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좀비묵시록 82-08-278화 (278/449)

6장 좋은 사람들 (4)

오버 사이즈의 얇은 집업 재킷을 위에 걸치고 나온 제니와 태권소녀가 풀의 종류에 관심을 보인다.

“우와, 풀이 세 개나 되네요. 어머, 이 색깔 봐.”

“그러게. 전부 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야?”

삼식이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동그란 풀에 들은 건 녹차, 네모난 건 그냥 물, 그리고 여기 이건… 비장의 삼식이 스페셜.”

“흠, 흠, 이거 맥주 아니에요?”

“맞아, 맥주 풀이야. 꿈이 이뤄지는 거지.”

별것도 아닌 농담에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제니와 태권소녀는 어느 풀로 들어갈지를 고른다. 결국 그녀들은 생수 풀부터 들어가기로 했다.

둘이 거의 동시에 재킷의 지퍼를 내릴 때, 삼식이를 제외한 남자들은 초고도의 집중 상태로 눈에 힘을 주었다.

“어라! 비키니 아니잖아? 아까 한참 고르는 것 같더니…….”

신입이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가 무안해져서 급하게 고개를 돌린다. 제니와 태권소녀, 둘 다 래시 가드를 입고 있다.

“이 안에 입었어요.”

제니가 머리를 틀어 올려 묶으며 대답해 준다. 물속에 먼저 들어가서 다리를 쭉 편 태권소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내가 이거 입자고 했어. 너무 비교되는 거 싫어서. 으아… 좋다.”

“…그, 그러면 목욕이 안 되잖아. 걱정되는데.”

“이따가 너희 내려가라고 하고 우리 둘만 있을 때 씻을 거야. 걱정하지 마. 그리고 경고하는데, 더 지껄이면 곧바로 한 대 찬다. 물볼기 맞으면 더 아플걸? 입든지 벗든지 내 맘이다.”

신입은 힘없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억울한 것은 신입 혼자만이 아니다. 그물 침대 쪽의 규영이와 보안관도 멍해져 있다.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보안관이 규영이에게 자신의 분노를 토로한다.

“후우~ 래시 가드 만든 새끼, 누군지 몰라도 감옥에 처넣어야 돼. 네 생각은 어떠냐?”

“나도 속상하긴 한데요. 그러지 말고 물에 어른거리는 저 선이랑 다리를 봐봐요. 지금 눈에 보이는 것도 충분히 아름답잖아요. 그걸 감사하면서, ‘나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나의 성품과 삶의 질을 결정한다. ―바이 월터 앤더슨’. 그건 그렇고, 아… 카메라를 가지고 왔어야 하는 건데…….”

보안관은 규영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예전 내 소원은 제니가 와이셔츠만 입고 있는 걸 보는 거였으니까… 이 정도면 꽤나 근접했다.

“터뜨린다?”

삼식이가 자동차 에어컨을 쐬고 있던 샴페인 병을 가져와 열심히 흔든다. 그러고는 허락이 내리기도 전에 곧바로 마개를 젖혔다.

퐁― 샴페인의 흰 거품이 높이 터져 나오며 사방으로 치솟는다. 삼식이는 모두를 향해 골고루 병을 흔들고 뿌려 댔다.

“하하하하!”

20만 원짜리 샴페인의 반 이상을 뒤집어쓰고 나니 모두의 얼굴에 더 큰 웃음이 피어났다. 1회용 플라스틱 컵에 샴페인을 따라 제니와 태권소녀에게 나눠 준 삼식이는 맥주 풀 안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으흐흠~ 달달하구나.”

병째 샴페인을 기울이고 나서 삼식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지금 마신 한 모금이 만원이라니… 나한테는 너무 사치스러운 것 같은데. 어디…….”

그러고는 플라스틱 컵으로 자신이 몸을 담그고 있는 풀 속의 맥주를 떠서 시원하게 쭈욱 들이켰다.

캬아! 역시 이게 더 낫다. 삼식이는 만족했지만, 보고 있던 보안관이 기겁을 한다.

“야, 너 그거 네 땟국물이잖아. 멀쩡한 맥주 두고 왜 그걸 마셔?”

“하하하, 때는 이러~엏게 밀어내고 뜨면 되지. 이렇게 건져 내도 되고. 너도 들어와서 이렇게 한잔해 봐. 이거 완전 짱이야.”

“됐어, 너나 실컷 마셔. 자, 규영아. 우리도 물에 몸 좀 담그자. 읏차.”

보안관은 규영이를 그물 침대에서 들어 올려 녹차 풀 쪽으로 걸어갔다. 규영이가 뻔뻔한 얼굴로 제니와 태권소녀를 돌아보며 말한다.

“아… 내가 미처 말을 못했는데요, 나는 녹차 안 돼요. 알레르기가 있어서 녹차가 닿으면 뭐가 막 나고 엄청 가려워져요. 그냥 물에 들어가야 돼요. 생수 풀 쪽에.”

이놈 봐라? 보안관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규영을 봤다. 녀석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딴청을 피운다.

“이리 들어와 봐요, 오빠.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제니가 수면을 찰박거리며 다리를 오므려 자리를 만든다. 황송하옵게도… 보안관은 좋으면서도 수줍어서 쭈뼛거렸다.

“그, 근데 내가 들어가면 불편하지 않아? 여자들만 있는데.”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리고 이거 다 오빠들이 힘들게 싸워서 얻은 거잖아요. 빨리 와요. 에잇! 이래도 안 와요?”

제니가 물을 쫙쫙, 끼얹는다. 자, 태권소녀도 한쪽으로 다리를 모아준다. 그, 그러면… 보안관은 규영이와 함께 첨벙 물속에 몸을 집어넣었다.

커다란 덩치의 보안관이 규영이까지 안고 들어가자 순식간에 물이 확 넘쳤다. 출렁거리며 흘러넘치는 물을 보면서 제니는 가벼운 환호성을 지른다.

“잘했어.”

규영을 자리에 앉혀주며 보안관은 작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이 어리고 뻔뻔한 변태 놈 덕분에 제니와 같은 풀 속에 들어올 수 있었다.

“오빠, 이쪽으로 다리 펴요. 큰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으면 불쌍해 보여요.”

제니와 불과 몇 센티 차이를 두고 나란히 다리를 뻗고 있다니, 이게 꿈이라면 나는 영원히 깨고 싶지 않다…….

보안관은 신체 변화를 들키지 않기 위해 엉덩이를 뒤로 빼며 몸 전체에 힘을 줬다.

흐읍! 강철 같은 근육으로 제니의 시선을 사로잡겠노라는 유치한 의지이다.

과연 효과가 있다. 태권소녀와 제니는 그를 빤히 쳐다본다. 옆에서 물장난을 하고 있는 규영이를 보는 게 아니다.

‘오빠, 눈이 부셔요’라는 말을 듣게 되면 어쩌지? 보안관은 괜히 두근거리며 제니의 눈을 마주 봤다. 태권소녀가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왜? 왜 웃어?”

“아~ 아니, 별건 아니고, 그… 면 티 자국이 너무 선명해서 꼭 분장한 것처럼 보여서…….”

“언니도 그 생각 했어요? 저도요!”

두 미소녀가 까르르 넘어갈 때, 보안관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다른 친구들도 다 그러니까 특이하다고 인식하지 못했는데, 목 위와 팔이 너무 새까맣게 타서 아직도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 노가다 때보다 몇 배나 심해졌다.

“이, 이상해?”

보안관이 부끄러워하면서 두 손으로 커다란 몸을 가리려 들자, 태권소녀가 더 당황해서 얼른 손을 내젓는다.

“아냐, 너 몸 좋아. 승모근도 좋고, 삼각근도 전면, 측면, 후면 다 엄청 크고 모양도 잘 잡혔어. 광배근도 그렇고, 전완근도 너처럼 발달한 사람 보기 드물어.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몸이야. 놀린 거 아니야.”

음… 분명 칭찬을 듣긴 들었는데, 뭔가 인간으로서 칭찬 받은 게 아니라 고기적으로 품평을 받은 느낌이다.

이 마블링과 육량을 좀 봐! 1++ A등급 한우로군! 보안관이 아직도 손을 내리지 못하고 있자, 제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빠, 멋있어요.”

그, 그렇지? 보안관은 다시 슬금슬금 손을 내리고 가슴을 쫙 폈다.

“젠장, 쟤 옷 좀 입으라고 하면 안 되냐? 몸이 좋아도 좀 어지간히 좋아야지. 내가 꼭 어린애 같아서 근처엘 못 가겠잖아.”

신입이 새로 딴 샴페인 병을 가지고 맥주 풀 안으로 들어오며 중얼거렸다. 여전히 컵으로 휘휘 저어 맥주를 떠서 마시고 있던 삼식이가 대꾸한다.

“어린애 같으면 어때. 이런 사람 있고, 저런 사람 있는 거지. 아참, 오줌 싸면 안 돼. 나 이거 떠서 마시고 있으니까.”

“너는 이 새끼야, 잘났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그딴 말을 씨부릴 수가 있는 거야. 내 입장이 되면 안 그렇다고. 아이! 다리 좀 오므려 봐! 자꾸 닿잖아. 다리도 씨발, 존나게 기네. 야, 그건 그렇고, 이거 죽이기는 한다. 톡 쏘는 게… 한 병에 20이라고 그랬지?”

신입은 투덜거리면서도 샴페인을 홀짝거리고 라벨을 보면서 행복해 했다. 삼식이는 자신이 옆에 놓아두었던 모엣 샹동 샴페인을 들어 올려 보여주었다.

“나는 이거랑 그렇게 큰 차이 모르겠던데, 값은 거의 네 배 되더라. 너, 이것도 한 번 먹어봐. 눈 감고 마시면 구분 못할걸?”

“지랄, 너는 입이 싸구려니까 그렇지.”

“하하, 엄밀히 말하자면 틀린 말은 아니네. 지금 이것도 먹어본 술중에 꽤나 비싼 편에 속하니까. 아닌가, 제일 비싼 건가?”

“나도 여자애들이랑 같은 풀에서 놀고 싶구만. 자기 목욕한 물 마시는 또라이 말고.”

신입이 한숨을 내쉰다. 하하하, 삼식이는 밝게 웃었다.

“아직 해 떨어지려면 멀었어. 한참 더 놀 건데 뭐.”

뭔가 부산스럽던 유빈이 일을 다 마치고 돌아와 녹차 풀에 몸을 담근다.

“여기는 통 인기가 없냐?”

유빈은 건너편 풀의 삼식이와 신입을 향해 맥주 캔을 들어 올렸다. 셋은 허공에서 건배를 하고 일제히 고개를 젖혔다.

“근데 유빈아, 여태까지 뭐했어? 혼자서?”

“아아, 늬들 꽐라 될 때까지 다 취하면 어디서 재울까 그거 궁리했어. 우리 둘이 보안관 업고서 모텔까지 못 갈 거니까. 모텔을 가도 그 비밀 통로로 올리지를 못하겠지.”

“우리 오늘 꽐라 돼?”

“백 프로지. 저 술 양을 좀 봐라. 보안관 새끼… 지금도 또 새로 샴페인 딴다, 저거. 혜주는 주량이 어떤지 모르겠네. 안주도 젤리만 먹던데.”

“하하, 그래서 어디에서 재울 건데?”

“승합차 한 대 문 따고 좌석 다 눕혀놨어. 덮고 자라고 타월도 몇 장 놔뒀고. 몇 명은 거기, 몇 명은 우리 타고 올라온 차. 그렇게 하면 대충 하룻밤이야 보내낼 수 있겠지, 뭐. 여름이니까.”

유빈은 걱정 대장답게 손가락을 꼽아보다가 또 맥주 캔을 기울인다.

“녹차 풀은 어때요? 미끌미끌해요?”

제니와 혜주가 물에 젖어 착 달라붙은 래시 가드 차림으로 다가와 묻는다.

“나, 나도 녹차가 궁금하더라!”

신입이 벌떡 몸을 세워 일어나려다가 엉덩방아로 물보라를 일으켰다. 뜻밖의 바보짓에 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이 기분 좋은지 신입도 환하게 웃는다.

삼식이는 샴페인을 한 모금 들이켜고서 물 위에 띄워둔 플라스틱 통을 끌어온다. 상자 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낸 삼식이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연기를 내뿜었다.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담배, 술, 음식, 평화, 친구… 전부 그가 좋아하는 것들뿐이다. 풍요롭고 고마웠다. 매력적인 여자가 없다는 게 좀 아쉽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 누구나 완벽할 수는 없는 거니까.

☆ ☆ ☆

건대 쉘터 의무실의 고 하사는 초조한 마음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똑똑, 노크와 거의 동시에 문이 열린다. 그리고 중년의 아저씨가 들어선다.

“어깨랑 목이 너무 결리고, 머리도 지끈지끈해서…….”

아저씨는 자신이 얼마나 괴로운지 인상을 쓰는 것으로 표현하려 한다. 네, 고 하사는 아저씨의 하소연을 한참 들어주고 서랍을 열었다.

이부프로펜 성분의 진통제. 이제 진통제는 이것밖에 없다. 그것도 딱 스무 알뿐이다. 그가 임수정을 위해 따로 챙겨둔 것들이다. 그녀는 이 약이 더 잘 맞는 것 같다고 했었다.

진통제가 다 떨어졌다.

이미 사흘 전에 왔어야 하는 보급이 계속 감감 무소식이다. 강 소위에게 물어봐도 답답한 한숨만 지을 뿐이다. 내일 주변의 약국을 털어 가져오겠다고는 하지만, 역시 보급품이 없으면 감당이 안 된다. 특히나 진통제는 더 그렇다.

생존자들은 대부분 진통제에 의존하고 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육체적인 아픔이라고 착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고 하사는 두 알을 뚝 떼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두 알 드리겠습니다. 지금 드시고, 저녁 드신 다음이나 가능하시면 내일 아침 식사 후에 드십쇼. 속이 쓰릴 수 있습니다.”

“아이고, 두 알 가지고 불안해서 안 돼. 난 이놈의 통증을 아주 달고 사는데, 그거 한 판 몇 알이야? 그냥 그거 다 주면 되겠네.”

아예 빼앗으려 달려드는 아저씨의 손을 피하며 고 하사가 두 알을 내밀었다.

“안 됩니다. 그렇게 남용하시면 이거 위천공이 생겨서 큰일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관리를 해야 돼요.”

엄포를 놓아 겨우 아저씨를 돌려보냈다. 사실대로 약이 다 떨어져서 넉넉히 줄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대번에 소문이 나고 먼저 약을 쟁여놓으려는 사람들이 미친 듯이 달려올 테니까.

‘이러다가 영영 보급이 안 오면 어쩌지?’

상상만 해도 끔찍해서 고 하사는 진저리를 쳤다. 약은 문제도 아니다. 당장 물과 실탄 보급이 끊기면… 다 죽는 거다.

이제 열여덟 알. 고 하사의 마음은 조금 더 무거워졌다. 임수정에게 ‘약이 없어요’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지금쯤 와주면 정말 좋겠다. 여섯 알쯤 뚝 떼어주고, 한동안 이걸 구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아껴 먹으라고 미리 일러주고 싶다.

똑똑, 또 노크.

고 하사는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들어선 것은 가희다. 이 여자도 어지간히 진통제를 달고 산다.

“안녕하세요.”

가희가 혀 짧은 소리를 내며 테이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네, 안녕하십니까. 증상이 어떠신데요?”

“몸이… 다 아파요. 관절도 뻐근하고… 누구한테 맞은 것같이, 그렇게 아파요. 가희가 원래 몸이 약해서요.”

이 여자의 통증 호소는 엄살이 아니다. 여전히 외모가 예쁘기는 하지만 요즘 많이 초췌해졌다. 고 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통제 두 알을 떼어 내밀었다.

“두 알… 그러면 내일 또 부탁하러 와야 하는데요. 가희는 번거롭게 해드리기 싫은데.”

늘 넉넉하게 주던 것과 비교가 되는지 가희가 머뭇거린다. 고 하사는 얼른 말을 지어냈다.

“아, 이거요. 이게 전에 드시던 약과 다른 성분이 보급이 와서 조금만 드리는 겁니다. 약보다도요, 마음을 편하게 먹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통증도 줄어들 겁니다.”

“그래야 하는 거 아는데요, 가희가 걱정이 많아서 그래요. 여려서.”

“네, 그러시는 것 같네요. 그런데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 푹 놓으세요. 세상이 이렇게 되었어도 쉘터는 안전합니다.”

고 하사의 조언을 들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던 가희가 물었다.

“여기가… 정말로 안전할까요?”

그녀의 말이 어딘가 섬뜩하게 들려서 고 하사는 흠칫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별것도 아닌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안심하고 싶어서 흔히들 저렇게 묻는다. 일종의 보채기 같은 거다. 고 하사는 다시 평소의 얼굴로 돌아가 미소를 지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철통같은 보안입니다. 걱정하실 거 하나도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을 믿으세요.”

“…그렇겠죠? 고맙습니다.”

가희는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또 두 알이 줄었다. 고 하사의 등에서 땀이 흘렀다.

가뜩이나 덥고 답답한데다가 매일 아프다고 칭얼대는 사람들만 만나야 하는데, 이제는 약 개수까지 세고 있어야 하다니……. 차라리 좀비 대가리라도 쏠 수 있는 전투병이었으면 좋겠다.

똑똑.

의무실 문은 1분이 멀다 하고 노크 소리를 울려 댄다. 또 새 환자다.

“체한 것 같아요. 아까 밥 먹고 있는데 밖에서 총소리가 울리는 통에 딱 얹혔어요. 아우, 답답해.”

아줌마는 아파 죽겠다고 하는데, 고 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통제가 줄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보급 없이 이렇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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