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289화 (289/449)

2장 공존 (4)

이 원사가 오랜 군 생활을 통해 얻은 철칙은 간단하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작업을 빡세게 시켜야 한다는 것. 대민 지원이든, 진지 공사든, 정 할 게 없으면 청소라도 힘쓰는 일이라면 다 괜찮다.

뭐든 기력을 다 소진하게 만들어야 골치 아픈 일이 없다. 그는 그것을 진리라고 믿고 있었다.

한창 혈기왕성한 놈들을 억지로 끌고 와 좁은 데다 가둬놓고 있으니, 잠시만 틈이 생겨도 뚫고 나오려는 놈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베개에 머리만 대도 곧바로 곯아떨어지도록 만들어놔야 한다.

좀비들과 대치 중인데다가 중대장이 자리를 비우고, 보급 식량이 줄어든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놈들아, 중대장님 돌아오시기 전에는 이 벽 다 쌓아서 길 막아놔야 한다. 못했다가는 너희 다 큰일 난다고 보면 돼. 그분이 늘 하하 웃으시니까 사람 좋아 보이냐? 웃던 사람이 화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병사들을 격려하고 나서 이 원사는 강 소위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강 소위도 마주 웃는다.

문 대위가 자리를 비우기 전에 이 원사는 낮 시간 동안 강 소위가 병력 운용을 담당하는 것으로 교체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작업을 진행하는 시간대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었던 것이다.

멀리 방어의 최전방을 담당하고 있는 전차가 믿음직하게 서 있다. 다른 방향에서 기웃거리는 좀비들도 문제지만, 역시 가장 골치 아픈 것들은 북쪽에서 대로를 타고 오는 대규모의 좀비 무리들이다.

원래는 그 정도로 큰 덩어리가 아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손대기도 어려울 만큼 커져 버렸다.

게다가 처음엔 각각의 색깔끼리 돌아다니던 것들이 어느새 온갖 색의 페인트 무리로 합쳐진 채 뒤죽박죽 섞인 바람에 보고 있자면 기괴하기 이를 데가 없다.

어서 길을 끊고 대로 자체를 차단해서 놈들을 왔던 방향으로 다시 되돌려 보내는 것만이 위험부담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무지개 좀비들 올 때까지 네 시간 정도 남았지? 빨리빨리 작업하고 30분 전에는 다 복귀해 들어와. 괜히 어영부영하다가 휘말려서 죽네 사네 울어봐야 그때는 너무 늦는 거다. 내 말 알아들었냐? 기합 팍 주고 일을 하되,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말이야.”

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잔소리 겸 주의 사항을 열심히 읊고 다니던 이 원사가 잠시 한숨을 돌리고 있자, 강 소위가 다가온다.

“이 원사님, 여기는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여기 아니라도 신경 쓰실 거 많으신데.”

“예, 예, 오늘은 안 그래도 정신이 좀 없네요. 강 소위님, 그럼 부탁드립니다.”

강 소위와 인사를 주고받으며 돌아선 이 원사는 자동차들이 치워진 대로를 걸어 쉘터로 돌아왔다. 도로변에서는 수감자들이 언제나처럼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가로수 절단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이구, 수고 많으십니다. 안전사고 없이 오늘도 잘 마무리하세요.”

이 원사는 수감자들 중 우두머리 격인 몇 명에게 고개를 숙이며 지나쳤다. 하지만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그저 뚱하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꾸벅하고 시선을 돌릴 뿐이다.

일전에 좀비들의 습격이 있던 날, 수감자들이 여럿 사망한 뒤부터 그들은 군인들을 한층 더 두려워하면서도 증오하고 있었다.

중대장이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약속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 원사는 수감자들의 싸늘한 시선을 받으면서 생각했다.

‘하여간 박 소위, 그놈이 문제야. 나중에 듣자하니 그날도 생난리를 치다가 작업반장을 죽게 만들었다지… 에잉, 쯧쯧. 마음에 안 들어. 어쩌다 그런 놈이 장교가 돼가지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서며 이 원사는 혀를 찼다. 얼빠진 놈이 완장을 차고 있으면 주변의 여러 사람이 피해를 본다. 평시에는 그래도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실탄을 다루고 생명을 거는 이런 실전 상황에서라면 더욱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일이다.

“민간인들 다 모이라고 했어?”

쉘터 주차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사에게 이 원사가 물었다. 중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 원사는 주차장에 나와 대기하고 있던 민간인 수용자들에게 인사를 한 후, 확성기를 들었다. 이제 민간인들을 바쁘게 만들어줄 차례다.

“에… 오늘 이렇게 날도 더운데 여러분에게 모여주십사 부탁을 올린 것은 다른 게 아니고요, 그 쉘터 내의 위생 문제에 관해서 좀 말씀드릴 게 있어서 그럽니다.”

뙤약볕 아래에서 손을 들어 햇볕을 가리고 있던 수용자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중얼거린다.

위생? 뭔 소리래?

이 원사는 웅성거림이 잦아들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여러분, 저희 군인들이 여러분을 위해서 여러 가지 최선을 다하고는 있습니다만, 여기는 어디까지나 같이 쓰는 공간입니다. 그게 뭔 소리인고 하면, 우리 모두가 다 주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런 이야깁니다. 근데 제가 볼 적에는 그런 게 좀 부족해요. 에… 어저께 저희 식량 창고에서 쥐가 나왔습니다. 원래 여기에는 쥐가 있으면 안 돼요. 부지 선정할 때, 방역 작업을 다 해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없던 쥐가 생겼냐? 바로 이런 거 때문이에요.”

이 원사는 주머니에서 빵 봉투를 꺼냈다. 빵이 절반쯤 들어 있다. 이 원사는 빵 봉투를 흔들며 말했다.

“이거 제가 주워서 가지고 온 건데요. 아니, 아까운 간식을 버린 것도 문제고, 또 간식이 남는다고 아무 데나 버리는 몰상식한 분들이 있는 겁니다. 참내, 사방에 쓰레기통 천지인데 고거 몇 걸음을 걷기 귀찮아서 이런 걸 구석에다가 휙휙 버리고, 또 숨겨놓는다, 이런 이야깁니다. 이게 뭡니까, 배울 만큼 배우신 분들이… 제가 발견하고 치운 것만도 한두 개가 아니에요. 그래도 그냥 말을 안 하고 넘어가 볼까 했어요. 그런데 쥐가 식량을 쏠아 먹는 상황까지 오니까 그렇게 둬서는 안 되겠더라고요. 여러분, 쥐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잘 아시죠? 전염병을 옮기는 놈들입니다, 그 조그만 새끼들이.”

전염병이라는 말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들의 얼굴에서 두려움을 읽어낸 이 원사는 잠시 저희들끼리 떠들도록 내버려 뒀다. 무슨 병이 걸린다더라, 걸리면 약도 없다더라… 근거가 있는 말과 없는 말이 어지럽게 섞여서 떠돈다. 수용자 중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묻는다.

“아니, 그러면 대책을 세워야 할 거 아닙니까? 병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계속 그렇게 방치를 했습니까?”

그러게! 동조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이 원사가 다시 확성기를 켜고 말했다.

“저야말로 좀 물어봅시다. 거기 지금 말씀하신 신사분, 평소에 청소 한 번이라도 자발적으로 했습니까? 버려진 쓰레기 있으면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어보셨냐고요.”

찍어서 도발을 하자 처음 떠들던 사람은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군인 애들이 다 해줄 거라고 생각했으면 그거 오산입니다. 얘들, 여러분 지켜주는 게 임무지, 청소하는 애들 아니에요! 보건 위생은 다 각자가 자기 주변 치우는 데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어쨌든 오늘은 더 못 참습니다. 대청소 한 번 해야 합니다. 안 그랬다가는 다 병 걸려서 죽어요. 쥐가 쏠은 거 버리느라 입은 식량 손해도 그거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 다들 소매 걷고 병사들 지시 따르세요.”

이 원사는 확성기를 내리고는 기다리고 있던 중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중사는 병사들과 함께 민간인들을 역할별로 나누기 시작했다.

쥐 이야기는 그가 사람들을 청소시키기 위해 지어낸 것이다. 아침에 자신이 반을 먹고 남긴 빵 봉지를 시멘트 바닥에 조금 갈아서 쥐가 쏜 것이라는 증거품도 날조해 냈다.

하지만 효과는 분명하다. 그렇게 위기감을 조성해 주면 사람들은 사소한 불편 정도는 곧잘 감수해 낸다.

먹을 게 얼마나 넉넉하면 간식을 마구 버렸겠나 라든가, 그래서 쥐가 꼬이는 바람에 상한 식자재를 버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배급량이 조금 줄어도 당분간은 군소리하지 못할 것이다.

“휴우~”

대청소를 시켜놓은 이 원사는 흡연 구역으로 걸어갔다. 담배를 피우고 있던 고 하사에게 다가간 이 원사는 녀석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서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야, 오늘 좋은 소식 하나 있다.”

이 원사가 라이터를 켜며 말했다. 고 하사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네? 좋은 소식이라는 게 뭡니까?”

“어라, 이놈 봐라? 너는 이미 뭐 좋은 소식 있는 표정인데? 너 수상하다? 약 없어서 힘들어 죽겠다고 엄살 부리던 놈이 오늘은 아주 실실 웃고 다니네?”

이 원사가 의심스런 눈으로 고 하사를 쳐다본다.

“아이 참, 원사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야 언제나 원사님 뵈면 그저 존경하는 마음을 감추지를 못하고 저절로 입이 찢어지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그나저나 좋은 소식이 뭡니까?”

고 하사는 너스레를 떨었다. 네, 어제 짝사랑하던 여자한테 고백하고 처음으로 데이트도 했습니다. 아, 글쎄 손도 잡았지 뭡니까? 그러니 당연히 기분이 날아가는 것 같죠,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으니 둘러 대는 게 서로 편하다.

흠…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은 눈초리로 고 하사를 보고 있던 이 원사가 입을 열었다.

“의약품 지원 온단다. 태양 그룹에서. 아마 조금 있으면 헬기 도착할 거다.”

“어, 정말이십니까? 계속 답이 없다고 하시더니, 어떻게 또 그렇게 갑자기?”

“그러게 말이다. 저희들 말로는 결재 받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고 하는데, 그건 못 믿을 소리인 것 같고… 뭔 꿍꿍이가 있겠지, 쯧. 어쨌든 우리야 당장 약 필요했었는데 잘된 거 아니냐? 그렇지? 일단 받아 쓰고 다음 일은 또 그때 고민하면 되는 거지.”

어휴~ 고 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외부로 가서 징발해 오는 약의 양도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근처의 약은 이미 다 털어 왔기 때문에 점점 더 멀리, 위험 지역까지 나가야만 하는 상황이라 병사들에게 요청하기도 미안했다. 이런 때에 의약품 지원은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다.

“이번에 얼마만큼이나 주고 갈지는 모르지만, 너 이거는 관리 확실하게 해야 돼. 저번처럼 민간인들이 달라는 대로 다 펑펑 인심 쓰면 안 된다. 민간인보다 군인들을 우선해야 돼. 우리 애기들 아픈데 약도 못 먹으면 전투는 어떻게 하냐? 알겠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 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원사는 몇 모금을 더 급하게 빨고 재떨이로 쓰는 드럼통 안에 꽁초를 던져 넣은 뒤, 고 하사의 배를 툭, 쳤다.

“나 간다. 그리고 표정 관리 좀 해, 이놈아! 저 연애합니다, 라고 이마에 쓰고 돌아다니지 말고.”

“어, 아닙니다…….”

“아니긴 개똥이 아니다. 거울을 한 번 봐라, 그딴 소리가 나오나.”

이 원사가 돌아간 뒤, 고 하사는 자신의 볼을 쓸어봤다. 내가 그렇게 실실 거리고 있었나… 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실없는 웃음이 터진다.

당장 오늘 밤에도 임수정과 만나기로 했다. 함께 별을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뿐인데도 어젯밤에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오늘도 하루 종일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침에 눈을 뜨기가 싫을 만큼 지겹기만 하던 일상에 기쁜 한 점이 생겼다.

“후후, 청소하는 모습도 차분하구나.”

철망 너머에서 다른 민간인들과 함께 비질을 하고 있는 임수정을 보며 고 하사는 미소를 지었다.

다들 군인들의 지시를 받으며 정신없이 쓸고 닦고 물건을 나르는 중이다. 대단한 고강도 노동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줄곧 쉬기만 하던 사람들이라 꽤나 힘들고 지칠 것이다.

이따금씩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래도 이 원사는 잘 다독거려 가며 일을 시키고 있다. 완강하게 저항하는 놈들에게는 서류철을 흔들면서 협박을 했다.

“어이, 아저씨. 이 서류 기억나? 아저씨가 처음 잠실에 갔을 때 자필로 서명한 서류고, 우리 군에서는 아무 때나 필요하면 당신을 징집할 수 있어. 남녀노소 구분도 없고, 날짜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고요! 근데 그 선택권이 지금은 나한테 있네? 어째, 오늘 입영하실랍니까? 군복 입게 해줘요? 응?”

그러면 아무리 잘난 척 뻐기던 놈도 입을 다물고 순한 양으로 돌변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기동이도, 주민 대표라고 껍죽대던 이요섭도 다 한 번씩 까불어 대다가 깨갱 하고 꼬리를 말았다.

조용히 비질을 하고 있던 육만배가 징집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 원사의 뒤통수를 잠시 노려보던 육만배는 다시 허리를 숙여 일하는 시늉을 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저 서류철이 저놈 손에 있으면 안 되겠는데…….’

의약품을 실은 태양 그룹의 헬기는 오후 늦게 도착했다. 휴식을 취하던 박 소위가 나와서 서류에 사인을 했고, 고 하사는 물품 확인을 했다.

박스에 적힌 품목들을 종이에 옮겨 적으면서 고 하사는 몇 번이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단한 양은 아니지만, 적어도 열흘 이상은 버틸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어딘가.

“이것도 가져가요. 항생제랑 소염진통제 두 박스 더 드릴게.”

검은 옷을 입은 태양 그룹 보안 직원들이 박스를 내려준다. 쉐도우 실드인지, 뭐 그런 재수 없는 명칭의 집단이었다고 고 하사는 기억하고 있다.

“아유, 그냥 두십쇼. 제가 할게요. 받는 것만도 고마운데.”

“하하, 아닙니다. 이왕 돕는 거, 제대로 돕는 게 좋죠.”

고 하사가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자 쉐도우 실드 요원도 겸양을 부린다. 이렇게 착한 놈들이 아니었는데, 좀 의외다.

그 순간, 박스를 내려놓느라 허리를 굽히던 쉐도우 실드 요원의 웃옷 주머니에서 뭔가가 툭, 떨어졌다. 빨간색 캡슐에 흰 덮개가 달린 물건. 집어 올린 고 하사의 눈이 커진다.

“엇! 이거는…….”

민구라는 사내가 대단한 보물인 척하고 주고 간, 바로 그 물건과 똑같이 생겼다.

“이, 이리 내놔요! 만지지 마요!”

잠깐이나마 상냥한 척하던 쉐도우 실드 요원이 당황하며 우악스럽게 빼앗아간다. 고 하사가 물었다.

“그게… 대체 뭡니까?”

“신경 쓰지 마요, 당신들이랑 상관없는 겁니다.”

요원은 얼굴이 벌개져서 무뚝뚝하게 쏘아붙이고는 헬기 쪽으로 돌아갔다. 그의 상사인 것처럼 보이는 다른 요원이 묻는 소리가 들린다.

“뭔가? 왜 시끄럽게 굴어? 말썽 피우지 말라니까.”

“그게 아니고 말입니다. D.E.M.을 떨어뜨렸는데 저 사람이 그게 뭐냐고 물어봐서 말입니다.”

“뭐? 그걸 왜 떨어뜨려? 똑바로 간수 안 해? 목숨을 지켜줄 수 있는 물건이야, 인마!”

두 요원이 떠드는 소리가 멀어진다.

오호, 이게 태양 그룹 물건이었구나…….

고개를 끄덕인 고 하사는 병사들에게 약품 박스를 의무실로 옮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다.

야, 그까짓 거 나도 두 개 있어. 잘난 척 오지게 하네. 그까짓 이상한 약보다 나한테는 진통제 한 박스가 더 중요하단 말이야. 심장 멎는 약 같은 거 쓸 일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지루하고 긴 하루가 흘러갔다. 약을 달라고 조르는 사람들과 씨름을 하느라 녹초가 되어버린 고 하사의 업무도 밤이 깊어지자 종료되었다. 의무병과 임무 교대를 하고 밖으로 나온 고 하사는 떼꾼해진 눈을 비비며 담배부터 피워 물었다.

“후후, 피곤하셨나 보네요.”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임수정이 인사를 건넨다. 고 하사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나와 계셨군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커피 가지고 올게요.”

고 하사가 서둘러 담배를 끄려 하자 임수정이 만류했다.

“그냥 피우세요. 괜찮아요. 술도 못 마시는데 그 정도라도 스트레스 풀어야죠. 커피, 오늘은 제가 가지고 왔어요. 보급 나온 거 여유가 있더라고요.”

임수정은 트레이닝복 주머니에서 캔 커피를 꺼내 고 하사에게 건넨다.

둘은 쭈뼛거리며 나란히 서서 걸었다. 고 하사의 손이 임수정의 손 주변에서 맴돌다가 천천히 깍지를 꼈다. 히죽, 고 하사의 입에 미소가 번진다.

두 사람은 쉘터 남쪽의 최근 확보한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 철책으로 막혀 있기는 하지만, 지키는 사람도 없어서 외지다. 한때 박 소위가 여기에서 가희와 밤마다 난리를 친다고 소문이 났던 그 건물이다.

“어, 좀 으스스하네요. 너무 외지고 어두우니까.”

옥상에서 캄캄한 밤하늘을 보며 임수정이 어깨를 가볍게 떤다. 고 하사가 말했다.

“저 믿으세요, 저 꽤 싸움도 잘하고 날랩니다. 임수정 씨 한 분 지켜 드릴 힘은 있어요.”

“후후, 그렇게 말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임수정은 진심으로 기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동생보다도 어린 남자지만, 이렇게 자신이 신뢰할 만한 누군가와 감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게 그녀에게도 꽤나 좋았다.

둘은 옥상 구석에 서서 가만히 어깨를 기댄 채 커피를 마셨다. 깍지 낀 두 손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후우~ 후우~ 숨을 고르던 고 하사가 고개를 돌려 임수정의 옆모습을 본다. 임수정도 그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마주쳤다.

“하, 한 번만 안아보고 싶습니다. 다른 뜻이 아니라 그, 그냥 이렇게 꼭 안는 거요.”

고 하사의 말에 임수정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고 하사는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끌어안았다. 작고 가냘픈 어깨와 등이 품 안에 들어오자 꿈처럼 행복하다.

“괜찮았습니까? 불편하게 만들거나 한 거 아니죠?”

긴 포옹이 끝나고 고 하사가 물었다. 임수정은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좋았어요… 근데 그거는 뭐예요? 그… 가슴 주머니에 든 거는 좀 뺐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눌려서… 하하.”

아! 고 하사는 자신의 군복 웃옷에서 D.E.M.을 꺼냈다. 이따위 게 두 개나 들어 있으니 눌리는 게 당연하다. 빨간 캡슐을 처음 본 임수정이 물었다.

“그건 뭔가요?”

“이거… 어떤 사람이 선물한 건데요. 이 뚜껑을 벗기면 나오는 바늘을 몸에 주사하는 거랍니다. 그러면 잠시 동안 심장이 멎는대요. 10분 정도라고 했던가? 하여간 좀비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는 이상한 약입니다. 아! 말 나온 김에 우리 하나씩 나눠 가질래요? 우정의 징표처럼.”

고 하사는 두 개의 D.E.M. 중 하나를 임수정에게 건넸다. 가만히 캡슐을 들여다보고 있던 임수정이 다시 물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네요. 그 선물한 사람이 뭘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닐까요? 아니면 고 하사님을 놀렸거나.”

“아니, 그런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니었어요. 평탄하게 살았던 사람 같지도 않았지만, 진지할 때는 진지하더라고요…….”

민구에 대해 더 설명하려던 고 하사는 말을 삼켰다. 어차피 임수정이 모를 사람인데 구구절절 설명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 구해준 그 남자가, 임수정을 구해줬던 남자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하여간 뭐 그래요. 구라는 아닐 겁니다. 게다가 오늘 보니까 태양 그룹 보안 업체 애들도 이거를 아주 신주단지 모시듯 하더라고요. 그쪽에서 쓰는 건가 봐요.”

“아, 그래요? 그러면 정말 귀한 건데… 저를 주시면…….”

임수정이 돌려주려 하자 고 하사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이까짓 건 안 귀해요. 임수정 씨가 훨씬 귀합니다.”

마주 보고 미소 짓던 두 사람은 한 번 더 포옹을 했다. 그리고 달궈진 분위기에 맞춰 막 입을 맞추려고 할 때, 멀리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투투투― 투투투투투―

두 사람은 놀라서 총성이 나는 쪽을 돌아봤다. 북쪽 게이트 너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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