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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몰락의 유산 (2) (269/449)


269. 몰락의 유산 (2)
2022.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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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제를 끊으니 밤이 길어졌다. 숨을 쉴 때마다 결려오는 갈비뼈의 통증에 민구는 밤새 뒤척였다. 참는 것에 익숙한 그라 해도 진통제 없이 밤을 보낸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장에라도 다시 박스 안에서 약을 꺼내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기 위해 민구는 몇 번이나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 어지러운 약을 먹지 않아야 혼자서 좀 걸을 수 있다.

밤새 주변을 걸어 다니는 발자국 소리와 은근히 풍겨오는 지린내도 그가 좀 더 깊이 잠드는 것을 방해한다. 자리를 잡을 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부근에 화장실이 있는 모양이다.

저벅, 저벅, 저벅.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민구의 바로 곁을 걸어가 볼일을 보고 물을 내린다. 그 소리가 새벽 내내 아주 크고 짜증스럽게 울린다.

저벅저벅.

쪼르르르르― 쏴아아아―

저벅저벅…….

다음 날 새벽 일찍 눈을 떴을 때, 그의 돗자리는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괴롭다. 땀을 그렇게 흘렸는데도 요의가 느껴진다.

민구는 숨을 몰아쉬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오줌이든, 식사든 잠시 미뤄둘 수는 있어도 영원히 피할 수는 없다. 고통스러워도 일단 욕구가 생기면 해결하고 오는 게 깔끔하다.

문제는 겨우 20여 미터 거리에 있는 화장실이 너무도 멀어 보인다는 점이다.

“후우~”

두 걸음을 떼던 민구는 옆자리 중년 남자의 시선이 자신의 보급품 박스에 꽂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놈의 얼굴에서 욕심이 뚝뚝 떨어진다. 자신이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박스를 들고 튀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옆자리 사람이라고 해봐야 그저 우연히 부근에 앉아 있는 것뿐이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인간이고, 그가 가진 짐이라야 돗자리 하나뿐이다. 언제라도 다른 곳으로 도망쳐 버리면 그만이다.

민구는 우뚝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옆의 여자도, 또 그 옆의 사람도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동시에 민구의 박스를 곁눈질하고 있다.

‘하긴, 그 안에 담배도 몇 갑이나 들어 있으니 욕심도 나겠지…….’

민구는 말없이 자신의 자리로 다시 돌아와서 박스와 돗자리를 챙겨 들었다. 사물함 부근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더 편할 것 같다.

옆구리에 박스를 끼고 걸어가는 민구의 모습을 다들 아쉬운 눈빛으로 돌아본다.

“젠장, 나만 그 생각을 한 게 아니었군.”

화장실에 들렀다가 사물함 부근으로 향한 민구는 양옆으로 빽빽하게 누워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혀를 찼다. 발 디딜 틈조차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서로 무리를 이루어 사물함 주변을 차지하고 있다.

민구는 깨끗이 포기했다. 자신의 돗자리를 깔 만한 공간도 없거니와, 용케 비집고 들어가 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해도 사방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차이게 될 것이다. 상상만 해도 갈비뼈가 시려온다.

담배 한 갑과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은 뒤, 민구는 박스를 사물함에 넣고 돗자리만 둘둘 말아 들었다. 걷다가 호흡이 가빠져 오면 아무 사람 옆에나 돗자리를 펴고 앉아서 잠시 숨을 고르고 쉬었다.

워낙에 난민의 삶이 익숙한 사람들이라 낯선 그가 와서 자리를 잡아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그저 이놈이 내게 해를 끼치는 건 아닐까…… 하는 시선으로 잠시 관찰하는 게 전부다.

막상 자리를 잡으려고 해보니 조금이라도 지리적 이점이 있는 명당들은 이미 모두 누군가에 의해 선점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급식소 주변, 출구 주변, 볕이 드는 곳……. 만만한 데라고는 아까 그가 자리를 잡았던 곳처럼 화장실 주변밖에 없다.

거긴 별로다. 냄새는 둘째 치더라도 사람들이 계속 발소리를 내며 들락거리는 통에 도무지 잠을 이루기가 어렵다.

꾸르르륵―

비어 있는 배에서 밥을 달라는 신호를 보내온다. 갇혀 있느라 어젯밤 저녁을 걸렀으니, 이제는 뭘 좀 먹기도 먹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아니다.

저렇게 사람들이 바삐 급식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그 행렬과 속도를 맞춰 이동할 자신은 없다. 툭, 가볍게 몸이 부딪치기만 해도 그로서는 숨이 턱턱 막히는 지옥을 경험해야 한다.

가뜩이나 진통제를 끊어 온몸이 다 부서지는 것 같은데, 거기에 또 통증을 추가할 필요는 없다.

민구는 일단 그나마 한가한 자리로 피해 벽에 기대앉았다. 화장실 앞에도 긴 줄이 생기고, 급식소 쪽에는 그보다도 몇 배나 더 긴 줄이 생겨난다.

우습게도 민구처럼 외톨이인 사람은 거의 없다. 다들 누군가와 앞뒤로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거나 눈빛을 교환한다. 여기에서 지내는 보름 정도 만에 만들어진 인연들이다.

동료…… 식구…….

민구의 머릿속에 식구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에게도 한때 일행이 있었다. 한 식구, 동생들, 새끼들, 형님, 아우님, 의리, 그리고 큰형님…….

되도 않는 개소리라는 걸 애초부터 알고 있었는데, 한동안은 그게 마치 진짜 중요한 삶의 원칙이라도 되는 양 믿는 척했다.

그런 말로라도 포장을 해야 자신의 말에 더 권위가 서고, 꼴이 조금은 나아 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열심히 믿는 척을 하다 보니 어느 시점부터는 정말 믿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만큼 자신에게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거짓말도 백 번을 하면 진실이 된다고 했던가…….

육만배를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만배 빌딩으로 갔을 때에도, 또 거기에서 기동이 놈의 아주 치졸한 쪽지를 확인하고 여기까지 먼 길을 찾아왔을 때도, 건대 쉘터로 이동할 때도, 그는 자신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져 보지 않았다.

큰형님을 찾아가는 것이 맹세를 나눈 식구라면 당연히 해야만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스스로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어 목에 목줄을 채우려 했던 것인데, 그게 뭔가 굉장히 멋진 쾌남아의 모습이라는 착각에 빠져서 온갖 애를 썼다.

“큭큭큭…….”

민구는 갈비뼈를 움켜쥐고 웃었다.

뭐야, 결국 똥개 새끼처럼 주인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거잖아…….

십 년이 넘도록 그 많은 아수라장을 헤쳐 가며 자신이 얻고자 했던 게 고작 누군가의 개집 한 칸을 차지하는 똥개 새끼의 지위였다니……. 다른 똥개들보다 좋은 개집에서 자고 좋은 개밥을 먹는다는 것에 우쭐해져 있었다니…….

허울 좋은 말들을 발가벗겨 놓고 보니 자신이 소망했던 것이 너무나 초라하고 한심해서 화조차 안 난다.

지금쯤 아마 육만배도 자신이 사라진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 늙은 너구리라면 기동이의 상처를 보고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을 거다. 강민구라는 개가 얼마나 이빨 빠진 약골이 되어버렸는지도…….

민구는 육만배가 자신을 찾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한 번 서열 싸움이 벌어진 식구들 간에 공생은 없다. 대충 화해하는 척 덮어보려 해도 둘 중 하나가 죽거나 사라지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피를 봐야 끝이 난다.

다시 말해 먼저 칼을 꺼낸 사람이 누구든 간에, 일단 피를 본 이상 육만배는 민구와 기동이,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돌아올 답은 너무도 간단하다. 육만배는 언제나 더 쓸모 있는 놈을 원한다.

둘 중 누구와 더 오래 일을 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힘을 써야 할 일이 더 많으면 힘이 센 놈을, 잔머리가 필요하면 잔머리가 잘 도는 놈을 고르는 인간이다. 그래야 더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으니까.

기동이와 붙어 이기지 못한, 조금만 걸어도 숨을 헐떡이는, 약해 빠진 자신을 육만배가 욕심낼 리는 없다. 이제 강민구는 조직에서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민구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몸짓조차도 실은 허세일 뿐이었다. 정말로 마음속이 홀가분한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스물여덟…… 그중 거의 절반에 이르는 시간 동안 몸담았던 조직에서 떨려나기까지는 단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 지탱해 줄 기둥이 빠져나간 채로 서 있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일러주는 마음의 중심이 없어진 것이다.

“젠장…… 한 대 피워야겠군.”

민구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외야석까지 먼 길을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땀으로 온몸을 흠뻑 적신 끝에 겨우 흡연 구역에 도착했다.

“하아~”

비틀대며 계단 위에 걸터앉은 민구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예전에 담배를 피울 때마다 비슷한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 각도에서 보는 야구장이 어느새 익숙하다. 민구는 연기를 뿜어내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야구장의 잔디가 좀 더 무성하게 자라나고 군데군데 잡초들도 보이지만,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전히 우울한 사람들이 사방에 바글거린다.

그나마 차이라고 하면 대규모 징집 덕에 젊은 남자들의 비율이 확연히 줄어들어 있다는 것 정도다. 흡연 장소에도 아직 어려 군에 끌려가지 않은 십 대 중반의 애송이 몇 명이 바닥을 눈으로 훑고 다니고 있다.

“어? 이거, 군인이 버린 거다. 피울 만하다.”

한 놈이 바닥에서 제법 긴 꽁초 하나를 주워 올리더니 곧바로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켠다. 한 모금을 깊게 빨고 나서 녀석은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불붙은 꽁초를 넘긴다.

다들 한 모금씩 돌려 빨고 나서 녀석들은 더 피울 수 없게 된 꽁초를 바닥에 버린다. 그러고는 또 새로운 꽁초를 찾아 고개를 숙인 채 의자 사이를 걷는다.

“후후후.”

놈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너무 일찍 담배 맛을 알아버린 통에 꽁초를 주우러 다니고 있는 십 대들의 모습을 민구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좇았다.

놈들의 옷 꼬라지며 하는 행동이 딱 거지다. 13년 전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열다섯 살 때의 민구는 저들보다 더 바짝 말라 있었고, 저들처럼 뭐 주워 먹을 게 없나 싶어 언제나 눈을 번들거렸다.

물론 당시의 그는 저렇게 담배를 나눠 피울 친구조차 가져 보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더 독하고 거침이 없었다. 육만배가 아직 길에서 그를 줍기 전의 이야기다.

“열다섯 살이라…….”

민구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그는 그때와 똑같아졌다. 주머니에 든 것도 없고, 지위도, 값비싼 이탈리아제 양복도, 누구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현란한 칼 솜씨도 없다.

하지만 모든 걸 다 잃기만 한 건 아니었다.

오늘 비로소 깨달았지만, 그는 장장 십수 년간 목줄을 걸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이 오히려 훈장인 줄 알고 뿌듯해하며 살아왔다. 그 질긴 개 줄을 벗어던지고 잃어버렸던 자유를 막 되찾은 참이다.

자유……. 민구는 입안으로 소리를 내서 그 단어를 되뇌어봤다. 그는 줄곧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직 너무 어려 자신의 욕망이 뭔지도 잘 모르던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철저하게 육만배의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살아왔다.

“……그랬군.”

고개를 끄덕인 후,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민구는 일단 열다섯 살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의리니 조직이니 하는 엉터리 굴레들을 머릿속에서 싹 지워 버리고 그때로 돌아가 진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비로소 꽉 막혀 있던 가슴이 조금은 뚫리는 것 같다.

육만배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과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한 미련도 당연히 함께 지워 버려야 하는 것들이다.

민구는 아직도 열이 펄펄 끓는 옆구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만큼 근육이 떨어져 나갔으니, 어쩌면 그는 예전의 자신만큼 강해지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다섯 살 때의 자신보다는, 그 땟국이 줄줄 흐르던 깡마른 소년보다는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

그때보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갈 수 있다면 별로 손해를 보는 게 아니다. 그는 열다섯 살이 되어 다시 시작하기로 했으니까.

“그거 괜찮군.”

목표가 생긴 민구는 엷은 미소를 띤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몸은 고통스럽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아직도 아래쪽을 뒤지고 다니며 꽁초를 찾고 있는 애송이들을 뒤로하고 야구장 건물 내부로 돌아온 민구는 일단 한가한 자리부터 찾기로 했다.

지금 급식소로 가서 줄을 서봐야 어차피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걸 버텨낼 자신이 없다. 앞으로 한동안은 사람이 몰리는 시간을 피해 남들보다 일찍 먹거나 늦게 먹어야 한다.

“여긴 자리가 이거 하나뿐인가?”

한참을 빙 돌던 민구는 꽤 여유로운 장소를 발견하고 수염이 잔뜩 돋은 턱을 긁적였다.

기둥 뒤쪽, 햇살이 잘 들지 않는 곳이기는 해도 이렇게나 한산하다니…….

먼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단 한 명뿐이다.

비록 명당은 아니지만 이만하면 편히 쉴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 발에 차일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민구는 더 고민하지 않고 돗자리를 폈다. 그러고는 땀에 젖은 트레이닝복 웃옷을 벗어 머리에 베고 누웠다.

인정하기 괴롭지만,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돌아오는 정도의 운동만으로도 그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열다섯 살의 민구라도 이겨보려면 앞으로 고생깨나 해야 할 것 같다.

“킁, 킁…… 이게 근데 아까부터…….”

민구는 눈살을 찌푸렸다.

바닥에 누워 있자니 코끝을 찌르는 듯 독특한 악취가 주변에 가득하다. 워낙 씻지 못한 사람들이 잔뜩 모여 사는 곳이어서 악취에는 어지간히 둔감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냄새는 또 조금 다르다.

러시아 마피아 애들에게서 맡아봤던, 그런 냄새다. 놈들이 반갑다며 두 팔을 쫙 벌리고 웃을 때, 놈들의 축축하게 젖은 겨드랑이에서 나던 냄새.

혹시 노린재 같은 게 터져 죽어 있는 건가 싶어 주위를 다 살펴봐도 그런 냄새를 피울 만한 물건은 찾지 못했다. 빈 과자 봉지가 잔뜩 버려져 있지만, 거기에서 이런 냄새가 날 것 같지는 않다.

민구는 의심해 볼 수 있는 단 한 가지 원인, 자신의 옆자리에 깔린 돗자리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대체 어떤 놈이지?”

쭈글쭈글하게 주름이 잔뜩 간 돗자리는 은박이 다 벗겨져 나갈 만큼 낡았다.

어지간히 험하게 써서는 단 며칠 만에 저렇게까지 망가지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돗자리 주변에는 과자 부스러기가 정신없이 떨어져 있다.

잠시 후, 민구의 궁금증이 풀렸다. 엄청나게 뚱뚱하고 커다란 백인 사내가 배를 씰룩씰룩거리면서 걸어온다.

저 무릎이 용케 부러지지 않고 버티는구나 싶을 만큼 대단한 거구다. 녀석은 걸어오면서도 아주 맛있게 손에 든 초코파이를 베어 물고 있다.

자신의 돗자리 옆에 새 이웃이 생겼다는 걸 발견한 백인 사내가 잠시 멈칫하더니, 민구를 빤히 쳐다본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초코파이를 다 먹어 치우고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댄다.

놈에게서 그 독특한 체취와 함께 된장국 냄새가 풍겨온다. 오늘 아침은 된장국인가 보다.

“후우우~”

한참 동안 관찰을 하고 나서야 백인 사내는 천천히 자신의 돗자리 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초췌하고 지쳐 있는, 게다가 몸 여기저기에 붕대를 친친 감은 동양 남자가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옷자락을 펄럭거려 땀을 식히던 사내는 주머니에서 또 뭔가를 꺼내 입으로 가져간다. 과자 봉지다.

‘……밥을 먹고 온 게 아닌가?’

오독거리며 열심히 과자 한 봉지를 먹어 치우는 녀석을 보며 민구는 생각했다. 그만큼 백인 남자는 열심히 먹었다. 손은 쉼 없이 봉지와 입 사이를 왕복하고, 입은 계속 오물거린다.

과자 한 봉지는 금세 바닥을 보였다. 녀석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빈 봉지를 바라보다가 대충 구겨서 뒤쪽으로 휙 던진다. 이 주변이 지저분한 건 다 이 녀석의 소행이었던 모양이다.

“헬로, 암념하쉐여.”

과자를 다 먹고 나서야 비로소 민구를 돌아보며 꾸벅 인사를 건네는 녀석의 입가에는 과자 부스러기와 초콜릿이 잔뜩 묻어 있다. 살랑살랑 흔드는 손은 기름기로 번질거린다.

‘헬로’ 정도야 알아들었지만, 민구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놈과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특별히 안면을 트고 싶을 만큼 관심이 가는 상대가 아니었다.

민구의 반응이 영 냉담하자 백인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1미터 거리를 두고 나란히 자리한 두 남자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민구는 누운 채 복도 쪽을 주시했다. 밥을 먹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조금 뜸해질 무렵, 그는 천천히 일어나 트레이닝복을 걸치고 급식소 쪽으로 걸어갔다.

“테라 양, 이게 약속과 어긋난다는 건 잘 알지만, 사탕부터 하나 주면 좋겠어. 아주아주 좋지 않은 이웃이 생겨 버린 통에 나 오늘 아침부터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거든. 녹초가 된 내 감성을 당분으로 좀 달래야 해.”

‘오전 산책’을 하기 위해 테라와 만났을 때, 젠킨스는 다짜고짜 사탕부터 요구했다.

테라는 빙긋 웃었다. 이제 겨우 조금은 걸을 수 있게 되었나 했는데, 이 사람은 참 집요하게 먹을 것에 매달린다.

“이웃이요? 누가 옆자리에 앉았어요?”

“으음, 기분 좋게 아침밥을 먹고 돌아가니까 떡, 자리를 잡고 있더군. 내가 친절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도 빤히 노려보고만 있는 거야. 고개도 까딱하지 않고. 어찌나 기분이 나쁘던지.”

테라에게서 사탕을 얻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젠킨스는 순순히 걷기 시작했다. 처음 이 짓을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괴롭기는 덜하다.

숨도 그리 가빠지지 않고, 배가 출렁이는 불쾌한 기분도 한결 약해졌다. 무릎이 좀 아프기는 하지만, 이것도 금방 익숙해질 것이다.

“그냥 문화 차이라고 생각하세요. 한국인들은 낯선 사람들과 쉽게 인사를 나누지 않아요. 상대가 외국인이면 더 그렇고요.”

뒤에서 걷는 테라가 그 못된 이웃을 두둔하자 젠킨스는 발끈해서 대꾸했다.

“아아니~! 절대 그런 느낌이 아니었어. 그 남자는 애초에 질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인 게 분명해. 얼굴에 난 커다란 흉터만 봐도 알 수 있지. 분명히 갱이나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을 거야. 최하의 말종이 지저분한 짓을 꾸미다가 경고의 의미로 칼을 맞은 거지. 음, 그랬을 것 같군.”

“흉터요? 젠킨스 씨도 참. 흉터가 있다고 해서 전부 갱은 아니에요. 어렸을 때 장난치다가 다친 사람들도 많다고요.”

테라의 말에 젠킨스는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섰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광대뼈에서 시작해 코를 지나 반대편 광대뼈까지를 가로로 주욱 그으며 말했다.

“이렇게 커다란 흉터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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