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299화 (299/449)

5장 엇갈린 운명(3)

“아, 그 새끼, 진짜 어지간히 징징거리네. 그리고 왜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정작 끌고 나온 건 유빈이 이놈인데. 나도 낯선 동네 별로 안 좋아. 얘한테 말해!”

보안관은 유빈을 가리키며 투덜댄다. 삼식이는 그런 보안관의 옆구리를 간질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거야 보안관 너를 졸라대는 게 훨씬 더 재미있으니까 그렇지. 너는 조금만 귀찮게 해주면 막 짜증스러워하잖아. 유빈이는 그냥 건성으로 듣는단 말이야.”

“내가 무슨 짜증을 낸다고 그래, 미친놈아! 아, 더워! 만지지 좀 마!”

보안관은 겨드랑이를 움츠리며 삼식이의 손을 피했다. 오늘도 태양은 뜨겁고 습도는 높다. 며칠 내 비가 한 번 제대로 올 모양새다.

그렇게 가뜩이나 푹푹 찌는데 삼식이 놈까지 엉겨 붙으니 불쾌지수는 두 배, 세 배로 팍팍 뛴다.

“야… 너희, 좀 긴장감이라는 걸 가지려고 노력해 봐. 모르는 동네에 왔는데 너무 풀어졌잖아.”

유빈은 투닥거리는 두 친구를 돌아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지하철역으로 한 정거장 떨어진 이곳 면목역까지 자전거를 타고 좀비의 꽁무니를 쫓아왔다.

그래봐야 고작 1킬로미터 남짓의 거리이고 자전거까지 있지만, 항상 조심하는 마음으로 몸을 사려야 한다. 보안관이 땀을 닦아내며 툴툴거렸다.

“얼씨구? 삼식아, 이 새끼 말하는 것 좀 봐. 좀비 떼가 지나간 뒤를 따라서 그 모르는 동네까지 끌고 온 게 너잖아. 음식 숨겨놓을 비밀 기지 찾아야 한다고. 안 그랬으면 지금쯤 또 물에 들어가서 더위 식히고 있었을 텐데.”

“그래도 그 많은 좀비들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 방향이랑 경로는 궁금했던 거잖아. 그리고 어느 정도의 간격마다 한 번씩 다른 좀비들을 떨어뜨려 놓는지도 알아보고 싶었고.”

“방향 알기는 다 튼 것 같아. 저기에서 또 꺾는구만, 뭐. 그리고… 좀비들은 별로 떨어뜨려 놓는 것 같지 않은데?”

삼식이가 목에 건 망원경으로 좀비들이 걸어간 방향을 다시 살피며 중얼거린다. 유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 떨어뜨려 놓고 갔어. 그 말인즉슨, 여기 어딘가에 좀비들이 충분히 있어서 저 무리에서 딱히 새로 좀비들을 두고 갈 필요가 없다는 말인 거야. 그러니까…….”

유빈은 주변의 도로와 건물들을 한 번 돌아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저 건물들 사이에서 언제 좀비들이 툭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거네. 몇 마리나 되는지도 모르고.”

동네 전체의 분위기를 모르니까 빈 학교 건물만 봐도 괜히 으스스한 것 같고, 가슴이 콩닥거렸다.

슬슬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고개를 든다. 그때, 삼식이의 옆구리에서 치이익― 하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수신 감도가 좋지 않자, 삼식이는 지하철 역 앞의 개방된 공간 쪽으로 위치를 옮겼다.

[치이익― 치익― 여기는 제니, 여기는 제니! 치익― 삼… 오빠 나와라… 치익―]

이제야 뭐가 좀 들린다. 삼식이는 배낭 고리에 걸고 있던 무전기를 꺼내서 입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응, 나야. 왜에?”

[치이익― 거기… 치익― 어때요? 치익― 위험하… 는 않아요?]

수신 상태는 그리 좋지 않지만 대충 알아들을 수는 있다. 코스트코에 계절상품으로 비치되어 있던 장난감 비슷한 무전기. 오늘 처음 쓴다.

겉포장에 적혀 있기로는 유효 통신 거리가 5킬로미터라고 했지만, 실제로 나와서 써보니 이제 고작 1킬로미터 남짓 거리인데도 감도가 이 모양이다.

하긴 워낙 빌딩들이 많으니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확실히 나을 것이다.

“아, 괜찮아. 이제 슬슬 돌아가려고 하고 있어.”

[치익― 현재 위치가… 치이익― 어딘… 요.]

“응, 면목역. 정말로 딱 지하철 역 앞. 이 동네는 별로 높은 건물이 없어. 어엇! 보안관 저것 좀 봐.”

무전기의 ‘Talk’ 버튼을 끄지 않은 채 삼식이가 중얼거렸다. 유빈과 보안관은 삼식이가 가리키는 방향, 그러니까 지하철역의 계단 쪽으로 다가갔다.

컴컴한 그늘 속에서 산발을 한 여자 좀비가 계단을 네 발로 기어 올라오고 있다. 좀비의 손이며 옷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으아… 섬뜩하다.”

삼식이가 계속 무전기를 통해 중계 해준다.

“이런 식으로 등장하는 놈은 또 처음 보네.”

보안관은 어깨에 메고 있던 야구 배트 케이스에서 배트를 뺐다. 좀비치고는 엄청 느리지만, 저렇게 어기적거리다가도 갑자기 부웅― 뛰어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뭔가 느낌이 다르다.

“어? 사람 아니야?”

삼식이가 물었다. 보안관이 눈을 떼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기다려 봐. 좀만 더 보자.”

겉모습은… 아무래도 사람이다. 그렇지만 사람을 만난다는 게 좀비를 만나는 것보다 훨씬 더 이상한 일이어서 세 친구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선뜻 나서지를 못하고 있다.

“윽!”

계단의 중간쯤에 도달했을 때, 팔에 힘이 빠졌는지 여자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으~ 보고 있던 삼식이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터진다. 계단 모서리에 부딪쳐 터진 입술에서는 다시 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여자는 가까스로 몸을 다시 일으킨 뒤,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사, 사람이에요. 좀비… 아니에요… 도와주… 도와주세요.”

바짝 갈라진 목소리의 애원을 듣자마자 삼식이가 자동으로 뛰어 내려간다. 유빈이나 보안관이 만류할 틈도 없었다.

“저한테 기대세요. 일으켜 드릴게요.”

삼식이가 여자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여자는 멍한 눈동자를 껌뻑거리며 힘겹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여자가 사람인 걸 확인하고 나서도 유빈과 보안관은 혹시 무슨 함정이나 그런 게 아닐까 싶어 지하철역 내부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저 지경이 된 여자를 가지고 무슨 함정을 만들 수 있냐고 물으면 딱히 떠오르는 대답은 없지만, 그래도 워낙에 뒤숭숭한 시절이니까…….

“혼자예요? 저 안에 혹시 또 일행 없어요?”

여자를 반짝 들어 계단 위로 올라오면서 삼식이가 물었다. 여자는 흠칫 놀라며 지하철역 안의 어둠을 한 번 돌아보고 나서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어쨌든 다행이에요.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삼식이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줬지만, 유빈은 여자가 보여준 그 짧은 머뭇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이 사람… 뭔가 숨기는 게 있다.

“자요, 물이에요.”

여자를 역의 대리석 기둥에 기대 앉힌 뒤, 삼식이는 자신의 배낭에서 물병을 꺼내 여자의 손에 쥐어 줬다. 여자는 물병을 들어 올릴 힘도 없는지 계속 팔을 부들거리기만 한다. 바짝 마른 입술에서는 아직도 피가 새어 나오고 있다.

“하아아~”

삼식이의 도움으로 겨우 물병을 기울여 입을 축이고 얼굴을 닦은 여자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러고는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세 명의 남자를 천천히 둘러봤다.

“군인들은……?”

여자가 아주 힘겨운 목소리로 묻는다.

군인? 뭔 소리야?

세 친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유빈이 나섰다.

“군인은 없어요. 난데없이 왜 군인을 찾는 건지 모르겠네…….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좀 알려주세요. 왜 그렇게 다쳤어요? 손도 그렇고, 옷에 묻은 그거… 그거 그쪽 피예요?”

유빈의 질문을 들은 여자는 잠시 멍해져 있다. 서로가 서로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여자는 유빈이 가리킨 자신의 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트레이닝복에는 전동차 아래로 기어오며 묻은 시체들의 체액과 강 소위의 피가 범벅되어 있었다.

“아뇨. 이건 그냥… 시체…에서 묻은 거예요. 전 다치지 않았어요. 이 손은… 지하철 승강장에 기어 올라오다가 베인 거고요. 그 승강장에 전동 문이 있잖아요. 지하철 오면 열리는…….”

힘에 부치면서도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예전에 실처럼 가느다란 상처에도 호들갑을 떨며 총을 겨누던 군인들이 생각난 것이다. 물렸다고 생각하면 버리고 갈지도 모른다.

“힘드니까 그만 말해도 돼요, 시간이 있으니까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세요.”

삼식이는 여자를 만류하고 다시 물을 권했다. 더 떠들게 놔뒀다가는 탈진해서 켁, 하고 죽어버릴 것처럼 보였기에 유빈도 더 캐묻지 않았다. 물을 한 모금 더 마신 여자는 주변을 돌아보며 묻는다.

“이 쉘터는 왜 철책이 없어요? 그리고 군인들이 없다는 게 대체…….”

“네? 쉘터? 야, 유빈아. 쉘터가 뭐더라? 들어봤는데.”

삼식이가 유빈을 돌아본다. 유빈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 대피소인지 보호소인지 그거잖아.”

“아하! 맞다, 보호소!”

삼식이가 머리를 두드리며 설명을 해줬다.

“여기 쉘터나 그런 거 아니에요. 군인들도 없고요. 사실 우리도 이 동네 처음이에요. 우리는 여기서 한 정거장… 읍!”

속도 없이 떠들어 대는 삼식이의 입을 보안관이 틀어막았다. 녀석을 뒤로 보내는 동안 여자의 고개가 힘없이 까딱댄다.

조는 사람처럼 꾸벅거리던 여자는 스르륵 앞으로 고꾸라졌다. 털썩, 그녀의 손에서 떨어진 물병이 바닥을 적시며 구른다.

“주… 죽은 거야?”

보안관에게 붙잡혀 있던 삼식이가 겁먹은 목소리로 묻는다. 여자의 목덜미에 손가락을 대본 유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맥 뛰어. 그냥 탈진해서 기절했나 봐. 저기요! 일어나요! 정신 차려봐요!”

유빈이 팔을 잡고 흔들자 여자는 맥없이 땅바닥에 쓰러진다. 연기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보안관이 난감한 듯 머리를 긁었다.

“어쩌지? 어떻게 데리고 돌아가? 이러면 자전거를 못 타는데…….”

“업고 묶으면 되잖아. 몸무게도 많이 안 나가 보이는구만, 뭐. 왜? 저 사람 옷에서 피 묻을까 봐? 옷이야 새걸로 잔뜩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삼식이가 해맑은 얼굴로 대답한다. 유빈이 고개를 저었다.

“업는 거는 안 돼. 이 사람이 좀비로 변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토하지 않는 거 보니까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는데…….”

“다 토하고 올라와서 지금 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뻗은 건지 알 게 뭐야. 우리가 이 사람을 언제 봤다고. 하필 이 동네는 리어카도 없네. 평평하고 넓은 것 좀 찾아보자. 테이블이나 간판이나… 뭐, 그런 거에 묶어서 싣고 가야지.”

손을 털고 일어난 유빈은 삼식이가 바닥에 떨어뜨린 무전기를 주웠다.

치익― 치익―

무전기 저편에서는 제니가 계속 다급하게 물어보고 있다.

[치익― 오빠, 무슨 일이에요? 응? 왜 그래요? 치치익― 뭐가 섬뜩해요? 오빠, 괜찮아요? 대답해 줘요!]

하… 삼식이 이놈, 송신 버튼을 계속 누른 채 중계를 하고 있다가 갑자기 집어 던졌구나. 이러니 걱정을 하지……. 유빈은 잠시 제니의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는 틈을 타서 무전을 보냈다.

“어! 우리 무사해! 걱정하지 마!”

[치익― 걱정했… 요. 대체, 무슨 일이었던 거예요?]

유빈은 뭐라 대답할지 잠시 생각을 정리해 봤다. 지하철에서 피투성이 여자가 기어 나왔는데, 삼식이가 준 물을 받아먹고 지금 기절해 있어. 지금 그 사람 끌고 돌아갈 만한 수단을 찾고 있어…….

너무 길다.

“에… 삼식이가 사람을 한 명 구했어. 만나서 이야기해. 금방 갈게.”

짧게 정리한 유빈은 친구들 쪽으로 돌아갔다. 보안관과 삼식이는 식당의 탁자를 뒤집어놓고 탁자 다리에 여자를 묶어 고정시키는 중이었다.

머리 쪽에는 방석을 여러 겹 대줬다. 먼 길이라면 이렇게 해서 자전거로 끌고 가는 게 무리겠지만, 고작 1킬로미터니까.

상봉역으로 돌아온 유빈 일행은 그때까지도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여자를 코스트코 맞은편의 모텔 1층으로 옮겼다. 그들이 늘 망을 보던 바로 그 건물이다.

“왜 여기에 둬? 코스트코로 옮기지. 아니면 파라다이스 모텔로 데리고 가든가. 이제 와서 좀비로 변할 것 같지는 않은데.”

여자를 방에 눕혀두고 나와 삼식이가 유빈에게 물었다.

“조심하는 거지. 저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거 다 탈탈 털어 보여줄 필요는 없잖아. 집에 데려가는 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 해도 안 늦어. 그러니까 너도 저 사람이 묻는 이야기에 시시콜콜 다 대답해 주지 마.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착한 게 아니야. 아, 맞다. 사진!”

유빈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규영에게 빌려온 카메라로 여자의 얼굴을 찍었다. 그러고는 코스트코로 돌아가 태권소녀 앞에 카메라를 내밀었다.

“이 사람, 본 적 있어? 그… 전에 네가 말했던 인철이네인가 하는 패거리에 있던 사람이야?”

“아니, 처음 보는 사람이야. 하지만 인철이네가 다른 동네로 간 다음 거기서 만난 일행일 수는 있겠지. 나이는 좀 있는 것 같고… 그나저나 이 언니, 많이 다쳤네… 너희가 때렸어?”

사진을 보고 나서 태권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유빈은 헛웃음을 지었다.

“때리기는… 자기가 힘이 빠져서 계단에 부딪친 거야. 그전에부터도 이런저런 상처가 많더라고.”

“지금 어디 있어요, 이 언니는?”

제니가 물었다.

“저기… 길가 모텔에. 믿을 만한 사람인지 확인되기 전에는 계속 거기에 둘 거야. 너희들도 그때까지는 만날 생각 하지 마. 나랑 보안관, 삼식이는 어차피 얼굴을 보여줬지만, 그 외에 전체 일행이 몇 명이고 누구누구인지 다 보여줄 생각은 없거든.”

“너, 이 언니 속옷 풀어줬어? 브래지어 말이야.”

태권소녀의 질문에 유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난데없이… 브래지어 이야기를……. 내가 기절한 여자한테 그런 짓 할 사람으로 보여?”

“그럴 것 같더라. 풀어줘야 돼. 기절을 한 건지, 탈진해서 자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숨을 잘 못 쉰다고. 가뜩이나 호흡도 불안정한데 가슴이 조이면.”

“그런 거는 몰랐네. 근데 그렇게 조일 것 같지 않던데… 그 사람도 꽤 말라서…….”

태권소녀의 타박을 들은 유빈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태권소녀가 유빈의 등을 탁, 친다.

“하여간에 이렇게 여자에 대해서 모른다니까……. 가자, 그 언니한테. 내가 가서 속옷도 헐겁게 해주고, 이야기도 하고 해볼게.”

“아… 나는 혜주 너까지 끼어들지 않았으면 하는데… 아직 위험한 사람일지 아닐지도 몰라서…….”

“야,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해봐. 혼자 살아남았던 여자가 어찌어찌 구조는 됐어.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시꺼먼 남자 셋이 전부야. 어떨 것 같아? 얼마나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겠냐? 그럴 때 같은 여자가 끼면 대화가 한결 수월해지지. 본심도 나오고. 그리고 말이야…….”

말을 끊은 태권소녀는 유빈의 가슴을 가볍게 팍, 두들겼다. 워낙 빠른 잽이어서 유빈은 주먹이 지나간 뒤에야 몸을 움츠렸다. 태권소녀는 씩, 웃었다.

“위험할까 봐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내가 너보다 더 세.”

“그래요, 오빠. 혜주 언니랑 같이 가요. 제 생각에도 그 언니 깨어났을 때 남자들만 있으면 굉장히 긴장할 것 같아요. 대신에 저는 여기서 얌전히 기다릴게요.”

제니까지 혜주의 의견에 한 표를 던졌다. 듣고 보니 유빈의 생각에도 그게 더 현명한 것 같다.

“아, 정신이 좀 드세요? 목마르시죠?”

임수정이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임수정은 아직 완전히 떠지지 않는 눈을 깜빡이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키가 크고 늘씬한 숏 커트의 젊은 여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또 정신을 잃었던 건가……. 임수정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네.”

임수정은 꺽꺽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일어나 앉는 것도 꽤나 힘이 든다. 어제 밤새도록, 그리고 오늘까지 지하 선로의 암흑 속에서 무리하게 끌어다 썼던 체력이 경고등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전원 공급을 차단시켰던 모양이다.

숏 커트의 여자가 물병을 건네준다. 친절하게 빨대까지 꽂아뒀다. 임수정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을 빨았다.

찢어지고 부은 입술 때문에 몸 저 안쪽에 거대한 갈증이 끓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차츰 시야가 넓어지고 방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임수정은 자신이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도 꽤나 깨끗한 시트 위에. 아까 지하철역에서 자신을 구해줬던 세 명의 남자는 방의 맞은편에 앉아 있다.

침대에… 의자에… 이 숏 커트 여자가 입고 있는 말끔한 옷까지……. 뭔가 이질적이다. 좀비 세상 이전으로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멍해 있는 임수정에게 숏 커트의 여자가 자기소개를 한다.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 이름은 혜주고, 스물세 살이에요. 쟤들은 아까 보셨죠? 저기 저 덩치 큰 녀석은 보안관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그 옆에 멀끔하게 생긴 애는 삼식이, 그 옆은 유빈이. 전부 다 제 동생들이니까 언니도 편하게 부르세요.”

“야! 누가 네 동생이야? 친구라고 해야지!”

보안관이 발끈한다.

혜주, 보안관, 삼식이, 유빈이……. 임수정은 마음속으로 따라 읊었다. 하지만 여전히 얼떨떨하다.

대체 여기는 어딜까? 이 사람들은 어째서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걸까? 게다가 다들 조금도 기가 죽은 느낌이 없다.

“자, 기운 좀 차리셨으면…….”

임수정이 물병을 다 비울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혜주가 의자를 가져와서 침대 앞에 놓고 걸터앉으며 말했다.

“이제 언니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