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302화 (302/449)

6장 Heart(1)

물러나라니… 도망을 쳐야 하는 게 아닌가?

임수정이 주저하는 동안 유빈이 그녀를 뒤쪽으로 끌어당기고, 플래시를 들어 앞쪽을 비춘다.

약간 아래쪽으로 기울도록 조종해 뒀던 헤드 랜턴과 달리, 정면으로 비추는 플래시가 밝혀지자 멀리서 달려오는 좀비들의 모습이 훨씬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그롸아아아―

네 마리였다. 선로 위를 어기적거리며 걸어오는 것이 셋, 미친 듯이 뛰어오는 놈이 하나.

뛰어오는 좀비의 속도에 놀라 임수정의 눈이 커진다. 지하철 내부의 좀비라고 해서 느리기만 한 게 아니었나 보다.

“어디서든 꼭 튀는 놈이 있다니까.”

보안관은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해머를 높이 치켜든 채 기다리고 있던 보안관은 뛰어오던 좀비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망설임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콰작―!

두개골이 납작해진 채 목이 꺾인 좀비가 날아가 기둥을 들이받고 떨어진다. 보안관은 곧바로 다음 좀비를 후려치기 위해 다시 허리를 돌렸다.

그 일격을 보는 순간, 임수정은 데자뷔에 빠진 것 같았다. 강서 정수장에서 만났던 남자, 민구가 좀비들을 상대할 때의 모습과 너무도 유사하다.

‘저 괴물 같은 움직임의 좀비보다 더 빠르고 강해. 게다가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어. 이런 사람이 또 있다니…….’

그때의 기억이 살아나자 의도하지 않은 공포가 소름과 함께 돋아 임수정의 온몸을 휘감는다.

다리와 어깨가 온전하지 않았던 칼잡이… 그가 놓쳤던 좀비가 그녀를 덮쳐왔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억은 끊겨 있다.

하아~ 하아~ 다시 공포와 정면으로 마주 선 임수정의 호흡이 거칠어진다.

“정말인데? 이 새끼들은 엄청 느리네. 정신만 바짝 차리면 누구라도 두어 마리 정도는 그냥 잡을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이놈은 또 빨랐단 말이지. 참내, 대체 무슨 조화지?”

임수정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보안관은 벌써 네 마리의 좀비를 모두 잡고 녀석들의 시체를 보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 방에 한 마리씩, 딱 네 번의 스윙이었다.

“말로는 정신을 바짝 차리면 된다지만, 무서우니까 오금이 달라붙는다고. 다 너처럼 배짱이 좋은 게 아니라서……. 근데 이놈은 좀비가 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야. 이거 봐, 상처 주변에 핏자국이 생생해. 옷에 묻은 피가 번질거리는 것도 그렇고… 오늘 죽었다고 해도 믿겠는데?”

가장 앞서서 빠르게 달려왔던 좀비를 플래시로 비춰 보며 유빈이 말했다. 그 말에 임수정도 억지로 눈을 돌려 좀비를 쳐다봤다.

끔찍한 모습이다. 한쪽으로 움푹 찌그러진 두개골에서는 뇌수가 줄줄 흘러나오고, 목은 이상한 각도로 돌아가 있다. 목덜미와 팔에 살점이 뭉텅 뜯겨 나간 상처는 피범벅이다.

그리고… 눈에 익은 파란색 수인복. 이 좀비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건대 쉘터 옆 건물에 주거하면서 도로 공사를 돕던 수감자들 중 하나다.

“이 사람… 오늘 물린 것 맞는 것 같아. 아까 우리 뒤를 군인들이랑 이 수감자들이 같이 쫓아왔었는데… 좀비들에게 둘러싸여 버렸었어요. 아마 그때 물렸던 사람인가 봐요.”

임수정의 이야기를 들은 유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좀비를 살폈다. 원래 지하철 속에 있던 좀비들은 느린데, 이놈만은 빨랐다. 그렇다는 건… 지하철 속의 뭔가가 좀비들을 점점 약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그게 뭘까? 환기장치가 고장 나서 가만히 숨만 쉬어도 몸이 약해지는 것 같은, 이 미세 먼지 가득한 공기? 아니면 이 지독한 어둠? 그것도 아니면 선로 내에만 잔뜩 있는 어떤 물건…….

유빈은 잠시 플래시를 위로 돌려봤다. 멀리 위쪽에 전기장치들이 보인다. 하지만 지금 이 내부에는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

“한 놈이 물렸으면 슬슬 더 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는 이야기네요. 총 몇 명이나 쫓아왔었는지 혹시 기억나요?”

보안관은 움직임이 빠른 좀비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임수정에게 물었다.

“정확하게는 몰라요. 뒤를 돌아볼 새가 없이 계속 뛰었거든요. 그냥 확실히 들은 거는 처음에 아홉 명 이상이었다는 거 정도예요. 그보다 더 줄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아홉 마리라……. 지금 하나 잡았으니까 여덟. 뭐, 전부 다 물렸을 리도 없지만, 그 정도는 사실 크게 위험하지 않긴 하겠는데……. 여차하면 빨랫줄 뒤로 피해가면서 싸워도 되고… 괜찮겠네요. 갈게요.”

보안관은 다시 천천히 전진했다. 몇 걸음 신중하게 걷다가 멀리 앞쪽을 한 번 살펴보고, 어른거리는 불빛이 없으면 다시 걷는다.

속도를 조정하는 이유는 좀비 때문이 아니라, 혹시 아직도 수색을 계속 하고 있을지 모를 군인들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 들어오기 전에 헤드 랜턴의 각도도 일부러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조정해 뒀다.

빛이 멀리까지 뻗어 나가지는 않지만, 대신 이쪽의 존재가 들킬 가능성도 줄어든다. 대충 15 미터 앞까지만 보이면 어지간한 좀비들은 대비할 수 있다.

“여기에서 물렸던 건가 보다. 그치?”

자빠져 있는 지하철 객차들로부터 10여 미터 떨어진 지점에 도달한 보안관이 너덜너덜해진 좀비 시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로는 군데군데 피로 물들어 번들거렸다.

“어지간히 쐈네.”

온몸에 총상을 입은 좀비들을 보니 보안관과 유빈도 새삼 긴장이 되었다. 파란 수인복의 시체 하나는 머리에 상처가 없다. 아마도 오발에 목숨을 잃은 모양이다. 아니면 물리자마자 겁에 질린 군인들이 막 갈겨 댔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저쪽이 심리적으로 별 여유가 없다는 점이다. 겁에 질려있으니 여차하면 방아쇠를 당길 것이고, 그러니 미리 더 몸을 사려야 한다.

“여기에서는 불빛은 안 보여. 넘어가자.”

전동차의 틈 사이로 선로 건너편을 살펴본 유빈이 말했다. 아까 임수정에게는 기어서 지나가야 하는 장애물이었지만, 남자 둘이 받쳐 주고 끌어 올려주자 그리 애를 먹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 물론 팔이 당겨질 때에는 엄청난 근육통에 식은땀이 솟기는 했다.

전동차를 넘어가서 유빈은 또 선로에 장애물을 만들었다. 여기를 넘어갈 때 시간이 걸리니까 보험 하나쯤은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나머지 좀비들은 어디로 간 걸까요?”

임수정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분명 저것보다 더 많은 좀비들이 여기에 있었다. 유빈이 건너편 선로를 가득 채운 깊은 암흑을 가리킨다.

“저쪽… 오면서 보니까 빈 공간이랑 예비 선로 같은 것도 어지간히 많고 공간도 넓던데, 그런 미로 속에서 돌아다닐지도 모르죠.”

“무섭네요. 바로 옆에서 덮쳐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미안해요, 나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도록 해서.”

임수정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러나 유빈과 보안관은 동시에 아니라고 해준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리로 군인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으니, 어차피 한 번은 와봐야 하는 길이었어요. 이런 일을 전혀 모르고 있던 것보다는 이렇게 대비할 수 있는 지금 상황이 더 나은 건지도 몰라요. 최소한 건대 쉘터가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됐잖아요.”

유빈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대답해 주며 시계를 봤다. 지하로 들어온 지 벌써 한 시간 반 이상이 흘렀다.

불과 3킬로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조심해 가며 전진하는 게 꽤 시간과 체력을 잡아먹고 있다.

그리고 이놈의 탁한 공기. 숨쉬기가 슬슬 힘겨워진다. 임수정이 지하철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무리 좀비들이 약해지는 곳이라고 해도 이 안은 절대 사람 살 데가 못 된다.

“또 온다. 물러서 있어.”

일행이 중곡역 부근에 도착했을 때, 보안관이 뒤를 돌아보며 경고했다. 두 번째 좀비 무리들이 헤드 랜턴의 빛이 닿는 끝자락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세 마리. 아까보다 수는 적지만, 대신 빠른 놈이 둘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롸아아아―

푸른 수인복의 좀비가 좀 더 빨리 뛰어들었다. 보안관은 평평한 곳에서 자리를 잡고 기다리다가 스텝을 밟으며 해머를 돌렸다.

와지끈!

목이 200도 이상 돌아간 좀비의 시체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군인 좀비가 아가리를 쫙 벌리고 덮쳐 온다. 보안관은 녀석의 배를 걷어차 거리를 벌리고 다시 해머를 휘둘렀다.

쩍!

쇳덩어리와 하이바가 부딪쳐 미끄러지며 기묘한 소리가 난다.

군인 좀비의 무릎이 바닥을 찧었다. 하지만 녀석은 죽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하이바가 충격을 꽤나 줄여준 모양이다.

그롸아아―

무릎이 박살 난 군인 좀비가 비틀거리며 보안관을 향해 두 팔을 휘젓는다. 보안관은 다시 한 번 해머를 돌렸다.

이번에는 몸통을 노려 쳤다. 갈비뼈가 박살 난 채 뒤로 나자빠진 좀비의 얼굴 위로 보안관의 해머가 내리꽂혔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만에 좀비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녀석의 얼굴은 무너지고 쪼개진 뼈 때문에 한층 더 끔찍한 꼴이 되었다. 보안관이 혀를 찼다.

“헬멧 때문에 영 성가시네. 이런 좀비들 많으면 골치 아프겠다.”

“보안관, 한 마리 더 있어. 느린 놈.”

유빈이 세 번째의 좀비를 플래시로 비추며 말했다. 보안관이 씩 웃는다.

“오케이. 안 까먹고 있었어.”

보안관은 풀스윙으로 세 번째의 느린 좀비를 끝장냈다. 그가 목숨을 내놓고 나서서 좀비들과 맞설 때마다 뒤에서 지켜보는 임수정은 미안함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아무리 강하고 용감하다고 해도 상대는 좀비다. 물리면 그 순간 끝이고, 예외 같은 건 없다.

“하아~ 숨 쉬기가 별로 안 좋네. 바깥 공기를 좀 마시고 와야 하나? 지금 우리 얼마나 온 거냐, 유빈아?”

보안관이 장갑 낀 손으로 땀을 닦아내며 물었다.

“이번 역 지나면 그다음이 군자역이야. 거의 다 오긴 했어.”

“그래? 그러면 그냥 쭈욱 가자. 어차피 다음 역에 가면 승강장 위로 올라갈 거잖아. 혹시 가는 길에 저놈이 떨어뜨린 총 같은 거 줍게 되면 좋겠다. 삼식이한테 선물로 주게. 그 새끼, 만날 우산 들고서 총이라고 바보짓 하는데… 누나, 괜찮으세요?”

임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신의 근육은 다 지독한 몸살을 앓는 것처럼 쑤셔 대고 두통은 점점 심해져 오지만, 참을 수 있다. 아니, 참아야 한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오로지 호의로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팔자 좋게 엄살을 떨 수는 없다.

“그럼 갈게요. 너무 힘들면 중간에라도 말하세요. 무리하다가 쓰러지면 안 되니까… 읏!”

다시 헤드 랜턴을 고쳐 쓰고 고개를 돌리려던 보안관이 얼른 몸을 숙이고 랜턴의 스위치를 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유빈도 플래시를 껐다. 그러고는 임수정의 헤드 랜턴까지도 꺼버리자 주변은 완전한 암흑 속에 묻혔다.

“흐윽!”

갑작스런 변화에 임수정이 가볍게 비명을 삼킨다. 하지만 큰 소리는 내지 않고 참아낼 수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꼭 짚어 안정감을 주며 유빈이 보안관에게 속삭인다.

“뭔데? 왜?”

“쉿! 불빛 번쩍였어. 저 앞에서.”

보안관은 손으로 더듬더듬 짚어 유빈의 몸을 찾아냈다. 그런 후, 세 명은 나란히 옆쪽 선로로 옮겨갔다.

좌우 구분조차 안 되는 상황. 오로지 등에 닿아 있는 벽만이 방향감각을 잃지 않게 도와준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정말로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비춰 온다. 그리고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보안관은 기둥 뒤로 조금 더 물러나며 귀를 곤두세웠다.

“이제 진짜 그만 가고 싶습니다. 좀 전에도 그 좀비 소리 나는 거 들으셨잖습니까? 아니, 우리가 무슨 나라를 구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쯤 되면 너무 멀리 왔습니다. 벌써 몇 시간째 이 먼지 구덩이만 뒤지고 다니는 거지 말입니다.”

툴툴대며 불평하는 목소리. 곧바로 다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아~ 계속 징징거리지? 응? 씨발, 누구는 좋아서 이러고 있냐? 도망간 놈 셋 중에 하나라도 잡아야 할 거 아니야. 빈손으로 돌아가면 박 소위, 그 또라이 새끼가 참 수고 많았다고 해줄 것 같냐? 응? 이 새끼야?”

“아니, 근데 말입니다. 이 근방 역을 세 개나 다 싹 헤집었는데도 없는 거면, 지하철 안에는 없는 거라고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 생각에는 이 사람들 다 밖으로 도망 나갔다가 어딘가에서 좀비들한테 물려 죽은 겁니다. 그럼 지금쯤 그 좀비 떼랑 같이 돌아다니고 있을 텐데, 여기를 뒤져서 뭐합니까?”

“하긴 그것도 일리가 없는 소리는 아니야. 우리는 가끔 교대라도 해가면서 맑은 공기 쐬지만 걔들은 그러지도 못할 텐데. 도저히 이만큼 오래 못 버텨. 에이, 퉤! 죽은 애들만 불쌍하게 됐지.”

네 개의 목소리가 각기 한 번씩 떠들어 댄다. 그럼 적어도 네 명. 그것도 총을 든 군인이다.

보안관은 최악의 사태를 가정해 봤다. 피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진다면 싸워야 하는데, 암만 빨리 해머를 돌린다고 해도 한 번에 두 명 이상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저쪽은 지금 언제라도 사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상태일 테지…….

안 좋다. 차라리 어둠이 가려주고 있을 때 뒤로 더 물러나야 하나.

“장 상병님! 잠시 위로 복귀하셔서 휴식하랍니다!”

승강장 위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군인들을 부른다. 조금 전 다른 병사에게 욕설을 퍼붓던 목소리가 대답한다.

“젠장, 벌써 한 시간이 지났냐? 어! 그래! 마침 여기 수색 다 끝났다! 간다!”

휴우~ 군인들의 발소리가 멀어져 간 뒤, 보안관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놈들이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왔더라도 조금 전 보안관이 끝장낸 군인 좀비의 시체를 볼 뻔했다. 그랬으면 수상해서라도 저렇게 건성으로 수색을 마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두 분도 아직 붙잡히지는 않았나 봐요. 하나라도 잡아야 한다는 걸 보면.”

유빈이 플래시를 바닥으로 향해 켜며 속삭였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더는 위험해서 안 될 것 같아요.”

임수정이 말했다. 진심이었다. 수색대가 계속 상주하는 것 같은데, 이 이상 위험을 감수하는 건 미친 짓이다.

유빈과 보안관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제는 그 두 군인이 살아 있길 바라며 행운을 빌어주는 것 외에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 ☆ ☆

건대 쉘터에서는 밤늦게까지도 계속 벽을 쌓고 도로를 막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사망한 이 원사가 어제부터 작업 속도를 높였던데다가 오늘 미칠 듯한 강행군을 계속한 덕에 슬슬 끝이 보인다.

“박 소위님! 애들 많이 지쳤는데, 너무 무리시키는 것 아닙니까? 쟤들 오늘 낮에 잠도 못 자고 계속 뺑뺑이 돌다 온 애들입니다.”

김 중사가 다가와 박 소위에게 말했다. 그의 눈가에도 피로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어제 새벽부터 지금까지 계속 잠시도 쉬지 못하고 전투와 수색, 그리고 장벽 공사를 지휘했다.

그뿐인가. 입에 담기도 끔찍한 살인 사건. 이 원사님이 피해자고, 범인으로 지목 받은 게 강 소위와 고 하사였기에 그가 받은 충격은 더 컸다.

다들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 언젠가 한 번 사고가 터질 거란 짐작은 했지만, 이건 너무 의외의 일이어서 믿어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의심하기에는 증인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증언도 일치한다.

강 소위가 이 원사를 쐈고, 그를 제압하려던 박 소위를 고 하사가 폭행하고 달아났다. 여자 문제 때문에 다투는 것 같았는데, 그 여자도 함께 도망쳤다…….

증인들은 다들 그렇게 말했다.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는 것도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바빴다. 지금도 혼이 반쯤 빠져나간 상태다.

“김 중사님, 힘드신 거 잘 압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기합으로 버텨주십쇼. 저도 지금 쓰러지기 직전인데 악으로 깡으로 참고 있는 겁니다. 지금 중대장님 부재 상황에 이 원사님마저 돌아가셨으니, 제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전차장 김 소위와 김 중사님뿐입니다. 저 차단벽, 꼭 쌓아야 합니다. 이 원사님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계속 작업 속도 올려야 한다고 하셨잖습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박 소위가 전에 없이 성실하고 공손하게 말한다. 뼈가 부러져 퉁퉁 부은 코는 숨쉬기도 힘들어 보인다. 요즘 살짝 돈 것 같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오늘 하는 걸 봐서는 멀쩡하다.

김 중사는 박 소위의 태도가 갑자기 이렇게 돌변한 것이 책임감을 가졌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제가 힘이 들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애들이 자꾸 다치니까, 그게 걱정이 돼서 그랬던 겁니다. 어쨌든 알겠습니다.”

김 중사는 찜찜한 얼굴로 물러났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지휘관이 거의 바닥난 상황이니만큼 북쪽의 장벽만 쌓아놔도 한결 든든할 것이다.

온갖 색깔을 뒤집어쓰고 있는 대규모의 좀비 놈들이 한 번 휘몰아치면, 지금 공사를 하다가 다치는 정도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쳇, 등신 같은 새끼들…….”

장벽 너머를 가만히 둘러보던 박 소위가 터진 입술을 씰룩거리며 혼잣말을 한다. 도망친 세 사람에게 던진 욕설이었다.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몰라도 오늘 오후 늦게까지 진행된 수색이 모두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하고 종료되었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별 상관은 없다. 그것들이 이 주변에만 있지 않으면 된다.

“달랑 총 한 자루로 밖에서 며칠이나 버틸 것 같아? 결국 그러다가 좀비한테 물어 뜯겨서 더 끔찍하게 뒈지겠지.”

박 소위는 저주와 바람을 담아 중얼거렸다. 그런 놈들보다는 장벽이 최우선이다. 이 원사가 했던 걸 그대로 이어받아 병사들을 몰아치니 다들 정신이 없다.

그렇게 바쁘면 딴생각 같은 건 못한다. 증언들의 허술한 구석도 그렇게 묻혀갈 것이다.

“좀비들 접근하면 탄약 아끼지 말고 미리부터 갈겨! 공사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 확실하게 해!”

박 소위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소리를 질렀다. 탄약 재고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며칠 내로 보급이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내일 오전까지 이 속도만 유지하면 깊은 구멍과 높은 장벽이 완성될 수 있다. 그러면 더 이상 컬러 페인트 좀비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태평성대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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