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엇갈린 운명(5)
흐느끼는 제니 덕에 여자들은 덩달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제니가 왜 저렇게 우는지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임수정까지도 눈에 눈물이 어린다.
크윽! 눈가를 찍어내고 감정을 추스른 태권소녀가 제니의 어깨를 잡고 일으켰다.
“자, 이제 잠깐 스톱. 제일 궁금했던 거 확인했으니까, 이 언니 치료부터 하자. 보안관, 내 가방 좀 줘. 거기에 약통 들었어. 자, 그리고 남자들은 다 나가. 제니, 너도 나가서 좀 진정하고 와. 갈아입을 만한 옷이랑 물 가져다주면 더 좋고.”
“네가 치료하면 낫는 게 아니라 더 아파지는데…….”
보안관이 가방을 들고 머뭇거렸다. 소독해 준다면서 딱지를 후벼 파던 거친 손길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태권소녀는 보안관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쥐며 낮게 속삭였다.
“내가 안 하면 제니가 해야 하는 건데, 그게 더 좋겠냐? 응? 이 바보야.”
그 말의 효과는 100퍼센트여서 보안관은 곧바로 물러났다. 안전의 측면에서 그게 훨씬 나은 선택지다. 저 임수정이라는 사람의 무력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태권소녀를 제압할 만한 능력자로 보이지는 않으니까.
“아! 으읏!”
남자들이 나가고 치료가 시작되었을 때, 임수정의 입에서는 가벼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태권소녀의 손길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더러워진 트레이닝복을 벗기 위해 슬쩍 팔을 들어 올리고 허리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져서 견디기가 힘들다. 보다 못한 태권소녀가 소매를 잡아준다.
“자, 이제 팔 빼세요. 갑자기 근육을 무리하게 써서 그래요. 평소에 운동 거의 안 하셨죠?”
“으읏! 네… 가끔 헬스클럽 등록해도 그냥 러닝머신이나 가볍게 뛰는 정도였죠, 뭐. 그나마도 일주일에 두 번이나 가면 많이 가는 거였고요.”
“격한 운동을 하면 근육이 찢어진달까… 손상되거든요. 다시 회복될 때까지 며칠 갈 거예요. 그동안 잘 드시고 휴식하시면 돼요.”
며칠… 임수정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고 하사와 강 소위에게 돌아가겠다고 약속을 했었는데… 하도 급하게 한 약속이라 정확히 어디에서 기다려 달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실… 그들이 아직 무사한지 어떤지도 모른다. 그녀의 표정에서 다급함을 읽은 태권소녀가 냉정하게 충고를 한다.
“소독 받고 뭐 좀 드신 다음에 일단 푹 주무세요. 뭘 하고 싶으시든 간에, 지금 이 상태로는 못해요. 사람 몸은 정직하거든요.”
태권소녀는 약솜에 알코올을 묻혀 임수정의 상처들을 닦았다. 손바닥, 얼굴, 팔꿈치와 무릎, 옆구리, 허벅지… 긁히고 찢어지지 않은 부위가 별로 없다. 발톱이며 손톱에도 까맣게 멍이 들어 있다.
깜깜한 지하철 선로 속에서 얼마나 필사적으로 부축하고 구르고 달리고 매달렸는지, 그녀의 온몸이 고스란히 보여준다.
“언니는 그래도 용케 도망치셨네요. 웬만한 사람들은 그렇게 못하는데.”
“하아~ 물론 운도 좋았지만, 좀비들이… 그렇게 빠르지 않더라고요. 지하철 속의 좀비는 느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믿기지 않았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그 말이 사실이었어요. 예전에 봤던 보통 좀비들이랑은 속도가 완전히 달랐어요.”
“느린 좀비라니… 잘 상상이 안 되네요. 왜 그런 차이가 있는 걸까요?”
태권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상처 위에 회복 연고를 발라줬다. 소독이 끝나갈 때쯤 제니가 갈아입을 옷과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옷은 대충 맞으실 것 같은데, 신발은 사이즈를 모르겠어서 그냥 슬리퍼를 가지고 왔어요. 우선 오늘만 신으세요.”
분홍색 슬리퍼를 내밀며 제니가 말했다. 가격표는 붙어 있지 않지만 분명히 새 슬리퍼였다. 옷과 속옷도 마찬가지였다. 접어놓았던 자국이 선명한 새 옷들이다.
음식, 물에 이어서 이런 것까지 넉넉한가 보네…….
임수정은 이 사람들의 풍요로움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격리되어 있던 동안에 세상이 많이 바뀐 걸까? 쉘터 주변의 세상에서는 좀비들이 별문제가 안 되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대체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토록 자유로운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거요.”
화장실에서 생수로 세수를 한 임수정이 새 옷을 걸치고 나오자 제니는 테이블 위에 테라의 시계를 놓는다. 임수정은 손을 저었다.
“아뇨, 이거는… 저보다 제니 씨가 가지고 있는 게 더 옳은 것 같아요. 테라와 가까웠던 걸 생각하더라도 제니 씨 쪽이…….”
“그냥 제니라고 편하게 부르세요. 말도 놓으시고요.”
“하하… 그럴까…요? 하여튼 시계는 이제 제니가 맡아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차고 있자니까 그거 은근히 부담스럽더라고.”
임수정이 호칭과 시계 문제로 쑥스러워하고 있을 때, 그녀의 낡은 트레이닝복을 치우던 태권소녀가 미안한 목소리로 부른다.
“저기, 언니……. 이 옷은 버려야 할 것 같아요. 워낙 뭐가 많이 묻고 다 찢어져서 못 입겠어요. 주머니에서 필요한 것만 꺼내세요.”
임수정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태권소녀가 다시 묻는다.
“싫으세요? 버리지 말까요?”
“아니… 딱히 아까울 건 없는 옷인데요, 근데… 나중에 제가 지하철로 돌아갈 경우를 생각하면 필요하지 않을까요? 제 일행들 눈에 익숙한 옷을 입고 있는 편이 아무래도 더 만날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서 그래요.”
“아, 맞다… 그런 것도 있겠네요.”
태권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더러운 옷을 다시 곱게 접어놓았다. 일행과 헤어져 혼자 남은 사람이 느낄 여러 감정에 대해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불안함과 미안함, 그리고 책임감 같은 감정들……. 상황은 다르지만, 얼마 전 태권소녀 그 자신도 느꼈던 감정이니까.
“어린 사람이 자꾸 똑같은 잔소리하는 것처럼 들리시겠지만, 일단 뭘 좀 드시고 주무세요. 그래야 새로 시작도 할 수 있어요. 시트도 새걸로 가져다 드릴 테니까요.”
태권소녀는 임수정의 어깨를 짚었다. 앙상하다. 치료하면서 보았던 손이며, 근육이며… 정말로 운동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즉, 이 사람 자체는 그리 위험하지 않다.
“아, 밤중에 좀비들이 근처를 지나기는 하는데, 이쪽에서 일부러 가까이 가서 소리 지르고 난리치지 않는 한 별로 걱정할 일은 없어요. 저희는 이 위 옥상에 있을 테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시면 돼요.”
제니와 함께 방을 나가며 태권소녀가 일러줬다. 임수정은 거듭 고맙다는 말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야. 잘 치료해 줬어? 꽤 한참 걸렸네.”
태권소녀와 제니가 문을 닫고 나가자, 복도 끝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빈과 보안관이 올라오라고 손짓을 한다.
“저 언니, 다친 데가 꽤 많더라고. 소독은 했지만, 약 가져와서 좀 먹도록 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해도 심한 근육통이 며칠 갈 거야, 아마.”
함께 계단을 올라가면서 태권소녀가 말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유빈이 물었다.
“자기 일행 구하러 가야 한다는 소리 안 해?”
“야, 지금 아예 뛰지를 못한다니까. 운동이라곤 해본 적 없는 사람이 아주 죽을힘까지 다 쥐어짜서 쓴 거야. 온몸이 근육통으로 끊어지는 것 같을걸?”
흠… 유빈이 머리를 긁적인다. 보안관의 시선은 제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아직도 눈이 부어 있다. 보안관은 제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괜찮아? 좀 진정됐어?”
“아… 네. 얼떨떨하기는 한데… 정말 테라가 살아 있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이 시계도 그렇고, 테라가 고른 옷도 그렇고… 딱 그 애다워요. 정말 다행이에요. 흑~! 얼마나 미안했었는데…….”
제니는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또 눈물이 솟아나는 모양이다. 계단 중간에 서서 눈물을 훔쳐 낸 제니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날 나랑 대표 오빠는 대체 뭘 보고 그 애가 물렸다고 착각을 했던 걸까요? 왜 둘이 동시에 착각을 해서 테라를 버리고 도망쳤던 건지… 그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 애를…….”
“순전히 착각만은 아닌 것 같은데? 저 누나도 테라의 발가락이 잘려 있었다고 했어. 제니, 네가 봤던 것하고 그 부분에서 일치하잖아.”
유빈의 말을 들은 제니는 더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럼 뭐죠? 저 언니한테는 왜 다쳤는지 말해줬대요?”
“나도 마음이 급해서 그런 것까지 물어볼 여유가 없었어. 근데 결과를 아니까 대충 끼워 맞춰서 추측을 해볼 수는 있지. 예를 들어 밀려 넘어지면서 어딘가에 찢겨 피가 났는데 그걸 보고 물렸다고 착각을 했다든지… 뭐, 그런 건 나중에 만나면 알게 되겠지. 일단은 살아 있다는 게 제일 중요한 거잖아. 그치?”
유빈은 그렇게 말하며 옥상 문을 열었다. 텅 빈 옥상을 보며 태권소녀가 물었다.
“다른 애들은 어디에 있어?”
“코스트코에서 쉬라고 했어. 다 여기에 모여 있을 필요는 없잖아.”
네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임수정은 좋은 사람 같았지만, 그 일행들을 구하러가는 건 또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렇다고 그녀를 혼자 돌려보낸다면 그냥 죽으라고 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녀를 돕기 위해 누군가 따라나서야 한다면 그때부터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지하철 안의 좀비들이 꽤 느리다고는 하지만 확신할 수 없는 노릇이고, 좀비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군인들 쪽이다. 수색하던 군인들이 플래시 불빛을 보고 다짜고짜 총을 쏠 수도 있다.
지금까지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던 건 매사에 두려움을 가지고 무리하지 않은 덕분이기도 하다. 함부로 아무 데나 발을 내디디고 싶은 마음은 없다.
보안관과 태권소녀가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총에 맞으면 그걸로 끝이다. 그들은 슈퍼 히어로가 아니니까.
또 만약 운이 좋아서 임수정의 일행을 만나 무사히 데리고 왔다 쳐도, 그 낯선 남자들을 옆자리에서 재운다는 것도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은 일이다. 비록 두 명뿐이라지만, 군인들에게는 총이 있다.
“나는 솔직히 얘가 제일 걱정이야.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자존심 상하지만… 너무 예쁘잖아. 아이돌이라는 희소성도 있고.”
태권소녀가 제니를 가리키자 보안관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음, 맞아. 진짜 예뻐.”
태권소녀는 보안관의 종아리를 한 번 냅다 걷어찼다.
바보 같은 놈! 너도 예뻐, 라고 말하라고!
하여튼 이 바보 같은 놈과 그 친구 놈들이 어지간히 별종인 거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매력적인 여자를 건드리려 들지 않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연히 말썽이 날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쓰인다. 착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쫓기고 있다는데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다는 건…….
“아, 젠장. 어찌 됐든 간에 내려가 보는 수밖에 없겠어. 그 사람들 돕는 것도 돕는 거지만, 다른 군인 놈들이 수색을 하고 있다면서? 그 소리 듣고 나니까 계속 신경이 쓰이네. 좀비 가둬놓고 나면 이제는 걱정거리 없을 줄 알았는데…….”
이야기가 길고 복잡해지자 보안관이 머리를 긁으며 유빈을 쳐다본다. 지하철 탐험 계획을 짜보라고 말하는 시선이다.
유빈은 이마의 땀을 훔쳐 냈다. 위험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 맞다.
“저기… 올라가도 될까요?”
몇 가지 세부적인 이야기를 더 하고 있는 동안 계단을 올라온 임수정이 열려 있는 옥상 문을 가볍게 두드린다.
“그럼요. 오세요.”
태권소녀의 허락을 듣고 나서야 임수정은 천천히 옥상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방에 가만히 있으려니까 답답해져서요. 탁 트인 광경을 보고 싶었어요. 건대에서는 늘 철책에 에워싸여 있었고, 지하철에서는 너무 깜깜해서 숨이 막히는 것 같았거든요. 햇살 속에서 이런 경치 내려다보는 거… 정말 오랜만이에요.”
임수정은 경이롭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유빈이 그녀의 곁으로 가서 말을 걸었다.
“저희 이따가 지하철 아래로 내려가 볼 거예요. 군자역까지도 갈 수 있으면 갈 거고요.”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여기 있는 사람들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그렇게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어요. 가더라도 저 혼자 가야죠.”
임수정은 도와달라고 매달리기는커녕 오히려 말리는 투였다. 이쯤 되면 의심했던 게 미안해질 지경이다.
“누나는 지금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체력이 안 되니까, 우리가 가려는 거예요. 근데 그 군인분들을 구해 오겠다는 장담은 못해요.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곧바로 돌아올 겁니다.”
“저 뛸 수 있어요. 깨어난 뒤에 물도 마시고 해서 한결 살 것 같아요.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고 하사님이랑 강 소위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분 한 명도 없잖아요. 공연히 다른 군인들에게 접근했다가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임수정의 말을 들은 유빈과 보안관은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그녀의 말이 맞는 것 같다.
“할 수 없네……. 그럼 우리 셋이 가는 걸로 하죠. 신발 가져다 드릴 테니 준비하세요. 우리도 준비할 테니까요.”
보안관이 유빈과 자신, 그리고 임수정을 가리켰다. 여차하면 보안관이 길을 트고, 유빈이 임수정을 업은 채 도망쳐 오면 된다.
태권소녀도 함께 가고 싶어 했지만, 보안관이 완강히 반대했다. 그렇게 하면 여기 남아 있는 쪽의 전투력이 너무 형편없어진다.
남을 구하러 가자고 내 집 문단속을 허술하게 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전기를 가지고 가기는 하는데, 절대로 먼저 무전 보내지는 마. 혹시 좀비 떼가 우리 예상보다 더 빠르게 지나오거나 해도 말이야. 할 말이 있거나 이 부근에 돌아오면 우리가 말을 할게. 알았지?”
지하철역으로 들어가기 전, 유빈은 태권소녀와 제니에게 다시 한 번 당부를 했다. 제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과 임수정을 바라보았다.
“무리하지 마요, 오빠. 절대로요.”
제니의 부탁에 유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헤드 랜턴을 썼다.
“응. 알잖아, 나 겁쟁이인 거.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세 사람은 지하철 계단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해머를 든 보안관이 당연히 앞장을 섰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는데도 한 층 아래로 내려서자 사방이 깜깜해진다.
보안관이 헤드 랜턴을 켰다. 표준 장비가 든 가방을 짊어지고 걷는 임수정의 목덜미에서는 벌써부터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자신이 내뱉은 말이 있어서 비록 신음은 흘리지 않았지만, 온몸의 근육이 콕콕 쑤셔 댄다. 티셔츠 위에 다시 걸쳐 입은 더러운 트레이닝복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풍겨왔다.
“여기도 엄청났구나…….”
지하철의 대리석 바닥에 메말라 붙어 있는 검은 핏자국들과 시체들을 보면서 보안관이 중얼거렸다. 이 동네에서 며칠이나 지냈지만, 여기로 내려와 보는 건 처음이다.
긴장되는 게 당연하다. 보안관은 승강장 차단벽에 다가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별로 특별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보안관은 이번에는 고개를 내밀어서 좌우를 살폈다.
“뭐가 좀 보여?”
유빈의 질문에 보안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보여. 여기는 별거 없어. 내려가자.”
계단을 통해 선로로 내려가던 보안관이 임수정에게 다시 당부를 했다.
“절대로 제 앞으로 가시지 마요. 그렇게 하면 지켜주기가 힘들어지니까.”
“네, 알겠어요.”
임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보안관의 지켜주겠다는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건장하긴 하지만 무장이라고는 해머와 알루미늄 배트뿐인 사람이 대체 뭘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한지…….
표준 장비라고 메준 배낭 속에도 그저 일상생활에서나 필요한 물건들뿐이다. 그들의 풍요로운 생활을 봤을 때는, 당연히 엄청난 무기들이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총 한 자루 없는 낯선 이들에게 이렇게 짐이 되어도 되는 걸까…….임수정은 불안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캄캄한 선로 위로 내려섰다.
세 사람은 일렬로 서서 걸었다. 보안관, 임수정, 유빈의 순이다. 유빈은 작은 플래시를 손에 들고 벽과 바닥을 비춘다.
“줄은 어디에다가 쳐둘 거야?”
보안관이 유빈에게 물었다. 유빈은 허리에 감아둔 빨랫줄 뭉치를 풀며 대답한다.
“좀 더 가서부터 묶어두려고. 여기는 너무 가까워서 쳐놔야 별 쓸모가 없을 것 같아.”
그런 후, 유빈은 임수정에게도 다시 당부를 한다.
“돌아올 때는 언제나 선로의 왼쪽 방향에 계세요. 걷거나 뛰거나 마찬가지예요. 오른쪽으로 오는 건 저 승강장 계단으로 올라갈 때만이에요. 아셨죠? 그거 잊어버리면 안 돼요.”
임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빈은 헤드 랜턴조차 켜지 않고 있다. 보안관도 유빈도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걸 보니, 겉으로는 여유 있는 척을 해도 실은 어지간히 긴장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저기… 이거, 머리에 쓰는 랜턴. 불이 안 켜졌는데…….”
임수정은 유빈을 돌아보며 알려줬다. 유빈이 싱긋 웃는다.
“네, 저는 보험이에요. 보안관의 랜턴이 망가지거나 건전지가 다 됐을 때 켜는 용도. 플래시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거든요.”
아… 당황한 게 아니었구나.
임수정이 감탄하고 있을 때, 빨랫줄을 꺼낸 유빈은 플래시를 입에 물고 선로와 기둥을 사선으로 연결했다. 능숙한 솜씨로 매듭을 묶은 뒤, 커터로 자른 유빈은 팽팽히 당겨진 빨랫줄을 탁, 튕기며 말했다.
“잊지 마세요. 올 때는 언제나 선로 왼쪽으로. 안 그러면 여기에 걸립니다.”
왼쪽으로 달리라는 게 그런 의미였나?
임수정은 멍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에도 유빈은 간간이 멈춰 서서 비슷한 장애물을 만들어뒀다.
면목역 부근까지 거의 다 왔을 때, 앞서서 걷던 보안관이 뒤를 돌아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물러나요.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