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공존 (5)
“아, 또 왔나 보네. 작업하는 시간이 아니라 다행이기는 하지만…….”
고 하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불빛이 번쩍이는 북쪽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몇 개의 건물들이 그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상황이 뭔지는 파악되지 않는다.
“고 하사님도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임수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야간에 총성이 들리는 건 낯선 경험이 아니다. 수용자들 대부분이 워낙 익숙해져서 어지간한 총소리 정도에는 잠에서 깨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그녀는 군인과 함께 있다. 그것도 일반 병사가 아니라 이 쉘터에 몇 명 되지 않는 부사관이다. 그게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고 하사는 고개를 저었다.
“저요? 아뇨. 저는 전투병이 아닙니다. 쟤들 총 쏘다가 괜히 총열 만져서 데이거나, 어설프게 뛰다가 넘어져서 까지면 그 정도나 치료해 주는 사람이에요. 그나마도 지금은 다른 녀석한테 넘겨주고 왔고요. 전투 지휘는 장교들이 알아서 잘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고 하사는 임수정을 안심시켰다.
탕― 타타탕― 탕― 탕―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고 하사의 장담을 뒷받침해 주기라도 하는 듯, 잠시 후 총성이 잦아들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갔네요. 작은 규모 놈들이었나 봅니다.”
고 하사가 임수정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임수정은 의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고 하사의 손을 꼭 쥔 그녀의 손은 계속 떨린다.
“무서우세요? 괜찮아요. 군인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아… 저도 머리로는 그렇다고 생각하는데요, 전에 구조되기 전에 보니까 군인들도 정말 목숨을 걸고 싸우더라고요. 그때 기억이 자꾸 되살아나서요. 재수 없는 말은 하면 안 되는데… 철책으로 쌓은 방어선이라는 것도 좀비들이 워낙 많으면 금방 무너지는 거더라고요.”
말을 하는 동안에도 임수정의 몸은 차가워진다. 구조되던 첫날, 강서 정수장에서 천막 틈 사이로 지켜본 전투는 너무도 끔찍했다. 머리가 터지는 좀비들, 그 강렬한 기억은 아마 평생 동안 남을 것이다.
평생…이라고 해봐야 그게 몇 년이 될지, 아니면 며칠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여기는 다릅니다. 워낙에 중대장님이 유능하신 분이라 방어선을 몇 겹으로 잘 구축해 놓으셨거든요. 아, 그리고 맨몸으로 좀비 세상에 뚝 떨어져도 어찌어찌 생존하는 방법이 있다더라고요.”
고 하사가 임수정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임수정은 못 믿겠다는 눈치다.
“저는 상상이 안 되네요. 한 시간도 못 버틸 것 같은데…….”
“첫째!”
고 하사가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따로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으면 지하철로 들어가야 한답니다. 거기는 좀비들이 잘 들어오지 않고, 그 안에서 좀비들을 만나더라도 훨씬 약한 놈들뿐이래요. 캄캄한 데는 좀비들이 싫어한대나 어쨌대나…….”
“그건 이상하네요. 좀비라는 게 뭔가 어두운 걸 더 좋아할 것 같은데.”
“근데 그렇지가 않대요. 그리고 둘째, 이거는 임수정 씨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기는 한데…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한답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좀비들이 담배 연기에 아주 환장을 한대요. 이 쉘터 주변에 좀비들이 꼬이는 것도 다 담배 냄새와 환한 불빛 때문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후후후, 그것도 거짓말 같아요. 고 하사님은 어디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어요?”
조금 여유를 되찾은 임수정이 물었다. 고 하사는 바지주머니에 넣은 D.E.M.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거 준 사람이 말해준 거예요. 그 사람은 좀비라고도 안 부르고 괴물이라고 하던데… 하여간 좀비 박사더라고요. 우리는 전혀 모르는 이야기들을 해줬어요. 그런데 그 사람 몸이랑 눈빛을 보면 그 황당한 이야기들이 다 허풍 같지가 않게 들렸습니다. 흉터들만 해도 워낙 파란만장해 보이고…….”
한창 좀비 이야기를 떠들던 고 하사는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소중한 데이트가 아닌가. 그래서 말을 끊고 임수정을 바라보았다.
“저기… 우리요, 조금 전에 서로 꼬옥 안아주는 분위기였는데… 그놈의 총소리가 훼방을 놔서…….”
고 하사가 쑥스러워 하며 중얼거렸다. 임수정은 고 하사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땀 냄새와 담배 냄새가 진하게 섞여 있지만, 그마저도 어딘가 인간적으로 느껴져서 좋았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건 암울하기만 한 이 상황에서 너무도 큰 선물이다.
쿵쾅, 쿵쾅, 가슴에 닿은 귀를 통해 고 하사의 심장박동이 또렷하게 들려온다.
“하아… 피곤하실 거 잘 아는데, 너무 좋아서 떨어지고 싶지가 않군요. 그래도 돌아가야겠죠?”
길고도 긴 포옹을 끝내고 난 후, 고 하사는 아쉬움이 가득 남은 얼굴로 말했다. 임수정은 대답 대신 웃었다. 그가 욕망과 매너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동시에 그녀도 가볍게 갈등하고 있었다.
진도를 나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이 간질간질한 느낌을 좀 더 유지하고 싶은 욕심이 아주 팽팽히 맞서는 중이다.
그때, 아래쪽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남녀, 약간 들뜬 목소리의 실랑이다.
“아이, 여기 정말 괜찮은 거예요? 이제 여기는 소문이 나서 못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잠겨 있지도 않은데…….”
“괜찮다니까. 오늘부터 며칠 동안은 중대장님이 안 계시니까 나한테 뭐랄 사람 아무도 없어.”
“모르겠어요. 가희는 불안해요.”
“그러지 말고 따라와. 지금 그 건물로는 못 가. 좀 전에 교전이 있었기 때문에 애들이 북적거린단 말이야.”
여자가 결국 수긍을 했는지, 두 사람이 계단을 탁탁거리며 올라온다. 둘의 발소리는 2층에서 멈췄다. 놀란 표정으로 입을 가리고 있던 임수정이 속삭였다.
“저 여자… 누구인지 알 것 같아요.”
“저는 여자, 남자, 두 사람 다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고 하사도 임수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소문이 무성하던 박 소위와 가희의 밀회를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상황이다.
아… 젠장, 하필이면…….
고 하사는 혀를 찼다. 건물이 여러 개인데 왜 하필 그들이 함께 있는 곳으로 와서…….
“미안해요. 저 때문에 여기 좀 더 갇혀 계셔야겠어요. 편히 주무시지도 못하고.”
고 하사가 속삭이자 임수정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아뇨. 저는 같이 있는 게 더 좋아요.”
두 사람은 옥상의 어둠 속에 기대앉아서 손을 마주 잡았다. 아래층에서는 벌써부터 요란스러운 교성이 울려온다. 가희는 가식적이었고, 박 소위는 무아지경인 것 같았다.
아~ 아~
우! 우!
어지간한 포르노에서조차 들어본 적이 없을 만큼 노골적인 신음들. 갓 연애의 단계에 접어든 고 하사와 임수정은 쑥스러워하며 그 소리를 고스란히 들어내야 했다.
‘와, 박 소위 체력 대단하네……. 낮 시간에 계속 근무하고 이렇게 늦게까지 깨서 이 짓을 매일한 거야? 오늘 낮에도 벽 쌓는다고 어지간히 힘들었을 텐데… 아니, 잠깐만…….’
박 소위의 오늘 일과에 대해 생각해 보던 고 하사는 깜짝 놀랐다. 그게 아니다. 오늘부터 근무 시간이 바뀌었으니까… 박 소위는 지금 자기 자리를 비우고 저 짓을 하고 있는 거다. 정말 대가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고서야…….
당장에라도 뛰어 내려가서 박 소위의 멱살을 잡고 싶은 충동이 든다. 후우우~ 고 하사는 한숨을 내쉬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아무리 박 소위의 잘못이 명확하다고 해도, 그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상관. 그러니 고 하사의 힘만으로는 처벌이나 징계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지금 큰 소리를 내면 자신뿐 아니라 임수정이 여기에 있었던 것도 다 알려져야 한다.
‘내일은 이 원사님에게 알리고 무슨 수를 좀 내야겠다. 애들을 그냥 방치하고 자리를 비우면 어쩌자는 거야……. 그런데 그 밤늦은 시간에 너는 거기에서 뭘 했냐고 물어보시면 뭐라고 핑계를 대지? 뒤를 밟았다고 할까?’
끝없이 계속되는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 고 하사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곁에서 손을 잡고 있는 임수정에게 뭐라고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섣불리 얼굴을 마주 보기가 민망하다.
어지간히 오래도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 그날 밤의 두 번째 총성이 고요하고 어두운 하늘을 갈랐다.
투투투투― 투투투투투― 투투투―
이번에는 동쪽이었다. 이제야 저 지겨운 박 소위의 헐떡거리는 신음에서 해방이 되는구나 싶어 고 하사는 안도했다. 아무리 그 짓이 좋아도 교전이 벌어진 상황에서는 멈추고 현장으로 쫓아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기대였다. 아래층의 뜨거운 연인들은 모두지 움직이는 기미가 없다.
‘대체 어쩌자는 거야? 무슨 대비를 해놓은 게 있나?’
고 하사는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임수정의 떨리는 손을 꽉 잡아주었다.
투투투투투― 투투투―
총성은 계속 울려 댔다.
곤한 잠에 빠져 있던 이 원사도 그 시끄러운 소리에 깼다.
“뭐… 뭐야? 왜 이렇게 오래 쏴?”
이 원사는 얼굴을 비벼 잠을 떨어내고 급하게 전투화를 신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직감이 그를 밖으로 내몬다.
끄아아아―
복도를 지나는 동안에 비명이 들려온다. 비명… 이런 소리는 있어서는 안 된다. 좀비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니까. 이 원사는 속도를 높여 뛰었다.
“이거 뭐야? 비명 지른 거 누구야?”
동쪽 게이트로 달려 나간 이 원사는 탄창을 갈아 끼우고 있던 상병을 붙잡고 물었다. 상병이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외부 게이트가 무너졌습니다! 거기 경비병 둘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서!”
“뭐?”
이 원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세 겹으로 이루어진 건대 쉘터의 동쪽 철책 중에 가장 바깥쪽이 좀비들에게 점령당했다. 서치라이트가 지나가며 훑는 동안 피투성이가 된 군복이 눈에 들어온다.
어째서! 이 원사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어째서 문 대위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첫날부터 사망자가 나온단 말인가…….
투투투투― 투투투―
동쪽 게이트 경비병들이 열심히 쏴대고는 있지만, 워낙에 수가 부족하다. 몰려든 좀비의 수는 백 마리에 가까운데, 이쪽은 겨우 일개 분대. 그나마도 두 명은 이미 목숨을 잃었다. 이 원사는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 지원 요청 안 했어? K―3 불렀어야지!”
“부르려고 뛰어갔습니다! 확성기가 없어서…….”
모든 게 다 개판이다. 도대체 병력 배치를 뭐 이따위로 한단 말인가.
“야! 너희 지휘관 어디 갔어? 박 소위님 어디 있냐고?”
“잘 모르겠습니다! 순찰 도신다고 하셨습니다!”
상병은 악을 쓴다. 그롸아아아― 철책에 매달린 좀비들은 더 큰 소리로 포효한다. 잠시 후, 요청을 받고 달려온 북쪽 게이트의 병력들이 사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투투투투투― 투투투투투―
분대 두 개분의 화력이 더해지자 사태는 빠르게 진정되어 갔다. 철책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던 좀비들은 온몸이 꿰뚫린 채 쓰러졌고, 그 위로 K―3의 연사가 퍼부어졌다.
접근해 온 모든 좀비들의 머리가 박살이 나기까지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병력 지원만 제대로 되었다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끝낼 수 있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후우~ 야, 너희들 왜 이렇게 늦었어? 이쪽에서 사격하는 소리 들렸을 거 아니야, 이 새끼들아!”
이 원사는 뒤늦게 달려온 북쪽 게이트 경비대를 책망하며 물었다. 병사들은 죄지은 것처럼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이동하라는 명령을 못 들었습니다. 저희도 계속 기다렸는데 말입니다.”
“그럼 명령 받고 온 게 아니라고? 결정은 누가 내렸는데?”
“얘가 뛰어와서 다 죽게 생겼다고 울부짖는 거 보고 저희가 임의로 병력 반만 빼서 쫓아왔습니다. 분대장들끼리 이야기해서 말입니다.”
“허! 그럼 박 소위는?”
“모르겠습니다. 아까 첫 교전 끝나고 순찰 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맙소사, 이 원사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분노가… 오랜 군 생활 동안 온갖 더러운 꼴을 다 경험해 온 그의 인내심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분노가, 온몸을 휘감는다.
박 소위…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 역시 말로 해서 될 놈이 아니었다.
“…다들 자기 위치로 돌아가. 너, 김 중사 깨워서 임시 지휘 해달라고 해.”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린 이 원사는 남쪽의 새로 확보한 건물을 향해 걸었다. 놈이 어디에서 뭘 하고 자빠져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다.
개 같은 놈… 이 원사는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이 무장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도 잊을 만큼 그의 분노는 컸다. 이성이고 논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당장 그 때려죽일 놈의 멱살을 잡아 내팽개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 원사님!”
뒤늦게 깨서 개인화기를 갖추고 쫓아 나온 강 소위가 이 원사의 등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이 원사는 강 소위를 한 번 돌아본 뒤, 대꾸하지 않고 다시 걸었다.
“이 원사님! 왜 그러세요?”
이 원사의 걸음을 따라잡은 강 소위가 그의 팔을 잡는다. 이 원사는 곧바로 뿌리쳤다.
“놓으십쇼. 가서 애들 좀 챙겨주세요. 지휘관도 없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박 소위는요?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해주셔야…….”
“아, 좀 놓으라고요! 나 급해요! 현장을 잡아야 한다고!”
잠시 언쟁을 하고 있는 동안 등 뒤에서 웅성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린다. 몇몇 잠에서 깬 사람들도 밖으로 나와 주차장 쪽을 서성이며 이 원사와 강 소위를 주시하고 있다.
“다 들어가요! 쫓아오지 말고!”
가까이 다가서는 남자들을 향해 강 소위가 명령했다. 이것들이 무슨 재미있는 구경거리인 줄 아나…….
그러는 동안에도 이 원사는 남쪽의 철책을 통과해 새로 확보한 건물로 들어간다. 그의 목적지를 보는 순간, 강 소위도 대강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박 소위, 이놈이 또 말썽을 피운 거다. 근무 중에 무단이탈까지 해 가면서… 문 대위가 없는 사이에 큰 소란이 나게 생겼다.
“으아, 난감하네… 내가 중위만 됐어도 상황 정리 다 할 수 있는데…….”
강 소위는 이 원사의 뒤를 쫓아 달렸다. 주변은 모두 캄캄한 어둠 속이라 한 번 모습을 놓치면 금방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 이 원사는 벌써 계단을 오르는 중이다.
뚜벅뚜벅, 건물을 울리던 그의 전투화 소리가 갑자기 멈춘다. 그러고는 엄청나게 큰 고함이 들려왔다.
“대체 뭐하는 놈이야! 네가 인간이냐? 응?”
“뭐, 뭐야? 당신 미쳤어? 이거 안 놔?”
박 소위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질러 댄다. 꺄악, 자지러지는 여자의 비명 소리. 이 목소리는 가희다. 강 소위는 서둘러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일단은 말리고 징계든 뭐든 추후에 요청을 해야 한다.
지금처럼 잔뜩 흥분한 상태에서 서로 감정을 앞세우다 보면 자칫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총은 좀비만 죽일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니까.
“너 같은 개새끼는 살다 살다 처음 본다! 생때같은 어린애들이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데, 너는 대갈통에 떡 치는 생각밖에 없냐, 이 미친놈아! 이 여우 같은 년 가랑이 생각밖에 없냐고?”
“가희 앞이야! 말조심 해, 씨발 놈아! 존댓말 써주니까 장교가 네 아래로 보여? 이 개새끼가! 어디서!”
강 소위가 2층에 올라섰을 때, 박 소위와 이 원사는 서로 멱살을 틀어쥔 채 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서로 주먹질을 할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다. 게다가 박 소위는 총까지 들고 있다.
그 옆에 비켜서 있던 가희는 강 소위의 얼굴을 보고 가벼운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옷매무새며 헝클어진 머리만 봐도 둘이 뭘 하고 있었는지는 짐작이 간다.
“박 소위, 그 손 놔! 이게 뭐야! 이 원사님 연세가 몇인데…….”
강 소위가 등장하자 박 소위도 주춤한다. 하지만 멱살을 움켜쥔 손에서 힘을 빼지는 않았다. 박 소위는 오히려 독기를 가득 품은 눈으로 강 소위를 노려봤다.
“오호라,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더니… 역시 너였지! 그래, 이 개새끼야! 처음부터 네가 꼰지른 거 다 알고 있었어. 흐흐, 그렇게 질투가 나디? 가희가 네가 아닌 나를 선택했다는 게? 못난 새끼… 이게 네가 원하던 거냐? 응? 속이 시원해?”
“뭔 소리야… 박 소위, 많이 흥분 했나 본데, 나는 소문하고 아무 상관 없어. 저 여자분하고도 그렇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후회할 짓 좀 그만해. 자, 그 손 놓고 숙소에 돌아가서 좀 쉬어. 이 원사님, 이 원사님도 멱살 놓으세요. 이러다가 사병 애들이 봅니다. 이게 통솔이 되겠습니까?”
강 소위는 왼손을 들어 보이며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그러면서도 오른손으로는 언제라도 총을 겨눌 수 있도록 대비를 했다. 박 소위가 꽉 쥐고 있는 K―2가 신경에 거슬린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두 명이나 죽었다고! 이 미친 인간아! 후우~”
먼저 멱살을 놓은 것은 이 원사였다. 그가 한숨을 쉬며 손에서 힘을 빼자 박 소위는 이 원사를 밀쳐내 버렸다. 뒤로 주춤하는 이 원사를 부축하며 강 소위가 말했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박 소위. 이제 돌아가서 한잠 푹 자… 너, 지금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 거 다 알아. 그러니까 야간 근무 걱정은 하지 말고 좀 쉬어. 그리고 오늘 여기에서 있었던 일도 여기에 다 묻고 잊어버리자. 나는 절대로 입 밖에 안 낼 테니까. 이 원사님도 그렇게 하시라고 내가 말씀드릴게.”
“지랄하고 있네. 내가 너를 믿을 것 같아? 애초에 모든 문제의 원흉인 새끼가. 꺼져! 누구 등 뒤에서 총질을 하려고!”
강 소위를 밀치는 박 소위의 눈에서 광기가 번뜩인다. 아무래도 이놈, 온전한 정신이 아닌 것 같다. 등 뒤의 계단이 너무나도 길고 높게만 보인다.
이곳에서 아무도 다치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강 소위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