서울로 입성해 그냥 쭈욱― 직진만 하면 되는 거다.
“삼식아, 너 물 좋아해? 나랑 배타고 갈까?”
얼― 삼식이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쾌활하게 대답했다. 말 나온 김에 진우는 지도를 펼쳐 봤다.
“근데 사실은 제트 스키를 타고 못 타고는 오히려 둘째 문제야. 양평 레저가 어디에 붙어 있는 건지도 모르잖아. 저 동네에 현수막이 붙어 있었으니까 근처일 것 같기는 한데, 물가로 가서 훑으며 올라가 보면 찾아지려나? 에… 여기서 한강 쪽으로 내려간다면…….”
진우는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훑었다. 밥을 다 먹은 삼식이도 진지한 표정으로 진우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린다.
현존하는 최강의 대좀비 병기와 그의 네 발 달린 동행이 국도를 따라 여행을 시작한 지 이틀째, 서울까지는 아직 60킬로미터가 남았다.
☆ ☆ ☆
젠킨스는 테라와 함께 오후의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이 시간은 너무도 소중한 기쁨으로 승격되어 있었다.
이국의 미소녀와 나란히 걷는다거나, 그녀가 이따금씩 간식을 보상으로 준다는 1차원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널 키드의 생태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에서 매순간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그녀와 나누는 대화 내용 한마디, 한마디마저도 최상급의 데이터들이다.
널 키드에 대한 데이터는 아무리 수집해도 부족하다. 극한의 확률로 존재하는 그들이 항체를 형성하고 난 뒤 어떤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겪게 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나는 다르지. 위대한 타일러 젠킨스는 매일의 자료를 이 뛰어난 머릿속에 모두 저장해 두고 있단 말이야.’
젠킨스는 우월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허락만 된다면 테라를 투명한 재질로 만들어진 방에 가둬두고, 24시간 내내 곁에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다.
식사, 수면, 생리작용… 살아가는 모든 과정들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기록해 두고 싶다. 인형 같은 외모를 가진 그녀가 유리로 된 방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하다.
“으흐으~!”
자신의 상상에 깊이 도취한 젠킨스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조금 거리를 두고 함께 걷던 테라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돌아본다.
“괜찮으세요, 젠킨스 씨?”
“음? 으응, 괜찮아. 갑자기 좀 오싹해져서 그런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테라 양.”
젠킨스는 본심을 감추며 웃었다. 테라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그녀 특유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아주 살짝 올라간 저 입 꼬리가 묘한 밸런스를 유지시켜 주기 때문에 미소를 짓는 것처럼도 보이고, 걱정을 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테라의 말에 젠킨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응? 뭐가?”
“젠킨스 씨, 요 며칠 동안 걷는 게 많이 늘었어요. 숨차 하는 것도 한결 덜하고, 속도도 올라갔고요. 이런 추세로 조금만 더 운동을 하시면 급성 심장마비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요.”
아… 그거. 그건 내가 지옥 같은 고통을 이겨내고 경쟁을 하는 과정 속에서 얻은 부수적 효과지…….
젠킨스는 흉터남자와의 레이스를 떠올렸다. 그 망할 자식은 이제 너무 빨라져서 이기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지능지수를 포기하고 야생의 회복력을 선택한 게 분명하다. 멍청한 짐승.
물론 자신이 질 것 같아졌을 때부터 젠킨스는 더 이상 레이스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직도 둘 사이의 전적은 젠킨스의 전승으로 남아 있다.
그러니까 흉터남자가 아무리 죽어라 연습을 해도 자신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다. 자신은 그 레이스에 이제 참여해 줄 생각이 없으니까.
무패의 챔피언. 젠킨스는 또 히죽 웃었다. 무패…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가.
“아, 사람들 정말 관심이 크네요. 여기 정도면 정말 안전하고 편안한 건데도요.”
반대편 내야석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며 테라가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젠킨스도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그래, 저 구역 말이야. 나도 궁금했어. 어제부터 영 혼잡하더군.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이 스타디움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뭔가 들떠 있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테라 양? 장내 스피커로 줄기차게 떠들어 대던 것과 무슨 연관이 있나?”
“저기… 저 깔끔하게 양복 입은 사람들 보이시나요? 만남의 벽 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요.”
테라가 가리킨 곳에는 남색 양복을 입은 일단의 남녀들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정말로 깔끔한 옷차림이어서, 이 쉘터의 수용자들과 한눈에도 구분이 된다.
그들은 옆에 쌓아둔 커다란 박스에서 뭔가를 꺼내 사람들에게 나눠 주며 길게 설명을 하는 중이었다.
“뭘 주는 거지? 먹을 건가? 간식?”
젠킨스가 목을 길게 빼며 물었다. 테라는 고개를 저었다.
“팸플릿이에요. 남부 지방의 민간 수용 시설을 홍보하는 팸플릿. 여기 쉘터가 너무 붐비고 거주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에 태양 그룹에서 분산 수용을 해준다고 하네요. 더 쾌적한 주거 환경에 음식까지 보장한다고… 장내 방송은 그걸 알려주는 거고요.”
“타이양? 민간 기업이라고? 이런 때에?”
젠킨스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 세상에 어떤 자본도 회수가 불투명한 곳에 투자하지 않는다. 그리고 좀비들이 지배하고 있는 지금, 미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예측이 어려워졌다.
그런데 민간 기업이 자신들이 소유한 재화를 사용하겠다고?
웃기시는군…….
젠킨스는 고개를 저었다. 둘 중에 하나다. 뭔가 엄청난 것을 정부로부터 약속 받았거나, 아니면 뭔가 대단히 구린 일을 꾀하고 있거나.
“그런데 테라 양은 왜 가서 설명을 듣지 않는 거지? 쾌적한 주거 환경이 싫은가? 아, 알겠다. 거기로 옮겨가 버리면 이 타일러 젠킨스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테니까?”
젠킨스는 일부러 테라를 떠봤다. 물론 그녀가 정말로 이동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가능한 모든 수를 동원해서 말릴 것이다. 소중한 널 키드를 그렇게 포기할 수는 없다. 그녀는 자신의 것이다.
그녀를 차지하는 대가가 자신의 남은 수명 중 절반이라고 해도 젠킨스는 기꺼이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 테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안 가요. 저는 저 회사 안 좋아해요.”
브라보~
젠킨스는 마음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그녀가 타이양을 싫어하게 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이 또래 소녀들의 마음이란 고양이의 눈보다도 더 변화무쌍한 법이니까.
젠킨스는 저 망할 민간 기업이 언제 유혹의 손짓을 거두고 떠나 버릴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 이주는 언제 시작해서 며칠 동안이나 진행한다는 건지 혹시 알고 있나?”
네, 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오후 늦게부터 1차 이동이 시작될 거래요. 그래서 다들 저렇게 만남의 벽에 자기 행선지를 써 붙이고 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