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303화 (303/449)

6장 Heart(2)

다음 날 아침, 임수정은 코스트코 옥상에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곯아떨어져서 몇 시간 동안 죽은 듯이 자고 났더니 어제보다는 한결 머리가 돌아가는 느낌이다.

대신에 온몸의 근육통은 더 심해져서, 아침에 수저를 올리는 그 간단한 동작을 하면서도 연신 앓는 소리를 내야 했다.

지난 30여 시간은 거짓말처럼 극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살인 목격, 참전, 도주, 그리고 헤어짐… 그다음에 또 새로운 만남, 모험…….

인생을 무료하다고 불평했던 그녀에게 신이 장난을 친 것 같다고 여겨질 만큼 변화무쌍했다.

안타까운 일만큼이나 놀라운 일들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경이롭다고 느꼈던 것은 보안관 일행이 성취해 놓은, 이 안정적인 삶의 수준이었다.

좀비 무리를 합쳐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정한다거나, 소수의 좀비들을 가둬서 다른 좀비들의 출입을 방지한다는 발상도 놀라웠지만, 이 큰 쇼핑몰 안의 좀비들을 모두 처리하고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게 더 대단하다. 그것도 총 한 자루, 중장비 하나 없이…….

절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을 그녀보다 10살 이상 어린 친구들 몇 명의 힘만으로 해냈다.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없다고 한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임수정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코스트코 옥상 위에 앉아 평화로운 거리를 보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실감이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일이다. 군인들의 보호에만 의존해서 아무것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주제에 삶이 지겹다고 느꼈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몸 좀 나아졌어요, 누나?”

옥상 한쪽에서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던 유빈이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건다. 임수정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목례를 했다.

“그냥… 아직은 좀 그래요. 심한 몸살감기 같다고 할까요? 부끄럽지만 어제 제 딴에는 아주 죽을힘을 다한 거거든요.”

임수정은 붕대를 감은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어제 지하철 안을 함께 다니며 임수정은 이 유빈이라는 청년도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 그녀는 이 팀의 생존 비결이 앞장서서 싸움을 도맡아 하는 보안관의 압도적인 힘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며 선로에 쳐뒀던 빨랫줄을 모두 회수하고 돌아오는 유빈의 모습에서, 이들을 지탱한 힘이 단순히 무력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어휴, 말 놓으시라니까요. 한두 살 차이 나는 것도 아닌데, 듣는 사람이 오히려 더 불편해요. 그리고 진통제는 드셨어요?”

“응, 먹었어요. 말은 차차 놓을게… 후후.”

임수정은 쑥스러움을 웃음으로 때웠다.

진통제… 이부프로펜……. 고 하사의 얼굴이 조건반사처럼 떠오른다. 함께했던 인연이 길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극적인 순간을 함께했던 사람.

아마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진통제를 먹을 때마다 약을 전해 주며 수줍게 고백하던 그의 모습이 기억날 것 같다. 부디 잘 살아 있었으면…….

“동료분들 못 구해서 영 그러네요.”

유빈의 말에 임수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신경 써주지 않아도 돼요. 하나도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냥 잘 도망갔다고 믿으려고. 고마워요, 유빈 군.”

임수정은 진심으로 대답했다. 이제 두 번 다시 이 어린 친구들에게 어두운 지하철 선로로 내려가 목숨을 걸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지 않다. 그런 일에 목숨을 걸기에는 그들이 지금까지 이뤄놓은 게 너무 많다.

“잠실 쉘터라는 데는 어떤 곳인가요? 저희도 원래 거기로 가려고 했었는데… 길이 막혀서 도중에 포기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지금 내가 아는 가장 좋은 곳이라고 대답했을 것 같은데, 여기를 보고 나니까 뭐라고 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 그냥 군인들이 지켜주는 야구장 안에서 세끼 밥 먹고, 돗자리 깔고 자고… 그 정도예요. 인구밀도도 높고, 늘 시끄러웠어요. 그냥 안전한 생존이 최고로 내세울 수 있는 자랑일 거야. 하지만 여기처럼 계속 웃음소리가 나지는 않아요. 다들 누군가를 잃었으니까 아무래도 좀 우울하지.”

임수정은 세 개의 풀 주변에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록 며칠째 계속 사용하고 있어서 매일 아침마다 때와 죽은 벌레들을 건져 내야 한다지만, 좀비 세상에서 저런 풀을 갖추고 놀 배짱과 상상력을 잃지 않았다니… 임수정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제니가 손을 흔들고 유빈을 부른다.

“오빠, 수정 언니랑 같이 와요! 그렇게 따로 떨어져 있지 말고요!”

“응, 응. 알았어. 지금 그 이야기 하고 있어.”

건성으로 대답한 유빈은 임수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낯설고 서먹서먹하시겠지만, 금방 가까워질 거예요. 저희도 그랬어요. 워낙에 뭐든 같이해야 하니까 친밀해지지 않으면 이겨내기가 힘들어요.”

“그 말은… 좀 의외네. 나는 유빈 군 일행이 전부다 꽤 오랜 친구들이었을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처음 봤을 때 이야기하는 분위기는 꼭 가족 같았어.”

“에이, 아니에요……. 딱 봐도 뭔가 귀티가 나는 사람들이 있고, 저처럼 빈티가 줄줄 흐르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요.”

유빈의 말을 들은 임수정은 다시 한 번 친구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하긴… 테라를 처음 봤을 때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었어. 얘는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예쁜 거지? 얘랑 나랑 똑같은 인종이라는 게 말이 되나? 뭐, 그런 생각 말이야. 잠실의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지. 그런데 여기 오니까 그런 사람들이 또 있는 거야. 제니 양도 그렇고, 삼식 군도 그렇고… 정말 놀랄 만큼 아름다워. 보안관 군이랑 혜주 양은 스포츠 웨어 모델 같은 몸이고. 그러고 보면 세상이라는 게 참 불공평한 것 같아. 어떤 면에서는 그래서 더 재미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너무 억울하잖아.”

‘우리’라는 말을 하면서 임수정은 유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하… 하하하……. 졸지에 별 볼일 없는 외모로 함께 분류된 유빈은 멋쩍게 웃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인데 왜 타인의 입을 통해 들으면 마음이 아파지는 걸까.

“아참, 내 정신 좀 봐.”

임수정은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며 바지 주머니에서 빨간색 캡슐을 꺼냈다. 고 하사로부터 받았던 D.E.M.이다. 임수정은 D.E.M.을 유빈에게 내밀었다.

“어제 입고 왔던 옷 버리려고 주머니에 들었던 거 정리하는데 이게 나오더라고. 받아요.”

“이게 뭐예요? 처음 보는 건데.”

유빈은 D.E.M.을 손으로 잡고 유심히 살펴봤다. 볼펜 반만 한 크기. 흰 뚜껑이 덮인 빨간색 플라스틱 캡슐 안에 액체가 들어 있다. 이름도 없고, 제조사도 없고, 아무런 정보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

“뭐 봐? 누나랑 같이 오라고 보내놨더니, 너는 계속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있냐?”

“그러게요. 혜주 언니 때도 그렇더니, 가만 보면 오빠는 처음 보는 여자한테만 관심이 있나 봐요.”

어느새 다가온 보안관과 제니가 양쪽에서 유빈의 어깨를 확 끌어안는다. 유빈은 보안관에게 D.E.M.을 넘겼다. 임수정은 쓰는 방법을 몸짓까지 동원해 가며 설명한다.

“그거… 태양 그룹에서 만든 물건이래요. 저도 선물 받은 거긴 한데, 위엣 걸 젖히고 몸에 콱 찌르면 심장이 10분간 멎는다고 했어요. 위급할 때 쓰는 거니까 나보다는 유빈 군 일행에게 더 유용할 것 같아서.”

“이상한 약이 다 있네요?”

D.E.M.을 쥐고 있던 보안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중얼거린다.

“근데 심장이 10분 동안 멎는 약이 뭐에 필요한 거지? 그거, 그냥 가사 상태에 빠지는 거 아니야? 아무 이득이 없잖아.”

“아마 그런 거 아닐까? 왜, 좀비들이 죽은 시체 안 뜯어먹잖아. 그러니까 좀비들에 둘러싸였을 때, 그걸 콱 박는 거야. 그러면 좀비들은 네가 시체인 줄 알고 건드리지 않는다는 거지.”

유빈이 추리를 해주자 보안관이 다시 묻는다.

“그래 봐야 10분이잖아. 10분 뒤에는 어떡해?”

“음, 그사이에 뭔가 다른 변화가 있거나 할 수 있으니까 그거라도 노려보자는 거지. 예를 들어 10분 동안 좀비들이 다른 것에 홀려 멀리 가버린다거나, 아니면 구조대가 도착할 수도 있잖아.”

“아하, 그런 식으로! 음, 상상력이 필요한 쓰임새네. 어쨌든 이거, 누나 건데 굳이 저희한테 주시지 않아도…….”

보안관은 그제야 납득을 하고 임수정을 돌아봤다. 임수정은 확실히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두 손을 내저었다. 고 하사와의 추억은 아직 한 알이 남은 진통제 케이스만으로도 충분히 되새길 수 있다.

“아니요. 기억만 났더라면 어제 이미 줬어야 하는 거였어요. 앞장서서 그 깜깜한 데를 헤치고 나가 싸웠는데.”

“그럼, 보안관 오빠가 가지고 있어요. 대신에 수정 언니는 오빠가 지켜주면 되죠.”

자칫 어색해지려는 상황은 제니가 보안관의 손에서 D.E.M.을 빼앗아 그의 바지 주머니에 쏙 집어넣고 톡톡, 두드리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보안관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

“언니, 이리 와봐요. 같이 샴페인 한잔해요.”

제니가 애교를 부리며 임수정의 팔짱을 끼고 잡아끈다. 엉덩이를 뒤로 뺀 채 끌려가며 임수정은 제니와 유빈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아침부터 샴페인? 그래도 괜찮아?”

“잔소리쟁이가 오늘 오전에는 쉬어도 된댔어요. 사실 어제 좀비들 가둬두는 작업 하느라고 언니 만나기 전까지 계속 일했었거든요. 어차피 앞으로 두어 시간 뒤에 좀비들 이 앞으로 지나갈 동안에는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어야 하니까, 지금 가볍게 한잔해요.”

“잔소리쟁이가 누구야?”

임수정이 묻자 제니가 찡긋 윙크를 하며 유빈을 가리킨다.

“여기 있잖아요. 언니한테는 무슨 잔소리 안 했어요?”

자신이 말해놓고 그게 재미있는지 제니는 한 번 까르르, 웃었다. 테라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라고 임수정은 생각했다. 똑같이 친절하지만, 제니는 훨씬 더 에너제틱하고 장난기가 많다.

“어서 오세요.”

풀의 귀퉁이에 앉아 물속에 발을 담근 채 캔 커피를 마시고 있던 태권소녀가 손을 흔들며 반겨준다. 임수정과 제니는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자요, 언니. 미지근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실 만해요.”

제니는 커다란 플라스틱 컵에 샴페인을 따라 준다. 잔을 입 주변에 가져다 대자 코끝에 약한 기포가 닿으며 포도 향기를 전한다.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건가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테라가 혹시 제 이야기 한 적 있어요?”

건배를 하고 잔이 두 번 정도 비워진 뒤, 제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역시 테라에 관해 대화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임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자주. 잠실에 가면 한쪽 벽에 구조된 사람들이 붙여놓은 메모가 꽉 차 있거든. 거의 매일 거기에 가서 확인을 하곤 했어. 혹시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제니가 왔을지도 모른다고. 엄청 그리워했어.”

“…그리워했다고요? 원망이 아니라?”

제니의 목소리가 떨린다. 임수정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원망을 하겠어? 그냥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했었는데.”

“제가… 테라를 버리고 도망쳤었거든요.”

제니는 고개를 숙인 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를 대신해서 태권소녀가 보충 설명을 해준다.

“테라가 발을 물린 줄 알았대요. 그래서 소속사 사장이 얘만 데리고 도망쳤다고, 그런 이야기예요. 잠시 착각을 하는 바람에 둘이 헤어지게 된 거죠. 이렇게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지……. 그런데 물린 게 아니었으면 얘가 본 그 피는 대체 뭣 때문에 났던 걸까요?”

“발가락 이야기라면… 내가 들은 건 그런 게 아니었는데… 빨간 스포츠카가 밟고 지나갔다고 했어.”

응? 서로의 이야기가 너무 달라서 세 여자의 눈이 커진다. 제니와 임수정은 계속 아닌데…를 번갈아 연발하며 서로가 알고 있는 그날의 사건에 대해 말했다.

비록 자신이 직접 겪은 것은 아니지만 임수정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테라가 몇 번이나 강박적일 만큼 그때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줬기 때문에 잊히기가 더 어려울 정도다.

“듣고 보니까… 제니의 이야기 쪽이 더 맞는 것 같아. 지금 돌이켜보면 테라는 제니와 그 사장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었어. 마치 그날 같이 있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야……. 뭐지? 물린 게 아니라 그냥 다른 부상이었다면 그렇게까지 말을 꾸며냈을 이유가 없는데…….”

그렇게 말을 하던 임수정의 뇌리에 스치는 문구가 있었다. 거짓임이 증명된 사실을 다 제거한 뒤에 남는 가설이 있다면, 아무리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말. 어느 탐정 소설에선가 읽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말이 안 되는 것처럼 여겨져서 아예 논외로 두고 있는 일이란 다름 아닌…….

임수정은 커다래진 눈으로 제니를 보았다.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 같은 기분이다.

“제니가 잘못 봤던 게 아닌가 봐. 이제는 나도 테라가 정말로 물렸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 앞뒤를 맞춰보면 그래야만 말이 돼.”

“예? 하지만 물리면 좀비가 되는 거잖아요. 시몬은 그때 분명히…….”

“그래, 그 어린아이는 좀비였을 거야. 그게 아니라면 어린아이가 무는 힘이 그렇게 강할 리가 없지. 뼈마디가 잘려 나갔으니까. 내 생각에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테라는 물리고 나서도 좀비로 변하지 않았…던 것 같아. 아마 모종의 항체 같은 게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 사실을 숨긴 거지.”

임수정의 말이 끝나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숏 커트 머리를 긁적이던 태권소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좀비에 대해서 항체가 있다는 건 상상도 안 해봤는데… 하여간 만약에 그러면 엄청 좋은 거 아닌가요? 테라, 그 친구는 그런 특별한 일을 왜 굳이 숨긴 거죠?”

“그건…….”

임수정의 기억은 격리실에서 테라와 함께 좀비 여자로부터 위협을 받던 때로 되돌아갔다.

군인들에 의해 사살된 좀비 여자. 그 처형 장면을 고스란히 보았던 테라는 울면서 몇 번이나 자신은 물리지 않았다는 말을 반복했었다.

“…그건 아마 두려움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물렸다고 하면 다들 변하기도 전에 죽이려고 든다는 걸 잘 아니까. 게다가 물린 사람은 일단 구조 대상도 아니고…….”

“너무 불쌍해요. 가뜩이나 겁이 많은 애인데… 혼자서…….”

제니가 한숨을 내쉰다. ‘혼자서’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임수정은 생각했다. 군인들이 계속 일부러 근처로 지나가면서 선물을 주고 주변에 어린 아기들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제니와 비교를 해 본다면 분명히 외로울 것 같기는 하다. 테라와 함께 있는 동안 그녀가 제니처럼 밝고 유쾌하게 웃는 모습을 봤던 기억은 없다.

“좀비 와요!”

망원경으로 감시하고 있던 규영이 신호를 보낸다. 제니가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대고 눈으로 웃는다.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몰라 임수정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자 제니는 또 까르르 웃는다.

“아뇨, 사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요. 제가 언니한테 장난친 거예요. 좀비 구경하러 가실래요?”

제니는 임수정의 손을 잡고 도로가 보이는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이미 와 있던 남자들이 자리를 비켜준다. 잠시 긴장 속에서 기다리고 있자, 좀비 무리의 선두가 도로에 모습을 드러낸다.

빨강, 분홍, 검정, 노랑, 파랑… 온갖 색깔의 페인트를 뒤집어쓴 좀비들이 군데군데 섞여 있다. 건대 쉘터에서는 소문으로만 들어봤던 바로 그 컬러 좀비들이다.

“어머… 우리, 이렇게 보고 있어도 돼?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너무 가까운 거 아냐?”

수천에 이르는 좀비의 규모 때문에 압도된 임수정은 난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숨으며 제니에게 속삭였다. 높은 건물 위라고 하지만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데…….

제니가 곁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목소리로 일러준다.

“일부러 큰 소리를 내거나 불을 피우거나 하지만 않으면 알아보지는 못하는 것 같더라고요. 이쪽에 관심 두지 말라고 저기 길 건너 건물에 좀비들도 몇 마리 가둬놨고요. 아, 또 담배도 얘네 지나가는 동안은 금연.”

그랬던 거구나…….

임수정은 건대에서 난리가 났던 밤들을 돌이켜봤다. 발전기는 계속 돌아가고, 사이렌에 총소리까지 더해져서 계속 좀비들을 도발했던 거나 다름없다.

몇 마리만 근처에 서성여도 다 제거하기 전까지는 비상이 풀리지 않았다. 아무도 좀비들의 행태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 자신까지도.

“항체가 있다는 게 어떤 의미지? 그럼, 그 피 수혈 받으면 나도 항체 생기는 건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겠지만…….”

혜주는 아직도 테라의 항체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곁에 서 있던 신입이 아는 척을 한다.

“항체? 무슨 항체? 어쨌든 수혈 받으려면 혈액형이 같아야 되는데, 너랑 피 줄 사람은 무슨 형인데?”

태권소녀는 테라가 좀비에 대한 항체를 가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직 너무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혈액형 정도는 알아두고 싶었다.

“B형. 테라는…….”

태권소녀가 제니에게 물어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 할 때, 규영이가 입을 열었다.

“테라는 O형, 천칭자리. 제니 누나는 A형, 사자자리.”

제니가 긍정의 의미로 엄지손가락을 척 올려 보인다. 도로에서는 좀비들의 행렬이 한창 진행 중이다. 모두들 별 감흥 없이 그 다양한 색깔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저놈들이 지나가고 나면 한 바퀴 돌아 다시 여기로 올 때까지 적어도 열 시간 이상이 걸릴 것이라는 데 아무런 의심도 없었다.

좀비들은 예전과 같은 코스를 따라 천천히 행진을 한다. 두어 시간 뒤, 그 무리의 선두가 만나게 될 건대 쉘터의 북단에는 전에 없던 구조물이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다. 오늘 아침 막 완성된 거대한 장벽이다.

지금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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