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엇갈린 운명(2)
고 하사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잡히더라도 다 같이…….”
“쉘터의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세요. 우리만 힘들어지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가세요. 어서요!”
임수정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두 사내는 잠시 얼어붙어 있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비틀거리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치익, 강 소위가 라이터를 켜서 앞을 밝힌다.
탁탁탁탁탁―
발소리와 플래시 불빛이 가까워진 걸 확인하고 임수정도 달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추격자들은 그녀가 들고 있는 플래시의 희미한 빛을 따라온다. 자신들이 몇 명을 쫓고 있는지는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저기! 선로 위에 뛰어간다! 빨리 와!”
추격대의 선봉이 소리를 친다. 임수정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래… 쫓아와라…….
뭔가 뜻있는 일을 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신기하리만큼 용기가 났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고 하사가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시간쯤에도 멍하니 쉘터 벽에 기댄 채 두통에 시달리며 자살에 대한 망상이나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보다는 지금 이 순간이 훨씬 더 살아 있다는 느낌이 충만하다. 누군가를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거기 서! 쏜다!”
등 뒤에서 반복적으로 울리는 경고. 그러나 임수정은 멈추지 않았다.
타아앙―
총성이 울린다.
피이이이잉― 피이잉―
총알이 갇힌 공간의 공기를 가르며 기묘한 소리를 낸다. 그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다. 임수정은 허물어지려는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맞지 않아. 맞을 리가 없어.’
그렇게 스스로를 속여봤다. 근거도 있다. 어차피 깜깜한 지하 선로. 자신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면 한 명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한바탕 소란이 일었을 테니까. 그러니 지금의 사격은 그저 대충 방향만 맞춰두고 쏘는 위협 수준에 불과하다.
“하아~ 하아~”
임수정의 숨이 가빠진다. 가끔씩 헬스클럽에서 러닝머신 위를 달렸던 경험은 있다. 그러나 남자들의 뛰는 속도에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 뛴다는 건 꽤나 힘겨운 일이었다.
하루 종일 쫓기고 부축하느라 체력을 소진한 상태여서 더욱 힘에 부친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일, 여기에서 대충 끝내고 싶지는 않다.
‘기운 내, 임수정. 너는 독한 년이야. 강단이 있어. 연구소 다니면서 학위 논문 쓸 때를 생각해. 하루에 두 시간도 못 자면서 버텼어. 그때 생각하면 이런 건 힘든 것도 아니야.’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멈춰 서고 싶을 때마다 임수정은 자신이 가장 힘겹게 싸웠던 시절을 떠올렸다.
넓은 책상 위를 꽉 채운 책들, 그리고 속절없이 흐르던 시간.
그렇게 밤을 새워도 결과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책장을 찢어버리고 싶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길이 있고 답이 있다. 눈앞에 쭉 펼쳐진 선로, 저기를 따라 달리면 된다.
두 개 정도의 역을 더 지나간 뒤, 잠시 몸을 숨겼다가 수색대가 포기하고 철수한 뒤 다시 돌아오면 그걸로 끝이다. 고 하사를 다시 만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웃을 수 있다.
‘그래, 그거야.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야.’
당겨오는 옆구리를 꽉 움켜쥐고 달리면서도 임수정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남아 있었다.
이따금 한 번씩 선로 주변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만나면 가슴이 서늘해지지만, 그래도 주저앉지 않고 쉼 없이 발을 앞으로 뻗었다. 암흑 속에서 플래시 불빛이 정신없이 흔들거린다.
1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순식간에 주파해 중곡역에 도착한 임수정은 쉬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멈춤 없이 다음 역을 향해 내달렸다.
승강장과 만나는 이 긴 직선 구간이 어쩌면 가장 위험하다. 여기에서 추격대와의 거리가 줄어들면 정말로 총에 맞게 될 수도 있다.
“아! 젠장! 빨리 뛰어! 이 새끼들아! 저쪽에는 부상자가 있다고! 그런데 그걸 왜 못 따라잡아? 발포해!”
“시야가 확보되지 않습니다!”
“일단 쏴! 불빛 훤한 쪽에다 대고 갈기라고, 이 새끼야!”
뒤쪽에서 떠들어 대는 군인들의 소리. 그리고 잠시 후, 정말로 또 총성이 울린다.
‘정말로 죽일 셈인가? 재판조차 없이?’
임수정은 인정머리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병사들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추격자들이 그렇게 막무가내로 잔인해진 이유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 역시 낯설고 위험한 곳까지 나오게 돼서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다. 목숨을 내건 사람과 엉덩이를 뒤로 뺀 채 마지못해 흉내 내는 사람의 마음가짐 차이가, 그녀와 추격대 간의 거리를 유지시키고 있었다.
‘무서우면 돌아가! 이제 이만큼 했으니까 포기하라고!’
임수정은 작은 우월감을 느끼며 계속 내달렸다. 쉘터 바깥은 무섭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비록 지하라고는 하지만 이렇게나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다니…….
내가 달리고 있어! 게다가 군인들을 따돌리고 있어!
신선한 충격 때문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다음 역까지도, 그다음 역까지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헉! 이건…….”
휘어져 있던 구간을 돌아 나온 임수정은 발을 멈추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탈선한 지하철 전동차가 벽을 들이받은 채 멈춰 서 있다.
뒤틀리고 찢어진 쇳덩어리는 암흑 속에서 커다란 관처럼 무시무시해 보인다. 선로는 자빠진 전동차들로 꽉 막혀 있다.
임수정은 플래시로 전동차들을 비췄다. 박살 난 유리창에는 쏟아부은 것처럼 흥건한 핏자국이 검게 말라붙어 있다. 그리고 그 내부에는 끔찍하게 훼손당한 시체들이 뒤엉켜 썩어가는 중이다.
시체를 파먹고 있던 쥐들은 플래시의 불빛을 받아도 달아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걸어서 지나갈 만한 틈은 없었다. 여기를 통과하려면 전동차 위쪽으로 넘어가든지, 아니면 아래의 틈으로 기어 나가야 한다.
전동차의 크기가 꽤나 커서 임수정의 키로는 위로 넘어간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진정해, 진정해. 이것만 지나가면 돼……. 어차피 다 죽은 사람들이야. 괜찮아.’
임수정은 전동차 앞에서 스스로를 다그쳤다. 하지만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시체 더미와 쥐 떼 사이를 뚫고 전동차 너머까지 기어간다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는 동안 추격대는 바짝 쫓아왔다. 등 뒤를 밝히는 불빛의 밝기가 그들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방증해 준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임수정은 선로 위에 떨어진 채 썩어가고 있는 잘린 팔을 발로 밀어내고, 바닥에 엎드렸다. 찌지쥑, 쥐새끼들이 부근을 내달리며 바퀴벌레처럼 흩어진다.
“으으~ 으으~ 흐으으~”
임수정은 신음을 내뱉으며 시체들과 쥐들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몇 번이나 돌아 나오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추격대의 고함 소리가 그녀를 전진하도록 밀어붙였다.
“야! 쏴! 저기에 불빛이 보이잖아!”
타아앙― 타타타― 타앙―
근처의 돌들 위로 불꽃이 일고, 전동차의 쇠에 맞은 총알이 요란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더 시간을 끌다가는 그녀 역시 여기에 시체로 누워 쥐새끼들에게 눈알을 파 먹힐 것이다.
임수정은 재빨리 팔꿈치와 무릎을 움직여 기었다. 불과 몇 미터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지만, 세상에서 가장 구역질나고 끔찍한 곳처럼 느껴진다.
“흐으으~ 하아아~ 우웨엑.”
전동차 아래를 빠져나온 임수정은 몸에 달라붙은 부패한 살덩어리들을 털어내다가 구역질을 했다. 죽음이 혐오스런 모습과 냄새가 되어 자신에게 손길을 뻗어 오는 것 같다.
그녀는 다시 뛰었다. 이제 가장 어려운 장애물을 통과했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따가 돌아가는 길에 저길 다시 통과해야 된다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참아낼 수 있다.
“야, 여기로 넘어! 누가 좀 받쳐 봐!”
전동차를 타고 넘으려는 추격대의 외침이 들려온다. 임수정은 뒤를 힐끔거려 가며 속도를 올렸다. 벌써 또 다음 역이다.
여기가… 무슨 역이었지?
임수정은 연신 이마를 쓸었다. 분명 자주 다니던 노선이었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체력이 떨어져 눈앞이 일렁거린다. 들떠 있던 마음과 달리 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까지 모든 기력을 다 뽑아 써버린 모양이다.
“아……!”
역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 플래시를 좌우로 비추던 임수정은 절망스러운 광경과 마주하게 되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좀비들이 희미하게 그림자를 만든다. 자빠진 전동차에 가로막혀 있던 좀비들인가 보다.
“…왜 이렇게 많아… 하나, 둘, 셋…….”
좀비들을 헤아리며 달아날 방법을 찾고 있을 때,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플래시가 깜빡거린다. 깜빡, 그리고 다시 켜진 플래시는 방금 전에 비해 훨씬 더 어두웠다.
다시 깜빡…….
“아, 안 돼! 안 돼!”
임수정은 신경질적으로 플래시를 두드렸다.
깜빡― 잠시 어둠, 다시 플래시가 잠시 켜진다. 좀비들의 수는 더욱 불어나 있다.
안 돼…….
임수정의 애타는 바람을 배신하며 플래시는 매정하게 꺼져 버렸다. 완전한 암흑이 그녀를 덮친다.
“으아아아아! 으아아아!”
어둠 속에 갇히자마자 구조되던 날의 악몽이 그녀를 사로잡는다. 빛이라고는 전혀 없던 냉장고 내부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땀에 흠뻑 젖은 채 기었던 그 경험. 앞도 뒤도, 위도 아래도 구분되지 않던, 그 막막하고 끔찍한 심연.
임수정은 그 자리에 허물어져 버렸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고 하사를 설득하던 자신이 얼마나 오만하고 두려움에 대해 무지했던 것인지 뼈저리게 느껴진다.
플래시 불빛이 사라져 버리자 그녀의 용기도 자취를 감췄다. 바로 당장에라도 좀비의 더러운 손톱이 살을 찢고, 그 이빨이 목덜미를 파고들 것 같다.
“으으으으… 으으…….”
임수정은 빛이 사라지기 전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되살려 기었다. 승강장 아래에 분명 움푹하게 들어간 공간이 있었다. 거기에라도 숨어야 한다.
…어디에라도 숨어야 한다.
탁, 앞으로 내젓던 손이 벽에 부딪친다. 여기가 끝이다. 임수정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그 움푹한 공간 안으로 들어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별 효과가 없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그녀의 마음은 바닥까지 내몰려 있었다.
“야! 뭐야? 왜 불빛이 사라졌어? 놓쳤잖아! 아이, 썅! 수감자들이 자꾸 늑장을 부리니까 이 모양이지!”
뒤쪽에서 쫓아오던 추격대의 목소리, 그리고 희미한 플래시의 불빛.
임수정은 더욱더 작게 몸을 움츠렸다. 뭘 어떻게 해야 가장 자신에게 유리할지도 계산이 되지 않는다. 그저 어떻게든 이 위기가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이, 씨발! 진짜 좆 됐잖아. 못 잡으면 곡소리 날 거라고 무전으로 지랄하던데.”
“아니, 그게 왜 우리 잘못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 잡고 싶으면 박 소위 본인이 와서 잡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우리는 어디 있는지 알려줬으면 그걸로 된 거지 말입니다.”
역 입구에서 멈춰 선 추격대 병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어 댄다. 대여섯 명이 쉬지 않고 떠들어 대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칙, 누군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우리도 한 대 주쇼, 후배님. 죄수복 입었다고 담배 피울 줄 모르는 거 아닌데…….”
“후우~ 그럽시다. 자요.”
병사들은 함께 달려온 수감자들에게도 담뱃갑을 내밀었다. 담배 연기는 금방 선로 위를 가득 채웠다.
“근데, 혹시 불을 끄고 이 부근에 숨어 있는 거 아닙니까? 깜깜한 데 숨어 있다가 쏘려고…….”
“지랄, 영화 찍고 앉아 있네. 야, 그럴 것 같았으면 아까 그 전동차에 숨었다가 쐈지. 내가 볼 때, 이 새끼들 총알 없어. 다 떨어졌다고.”
승강장 입구 주변에서 담배로 심란한 마음을 달래고 있던 병사들 중 하나가 앞으로 몇 발짝을 내디딘다. 플래시의 희미한 광원이 반대편 승강장까지 비춘다. 숨어 있는 임수정의 눈앞에 병사의 전투화가 멈춰 선다.
“뭐야? 왜 그래?”
“아니, 그게 아니고 말입니다. 저기 뭔가 움직이는… 어엇! 어어어!”
병사는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총을 고쳐 쥐었다. 좀비들. 지금까지 오는 동안에는 보지 못했던, 많은 규모의 좀비들이 어기적거리며 걸어오고 있다.
“쏴! 쏴!”
수감자들이 비명을 내지른다. 겁에 질려 주저앉는 놈과 뒤돌아 뛰어가는 놈, 몽둥이를 고쳐 쥐는 놈이 한데 섞여 대혼란이 일었다.
그롸아아아―
좀비들은 두 팔을 들어 올린 채 그들의 뒤를 쫓는다.
타타타― 타타― 타― 타타타―
병사들은 덜덜 떨면서도 방아쇠를 당겼다. 여러 개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온다.
탁, 누군가 떨어뜨린 플래시가 바닥에 뒹군다. 피이잉― 난사된 총알은 임수정이 엎드려 있는 승강장 아래까지 날아와 그녀의 근처를 때렸다.
불빛에 아주 약간 기운을 얻은 임수정은 다시 벌떡 일어났다. 여기에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어! 저기! 저 여자! 저것도 한패 아닙니까?”
“미친 새끼야! 여자 내버려 두고 좀비 잡아! 물리면 뒈진다고!”
“으아아악― 으으! 끄으으! 살려줘!”
뒤쪽에서는 총성과 비명, 좀비의 포효가 한데 섞여 대혼란이 일어났다. 임수정은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비추는 플래시 불빛이 앞쪽을 조금이나마 밝혀줄 때 뛰어야 한다.
그롸아아아―
희미한 그림자가 덮쳐 온다. 히익, 임수정은 목을 움츠렸다.
타아앙― 타아앙―
그녀를 향해 아가리를 벌렸던 좀비가 가슴을 맞고 뒤로 날아간다. 임수정은 알고 있는 모든 신의 이름에게 이 우연을 감사하며 속도를 높였다.
점점 주변이 어두워진다. 그리고 곧 암흑이 되었다. 이제는 바로 코앞에서 좀비와 부딪친다고 해도 모를 것이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이는 계속 딱딱 부딪친다.
끄아아― 타타타타― 투투둑― 투투둑―
멀리 뒤쪽에서는 아직도 총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울려 댄다.
“컥! 으허억!”
선로에 놓여 있던 무언가에 발이 걸린 임수정은 부웅, 날아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뭔지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걸로 봐서 좀비는 아닌 것 같다.
하아아~ 하아아~ 눈뜬장님이 된 임수정은 다시 기어가기 시작했다. 벽을 짚고 일어나려던 그녀는 따끔한 고통 때문에 몸을 움츠렸다.
주르륵, 뜨거운 피가 손바닥을 타고 흐른다.
“뭐지? 이거… 그냥 벽이 아닌데?”
임수정은 베인 손을 다시 뻗어 벽 쪽을 더듬거렸다. 날카로운 쇠파이프와 깨진 유리의 단면이다.
“…승강장!”
임수정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두 손을 뻗었다. 단단한 대리석 바닥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한결 호흡이 편해진다. 임수정은 안간힘을 쓰며 승강장 위로 기어올랐다.
이제… 암흑은 지긋지긋하다.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서 빛을 보고 싶다. 어차피 좀비의 이빨에 찢겨 죽어야 한다면 그래도 햇살 아래에서 죽는 편을 택할 것이다.
그녀는 기다시피하며 계단을 찾았다. 이따금씩 손에 걸리는 물컹한 물체가 전신에 소름을 돋게 만든다.
분명히… 사람의 몸이다. 죽어버린 사람의 차가운 촉감. 암흑 속에서 시체를 타 넘고 지날 때에는 등골이 오싹하다. 당장에라도 시체가 손을 뻗어 그녀의 발목을 잡아챌 것 같다.
“계단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
계단에 손톱을 찧은 임수정은 잠시 두 손을 모았다가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참의 위치를 몰라 손을 헛짚는 바람에 몇 번이나 고꾸라질 뻔했지만, 그래도 난간을 꼭 붙잡고 버텨냈다. 그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서 겨우 한 층을 올라왔다.
지하 2층의 어둠 속에 익숙해져 있던 임수정의 눈은 어두컴컴한 지하 1층에서 희미하게나마 사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 아주 작은 양의 햇빛이 들어와 반사된 것뿐인데도 시각이 회복된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녀는 더 밝은 곳을 향해, 빛이 들어오는 곳을 향해 걸었다. 걸어가면서도 자신이 뭘 바라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혹사당한 두 다리는 후들거리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마음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다. 만약 지금 다시 좀비를 한 마리라도 만난다면 그걸로 끝이다.
더 이상은 뿌리칠 용기도, 달아날 기운도 없다.
지상으로 이어진 계단 앞에서 그녀는 풀썩 쓰러져 버렸다. 바깥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막상 그럴 수 있게 되니 두려움이 앞섰다. 거대한 좀비 무리들이 기다리고 있는 절망적인 모습이 상상된다.
“아아~”
임수정은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입술이 바짝 말라 찢어지는 것 같다. 다시 돌아가겠다던 자신의 약속이 얼마나 큰 만용이었는지 다시 한 번 실감된다.
그녀는 이제 곧 죽게 될 것이다. 근처를 지나는 좀비가 포식을 하겠지…….
그렇게 그녀가 모든 것을 다 포기한 채 계단을 베고 누워 햇살을 쬐고 있을 때, 위쪽의 거리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그만 가자. 여기 별로 볼 것 없어. 나는 오늘 미끼 역할 하느라고 엄청 피곤하단 말이야. 근데 왜 이렇게 멀리까지 끌고 와? 응? 보안과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