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8. 마이 프레셔스 (4) (258/449)


258. 마이 프레셔스 (4)
2022.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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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아아― 쏴아아아―

온종일 후텁지근하더니, 결국 밤 12시를 전후해서 폭우가 쏟아졌다.

빗소리를 들으며 사방이 고요해지기를 기다리던 박 소위는 몰래 관사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컴컴한 마당과 주차장을 내달려 쉘터의 동쪽 철책 앞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다. 애초에 인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내부 철책에는 따로 경비를 세우지 않는다. 어둠을 틈타 밀회를 즐기는 연인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철책의 자물쇠를 연 박 소위는 건물 주차장 아래에 몸을 숨긴 뒤,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된 채로 초조하게 기다렸다.

잠시 후, 쉘터 뒷문을 열고 나온 가희가 요란하게 퍼붓는 비를 뚫고 철책 쪽으로 뛰어오는 게 보인다. 박 소위는 얼른 마중을 나가 철책을 열었다. 두 연인은 건물 그늘 속에 숨어들었다.

“어서 와. 후후, 많이 젖었네. 뭔 놈의 비가…….”

가희가 입술을 덮쳐 오는 바람에 박 소위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으음~ 박 소위는 부드러운 촉감을 만끽하며 그녀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비에 젖어 달라붙은 옷 위로 만지는 맛은 또 각별한 데가 있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아까 사이렌 울리고 총소리 들릴 때 가희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지 모르죠? 우리 박 소위님, 머리카락 한 올도 다치지 않게 해 달라고.”

비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가희가 말했다. 그 애절한 말투며 눈빛이 아주 사람의 애간장을 녹인다. 박 소위는 벌써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하아~ 나도…… 나도 하루 종일 네 생각뿐이었어, 가희야.”

“근데 왜 여기로 오라고 했어요? 아까 편지 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후후, 밖에서는 모르는 사이처럼 굴자고 해 놓고 갑자기 뒤에서 편지를 슥, 쥐여 주고 가니까.”

아, 그거……. 박 소위는 가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어디에서 말이 새어 나갔는지 모르지만, 우리 사이에 대해 소문이 돌고 있대. 새 건물 거기만 주시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당분간만 만나는 장소를 여기로 옮겨야겠어, 가희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죠? 어쩐지 사람들이 절 보면서 뒤에서 수군대는 기분이 들더라니……. 설마 박 소위님……. 누군가한테 자랑하고 다녔어요? 가희는 그런 건 싫은데…….”

가희가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자 박 소위는 다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럴 사람인가? 가희야,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 같아? 날 못 믿어?”

“아뇨, 믿어요…….”

가희가 서글픈 눈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연히 믿는다. 왜냐하면 소문은 육만배가 냈으니까.

하지만 이 순진한 녀석은 꿈에도 그런 사실을 모를 것이다. 가희는 육만배가 시킨 대로 고민하는 척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런데 이렇게 몰래 만나는 게 뭔가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기분은 안 좋아요. 가희는 소위님을 사랑하는 죄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숨어 있어야 하죠?”

“그, 그건……. 미안해. 내가…… 내가 여기 책임자였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어도 되는데……. 문 대위가…… 중대장님이 이걸 알면 나를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킬 거야. 나는 그게 너무 두려워.”

박 소위가 풀죽어 하자 가희는 금방 표정을 바꾸며 그의 얼굴을 쓸어준다.

“잊어버려요. 지금 이 시간에는 가희랑 소위님에게만 집중해요.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데……. 하루 종일 이 시간만 기다리는데……. 아우, 가여워. 여윈 것 좀 봐. 일이 힘들죠? 자, 영양제. 아~ 해요. 가희가 먹여 줄게요. 아~”

가희는 품에서 꺼낸 약통을 열고 알약 하나를 입에 문 뒤, 미소를 지었다. 박 소위는 시키는 대로 입을 벌린 채 기다렸다. 그녀가 키스하듯 약을 건네고 혀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고마워……. 가희가 챙겨 주지 않았으면 나는 정말……. 어! 벌써 기운이 막 나는 것 같아! 후후후.”

준비해 온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박 소위는 과장된 몸짓을 보인다. 가희는 겉으로도, 마음속으로도 웃었다.

그렇게 좋아? 이거, 이제 완전히 약쟁이가 된 모양이네…….

“가자, 가희야. 여기 2층에 병실로 쓰던 방이 있어. 거기 침대도 있고……. 네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보여줄게. 대신에 소리 크게 지르면 안 돼. 바로 두 층 위에 병사 애들이 있어. 오늘은 비가 오니까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어머, 후후후. 그렇게 말하면 가희는 부끄러워서…….”

가희는 쑥스럽다는 듯 낯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이 젊은 장교가 육만배의 손바닥 위에서 망가져 가는 게 측은하다가도, 발정 난 개새끼처럼 밝혀 대는 꼴을 보면 정나미가 다 떨어진다.

이놈은 오직 그 짓을 위해 사는 놈 같다.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시간은 모두 합쳐 한 시간도 안 된다.

너는 내가 어떻게 이 지옥 속에서 살아남았는지조차 물어본 적이 없었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동안 가희의 눈이 일순간 슬퍼졌다.

만약 네가 내 삶에 대해 진심으로 궁금해했다면…… 나와 어떤 미래를 보내고 싶은지 수줍게 털어놓았다면, 나는 육만배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도 있었는데…….

팔을 잡아끌고 다급하게 계단을 올라가는 박 소위의 뒷모습을 보면서 가희는 생각했다.

확실히…… 동정할 필요가 없는 놈이다.

쏴아아아―

비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퍼부어 대고 있다.

***

바로 강 건너 잠실에도 사나운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서치라이트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빛줄기를 바라보는 민구에게 밤톨이 물었다.

“형님, 무슨 생각 하세요?”

“음, 안 잤나?”

민구는 철창 너머 밤톨을 돌아봤다. 그들이 격리 수용되어 있는 곳은 잠실 쉘터의 1층.

예전에 분식집이었던 곳을 대충 개조해 만들어 둔 격리 수용 시설에는 민구 외에도 밤톨과 무전병, 그리고 세 명의 병사가 더 들어 있다.

민구도 예전에 한 번 갇혀 본 적이 있는 개인 철창이다. 야구장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위치해 있다는 점만이 다르다.

의사가 제대로 치료를 해 줄 것이라던 밤톨의 기대와 어긋나게, 외부에서 상처를 입고 돌아온 민구는 또 48시간의 격리를 명령받았다.

심지어 가벼운 찰과상의 병사들까지도 모조리 갇힌 걸 보면 외상자 격리의 원칙은 아주 철저한 모양이다.

안전을 위해 당연한 조치이기는 한데, 갇히는 입장이 되면 기분은 그리 좋지 않다.

“예, 잠이 안 오네요. 형님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쩝,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거든요. 당장 의무실에 눕혀 줄 거라고 믿었는데…….”

밤톨은 민구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걸 어지간히 마음에 걸려 했다. 민구가 말했다.

“의사가 와서 주사도 놓고 링거도 달고 갔으니, 그럴 거 없어.”

“어쨌든 좀 그래요. 몸 상태가 영 안 좋으신데 돌바닥에 이 은박 돗자리 하나 달랑 깔고 48시간을 보내라고 하다니……. 그래도 조금만 참으세요. 내일 오후에 여기서 나가면 의무대로 옮겨 달라고 부탁해 볼게요.”

밤톨의 말처럼 민구에게 좁은 철창에 갇혀 있는 시간은 어지간히도 괴로운 것이었다.

기동이가 쑤신 옆구리의 상처, 총알이 살을 뚝 떼어낸 옆구리, 금이 간 상태에서 무리하게 힘을 주었던 갈비뼈까지…… 전부 다 숨을 쉴 때마다 끔찍한 고통을 선사해 주고 있다.

온종일 그저 멍하니 앉아만 있는데도 쉴 새 없이 식은땀이 뚝뚝 떨어진다. 비가 내리고 난 뒤부터는 어째 더 쿡쿡 쑤시는 것 같기도 하다.

“한 대 피우시겠습니까?”

밤톨이 불붙인 담배를 철창 사이로 내밀었다. 민구는 사양하지 않았다.

기침이 나고 몸이 힘들어지지만, 마음이 답답한 것보다는 낫다. 담배 소지와 흡연은 밤톨이 외곽 경비 중대에 속한 병장이기 때문에 가능한 특별 대우였다.

물론 장교나 부사관들이 보지 않을 때만 누릴 수 있는 반토막짜리 특전이라고는 해도, 그 덕에 48시간을 견디는 게 한결 수월해졌다.

“띨띨아, 넌 뭐하냐? 아까부터 왜 자꾸 훌쩍거려? 새끼가 사람 심란해지게. 자, 이거나 피워.”

밤톨이 오른편의 무전병에게 담배를 건네면서 물었다. 무전병은 눈가를 닦으면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 오는 소리 듣고 있으니까 자꾸 집 생각이 나서 그렇습니다.”

“아나, 이 새끼. 몸이 편하니까 엉뚱한 생각 하네. 좀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해. 기분이 좀 좋아질 생각을 하라고.”

밤톨의 충고를 들은 무전병이 물었다.

“예를 들면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조 병장님?”

“그것까지 알려 줘야 하냐? 그냥 네가 좋아했던 거, 소중한 거, 이런 거를 생각하라고.”

“좋아하는 거라고 하시면…… 엄마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무지하게 친하기도 했고 말입니다.”

“이 새끼가, 너 지금 나랑 장난 치냐? 엄마는 빼! 여친이나! 뭐, 다른 거 있잖아! 취미라든가!”

밤톨과 무전병의 만담 같은 대화를 들으며 민구도 가만히 생각을 해 봤다.

좋아했던 것, 소중했던 것이라…….

그런데 담배 한 대를 거의 다 피울 동안에도 소중한 것이라고 부를 만한 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훗, 그 사실이 어처구니없어서 민구는 쓴웃음을 지었다.

비싼 값을 지불하고 손에 넣었던 것들…… 그건 그저 사치스러운 장난감이었을 뿐이다.

친구? 애인? 그런 건 없다. 그저 밑에 동생 애들에게 용돈을 좀 더 넉넉하게 쥐여 주는 정도 외에는 누군가와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지 않았다.

가족? 애초부터 가져 보지 못한 존재다. 그럼 대체 예전에는 뭣 때문에 어깨에 힘을 주고 살았던 것일까? 소중한 것 하나 없는 주제에…….

민구는 빗속으로 퍼져 나가는 뿌연 담배 연기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계속 고민을 해 보니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것은 두 가지였던 모양이다.

하나는 최고의 칼잡이라는 자부심,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만배파의 에이스라는 타이틀.

‘그게 전부인가. 참 한심하군…….’

민구는 스스로의 공허함에 새삼 놀랐다. 그 두 가지 모두 순식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것들이다. 허탈해서 웃음이 나온다.

그는 이제 재활을 해야 하는, 아주 약해 빠진 환자고, 만배파 조직원은 20명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게다가 그중 대부분이 기동이 놈의 부하들이다.

그런 허접한 집단의 에이스라고 해 봐야 빈껍데기 명함일 따름…….

‘텅 비었구나. 정말 안에 든 게 아무것도 없어.’

피가 배어 나와 굳어진 복부의 붕대를 보며 민구는 또다시 허탈하게 웃었다.

***

상봉동의 망우로에도 폭우가 쏟아진다.

후두두둑― 후두두둑―

가발 가게 간판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빗물을 보며 유빈과 태권소녀는 졸린 눈을 비볐다.

보안관 대신 유빈이 1번 경비로 나섰을 때, 태권소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제니에게 규영이를 좀 신경 써 달라는 부탁만 남겼다.

“괜찮아?”

눈을 껌뻑거리는 태권소녀를 보며 유빈이 물었다.

응, 이 정도쯤이야.

태권소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어지간히 피곤해 보이기는 했다.

발목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오늘 고된 싸움을 했고, 게다가 규영의 형 일로 울기도 많이 울었으니, 이렇게 새벽까지 깨어 있는 게 어지간히 고역일 것이다.

“아, 진짜 어지간히 쏟아붓네. 징글징글하게 온다.”

창틀에 맞고 튄 빗물을 얼굴에서 닦아내며 유빈이 말했다. 제대로 배수가 되지 않아 부유물이 떠다니는 도로를 보니 기껏 깔아둔 ‘덫’도 다 떠다니게 생겼다. 태권소녀가 묻는다.

“네가 말한 그 작전이라는 거, 그거 비 오는 날도 쓸 수 있는 거냐?”

“어떤 작전?”

“코스트코에 남은 좀비들 쉽게 죽일 수 있는 작전이 있다며? 아까 종이에 낙서도 열심히 하던데. 혼자서 뭐라고 중얼중얼하면서.”

아, 그거…….

유빈이는 잠시 고민을 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고인 빗물이 빠진 다음에 맑은 날을 골라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바닥에 물기가 많고 미끄러우면 신경 쓰이는 게 많아지니까.”

“그럼 내일은 어렵겠네.”

“뭐…… 며칠 내로 못 한다고 무슨 큰일이 나는 건 아니니까. 안전제일이지.”

훗, 유빈의 말에 태권소녀가 아주 약간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또 잠시 침묵.

빗소리 외에는 고요하던 분위기를 깬 것은 태권소녀의 질문이었다.

“야, 여자 토하는 거 보면 남자들은 정나미 떨어지냐?”

‘이게 웬 난데없는……’이라고 생각하던 유빈의 머리에 아까 코스트코에서 쌍으로 나란히 서서 토하던 두 여자의 일이 떠올랐다. 유빈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걸로 정 떨어지는 사람은 없을걸? 그런 식이면 애인들끼리 어떻게 술 마시겠어.”

“그럼 무슨 생각 해?”

“그야…… 괴롭겠다 정도? 아, 오늘 같은 경우에는 좀 다르지. 오늘은 미안하고 안타까웠지. 죽을힘을 다해 함께 싸우고 나서 그랬던 거잖아. 고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아름답기까지 했달까?”

아름답다고?

태권소녀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유빈을 돌아보았다. 또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태권소녀가 물었다.

“근데 모든 남자가 다 똑같은 반응을 하지는 않을 거 아냐. 그건 그냥 네 생각인 거잖아?”

“에…… 굳이 따지자면 그렇지.”

흐음~

말도 아니고 감탄사도 아닌, 숨소리만 짧게 뱉은 태권소녀가 소방 호스로 물을 발사하는 것 같은 검은 밤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 선배, 다 젖겠네. 운전석 유리창도 깨졌던데…….”

옥상 차 안에 남겨진 규영이의 형 이야기다. 물어볼까 말까를 망설이던 유빈이 결국 궁금증을 못 참고 슬쩍 돌려서 질문을 던졌다.

“그 사람, 어지간히 날렵해 보이더라. 혼자서 싸워 가며 4층까지 올라간 거 보면 힘도 대단했던 것 같고.”

“음, 테니스 대표였으니까. 올림픽은 몰라도 아시안 게임 메달은 노려볼 만했지. 성격도 좋아서 선수촌에서는 인기인이었어. 그리고 좀비들한테 둘러싸였을 때도 진짜 잘 싸웠어. 다들 무서워서 몸 사리는데 잽싸게 스텝 밟으면서 좀비들 피하고, 그러면서 또 스패너로 갈기고……. 그 선배 보면서 생각했지. 테니스라는 게 실은 격투기구나. 검술을 조금 바꿔 놓은 거구나…… 뭐, 그런 생각.”

“그러면…… 너랑 그…… 서로…….”

“서로 뭐? 좋아했냐고? 아니야, 바보야. 그 선배 약혼자 있었어. 내 타입도 아니었고. 그냥…… 정말 죽느냐 사느냐 하던 때에 이끌어 준, 좋은 리더였어. 이타적이고, 그렇다고 무작정 희생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사람 있잖아.”

아련한 눈빛으로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던 태권소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도 오늘 봤으니까 알겠지만, 나랑 규영이는 저 코스트코에 안 좋은 기억이 있어. 사실 지금도 좀 두려워. 저 안에 들어갔다가 또 불행이 닥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에……. 운동하는 애들은 은근히 저주나 징크스, 이런 거 잘 믿거든.”

“그런 일 없어. 우리는 안전하게 들어가서 아주 안전하게 저 안에 있는 거 다 쓰면서 행복하게 잘살다가, 또 안전하게 다른 곳으로 옮겨 갈 거야. 걱정하지 마.”

유빈이 단언했다. 그 말을 들은 태권소녀가 중얼거린다.

“행복……. 예전에는 흔한 말이었는데, 지금 들으니까 되게 어색하게 들린다. 정말 저 안에만 들어가면 행복해지기는 할까?”

어…… 유빈은 조금 고민해 보더니 확신하듯 대답했다.

“처음 며칠은 확실히 그럴 거라고 생각해. 금방 또 다른 게 욕심나기 시작하겠지만. 근데 사실…… 행복이란 걸 잘 모르겠어. 별로 그래 본 적이 없어서.”

***

폭우가 퍼붓는 서울과 달리 제주도의 밤하늘은 맑았다. 하지만 비바람 대신에 인간들이 만들어 낸 매서운 피와 연기의 폭풍이 지금 막 휘몰아치려 하는 중이다.

그 첫 번째 사건은 강정 기지 골프장 클럽 하우스에서 시작되었다.

8월 4일, 새벽 한 시가 되기 전에 클럽 하우스 요리사 신상기는 냉동 컨테이너가 줄지어 늘어선 식당 뒤편의 넓은 잔디밭으로 나갔다. 잔디밭 위에서 시계를 보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계속 흘러내렸다.

냉동 컨테이너는 대부분 지난 7월 16일 채 장군 휘하의 특수부대가 서울에서 고급 식재료를 가득 채워 공수해 온 물건들이다.

그때만 해도 육군과 다른 군의 사이가 지금처럼 틀어져 버리기 전이고, 다들 워낙 정신들이 없어서 서울에서 뭘 가지고 오는지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채 장군이 고급 와인이나 두어 병 내놓으면 그것에만 환호하는 정도였다.

여러 개의 냉동 컨테이너들 중 신상기가 신경 써야 하는 건 6호기와 7호기, 두 개다.

보름 전, 그가 채 장군으로부터 직접 전달받은 명령은 간단한 것이다. 별도의 지시가 없으면 8월 4일 01시를 기해 냉동 컨테이너의 전원을 끄고 문을 열어 놓는다. 그것이 명령의 전부였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려고 해도 안 되고, 시간이 지체되어도 안 된다. 컨테이너의 문을 열어둔 뒤에는 식당 밖으로 빠져나가면 된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식구들 중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어이구…….”

마침내 한 시 정각이 되었을 때, 컨테이너의 문을 열려던 신상기는 앓는 소리를 냈다.

두렵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지 말라고 했지만, 안 봐도 왠지 다 알 수 있을 것 같다. 무슨 일이 날 것인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가는 지금 제주 북쪽 어딘가에 인질로 잡혀 있는 자신의 아내와 아이 둘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독하게 먹은 신상기는 6호기 컨테이너 문을 열고 옆에 붙은 패널을 조종해 전원을 꺼버렸다.

삐잇― 하고 짧게 울린 경고음에 가슴이 벌렁벌렁 뛴다. 그러고는 7호기의 문도 열어젖혔다.

화아악―

하얀 냉기가 곧바로 피어 나와 시야를 흐린다.

“이상한데, 영하 20도가 이렇게 추운가?”

신상기는 패널에 표시된 온도와 체감되는 냉기의 차이를 느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물론 그의 체감이 맞았다.

이 냉동 컨테이너는 영하 57도로 세팅되어 있지만, 표기되는 온도는 항상 영하 20도로 고정된 채 변하지 않는다.

아주 허접한 페이크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겉에 커다란 고깃덩이를 몇 줄 주렁주렁 걸어 두면 속임수는 더 공고해진다.

아무도, 단 한 사람의 군인도 이 냉동 창고에 대해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신상기는 얼른 스위치를 눌러 전원을 차단했다.

삐익―

그것으로 1차 세팅은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

걸려 있는 고깃덩어리 너머, 컨테이너 안쪽에서 불길하게 너풀거리는 검은 비닐 커튼을 보며 신상기는 거기 무엇이 있는지, 대체 왜 이걸 열라고 하는지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차피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다.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하는 일이다.

문을 열어 둔 신상기는 두 번째 임무이자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클럽 하우스 직원 숙소로 서둘러 돌아왔다. 그러고는 자신의 방에 숨겨 뒀던 최루탄 두 개를 까서 1층 복도 끝을 향해 데구루루 굴렸다.

치이이이익―

최루탄에서는 이내 엄청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돌아서서 주차장으로 나오는 길에 신상기는 따끔거리는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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