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3)
“일단 물이야. 지금 상황에서는 물이 제일 중요해. 총알은 여기 있으니까.”
진우는 옆으로 비껴 멘 가방을 두들기며 중얼거렸다. 다른 곳을 경유하지 않고 쭉 도로를 따라 직진하기만 한다는 가정에서, 적어도 4일치 소비할 물은 필수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여유를 둬서 5일치쯤은 가져가는 게 좋다.
배고픔은 하루쯤 참아도 되지만, 목이 마른 채로 하루를 걷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 요즘처럼 태양이 달아올라 기승을 부릴 때는 더욱 그렇다.
“어디… 보자, 하루에 너랑 나랑 각각 생수 큰 거 한 병씩만 먹는다고 치면… 우와, 그거만 해도 닷새 치면 거의 20킬로그램이 되네.”
손을 꼽아보던 진우는 새삼 놀랐다. 물론 하루하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무게가 줄겠지만, 짊어지고 가기에는 무리인 무게다. 거기에 식량의 부피와 무게도 더해야 한다.
일반 가정집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음식들은 전투식량처럼 수분을 완전히 제거해 압축해 놓은 게 아닐 테니 꽤나 무겁고 부피도 클 것이다.
“리어카를 끌고 가야 하나… 아니야. 그거는 길 막힌 데에서 자동차 사이로 빠져나가기가 힘들어. 그런 거 말고… 여행용 캐리어나 바퀴 달린 장바구니… 그런 종류가 낫겠다. 시골이니까 할머니들 장터에서 물건 사 가지고 올 때 쓰는 거 있겠지. 그치, 삼식아?”
들떠서 정신없이 혼잣말을 떠들어대는 진우를 삼식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훗, 진우는 미소를 지었다.
“미친 게 아니라 좋아서 그러는 거야. 정말 까마득하게 멀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제 손에 잡힐 것 같거든.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아도 돼. 봐봐, 자, 표정 이렇게 하면 멀쩡하지?”
진우는 애써 진지한 얼굴 연기를 선보였다. 하지만 마음이 들뜨는 것은 사실이다. 여행용 캐리어… 여행용 캐리어… 라고 흥얼거리던 진우는 곧 훨씬 더 좋은 것을 발견했다. ‘농협 마트’라는 로고가 찍힌 쇼핑 카트다.
“어이쿠, 뉘신지 모르지만, 어르신 아주 좋은 거 챙겨 오셨네…….”
진우는 카트에 들어 있던 장작들을 밖으로 집어 던지고 자신의 배낭과 가방부터 담았다. 그 두 개의 무게를 덜고 나니, 숨쉬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지도책도 배낭 안에 담았다.
“바퀴에는 구리스 칠 좀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뭐, 농기구들 쓰니까 금방 찾을 수 있겠지.”
카트를 앞뒤로 굴려보고 방향도 바꿔보면서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바람에 조금 녹이 슬고 먼지가 뽀얗게 앉았지만, 이게 어딘가. 잘 굴러가고 많이 실을 수 있다. 게다가 폭도 그리 넓지 않아서 자동차들 사이로 통과하기도 좋다.
진우는 카트를 끌고 삼식이와 함께 집집마다 들어가서 필요한 것들을 담았다. 구제 시장에서 쇼핑을 하는 기분이다.
다만, 가끔씩 문을 열었을 때, 썩어가는 동물의 시체나 사람 시체가 반겨줄 때도 있으니까 언제나 긴장을 풀면 안 된다.
“카트가 생겨서 무게에 그렇게 민감해질 필요 없네. 이럴 줄 알았으면 총도 가지고 올걸. 저격총 좋은데…….”
카트 안에 참치 통조림을 던져 넣던 진우는 두고 온 총과 실탄들이 떠올라 잠시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젓고 잊기로 했다.
그걸 다 끌어안고 있었으면 아직도 포화가 피어오르는 산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
“가만있어 보자… 이렇게 막 담을 게 아니라 가벼운 가방을 몇 개 담아서 그걸로 분류를 해놔야겠다. 하루치씩 딱 싸놓으면 계산하기도 좋고…….”
정신없이 물건들을 쌓던 진우는 새로운 포장법을 따랐다. 장바구니를 다섯 개 펼쳐놓고, 거기에 순서대로 물건을 채운다. 불필요한 욕심을 부리지 않을 수 있어서 효율적이다.
“이거 어떠냐, 삼식아? 나한테 어울리는 느낌?”
판초 우의를 찾아낸 진우가 옷 위에 걸치고 두 팔을 벌려 보였다. 삼식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응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싸구려라 그럴 것 같기는 했다. 흥, 까다로운 놈.
“그냥 며칠만 참아. 어차피 밤에 추워질 때만 입을 거니까 잘 안 보이잖아.”
진우는 녀석의 머리를 쓸어주고 우의를 접어 카트에 담았다. 예전에 총을 잃어버릴 뻔했던 마을에서 쇼핑에 몰두해 있던 때의 일이 생각난다.
그때, 군인들에게 에워싸였다가 토할 만큼 뛰었던 경험도 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는 마음이 편하다. 만약에 화약 냄새 풍기는 군인들이 근처로 다가온다면 삼식이가 먼저 냄새로 알고 경고를 해줄 테니까.
“결국 물이 제일 넉넉하지 않네. 믿고 마실 만한 물이 별로 없어.”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쇼핑의 결과물을 확인해 보던 진우가 중얼거렸다.
통조림, 건빵, 미숫가루, 라면, 사탕, 돗자리에 담요 두 개, 비상약, 장갑, 휴지, 빈 그릇들, 수저, 수건, 옷가지 몇 개, 예비 플래시에 배터리까지 다 어느 정도 넉넉히 챙겼는데, 결국 모자라는 건 또 물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다들 어딘가에서 물을 길어다 먹거나 끓여 먹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무거나 마실 수 있는 건 다 담았다.
박카스, 캔 커피, 사이다, 이온 음료, 두유… 그리고 페트병에 든 소주도 한 병.
비바람이 부는 날에 체온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댔다.
“으음, 다 챙겼나? 까먹은 거 없지? 어째 너무 사치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묵직해진 카트를 보면서 진우는 빨랫줄을 앞쪽 철망에 동여맸다. 만약 음식이 꽉 찬 초반에 가파른 언덕길을 만나면 삼식이 녀석이 끌고 자신이 뒤에서 밀어야 한다. 그때, 이 줄을 풀어 삼식이에 묶을 계획이다.
“자, 이거 먹고 기운 내서 출발하자.”
마을 어귀의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진우는 커다란 냉면 그릇에 여분의 참치 통조림과 스팸, 마른 멸치, 건빵을 한꺼번에 부어 섞었다.
개밥이라고 해서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고? 무슨 소리인가, 어차피 그 자신도 똑같은 걸 먹을 건데.
진우는 섞은 음식의 1/3만 뜨고 나머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와구, 와구, 삼식이는 신이 나서 먹어 댄다.
“맛있다. 그치?”
진우도 수저를 핥으며 미소를 지었다. 얼― 삼식이도 아주 적극적으로 동의해 준다.
세상에… 며칠간 그 딱딱한 특수부대용 전투식량과 인삼만 먹었던 터라, 참치 기름이 듬뿍 묻은 건빵이 아주 살살 녹는다.
남은 여정의 좋은 징조인 것 같아서 진우는 웃었다. 대지를 달구는 태양조차 사랑스럽다. 눈앞에 보이는 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해서 100킬로미터. 그것만 가면 목적지에 다다른다.
☆ ☆ ☆
같은 시각, 잠실 쉘터에서는 두 약골의 자존심을 건 레이스가 또 펼쳐지고 있었다. 속도 면에서는 레이스라는 거창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였지만, 참가자의 열의만큼은 그 어디에 내놔도 뒤처지지 않을 수준이다.
“헥, 헤엑, 헥, 많이 늘었군. 하지만 이 챔피언에게 도전할 수준은 아니야! 그러기에는 우리의 클래스가 너무 달라! 헤엑, 헥, 헥…….”
젠킨스가 숨을 할딱거리며 잘난 척을 한다. 하지만 현실의 그는 민구의 등을 보고 걸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둘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져 갔다.
젠장, 저 괴물 같은 인간. 어제보다 또 더 빨라졌다. 도대체 저렇게 커다란 상처를 옆구리에 가진 인간이 어째서 저렇게 걸을 수 있는 건지…….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회심의 전법이 있다. 젠킨스는 살이 늘어진 볼을 부르르 흔들었다. 이 게임, 아직 져줄 생각이 없다. 적어도 환자보다는 빠른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그가 숨을 헐떡이며 뒤처지는 사이에 민구는 벌써 야구장의 한쪽 끝을 찍었다. 벽을 짚고 잠시 숨을 고른 민구는 몸을 돌려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걷기 시작했다.
“히익!”
민구가 턴을 한 걸 확인하자마자 젠킨스도 숨넘어가는 다급한 소리를 내며 뒤돌아 걸었다. 이것이 그가 가진 비장의 전술이다.
거리가 얼마나 벌어져 있든 간에 민구가 턴을 하면 그도 턴을 한다. 그리고 출발 지점까지 먼저 도착하면 자신의 승리다.
처음부터 멀리까지 따라오지 않고 아예 출발 지점 부근에 머무르는 비겁한 수는 쓸 수 없다. 민구가 턴을 하는 순간을 보지 못하면, 젠킨스 자신의 패배니까.
애초에 그가 혼자만의 룰을 만들 때, 그 정도의 페어플레이는 하기로 했다. 그게 정정당당한 승부다.
지난 며칠 동안 젠킨스는 이 게임에서 계속 이겼다. 하지만 오늘, 견고해 보였던 그의 왕좌가 위협받고 있다.
“헤엑―! 저 괴물! 점점 더 가까워진다!”
뒤를 돌아볼 때마다 민구와의 거리가 줄어든다. 젠킨스는 뒤뚱거리며 최선을 다해 걸었다.
제기랄, 이런 승부 애초부터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 그랬더라면 질 일도 없는데…….
헤엑, 헤엑, 폐는 터질 것 같고, 허벅지는 풀렸다. 눈이 따끔거린다. 살면서 이만큼 지독하게 자신의 육체를 혹사해 본 적이 없다.
“바로 저기… 바로 저기까지만 가면 돼……. 바로 저기까지만… 헤엑, 헤엑…….”
젠킨스는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씻어내면서 필사적으로 다리를 들어 올렸다. 골인 지점인 두 사람의 돗자리까지 이제 겨우 10여 미터. 여기에서 포기할 수는 없다.
힐끔 뒤를 돌아보니 민구는 어느새 바로 몇 미터 뒤까지 추격해 와 있다. 이익, 젠킨스는 이를 악물었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휘청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끌어 올릴 때마다 무릎이 쑤셔온다. 결국 마지막 2미터를 남겨놓고 젠킨스는 고꾸라졌다.
우당탕! 앞으로 넘어지며 구르는 젠킨스의 시야에 민구의 모습이 들어온다. 분명히 자신보다 결승선을 늦게 통과했다.
“하아~ 하아~ 이겼다! 이겼어! 내가 챔피언이야! 승자는… 헤엑, 헤엑… ‘아직도’ 무패의 챔피언! 타일러 더 매드 사이언티스트~ 젠킨스!”
젠킨스는 당겨오는 옆구리를 꽉 움켜잡은 상태에서도 입을 쉬지 않고 놀렸다. 몸은 고통스럽지만 승리의 쾌감은 너무나 짜릿하다.
다들 이래서 운동경기에 그렇게나 열광했던 모양이다. 권투 링 아나운서의 말투까지 흉내 내가며 승리를 만끽하는 젠킨스를 보면서 민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 이상한 방식으로 열 받게 구는군……. 하아~ 하아~”
말의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녀석이 기뻐한다는 것과 챔피언이라는 단어만은 알겠다.
챔피언이라니, 네놈은 다 완주를 하지도 않았잖아…….
민구는 저려오는 갈비뼈를 잡았다. 이 녀석, 분명히 요즘 자신을 따라 걷는 것 같은데, 중간에 되돌아온 주제에 계속 승자인 척 난리를 피운다. 이놈 때문에 민구도 덩달아 오버 페이스를 하고 있다.
네가 이긴 게 아니야. 끝까지 갔다가 돌아와야지!
그 말을 영어로 설명할 수가 없으니 그냥 내버려 두고 있지만, 미묘하게 자존심이 상한다. 오늘은 거의 다 따라잡았는데… 이놈이 술통처럼 굴러 들어오는 바람에…….
민구는 숨을 고르며 화를 가라앉혔다. 두들겨 패주는 건 일도 아니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그 자신이 개운치가 않다. 확 따라잡아서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 기분이 풀릴 것 같다.
“헤엑, 헤엑, 에너지… 탄수화물…….”
큰대자로 뻗은 젠킨스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사탕을 꺼냈다. 두 알을 급하게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던 젠킨스는 고개를 돌려 민구를 보며 사탕 한 알을 들어 올렸다.
“헤엑~ 유 원트 잇? 헤엑~ 헤엑~ 원 시가렛.”
“…미친놈.”
민구는 대답 대신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녀석을 외면해 버렸다. 붕대를 대신 감아주는 거래를 튼 이후, 어찌나 장사를 하려고 드는지… 뭐든지 다 담배 한 대란다. 항상 바가지를 씌우고 싶어서 눈이 벌겋다.
“응? 이건 뭐야?”
숨을 헐떡이며 물을 마시고 있던 민구의 곁으로 어린아이 한 녀석이 아장거리며 걸어온다. 아직 기저귀도 떼지 않은 꼬마다.
“아찌, 아찌.”
‘아찌’가 아저씨라는 뜻임을 민구가 파악했을 때쯤, 꼬마는 질질 끌고 온 비닐봉지를 돗자리 위에 털썩 내려놓았다. 꼬마가 손가락으로 민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머거.”
뭐지, 이건?
민구는 꼬마가 떨어뜨려 놓은 비닐봉지와 녀석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용케 살아남았군, 이런 몸으로.’
꼬마의 짧고 작은 팔다리를 보며 민구는 생각했다. 멀쩡한 성인들도 대부분 버티지 못하고 괴물이 되어버렸는데,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놈이…….
녀석의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구해낸 보호자의 힘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비닐봉지에 든 건 주스 두 팩, 사탕 한 봉지.
단출하지만 누가 봐도 저 또래의 꼬마가 쉽게 남을 위해 포기할 내용물은 아니다. 모든 물자가 넉넉하지 않은 이 수용소에서는 더 그렇다.
“야!”
민구는 봉지를 주워 다시 꼬마에게 쥐어 줬다. 괜히 애새끼 거 빼앗아 먹었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다.
으차, 꼬마는 봉지를 또 민구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찌 머거. 쥬쯔! 쥬쯔!”
꼬마는 주스 팩을 가리킨 손가락으로 민구를 향해 삿대질을 해 댄다. 녀석이 사람을 착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쯤 되면 누구의 소행인지 민구도 짚이는 게 있다.
그 바짝 마른 계집애… 테라. 늘 어린애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더니, 결국 이렇게 애새끼에게 심부름을 보냈다.
“쥬쯔!”
심부름을 마친 뒤에도 꼬마는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연신 주스를 외쳐 댄다. 민구는 녀석이 왜 그러는지 뒤늦게야 눈치를 챘다.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녀석도 주스에 욕심이 난 것이다. 참 바보 같군. 그까짓 걸 알아채는 데 그렇게 한참이 걸리다니…….
민구는 속으로 웃었다. 뭐, 당연하다. 지금까지 사는 동안 이런 또래의 아이와 함께 있어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먹어.”
민구는 주스 팩에 빨대를 꽂아 꼬마에게 내밀었다. 녀석은 곧바로 빨대를 물고 힘차게 빨아들인다. 한참을 쭉쭉거리던 꼬마는 카- 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참았던 숨을 쉰다.
꼬마가 주스 마시는 걸 주목하고 있던 젠킨스도 흐으~ 하고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마이따? 마이따?”
물어보는 말인지, 감상을 말하는 것인지 모를 소리를 두 번 반복하고 꼬마는 또 주스를 마저 빤다. 녀석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며 민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곳으로 옮겨온 후, 그 깡마른 계집애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다. 대부분 먼발치에서였지만, 한두 번은 바로 근처를 스쳐 지났다.
제아무리 야구장이 넓다고는 해도 어차피 폐쇄된 공간이고, 먹는 곳, 싸는 곳이 정해져 있으니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 계집애는 고개를 숙이고 외면한 채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민구 본인도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다.
이 몸뚱이 꼬라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이런 모습. 딱히 그녀뿐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일부러 보여주고 싶은 꼴은 아니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넌 머리가 나쁘냐?”
이 쉘터를 떠나기 전 테라가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민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단순히 자신과 얽히면 그녀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아 한 말이 아니었다. 그 가시 돋친 말들은 그녀를 보면 뭔가 마음이 약해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책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꼬라지가 되어 돌아왔기 때문에 그녀와의 인연이 다시 얽히려 하고 있다. 그것도 대등한 게 아닌 동정 받는 관계로… 그것만큼은 정말이지 사양하고 싶다.
‘아무래도 한 번 정리를 해야겠군…….’
테라는 부근의 코너에 숨어 아이와 강 실장이라는 남자, 그리고 젠킨스를 보고 있었다. 워낙에 똑똑한 아기라서 심부름을 잘해주리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다.
과연 아기는 주스를 무사히 전달하고 대접까지 받고 돌아온다. 주스 두 개 중에 하나를 전달했다. 젠킨스를 심부름꾼으로 채용했을 때보다 몇 배나 뛰어난 효율이다.
“테다야.”
아장아장 걸어오는 아이가 테라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이며 방긋 웃는다. 테라는 얼른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유~ 우리 예쁜 애기, 심부름 잘했어요?”
“어.”
“고마워요, 왕자님.”
테라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을 때, 그녀의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갑작스런 인기척에 놀라 테라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앞에는 민구가 서 있었다. 서둘러 걸어오느라 꽤나 고통스러운 표정이다.
“아…….”
테라가 당혹스러워하며 눈을 내리깐다. 후우~ 후우~ 숨을 고른 민구는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뭐하자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