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엇갈린 운명(4)
“저는…….”
임수정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이 사람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일까? 솔직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가 만에 하나라도 고 하사와 강 소위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쩌지, 하는 기우가 아주 짧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임수정은 이내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건 전혀 말이 안 되는 걱정에 불과하다.
“임수정입니다. 서른두 살이고요. 제가 어제까지 있던 곳은… 건대 쉘터였어요. 군인들이 운영하는 민간인 대피소였는데…….”
“건대? 어머, 여기에서 얼마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데네요?”
태권소녀가 깜짝 놀란다. 임수정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여기가 면목역 부근이면 그래요. 철책이 어린이대공원 부근까지 이어져 있으니까 실제로는 더 가깝고요…….”
임수정은 자신이 건대 쉘터에서 겪은 일들을 차분히 들려줬다. 중요한 일들만 추려낸다고 했는데도 그녀와 고 하사, 그리고 강 소위가 누명을 쓰고 쫓기는 몸이 된 사연까지 다 이야기하고 났을 때는 꽤나 긴 시간이 흘러 버렸다.
“그러니까… 그 고 하사라는 분하고 강 소위라는 분은 아직 그 역에 숨어 계실지도 모르는 거네요. 언니가 돌아오겠다고 했으니까요.”
“…붙잡히지 않았다면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태권소녀의 질문에 임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이 좀비들에게 당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얼른 돌아가서 그들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다. 그러나 물병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하는 지금의 체력으로는 무리다.
‘흠, 그래서 아까 삼식이가 일행이 있냐고 물었을 때 머뭇거린 거였나…….’
유빈은 임수정이 지금까지 해준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 전부 다 명쾌하게 이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특별히 허술하거나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은 없어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이 다 사실이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거짓말을 지어내는 사람은 항상 이야기가 그럴듯해질 때까지 다듬는 법이니까.
“어쨌든 건대 쉘터라는 데는 지금 갈 데가 못 되는군요. 미친 군인에… 일반인 코스프레 하고 있는 조직폭력배들에… 좀비들은 매일 덮쳐 오고…….”
유빈의 이야기를 들은 임수정은 쓸쓸하게 웃었다.
“말하고 보니까 그렇게 들리겠네요. 그런데 사실 어젯밤까지는 딱히 힘들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확 겉으로 드러나 버렸거든요. 물론 때도 가리지 않고 총소리가 울린다거나 하면 무섭기는 했지만요.”
“그… 건대 쉘터라는 곳에는 애초에 어떻게 가시게 된 거예요? 좀비 첫날, 그러니까 7월 14일부터 그런 데가 있었나요?”
“아니요, 건대는… 나중에 옮겨간 곳이에요. 살던 동네라서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지는 않을까 싶었거든요. 처음 구조돼서 간 곳은 잠실 쉘터였어요. 야구장이요. 거기에 사람들을 대피시켜 두고 보호해 줬어요.”
잠실 대피소. 거기는 유빈과 친구들도 안다. 전단지를 줍고 난 이후, 계속 그곳에 가는 걸 제일 큰 목표로 삼았었다. 산책로를 따라 자동차를 달리며 목표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롸아아아―
갑자기 좀비의 울음소리가 작게 들려오자 임수정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건물 내부에서 울려오는 소리다. 가까이에 있다. 보안관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늘 아침에 가둬놓은 놈들이 한 번씩 저렇게 소리를 지르기는 하는데, 위험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바로 이 건물 아래라서 소리가 생생하죠?”
“…가둬놔요? 좀비를? 어떻게… 아니, 그것보다도 왜요?”
“말하자면 길어지니까 나중에 자세히 알려 드릴게요. 그냥 그렇게 하는 편이 더 안전하고 편해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보안관의 설명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얼떨떨해 있는 임수정에게 유빈이 물었다.
“잠실은 어때요? 거기도 위험한가요? 사람은 많아요?”
임수정의 피곤한 안색을 보면 더 말을 시키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이 여자가 얼마나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확실히 확인해 두고 싶다.
전단지를 주운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잠실에 직접 가보지 않아도 거기에 쉘터가 있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는 거니까.
“잠실은 굉장히 커요. 사람들도 많고… 붐비고, 적어도 몇 만 정도는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군인들도 대규모라서…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어요. 탱크 같은 것도 보이고. 하여간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스케일이었어요.”
“몇 만… 그러면 유명 인사들도 많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정치인이든가, 무슨 대기업 회장, 이런 사람들도 돗자리 하나 깔고 자는 거예요? 언니, 물 한 병 더 드릴까요?”
혜주로부터 새 물병을 건네받아 마신 임수정은 도리질을 한다.
“아니요. 그런 사람들은 별로 못 봤어요. 그냥 보통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래도 대단한 스타는 한 사람 있었네요. 테라 아시죠? 핑크 펀치의…….”
“테라요?”
듣고 있던 네 사람이 동시에 같은 목소리를 내며 놀란다. 임수정은 그 반응이 테라의 생존에 대한 반가움이라고만 생각해서 희미하게 웃었다.
“우와, 역시 인기가 대단하네요. 잠실에서도 엄청났거든요. 지나가는 군인들마다 계속 먹을 것을 선물하고… 사물함이 꽉꽉 찼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한 게, 가까이에서 직접 보니까 정말 너무 이쁘더라고요. 이건 뭐랄까… 하아~ 사람이 아니에요. 성격도 얼마나 착한지… 왜 그래요? 다들 표정들이…….”
잠시 흐뭇한 기분이 되어 테라에 대해 회상하고 있던 임수정은 말을 다 맺지 않고 물었다. 모두들 겉으로 티는 내지 않고 있지만, 뭔가 불편한 심기가 엿보인다.
“아뇨, 별거 아닙니다. 피곤하실 텐데 저희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요. 좀 쉬세요.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하기로 하고요. 아, 배고프시면 저기 테이블 위에 있는 거 아무거나 다 드셔도 돼요. 화장실은 이쪽이구요.”
유빈이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한다. 임수정은 네 사람의 갑자기 돌변한 태도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네, 고마워요.”
차르르륵―
네 사람이 나가고 난 뒤, 셔터가 올라가는 소리가 난다. 임수정은 다시 멍해져서 물병을 꼭 쥔 채 자신 때문에 더럽혀진 시트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말실수를 한 건지 모르겠다. 하여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들이 갑자기 뭔가 대단히 심기가 불편해져서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방 밖으로 나와도 좋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다시 그들이 찾아올 때까지 자신은 이 방 안에서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테이블 위에 준비된 음식은 풍요롭지만, 호의는 거기까지였던 모양이다.
욱신, 머리가 또 아파져 온다. 임수정은 주머니에서 진통제를 꺼내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고 하사가 준 약. 이제 한 알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걸 다 먹어 없애고 싶지가 않았다. 임수정은 피딱지가 앉은 손으로 진통제 포장을 꼭 쥐었다.
“저 사람… 뭐지? 허언증 환자인가?”
모텔 밖으로 나온 보안관이 불쾌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삼식이도 머리를 긁적인다.
“그러게… 갑자기 테라가 등장하는 바람에 신빙성이 확 떨어져 버렸네.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옷은 더러웠지만……. 근데 숨어 있다는 그 군인 두 명 어쩌지? 좀 불쌍한데.”
“야, 그 말은 사실이겠냐? 그냥 나오는 대로 아무 소리나 막 하는 것 같은데. 테라랑 같이 지냈다고 하잖아. 제니가 들었으면 공연히 또 눈물 뺄 뻔했네.”
“저기 테라가 물렸다는 이야기는 나도 제니한테 얼핏 들었어……. 근데, 저 사람 말이 맞을 수도 있지 않아?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잖아.”
태권소녀가 이의를 제기해 본다. 하지만 곧바로 보안관의 반발을 샀다.
“뭐? 그러면 네 말은 제니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걔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
“아니, 너 왜 그렇게 성질을 내? 이건 무슨 제니 이야기만 나오면 발끈해서… 내 말은 걔도 잘못 알고 있을 수 있다는 거야. 예를 들어서 물린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거나, 뭐, 그런 거 말이야. 사실 너도 제니에게 이야기 들은 게 전부잖아. 네가 직접 그 현장을 본 것도 아니고, 다른 증인도 없었다고.”
“하긴…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항상 완전하지 않다는 건 맞는 말이야. 나도 그런 경험이 몇 번 있었거든. 분명히 아는 여자애라고 생각해서 말을 걸었는데 한참 이야기하다 보면 사실은 처음 만난 애더라고.”
삼식이가 태권소녀와 제니의 편을 동시에 들어준다. 하지만 그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보안관이 귀찮다는 듯 대꾸한다.
“그런 착각은 너나 하는 거지. 하도 여기저기 건드리고 다니니까.”
그렇게 친구들이 한마디씩 떠들어 대는 동안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유빈이 모두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하필 테라라고 했지?”
“뭐?”
“저 사람 말이야, 콕 찍어서 테라를 지목했어. 자기가 잠실에서 만났던 유명 인사로.”
“그래, 다 같이 들었잖아. 뭐 새로운 이야기라고 그런 눈빛을 하면서 중얼거려?”
“아니, 다시 생각해 봐. 그냥 허풍이라면 핑크 펀치를 만났다고 하는 게 더 일반적이지. 제니, 테라, 이 둘이 따로 떨어질 거라는 생각을 잘 안 하게 된다고. 게다가 제니가 아니라 하필 테라야. 우리가 제니와 함께 있다는 걸 저 사람이 알 리가 없는데. 정리해 보면 수많은 연예인 중에 핑크 펀치를, 그것도 둘 중에 한 사람만, 그리고 제니가 아니라 테라를 만났다는 거야. 이상하지 않아? 이 모든 게 다 우연히 들어맞은 허풍이라고 하기에는 말이야.”
유빈의 설명을 들은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본다. 듣고 보니 뭔가 그럴싸하기도 하다. 열이 좀 가라앉은 보안관이 유빈에게 물었다.
“그럼 네 결론은 뭐야? 테라가 정말로 살아 있고, 저 사람이랑 함께 있었다고?”
“그건 아직 몰라. 하지만 적어도 이야기를 더 들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야. 미친 사람 취급하기에는 너무 걸리는 부분이 많으니까.”
유빈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다시 모텔로 돌아가 임수정의 방문을 노크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라서 조금만 더 물어보고 싶었어요.”
유빈은 임수정의 발치에 앉았다. 조금 전 냉담하게 문을 닫고 나갈 때와 달리 엄청난 흥미가 눈에서 뿜어져 나온다. 임수정은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이렇게 구해주셨는데 그 정도로…….”
“테라와 함께 계셨다고 하셨죠?”
“네, 그랬어요. 며칠 정도뿐이었지만.”
“어떻든가요? 그러니까… 몸 상태 같은 것 말이에요. 아프거나… 다친 곳 같은 건…….”
뭐야,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나 했더니, 연예인의 몸 상태를 걱정한 건가? 이 사람, 테라의 팬이었나 보군…….
임수정은 조금 맥이 빠지는 걸 느끼면서도 순순히 대답을 해줬다.
“그냥… 건강했어요. 잘 웃고, 뭐, 물론 자면서 끙끙 앓기는 했고…….”
임수정은 잠시 망설였다. 별로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발가락이 잘렸다는 걸 알려도 될까 싶었지만, 그냥 사실대로 말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잠실 쉘터에서는 비밀도 아닌 이야기다.
“또 발가락이… 한 마디 정도 잘려 있어서 한동안은 걷는 데 애를 좀 먹었지만, 그 외에는 딱히…….”
“발가락이요? 어느 쪽 발? 어떤 발가락이요?”
유빈의 목소리가 커진다. 임수정은 기억을 더듬어봤다. 격리 시설에서 ‘언니도 맨발이시네요’ 하고 말을 걸던 날, 어떤 발을 내밀었더라?
“…왼발 새끼발가락이었어요.”
허어~ 유빈이 크게 한숨을 내쉰다. 임수정은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물어보기가 조심스러웠다. 어쩌면 이 사람은 테라의 회사 관계자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니저였을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굉장히 어려 보이는데.
“저기… 저는 믿고 싶어요. 지금 하신 말씀들이요. 혹시 증거가 있을까요? 누나가 테라랑 같이 있었다는 걸 증명할 만한 물건이나… 사진 같은 거 말이에요.”
유빈의 말에 임수정은 고개를 저었다.
“사진 같은 건… 없어요. 사진을 어떻게 찍겠어요. 카메라는 구경도 못해봤어요. 이런 싸구려 트레이닝복 배급 받는 것만도 감지덕지인데…….”
트레이닝복 소매의 고무줄을 늘려 보이던 임수정이 멈칫한다.
시계! 테라가 준 시계가 있다.
“아, 그래요. 있었네요. 이거예요.”
임수정은 자신의 팔목에서 시계를 풀어내 유빈에게 건넸다.
“제가 건대 쉘터로 오던 날, 그걸 줬어요. 같이 못 가서 미안하다고… 자기는 제니를 조금만 더 기다리고 싶다고… 그러면서 싫다는데도 억지로 쥐어 줬어요. 비싼 거니까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그걸로 바꾸면 된다고. 잠실 쉘터에도 암시장 같은 게 있었거든요.”
유빈은 건네받은 시계를 가만히 쳐다봤다. 시계 디자인 같은 건 잘 모르지만, 분명 제니가 이것과 유사한 모양의 시계를 차고 있었던 것도 같다.
제니라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유빈은 시계를 쥐고 임수정에게 부탁했다.
“이거, 잠시만 빌려주세요. 금방 돌려드릴게요.”
뭐지, 이 상황은? 그냥 대놓고 빼앗는 것도 아니고……. 물론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물건을 아까워할 수는 없지만, 저건 테라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인데. 비싼 거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저렇게 눈빛이 달라질 수 있는 건가?
임수정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러라고 했다. 안 된다고 버텨봐야 순순히 돌려줄 것 같지도 않았다.
“고맙습니다. 금방 가져올게요!”
유빈은 시계를 꼭 쥐고 모텔 밖으로 뛰어나갔다. 제니는 이미 모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태권소녀가 가서 이야기를 전하며 데리고 온 모양이다.
“오빠, 이게… 무슨 소리예요? 혜주 언니 말이, 테라랑 함께 지냈다고 하는 사람이라고… 오빠답지 않게 왜 그런 거짓말에 속아요?”
평소와 달리 제니의 얼굴에는 작은 원망과 불쾌감이 드러나 있다. 늘 웃던 그녀지만, 자신의 가장 후회스럽고 아픈 기억이 파헤쳐지고 희화화된다는 건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유빈도 이해한다.
하지만 임수정은 테라의 잘린 발가락이 어떤 것인지까지도 정확히 맞췄다. 물리는 광경을 직접 본 사람은 제니와 제비뿐이었고, 제비는 예전에 죽었다.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 같았다.
“이 시계, 테라가 자기한테 준 거래. 테라 시계가 맞아?”
어머! 유빈이 내민 시계를 보고 제니가 입을 감싼다.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제니는 바들거리는 손으로 시계를 쥐었다.
“하아~ 하아~ 이게… 이게 왜 그 사람 손에… 테라 거 맞아요.”
제니는 건네받은 시계를 자신의 시계에 나란히 댔다. 밴드의 색깔만 다를 뿐, 똑같은 시계다.
“근데, 그런 시계… 그냥 가게에서 사면 되는 거 아니에요? 어차피 인터넷에서 테라 시계, 이렇게 치면 모델명에 가격까지 쫙 다 뜨는데.”
규영이가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어 본다. 하지만 도리질을 하는 제니의 눈가는 이미 꽤나 젖어 있었다.
“이 시계… 중국에서… 제일 큰 백화점이 스위스에 주문해서 선물해 준 거예요. 거기 사장이 팬이라고… 딱 두 개만 만들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테라 맞아요. 그 언니, 테라랑 같이 있었다고 하는 그 언니 어디 있어요? 만나고 싶어요.”
제니는 감정이 북받쳐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리려 한다.
테라가… 테라가 살아 있다. 자신이 버려두고 와서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그 예쁘고 겁 많은 소중한 친구가…….
제니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가능성이 더 있다. 혹시 테라의 시체에서 이 시계를 훔친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는 걸 확인 받고 싶다.
“실례합니다.”
제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임수정의 눈이 커진다.
“어머, 어머! 세상에… 이게 뭐죠? 제니!”
“네, 처음 뵙겠습니다.”
“하~ 이런 일도 있군요. 쉘터에서는 테라를 만났었는데… 그 테라가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제니를 또 여기에서 내가 만나네요.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세상에…….”
임수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니가 시계를 꼭 쥔 채 용기를 짜내 물었다.
“테라가… 정말로 살아 있어요?”
“그럼요. 왜요?”
“뭘 입고 있었어요? 신발은요? 신발이…….”
테라는 신발이 없었어요. 차에 벗어두고 갔었는데… 라는 말을 하려는데 눈물이 나서 제니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날의 후회가 고스란히 살아나 가슴을 친다.
“테라는 까만 원피스를 입고 있었어요.”
임수정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제니의 표정이 바뀐다. 그날 마지막 보았을 때 테라는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다. 정체를 숨길 수 있는 편한 옷. 그러니 이 여자의 말은 시체를 묘사하는 게 아니다.
이제 이어지는 이야기는 완전한 거짓말이거나, 완전한 진실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제니의 마음을 모르는 임수정은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
“굉장히 짧은 치마였어요. 라인이 몸에 예쁘게 달라붙는… 시폰인지, 실크인지… 저는 여자지만 그런 걸 잘 몰라서… 하여간 얇고 하늘하늘해 보였어요. 가슴에 굉장히 선명한 색깔들로 무늬가 들어간 옷이었는데…….”
임수정이 거기까지 설명했을 때, 제니는 무너지듯 주저앉아 펑펑 울기 시작했다.
“흐윽~ 테라가… 흐윽~ 제일 좋아하는 옷…이에요. 으으으~ 베르사체 원피스! 흐으으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