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Big Picture (2)
“그래서 지금 건 얼마나 떨어져 있나요?”
테라의 질문에 젠킨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 안 되지, 테라 양. 그런 유도는 곤란해. 그러면 암호가 무슨 의미인가? 그냥 멀다고만 알면 돼. 3RG, OL, G2U는 모두 여기에서 1킬로미터보다는 먼 곳이야. 이런 식으로 범위를 점점 좁혀가다 보면 앞으로 두 번, 어쩌면 세 번 내에는 이 근처까지 오겠지. 하하, 여유가 많지 않아, 테라 양. 함께 가고 싶다면 지금부터 부탁해야 돼.”
머리를 좌우로 흔들 때마다 볼 살이 푸들푸들 떨리는 젠킨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테라는 같이 가자는 제안은 깨끗이 무시하고 다른 걸 물었다.
“그렇다고 해도 역시 이해가 가지 않네요. 이 쉘터가 없었다면 젠킨스 씨는 어떻게 생존할 계획이셨어요?”
젠킨스는 순순히 인정했다. 자신은 중간에 휴식이 없다면 1킬로미터도 제대로 걷지 못한다. 뛰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않는다. 남들보다 몇 배나 많은 칼로리를 섭취해야 한다는 것도 분명히 서바이벌을 위해서는 치명적인 단점이다.
“음, 타당한 질문이군. 이렇게 대답하지. 이 나라의 시스템은 JL이 자체적으로 평가했던 것보다 더 문제가 많았어. 그래서 계획이 틀어졌다는 말이야. 예를 들어보지. 우리가 기억하는 첫날인 14일 오전, 이미 좀비들이 꽤 확산됐던 시기지. 하지만 그때만 해도 확산 속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어.”
무슨 질문을 하든 젠킨스는 그 잘난 척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틈만 나면 앉아 쉬려고 한다. 이래서야 산책을 하는 보람이 없다.
테라는 다시 일어나서 걸으라는 손짓을 했다. 젠킨스는 마지못해 일어나 걸으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다보며 지껄였다.
“일단 사람들이 외부로 나가지 않도록 유도했어야 해. 하지만 그런 안내는 없었지. 심지어 좀비 사태가 일어났다는 보도조차 몇 시간 동안이나 이루어지지 않았어. 테라 양, 귀하는 그날 사이렌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나? 없었겠지. 나도 마찬가지야. 헬리콥터에서 이뤄지는 경고 방송은? 물론 그것도 없었어. 그러면 대형 전광판의 화면이라도? 아니, 그건 내가 기억해. 나는 그때 자동차 안에 갇혀 있었거든, 내 경호원들과 같이. 전광판에서는 영화 예고편을 보여주고 있더군. 그날 길에서 좀비가 된 사람들은 거의 다 아무런 경고도 듣지 못했어. 자신의 차 앞으로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좀비가 걸어올 때까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몰랐지. 헤엑~ 또 말해줄까?”
“숨차지 않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걸으면?”
“헤엑~ 숨차. 하지만 잘난 척하고 싶으니까… 하아~ 참는 거야. 내가 내… 경호원들 이야기한 적 있었나? 헤엑~ 우수한 요원들이었지. 무장도 했었고.”
“과거형을 쓰시는군요.”
“뭐, 그래.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혼자 있는 거잖나. 그들은… 임무를 다했어. 그게 제일 가치 중립적인 어휘일 것 같군.”
산책은 그 후로도 20여 분 이상 지속됐다. 5분을 넘긴 시점부터 젠킨스는 끊임없이 투덜대며 쉬려 들고, 테라는 그런 그를 계속 달래며 걷게 만들었다.
그래도 며칠 전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때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다.
“이제… 헤엑… 이제는 그만. 귀하가 내게 원하는 게 끔찍한 고문이 아니라면 좀 멈추게 해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외야석을 찍고 돌아섰을 때, 젠킨스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두 다리를 짚으며 허리를 숙였다. 몰아쉬는 숨에서는 쇳소리가 난다.
“이렇게 하다가는 정말 가까운 곳에 그 부메랑이라는 수신기가 설치됐다는 신호가 오더라도 JL로 돌아가지 못할 거예요. 최소한 그 장치 근처까지는 걸어가야 하잖아요.”
“하아~ 몇 번을 말해야 돼, 테라 양. 하아~ 나는 안 걸어. 그냥… 부메랑이 1킬로미터 내에 설치된 걸 확인했을 때, 신호만 보내면 된다고……. 하아~ 하아~ 위치를 추적해서 헬리콥터가 올 건데 내가 뭣 때문에 걸어야 하겠나…….”
“아니면 그전에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죠.”
“그건… 저주인가? 헤엑~ 헤엑~ 너무하는군. 나는 좋은 사람이야, 테라 양. 귀하의 그 소중한 흉터남자를 위해 매일 하루에 두 번씩 붕대를 갈아주고 소독도 해주는, 천사 같은 사람이라고.”
과장된 몸짓을 하며 떠들어 대던 젠킨스는 테라의 눈치를 슬쩍 살피곤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 좀 쉬어도 봐줄 것 같은 눈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테라가 물었다.
“계속 그 말씀을 하시는데, 젠킨스 씨가 정말로 그 아저씨 붕대를 갈아준다고요? 젠킨스 씨는 움직이는 걸 싫어하시잖아요.”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렇지. 바로 옆에서 근육질의 남자가 뭉텅이째 날아간 옆구리의 근육 때문에 제대로 몸을 돌리지 못하고 멍청이처럼 붕대를 질질 흘려도 내버려 두겠지. 맞아, 그게 내 캐릭터이긴 해. 하지만 그 남자가 내가 진심으로 아끼는 테라 양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러니까 내가 아무 대가도 없이 그 남자의 붕대를 갈아주는 건, 사실 테라 양을 위한 행동이라는 거야. 어때, 이 정도면 과자로 보상을 받을 만한 선행 아닌가?”
젠킨스는 팔을 활짝 벌리며 위선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테라는 그런 장난에 장단을 맞춰줄 기분은 아니다.
옆구리 근육이 날아갔다고 했다. 공상 과학 영화에 나오는 레이저 총에 맞은 것처럼 움푹 팬 상처는 화상으로 뭉개져 있었다고…….
갈비뼈에 금이 간 것은 시간이 가면 낫겠지만, 그 상처는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는 게 아니라는 말도 젠킨스로부터 들었다. 테라의 안색을 살피던 젠킨스가 애절하게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오, 이런 또 눈물을 흘리려고 하는군, 테라 양. 괜찮아. 그냥 오른쪽 외사근의 80퍼센트가 손실된 것뿐이라고. 죽지 않아. 그저 앞으로는 평생 배에 힘을 주지 못할 테니까 숨을 제대로 참을 수 없을 거고, 한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가 빨리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게 된 것뿐이야.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니까.”
“울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렇게 도발하려고 해도 안 통해요.”
협박인지 조롱인지 모를 위로를 해주는 젠킨스를 보면서도 테라는 그다지 화를 내지 않았다. 어차피 이 사람은 타인의 고통 같은 것을 공감할 줄 모른다. 그런 감각이 아예 결여되어 있다.
그러니 실은 인간적으로 더 큰 장애를 가진 쪽은 이 사람이다. 그 자신은 그걸 오히려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하지만.
빤히 쳐다보는 테라의 눈빛에서 분노가 담겨 있지 않은 걸 깨달은 젠킨스는 도발의 수준을 한 단계 더 올리기로 했다.
“그렇게 손상된 근육이라도 되살릴 수 있다는 게 JL의 근육세포 배양과 이식 기술이기는 하지. 테라 양, 이런 거야. 원시세포를 배양해서 특수 성장인자를 넣으면 인체의 각종 부위가 된단 말이야. 시험관 속에서 부글거리며 그 흉터남자의 외사근이 자라나는 거지. 그게 충분한 크기로 배양되면 지금의 상처를 도려내고 거기에 근육을 새로 이식하면 돼. 반년쯤 뒤에는 아무도 어디가 수술 부위였는지 짚어낼 수 없을걸? 그만큼 완벽한 기술이라고. 아, 내가 이 이야기를 전에도 했던가?”
테라가 여전히 대꾸하지 않자 젠킨스는 결정타를 날렸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그렇게 치료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몸을 휘청거리며 살겠지. 그 남자의 여자 친구가 JL 연구소로 가고 싶지 않다는 이유, 단 하나 때문에 모든 기회를 박탈당하는 거야. 아, 불쌍하군. 정말이지, 너무 슬픈 이야기야.”
“여자 친구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젠킨스 씨.”
테라가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이런 일관된 태도도 흥미롭다. 그럼 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가족이나 애인도 아니고, 특별히 오랜 친분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게다가 남자 쪽에서는 테라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녀를 찾는 것 같은 눈치도 보이지 않고… 젠킨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자꾸 그렇게 이상한 말만 하고 사람 기분 나쁘게 만드시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래봐야 어차피 저는 젠킨스 씨와 함께 가지 않을 거니까요. 이제 일어나서 20분만 더 걸어요. 전에도 말했듯이 당신은 백신을 만들기 전까지는 천벌을 받으면 안 된다고요.”
테라는 젠킨스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젠킨스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순순히 따랐다. 이걸 다 완수해야만 과자를 지급 받을 수 있으니, 거부할 도리가 없다.
“그건 그렇고, 테라 양. 어제부터 배급되는 식사 양이 줄어든 것 같지 않았어? 가뜩이나 적은 양이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안 되니 말이야. 봐, 벌써 배가 이렇게 홀쭉해졌어. 식사량이 적었다는 분명한 증거지.”
한동안 씩씩거리며 걷던 젠킨스가 물었다. 테라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원래부터 그리 많이 먹지 않는 사람이라서 잘 모르겠어요. 제게는 늘 충분하거든요. 고마운 식사고요.”
“흠, 그런 식사라도 좋게 말해주다니, 천사 같은 사람이라 역시 다르군. 하지만 그 남자의 인생만은 구원해 주고 싶지 않다니, 어느 쪽이 테라 양의 진짜 모습인지 난 모르겠어.”
젠킨스가 비꼬자 테라는 곧바로 그 말을 되돌려 줬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군요, 젠킨스 씨.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시는 분이 왜 그 아저씨를 JL로 데려가 치료하고 싶어서 이렇게 애타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 후로도 한동안 공격과 역공이 계속되었다. 젠킨스는 어떻게 해서든 테라로부터 JL연구소로 가겠다는 말을 끄집어내기를 원했고, 테라는 화를 내지 않으면서 줄곧 그 말을 흘려보냈다.
“이거요.”
산책이 끝나고 젠킨스가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 테라는 비닐봉지를 한 개 가지고 돌아왔다. 과자와 주스가 몇 가지 들어 있다.
“오호, 오늘은 이런 것도 주는 건가? 운동을 열심히 한 것에 대한 상인 거지?”
젠킨스가 환호하며 주스를 집으려 할 때, 테라는 손으로 비닐봉지를 덮으며 말했다.
“젠킨스 씨는 산책하시는 동안 많이 드셨잖아요. 이건… 그 아저씨에게 전해 주셨으면 하는 거예요. 뭐가 도움이 될지 몰라서 그냥 좋아 보이는 걸 몇 개 담았어요. 주스의 비타민이라도 섭취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흠, 그래? 아무것도 안 한 그 남자가 열심히 운동을 한 나보다 더 많이 받다니, 왠지 불공평한 것 같지만 물건의 주인이 주겠다는데 어쩔 수야 없지…….”
젠킨스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봉지를 받아 들었다. 테라는 다시 한 번 간곡하게 부탁했다.
“꼭 그분에게 전해 주세요. 제가 전했다는 말은 하지 마시고, 그냥 젠킨스 씨가 인심 쓰는 것처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 걱정하지 마!’라고 흔쾌히 대답하고 젠킨스는 테라와 헤어졌다. 복도를 따라 걷던 테라는 코너에 숨어 젠킨스의 뒤를 눈으로 쫓았다.
뒤뚱거리며 몇 걸음을 걷던 젠킨스는 등 뒤를 힐끔 돌아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쓰레기통 부근으로 이동한다.
봉지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젠킨스는 일단 주스부터 꺼내서 마신다. 행동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다 마신 주스 팩을 쓰레기통 안에 던져 넣은 뒤, 젠킨스는 과자를 꺼내 이로 포장을 뜯었다.
그러고는 다시 주변을 한 번 살피고서 과자를 입안에 털어 넣는다. 젠킨스는 봉지 안이 바닥날 때까지 계속 집어 먹고 마셨다.
마침내 작은 과자 봉지 하나와 주스만 남았을 때, 젠킨스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주스를 마저 꺼내 마셔 버렸다. 그런 후, 비닐봉지에서 과자만 꺼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를 두드리며 걸어가는 젠킨스의 뒷모습을 보며 테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부터 자신이 젠킨스 편으로 보내는 음식이 온전히 다 그 아저씨에게 갈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저 정도까지 전부 먹어치울 줄은 또 몰랐다.
역시 이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다. 음식을 전해 주려면 무슨 다른 수를 생각해 내야 한다.
민구가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 소독을 위해 붕대를 풀었을 때, 젠킨스도 뒤뚱거리며 돗자리로 돌아왔다.
‘큭큭… 저놈, 또 뭘 먹었군. 가만 보면 계속 뭔가를 오물거리고 있는데, 참 재주도 좋단 말이야. 내가 주는 담배 한 개비씩으로 저만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젠킨스의 입 주변에 묻은 온갖 과자 부스러기를 보며 민구는 웃었다. 그것이 원래는 테라가 자신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던 과자였다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헤이, 네이버!”
젠킨스가 민구에게 아는 척을 하며 다가온다. 민구는 상대방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소독에 집중했다.
옆자리의 녀석. 아침저녁으로 제가 먼저 제안을 하고 붕대를 꼼꼼히 감아주는 건 요긴하지만, 도무지 정은 안 가는 놈이다. 비록 말은 안 통하지만, 속이 시커멓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기프트!”
젠킨스가 과자 한 봉지를 내민다. 또 담배 한 개비랑 바꾸자는 건가… 민구는 차갑게 대꾸하며 손을 저었다.
“안 사, 치워.”
원래부터 과자 같은 걸 오물거리는 취미도 아니고, 매일 건빵 한 봉지는 지급이 되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다.
오! 리얼리? 민구가 거부 의사를 밝히자마자 젠킨스는 반색을 하며 그 자리에서 곧바로 과자 봉지를 뜯었다. 그러고는 과자를 우적거리며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양복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지도다.
부스럭거리면서 지도를 편 젠킨스는 몇 군데를 짚어가며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이윽고 다시 지도를 접어 주머니에 넣은 젠킨스는 민구를 돌아봤다.
마침 소독이 다 끝난 민구를 향해 젠킨스는 붕대와 뚱뚱한 자신의 가슴을 번갈아 가리킨다.
붕대를 갈아주겠다는 거다. 그 거래는 할 만하다. 아직까지도 도무지 옆구리를 튼다는 게 어려워서 한 번 붕대를 감으려고 하면 눈앞이 캄캄해질 만큼 지독한 고통을 맛봐야 한다.
게다가 그마저도 제대로 매지 못하고 주르륵 흘러내려 버린다. 민구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돗자리 위에 내려놓았다.
“오케이!”
젠킨스는 얼른 과자 봉지를 놓고 알코올 솜에 꼼꼼하게 손을 닦았다. 그리고 새 붕대를 꺼내 민구의 옆구리에 대고 감기 시작했다. 그간 몇 번 해봤다고 어느새 요령이 좀 붙어서 처음 했을 때보다 훨씬 빨리, 깔끔하게 일을 끝낼 수 있다.
민구는 손으로 붕대를 짚어보며 느슨한 구석은 없는지 확인했다. 이번에도 평소처럼 꼼꼼하다.
이런 손재주가 있는 놈이 왜 과자는 저렇게 주둥이에 다 묻히고 처먹는지 모르겠다.
만족한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여 준 민구는 벌떡 일어나서 트레이닝복을 걸쳤다. 이제 운동을 할 시간이다. 물론 운동이라야 아직 비척거리며 걷는 수준이지만.
처음엔 한 발을 뗄 때마다 옆구리가 터져 나가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한결 버틸 만하다. 걷는 속도도 건강한 사람들에게 크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까지는 되었다.
진통제를 자기 전에만 복용하니 깨어 있는 동안에는 늘 아프고, 한 번씩 격한 고통이 밀려올 때면 정말 미칠 것 같지만, 어지럼증만은 확실히 줄었다.
눈앞이 일렁거리며 비틀대는 것보다는 아픔을 참는 편이 낫다. 어지러우면 아무것도 못하니까.
“후우~!”
민구는 신음처럼 숨을 내뱉으며 걷기 시작했다. 오른쪽 손에는 물병을 들었다. 그쪽 옆구리의 근육이 꽤 많이 날아가 버렸으니 남은 부분이라도 단련을 해야 하는데, 아직 무거운 건 무리였다.
“저건 대체… 야생 짐승인가?”
담배를 건빵으로 바꿔 오려던 젠킨스는 민구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분명히 만신창이인 몸인데, 저 정도라도 멀쩡하게 걸어 다닌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어제보다 속도가 빨라졌다. 어제 그가 보았던 민구의 걸음걸이는 결코 자신보다 빠르지 않았다.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느린 정도였다. 그런데 불과 하루 만에 저런 속도의 향상을 보이다니…….
젠킨스는 태어나서 거의 처음으로 신체 능력에 관한 질투를 느꼈다.
애초부터 그는 운동에 소질도 없었고, 누구와 라이벌이라는 생각 자체를 갖지 않았었다. 그는 운동에 있어서만큼은 패배자라고 일찌감치 현실을 인정한 채 살아왔다.
하지만 저 남자만은 다르다. 저 남자는… 어제까지 그보다 못했던 인간이다. 그렇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제 평생 장애를 가진 채 살아야 할 거라고 테라에게 말했던 것이 온전한 허풍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남자가 지금 자신보다 빠른 속도로 더 멀리까지 걸어가려 하고 있다.
멀어져 가는 민구의 등에 테라의 얼굴이 겹쳐 보이자, 젠킨스의 가슴속은 갑자기 분노로 가득 차올랐다.
“너한테는 안 져! 최소한 너보다는 잘 걸을 수 있다고!”
크게 소리를 내지른 젠킨스는 무릎이 시큰거리는 걸 꾹 참으며 빠르게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주먹을 꽉 쥐는 바람에 과자 여섯 봉지 값어치의 비싼 담배가 뚝 부러져 버렸지만, 홱 내팽개쳐 버렸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이 지점으로 돌아올 때, 저 남자보다 앞서 있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격차를 줄이기만 해도 자신의 승리다. 이 승부는… 건빵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게 두 남자가 잠실 쉘터의 건물 내부에서 보잘것없는 경주를 하고 있을 때, 외부의 게이트에는 문 대위를 태운 전차가 막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