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 몰락의 유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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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몰락의 유산 (1)
2022.05.26.
“고생하셨습니다. 나오셔도 됩니다.”
경비병이 밤톨 일행과 민구를 풀어준 것은 48시간이 경과된 후에도 여섯 시간은 족히 지나서였다.
밤이 깊어버렸는데 저녁도 먹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도 불평하지는 않았다. 모든 병사들이 얼마나 바쁘고 힘들었는지 바로 지근거리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방어용 진지를 구축하다가 크고 작은 사고가 있었고, 좀비들의 웨이브가 근접해 올 때 30분 이상 초비상이 걸려 총성과 고함, 비명이 난무했었다.
군용 외부 격리 시설을 경비하는 병력들조차 차출되었어야 할 만큼 바빴다. 갇혀 있는 병사는 오히려 호강을 하는 편이었다.
“형님, 저랑 같이 가세요. 입원 수속 도와드리겠습니다.”
복귀 신고를 마치고 돌아온 밤톨은 민구와 함께 의무대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내리고 야구장 내부의 긴 복도를 가로질러 의무대까지 가는 동안 민구는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이를 악물어야 했다.
아픈 내색을 해서 더 이상 밤톨에게 걱정이나 부담을 남기고 싶지도, 나약해졌음을 드러내 보이고 싶지도 않다. 하루 반나절 동안 내리다 그친 비로 인해 무거워진 공기 때문에 숨쉬기는 더욱 힘들었다.
“으으으~! 끄으응~!”
1층 내부에 위치한 의무대 부근에 다가가자 벽 너머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온다. 딱 듣기에도 한두 사람이 내는 게 아니다. 꽤 여러 명이다.
그 앓는 소리에 놀란 밤톨과 민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의무대 문을 노크하려던 밤톨은 문에 커다랗게 적힌 안내 문구를 보고 손을 멈췄다.
- 노크 절대 금지! 조용히 들어올 것. 민군 구분 없음.
안내문의 글씨 크기나 말투에서 신경질이 느껴진다. 시키는 대로 밤톨은 문손잡이를 살짝 돌리며 밀었다.
그 너머에서는 차갑고 불편한 현실이 알코올 냄새와 함께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끄으으으! 으으으~”
방 전체에 빼곡하게 들여놓은 침대마다 신음하는 병사들이 누워 있다. 빈자리라고는 하나도 없고, 심지어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누운 병사들도 보인다.
다들 기본적으로 두 군데 정도는 붕대를 친친 감은 채고, 피도 어지간히 흘렸다. 구석에 놓인 카트에는 피로 흠뻑 젖은 붕대와 거즈가 가득 쌓여 있다.
“어떻게 왔어요?”
주황색 트레이닝복 위에 흰색 야구 저지를 입은 중년 남자가 피 묻은 장갑을 벗으며 묻는다. 한눈에도 군인이 아닌 걸 알 수 있는 남자의 얼굴에는 제멋대로 자라난 수염과 피곤이 덕지덕지 매달려 있었다.
밤톨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답했다.
“입원 수속하려고 왔습니다. 저…… 근데, 군의관님이십니까?”
“아니, 군의관은 지금 저기서 치료하고 있어요.”
“그, 그럼 선생님은…….”
“참내, 그게 뭐가 궁금해? 나…… 저기, 강남 최 병원 내과과장이에요.”
귀찮다는 듯 대꾸한 남자는 아직도 밤톨이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한 걸 눈치채고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군의관만으로는 도저히 안 되니까 수용자들 중에서 내과든 성형외과든 수의사든 가리지 않고 의사들을 다 동원해서 일하고 있는 거라고요. 그런 것보다 입원 수속이라고 했지? 누구?”
“아, 예. 이분, 총에 맞으셔서…….”
밤톨이 민구를 가리키자 의사는 위아래로 훑더니 일단 보자고 했다. 민구는 아무 말 않고 트레이닝복 지퍼를 내렸다.
고 하사가 싸둔 붕대를 풀고 상처를 살피던 의사가 다시 새 장갑을 꺼내 낀다. 그러고는 옆구리의 총상을 손으로 더듬으며 물었다.
“총상인데, 왜 이래요? 화상을 심하게 입었네?”
“네…… 그거 당시에 지혈시킬 방법이 없어서 불에 달군 칼로…… 지졌습니다.”
밤톨이 대신 나서서 설명을 해준다. 미쳤네, 의사는 고개를 젓더니 다시 상처를 유심히 살폈다.
“그렇게 심하게 다뤘는데도 신기하게 곪지는 않았네? 지방층이 얇아서 그런가…….”
민구는 그 이유를 안다. 건대의 그 군인 의사가 지극정성으로 소독하고 돌봐준 덕이다. 민구의 반대쪽 옆구리로 고개를 돌린 의사는 기동이가 찌른 상처를 보며 물었다.
“이쪽은 뭡니까? 왜 찢어졌어요?”
그 상처에 대해서 밤톨은 모른다. 민구가 대답했다.
“날카로운 거에 좀 걸린 겁니다.”
“그럼 이 위쪽은 왜 이런 건데요?”
“그냥…… 도끼를 들고 있다가 그게 총알에 맞고 튀었습니다. 거기에 찍혀서 갈비뼈가 나갔고.”
으음, 의사는 민구의 갈비뼈를 지그시 누른다. 민구는 눈을 찌푸렸다. 민구의 반응을 살피던 의사가 말했다.
“도끼면 쇠일 테니까, 파상풍 주사부터 맞아야겠네요. 뼈가 골절된 건 아닌 모양입니다. 그랬으면 이렇게 건드리기만 해도 아파서 죽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많이 부었는데…….”
민구는 의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했다.
내 얼굴의 땀을 보면 모르나? 나도 당신이 건드릴 때마다 아파 죽을 것 같아. 그냥 가오 때문에 티를 안 내는 것뿐이지…….
후우~
민구는 숨을 크게 쉬어 통증을 숨기고 말했다.
“파상풍 예방 주사는 2년 전에 맞았습니다.”
“확실합니까? 다른 주사랑 착각한 거 아니고요?”
의사가 재차 확인을 해서 민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늘 날붙이를 다뤄야 하고 언제 연장질을 당할지 모르는 그의 직업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밤톨은 마음이 급해졌다.
“선생님, 자세한 건 일단 입원 수속부터 진행한 다음 두 분이서 말씀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외곽 근무로 복귀해야 해서 말입니다.”
밤톨의 부탁에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자리가 없어. 이분은 걸을 수 있잖아. 걸을 수 있는 분은 방문 치료가 원칙이라고요. 입원은 그보다 더 중증인 사람들만.”
에?
너무 의외의 반응이라 얼빠진 소리를 낸 밤톨은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의무대 내부를 둘러봤다.
정말이다. 침대마다 누워서 신음하는 환자들 중에 멀쩡히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들 거의 대부분이 병사들이다.
“대체 왜 이렇게 다친 사람이…….”
밤톨이 말끝을 흐리자 서랍을 뒤지던 의사가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아픈 사람이 왜 이렇게 많으냐고? 아니,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 그분 왜 다쳤어요?”
“좀비들이랑 교전 중에 오발 사고가 났습니다.”
“여기에서도 매일 교전이 있잖아요. 세 시간이 멀다 하고 총소리가 나고. 그게 벌써 며칠째야? 보름…… 아니다, 보름이 다 뭐야? 20일이네. 여기 병력이 3,000. 그중에 오발이나 도탄 사고가 하루에도 몇 건씩 꼭 일어나잖아요. 외곽 근무라니까 잘 알잖아. 크레모아 같은 거 설치할 때 한 번씩 아주 떼로 난리가 나고, 그리고 또 강에서 보급품 하적하면서도 무거운 거에 깔리고, 찢기고…… 이유는 다양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계속 위험한 일을 하는데 사고가 안 터지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어쨌든 이나마도 태양 그룹에서 의료 지원을 해줘서 가끔 한 번씩 그쪽으로 환자들을 후송하니까 유지된다고 보면 돼요. 안 그랬으면 이 조그만 방 벌써 예전에 미어터졌지. 자, 이거 받으세요. 삼 일 동안 드실 약이에요. 혹시 항생제나 소염진통제에 알러지 반응 보인 적 있어요?”
의사는 서랍에서 꺼낸 약들을 작은 플라스틱 병에 담고 유성 펜으로 약 이름과 날짜를 적은 뒤, 사인을 해서 민구에게 건네주었다.
민구가 그런 적 없다고 하자,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해주었다.
“하얀 거는 소염진통제, 파란 거는 항생제. 둘 다 하루 세 번씩 드세요. 통증이 상당해 보이는데, 너무 힘들다 싶으면 하얀 약은 그냥 하나쯤 더 드셔도 되고. 그러라고 두 알 더 넣었어요. 그리고 다음에 약 받으러 올 때에는 그 통을 가져와요. 여기는 뭐, 전산도 없고, 따로 명부도 없어서 안 그러면 매번 또 똑같은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자, 팔 들어보세요. 소독 다시 하고 붕대 감아드릴 테니까.”
“저기…… 선생님, 이왕 주시는 건데 약을 좀 더 넉넉하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분 지금 걸을 수 있기는 하지만, 꽤 힘들어하시는데 말입니다. 한 열흘 치 정도는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약이 너무 적다고 느낀 밤톨이 부탁했다. 사흘이라야 금방인데, 그다음에 여기까지 또 찾아와서 기다렸다가 약을 타 간다는 게 너무 번거롭고 힘들게 느껴진다.
의사는 민구의 상처를 소독하면서 무감정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대꾸했다.
“정확히 언제 보급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여유 있게 팍팍 줄 수가 없어요. 그러다가 약이 똑 떨어지면 저 사람들 다 큰일 난다고. 서로 조금씩 양보합시다. 자, 이건 붕대 여유분하고, 소독약입니다. 번거로우시더라도 이걸로 하루에 두 번 정도는 소독을 하세요. 날씨가 덥고 습해서 곪기 딱 좋거든요. 해드리면 좋은데, 우리가 그럴 여력이 없어요. 이해하세요. 아, 소독약도 마찬가지. 그 병을 가져와요. 날짜 써놨으니까.”
친절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의사의 말은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 치료를 받고, 설명을 듣는 동안에도 넓은 방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왔다.
그리고 그들 중 절반가량은 길게 못 버틸 것 같은 상태다. 저렇게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는 병사들에게 내가 좀 누워야겠으니 침대를 비워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의사의 모습도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핏발 선 눈만 봐도 그가 얼마나 고단할지 알 수 있다. 어쩌면 이 사람이 환자들보다 더 먼저 뻗을지도 모르겠다.
돌봐야 할 환자가 이렇게 많은데, 칼에 찔린 부위를 꿰매준 것만도 고맙다고 해야 할 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민구는 건대 쉘터에서보다 훨씬 질이 떨어지는 치료와 처우를 받게 되었다. 의사는 마지막으로 이행하기 어려운 조언을 해준다.
“내장이나 이런 기관들이 원래 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인 상태일 거예요. 그…… 총알이 내장을 직접 가격한 건 아니더라도 바로 가까운 데를 콱, 때렸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가 있어요. 사실 이런 총상은 저도 잘 몰라요. 대한민국에서 총이 옆구리 근육을 찢고 나갔을 때 내장 기관이 얼마나 손상을 입는지 잘 아는 의사가 몇이나 되겠어요. 그런 케이스를 볼 일이 아예 없는데…… 하여튼 장끼리 꼬일 위험성도 있으니까, 빨리 다시 제 위치를 잡게 하려면 고통스러우시더라도 걷기라든지 이런 가벼운 운동을 꾸준히 하셔야 해요. 잘 드시고. 지금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게 답니다.”
잘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밤톨이 그거라도 건져 보자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선생님, 그럼 영양제라도 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사람 참, 그런 거 있을 것 같아 보여? 환자분, 약병 버리지 말고 가져와요.”
의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다시 중상자들이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돌아갔다. 민구의 이름도 묻지 않은 채 끝난 진료였다. 그만큼 바쁘고 정신이 없었다.
“죄송해요, 형님. 진짜……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로 옮겨 오자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교섭에 실패하고 의무대 문을 나서면서 밤톨은 정말 면목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민구는 이제 다 나았으니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차피 그가 밤톨을 따라나섰던 이유는 이곳에서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했기 때문이 아니다. 거기를 떠나야 기동이와 그 조무래기들로부터 자신과 그 고마운 군인 의사의 목숨을 지킬 수 있어서였다.
“좀 앉아 계세요. 제가 사물함 열쇠랑 보급품 받아다 드릴게요.”
“아니, 바쁜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밤톨에게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만류하려던 민구는 말을 삼켰다.
보급품을 받으려면 예전에 시비가 붙었던 그 낙타를 또 만나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런 놈과 얽히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신경 쓰이는 일들이 많다.
“무리하지 마십쇼, 의사도 그러잖습니까, 어지간히 고통스러울 거라고.”
밤톨은 씽긋 웃어 보이며 대민 지원 센터 쪽으로 뛰어갔다.
“으음~!”
밤톨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민구는 벽에 기대앉으며 계속 참아왔던 신음을 내뱉었다. 총알이 날려 버린 옆구리는 달군 쇠로 쑤시는 것 같은 통증을 준다.
기동이와 몸싸움을 벌였던 이후, 갈비뼈도 더 심하게 결린다. 근처에 누워 있던 수용자들이 숨을 헐떡이는 그의 모습을 구경거리 보듯 쳐다본다.
“만신창이군…….”
뚝뚝 떨어지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민구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얼굴과 팔에서 떨어진 땀방울이 바닥을 적신다.
그저 가까운 거리를 좀 걸어 다녔을 뿐인데, 그 대가가 너무 독하게 돌아온다. 누군가가 내장 안에 손을 넣고 사정없이 휘젓는 것 같아 숨을 크게 쉬기도 어렵다.
새벽에 기동이와 사투까지 치른 상태에서 장갑 트레일러를 타고 다시 잠실로 돌아오는 여정이 부담스럽기는 했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 괴로워질 줄은 몰랐다.
“하아, 하아, 여기요. 열쇠 받으십쇼. 이거는 보급품이고요. 배고프실 텐데, 건빵이라도 좀 드세요.”
어느새 돌아온 밤톨은 숨을 헐떡이며 사물함 열쇠와 물건들이 든 상자를 내밀었다.
아…… 민구는 벽을 짚으며 일어났다. 주저앉은 상태에서 남이 주는 뭔가를 받고 있자니, 미안함과 동시에 비참함이 밀려온다. 도저히 그렇게는 못 하겠다.
“……고맙다.”
민구는 밤톨의 눈을 보며 말했다. 뭔가 더 그럴듯한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래봐야 어차피 다 공허한 소리들일 뿐이다. 신세를 갚겠다는 말조차 할 수 없다. 밤톨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담배입니다. 애들이랑 저랑 있는 거 모았는데, 몇 갑 안 돼요. 저는 외곽 근무 중대여서 이제 자주 얼굴 뵙기도 어려울 텐데…… 일이 이렇게 돼버려서 영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형님, 힘들어도 운동 꼭 하세요. 갈게요.”
건빵 주머니에서 담배 몇 갑과 라이터를 꺼내 준 뒤, 돌아갈 때 밤톨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사실 자기 실수도 아니고, 그렇게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는데…… 참 모질지가 못한 녀석이다.
“후우~”
민구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주던 밤톨은 돌아갔고, 이제 나머지 일들은 다 그의 몫이 되었다.
심란하다. 담배가 피우고 싶지만, 외야의 흡연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걸 상상만 해도 머리가 다 어질어질해지는 것 같다.
격리 수용되어 있던 이틀 동안이 차라리 더 편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밥도 주고, 약도 주고, 보는 눈이 없을 때엔 밤톨이 담배도 줬으니까.
“엇!”
박스를 뜯어 돗자리를 깔려던 민구는 땅이 일렁이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벽을 짚었다.
“젠장…….”
약해 빠진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 기동이와 싸울 때에는 이 정도가 아니었으니, 어제오늘 격리되어 있던 동안 맞았던 주사 중에 뭔가 머리를 핑― 돌도록 만드는 성분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진통제…… 아마 진통제일 테지.
한동안 기대 있다가 겨우 돗자리를 펴고 앉은 민구는 조금 전에 의사에게서 받은 진통제 병을 박스 안에 넣었다. 이렇게 어지러워서야 운동이고 뭐고 못한다. 아프더라도 한동안 약을 끊어봐야겠다.
“구두 꼴 봐라…….”
바닥에 쓸리고 먼지를 뒤집어써서 엉망이 된 자신의 구두를 보며 민구는 쓴웃음을 지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싸구려 트레이닝복과 엉망이 된 구두의 조합은 이미 초췌한 그의 모습을 더 초라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이렇게 형편없는 꼴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저씨, 그거…… 콘돔 쓸 거예요?”
망연자실해서 담장 너머의 밤하늘을 보고 있는 민구에게 누군가 말을 건다. 돌아보니 서른쯤 된 여자다. 이해를 못 한 민구가 되물었다.
“콘돔?”
“그래요, 콘돔. 보급품 박스에 든 거.”
보급품 박스에 그런 게 있었나…….
민구는 기억을 되짚어봤다. 처음 이곳에 와서 받은 상자는 뜯지도 않은 상태에서 초희에게 줘버리고, 자신은 만배파 애들이 남기고 간 돗자리를 사용했었다.
“안 쓸 거면 나한테 팔아요. 건빵 한 봉지 줄게요.”
여자가 거래를 제안한다. 민구는 그러자고 했다. 어차피 쓸 데도 없는 콘돔. 먹을 수 있는 건빵이 훨씬 낫다.
박스를 뒤져 콘돔을 꺼내 주자 여자는 건빵을 돗자리 위에 올려두며 물었다.
“담배는요? 아까 보니까 잔뜩 주고 가던데, 그것도 좀 파세요.”
민구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된다. 그러고는 다시 벽에 머리를 기댔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 다 아는 양 마음껏 까불고 살았었는데…… 총 한 방 맞고 나니 그동안 전혀 모르고 살아온 일들이 비로소 보이는 것 같다.
박스 안에 든 콘돔처럼, 세상에는 그가 알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이 가득했다.
민구는 힘없이 누워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의 안쪽에 오늘 의무대에서 보았던 피투성이 중상자들의 모습이 자꾸 어른거린다. 그동안 자신은 모든 것을 혼자만의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그의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오늘 민구는 자신의 편안한 하루가 누군가 흘린 피와 땀을 양분으로 하여 겨우 연장된 것임을 깨달았다.
으음~
그의 입에서 또 신음이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